티벳불교/티베트스님 감옥이야기

책: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 -중에서 발체내용 :티베트불교 감옥이야기

아미연(阿彌蓮) 2020. 4. 11. 03:10

책: <그래도 내 마음은 티베트에 사네> 아마아데 지음

-중에서 발체내용

     독립 염원하며 27년 감옥생활 `티베트의 여인`

 

모든 존재들이 더 이상 다른 존재들을 해하는 불선한 마음과 악행을 멈추기를...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행복과 자유를 해하지 않기를...

 

모든 존재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게 되기를...

 

모든 존재들이 자애로운 불성의 마음을 속히 회복하기를 바라며...

책 내용의 일부를 발췌해봅니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캄툴린포체 첸노 캄툴린포체 첸노 캄툴린포체 첸노 ()

달라이라마존자님 달라이라마존자님 달라이라마존자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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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힘든 노동과 굶주림으로 쇠약해 있었다. 형무소에서의 식사는 열악하고 형편없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늘 질 나쁜 보리나 옥수수 가루가 섞인 귀리로 만든 작은 죽 한 그릇이 고작이었다. 얼마 안 가서 빈사 상태에 있던 죄수들은 풀과 나무 뿌리까지 먹게 됐다.

 

그곳에 온지 2~4개월이 되던 어느 날, 그들은 사원 구내의 저녁집회로 우리를 내몰았다. 그들은 툽텐다르계라는 한 티베트인을 앞으로 끌어내 바닥에 무릎을 꿇게 했다.

 

중국인 의사가 죽은 죄수의 장딴지를 먹으려고 하는 그 굶주린 죄수를 현장에서 잡았다는 것이었다. 시체는 얼마 전 시체 처리장으로 쓰이는 한 오두막에 버려진 것이었다.

 

툽텐다르계는 구타당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엄청난 모욕을 당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 변명하라는 요구를 받자, 그가 대답했다. "나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어요. 시체에는 살과 뼈밖에는 없었는데, 그런 걸 물어뜯기엔 내 이가 너무 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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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소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북쪽 길에서는 죄수들이 텅 빈 갱도를 파고 있었다. 사형을 당했거나 굶어 죽은 시체들이 그곳으로 던져졌다. 매일 최소한 10~15명 가량의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24시간 내내 트럭이 이 시체 더미들을 갱도로 나르고 있었다. 갱도가 꽉 차면, 그들은 갱도를 막고 다시 새 갱도를 파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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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쇠약해진 수감자들은 지팡이에 몸을 의자하고 걸어야 했지만, 자기 몫의 음식만큼은 받기가 무섭게 다 먹어치웠다. 접시를 들고 움직일 때마다 으레 음식이 바닥에 떨어졌다.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리다가 넘어지기 일쑤였고 그러면 음식은 바닥에 쏟아졌다.- - - 당시 대부분 사람들이 이미 자기 신발 밑창의 가죽까지도 먹어치운 상태였다. 우리는 돌로 신발을 찧어 바느질 솔기를 푼 다음, 가죽으로 된 밑창을 두들겨 연하게 만들었다. 기회만 되면 우리는 그 가죽을 씹어댔다. 먹기에는 약간 단단하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이 사람에서 다음 사람에게로 전달됐다. 결국엔 이 가죽도 사람이 삼킬 수 있을 만큼 아주 부드러워졌다.

 

교도소 직원들이 죄수들의 희생을 즐기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고탕걀고에서 가장 힘겨운 충동을 참아내야 했다. 종종 교도관들과 공관원들은 찻잎을 바닥에 쌓아놓았다. 그 근방에는 많은 차나무가 산재해 있었다.

 

모든 죄수들은 그 찻잎을 몇 개라도 훔쳐 먹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힘이 너무 없어 찻잎에 손을 대다가는 넘어지기 일쑤였고 그렇게 서로 엉켜 다툼이 벌어졌다.결국 한 사람이 그 차 더미에 손을 댔고, 사람들은 그의 얼굴이며 입이 찻잎 때문에 시커멓게 물드는 꼴을 볼 수 있었다.

