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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덕스님-[최상의 기도법]/ 광덕스님 법문---(모음)

아미연(阿彌蓮) 2020. 2. 1. 16:01

광덕스님-지장보살의 무한대비를 배우자http://blog.daum.net/young12193/17785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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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의 기도법   -광덕스님

 

항상 우리의 수행이 그대로 기도여서 기도와 수행이 다르지 않다는 것은 다들 잘 아실 것입니다. 실로 수행이라고 하는 실다운 진리현전이 그대로 나의 환경의 변화라고 하는 우리의 기원을 한꺼번에 이루게 해주는 바라밀수행에서는 기도와 수행을 구별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 형제들이 금년도에 특별기도를 다들 드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기도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이해하시고,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에 의해서 마음을 반야바라밀이 가르친 진리세계로 돌리고, 그 반야바라밀의 가르침, 그 진리 그 속에 나의 생명, 나의 현재 나의 환경 모두가 바라밀 광명 가운데 충만돼 있다는 믿음으로 수행하십시오. 그렇게 한다면 아마 수행 