 

그러면 공관원들과 교도관들은 손뼉을 치고 서서 양쪽의 죄수를 응원하는 것이었다. 그자들은 웃으며 환호성을 질렀고 이 장면을 가리키며 축배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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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 내에 몇몇 중국인 수감자들은 땅속에 있는 두 종류의 벌레를 파내어 잡아먹었다. 정말로 잡기 어려운 진드기도 있었다. 그러나 여러 수감자들은 이 벌레를 잡아서 터뜨려 빨아먹었다.

 

이렇게까지는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은 조그만 온갖 푸성귀들을 뜯어 입에 우겨넣었다. 독성이 있는 풀인지 없는 풀인지는 신경쓸 여력이 없었다. 채소밭의 감시가 삼엄했으므로 그곳에서는 때를 봐가면서 뭐라도 잡아야 했다. 극심한 굶주림은 사람들을 미치광이로 만들고 있었다.- - - 결국 끊임없는 굶주림과 살을 에는 추위의 고통과 그 결과로 약해진 몸이 우리의 생각을 무디게 만든 것이다.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겨우 몇 가지뿐이었다. 어떻게 하면 넘어지지 않고 제대로 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한 걸음이라도 더 내디딜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잠자는 동안 얼어붙을 것 같은 이 추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종종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면, 옆에 있던 동료 수감자가 싸늘하게 죽어 있기도 했다. 끝까지 버틸 수있는 한 가지 방법은 작은 목표를 세워두는 것이었다. 나는 추바의 안감을 찢어서 매트리스를 하나 만들었다. 온종일 작은 덤불이너 부드러울 만한 것들을 찾아서 매트리스 안에다 그것들을 채워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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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수뒤라는 교도소장은 티베트를 유창하게 할 줄 아는 몇 안 되는 공산당원 중 한 명이다.- - - 20대 후반의 그는 둥그스름한 얼굴과 날카로운 눈매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젊고 매력 있는 여자 죄수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이런 여자 죄수들은 그의 방을 청소하고 빨래를 하라는 명목으로 자주 그에게로 불려갔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 그는 여자들을 여러 차례 농락했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나 이외에 3명이 더 이러한 임무에 선발됐다. 리탕 지역에 이웃한 링카르쉐 지역 출신이었던 낭초왕모와 차트링 지역 출신이었던 돌카르와 양첸이 바로 그들이다.

 

우리는 교대로 불려가서 농락당했다. 그는 욕을 보인 후에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강제로 사향수를 마시게 했다. 우리가 반항을 하기라도 하면 무거운 형벌을 주겠다거나 심지어는 죽여버리겠다고까지 위협했다. 우린 잠자코 순종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끔찍스러운 치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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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 지방 타오 지역의 출신이었던 위가라는 젊은 비구니 스님- - - 그녀는 원정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슬픔에 찬 눈으로 조용히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바라보았다.- - - 위가는 채소밭에서 돌을 고르라는 명령을 받았었다. 그때 나는 더 이상 일을 할 상태가 아니었지만, 종종 채소밭으로 보내졌다. 돌아다닐 수도 없을 만큼 너무 몸이 약했기 때문에, 그냥 그 자리에 앉아 이따금씩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위가를 바라보았다.

 

위가는 늘 교도관들로부터 저만치 떨어져서는 계곡에서 가까운 농장 쪽으로 가려고 했다. 교도관들이 바라보면,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돌을 골라내는 데 열중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고 둘러댔다. 그렇게 약 일주일 정도가 지나갔다. 어느 날 그녀는 계곡 가까이까지 가는 데 성공했다. 교도관들은 그녀에게서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그녀를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내 쪽을 바라보더니 이내 교도관 쪽을 흘깃 보고는, 빠른 물살 속으로 뛰어들었다.

 

여느 다른 죄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녀도 심한 우울증에 빠져 있었다. 중국인들이 티베트의 종교를 비난했고, 수도승과 비구니들에게는 특히 더 심한 모욕을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굶주림까지 더해졌다.

 

우리의 신앙은 인간의 몸으로 태어난 것이 귀한 복이며 자살은 가장 나쁜 죄악 중 하나라고 가르쳤지만, 그녀는 과연 이러한 조건에서 삶을 연명하는 것이 최상의 길인가 하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 당시 다른 모든 죄수들은 그녀의 행동에 공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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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라마승들이 굶주림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우리에게 요구된 육체노동은 노인들이 감당하기에는 정말 힘겨운 일이었다. 마침내 가장 연로한 라마승들은 감방에 감금됐고, 그보다 좀 젊은 라마승들이 일터에 배당됐다. 연로한 라마승들의 식사 배급량이 현격히 줄었다.

 

나는 돼지사료를 조금 훔쳐내서는 라마승들이 변기 양동이를 비울 때 눈에 띌 만한 곳에 갖다놓기 시작했다. 교도관들이 조금 떨어져 있기라도 하면 그들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러면 그들이 돼지사료를 가지고 가서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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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황에서 어느 날 우리 가문의 라마승이었던 촘펠걈초 린포체를 만났다.

- - - 1957년 냐롱 지방의 모든 라마승들은 중국인들로부터 암룡 요새에서 열리는 한 집회에 첨석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중국인들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던 선발하여, 여자들이 입는 옷을 강제로 입히고 장시간의 탐칭에서 굴욕을 가했다. 촘펠걈초도 그들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냐롱에는 60여 개 남짓한 사원이 있었다. 그 사원들은 거의 같은 비슷한 시기에 포위되어 모든 수도승과 라마승들이 체포됐다.

 

촘펠걈초에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가 수갑을 찰 때마다 그것이 저절로 풀어지는 것이었다.

교도관들에게 더 많은 구타를 당할까 두려워, 고의로 그랬을 거라는 혐의를 받을까 두려워, 그는 스스로 다시 수갑을 채우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는 교도관에게 그것을 채워달라고 부탁했지만, 수갑은 이내 풀어져버렸다. 결국 그는 수갑을 찰 수 없게 됐다.

 

- - - 촘펠걈초는 내게 확신을 주고 기운을 북돋아주려고 노력했다. 언젠가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이런 경험을 하는 것은, 우리 업보의 소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증인이 진실하다는 믿음을 갖고, 기품 있게 견뎌내야만 합니다."

 

- - - 어느 날 교도소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고승 7명이 같은 날 사망한 것이었다. 이 일은 외부 영향의 결과로 일어난 것이 아니었다. 그들 스스로가 내린 결정인 듯 했다. 중국인들은 이 사건을 놀랍게 받아들였다.

그들 중에는 촘펠걈초와 카르체 지방 근처 롱바차 지역과 냐계 지역 출신이었던 롱코르샵드룽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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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한 환생 라마승에게 조언을 구할 기회가 있었다.

- - - 나는 종종 그가 멀리 떨어져서 일하는 것을 보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줄 아는 그의 침착함에 위안을 얻었다. 다른 죄수들과의 교제는 각별히 조심하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나는 그가 다른 죄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눈은 평범하고 무관심한 다른 죄수들의 눈빛과 달리, 사슴의 눈빛처럼 고요하고 깊었으며 자신의 주위에서 부탁하는 것들을 관심과 자비로움으로 감싸안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에게 다가갈 용기가 나지 않았으나, 곧 그에게 폐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는 내 손을 잡고 내 눈을 들여다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마음먹은 대로 기도에 전념할 수 없어요. 제가 당신께 짧은 기도문을 가르쳐드릴게요. 그러면 똑같이 당신을 바치는 기도로 암송할 수 있을거예요. 이런 곳에서 당신의 주요 관심사가 영적 실행이라니 저도 무척 기쁩니다."

 

그러고서 그는 9줄로 줄인 돌마에 대한 짧은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다. 그 후 곤궁과 고독의 세월 속에서 그 기도문은 나의 안식처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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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 오빠가 용기를 내어 나를 방문하고자 혼자서 여행을 감행했다. 강제노동수용소 입구에서 교도관들은 죄수들에게는 어떤 방문도 허용되지 않는다며 그를 돌려보내려 했다.

 

그런데 수용소에는 국민당계 중국인 의사가 한 사람 있었다. 그는 아주 친절한 남자였다. 어떤 이유에선지 그는 내 신변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출입문으로 가서는 잠깐이나마 내가 니마 오빠를 볼 수 있도록 손을 써주었다.

- - - 공관원들은 니마 오빠가 가져온 사식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그 의사가 걸어오더니 말했다. "내가 음식을 맡아두었다가 아데에게 조금씩 주겠소."- - -처음에 그는 버터가 든 참파를 조금 주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한 번에 많이 먹으면 당신은 죽을 수도 있어요. 당신 오빠가 가지고 온 음식은 내가 맡아두었다가 조금씩 주겠소."

 

내가 다른 죄수들에게로 되돌아왔을 때 그들이 말했다. ", 아데에게서 참파냄새가 나요." 몇몇 죄수들이 내게로 와서 물었다. "뭘 좀 얻어먹었나요? 댁의 오빠가 먹을 것 좀 주던가요?" 순간 내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내 마음은 무척 혼란스러웠다. 다들 극심한 배고픔을 견디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결국 나는 그 의사에게 가서 내 사식을 가지고 죄수들 모두를 위해 무언가를 마련해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불가능한 일이오. 당신 식량은 그다지 많은 양이 아니라오." 작은 주머니 안에는 참파와 버터, 작은 고깃덩이와 치즈, 약간의 찻잎이 전부였다.

 

그에게 말했다. "이것들을 한데 모아서 모두를 위한 걸쭉한 수프를 만들면 어떨까요?"

 

그러자 그가 물었다. "당신, 정말로 전부 다 주어도 괜찮겠소?"

 

정말로 괜찮다고 대답했다.

 

- - - 그가 나를 도와주기 위해 어떤 방법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주임의사였고 중국인들에게 존경받고 있었다. 그는 요리에 쓸 큰 냄비를 준비하더니, 자신이 나를 도와 요리를 했다.

 

- - - 수프가 아직 뜨거웠는데도 수감자들은 기쁜 얼굴로 즉석에서 그것을 다 마셔버렸다. 그들의 얼굴이 발그레하게 상기됐다. 많은 이들이 접시를 핥아먹고 나서도 물에 부셔 헹궈 마셨다. 그들은 고마움을 전하며 내 손에 입을 맞췄다. "죽기 전에 언제 또 이런 음식을 먹어보겠어요. 당신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셨군요."

 

고탕걀고에는 라싸 출신의 라마승들이 여러 명 있었다. 내게 돌마 기도문을 가르쳐주었던 카통시투라도 그들 중에 하나였으며, 그 역시 수프를 나눠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그는 말했다.

"티베트가 독립되어 있었을 때는, 유복한 가문들이 식사며 차를 큰 사원에 기부라는 것은 관례였지요. 엄청난 재산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당신이 자신의 음식을 모두에게 나누어준 것은, 대단히 의미 있는 일입니다. 당신의 행동은 칭찬받아 마땅하며 당신은 꼭 살아남게 될 거예요. 그러나 우리에겐 죽음만이 있을 뿐이에요. 우린 이런 만행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요."

 

 

- - - 얼마 후 우리는 카통시투의 죽음을 지켜봐야 했다.

그와 감방을 함께 쓰던 수감자들은 그가 가부좌를 한 채 숨을 거두었다고 말해주었다. 그의 시신은 '무드라'라는 예식 즉 손동작을 취하고 명상을 하며 앉은 채로, 이른 아침에 발견됐다. 시신은 마치 불상과도 같았다.

 

그 소식을 듣고, 나는 맨 먼저 그 거룩한 눈동자와 그가 보여준 친절한 모습을 떠올렸다. 그가 심어준 용기와 그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그가 했던 말이 정말 현실이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어떻게든 살아남을 거라던, 우리가 경험한 것들은 아무런 질서도 정당성도 의미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와 그의 침착하고 담대했던 말씀은 평생 동안 결코 잊지 못할 것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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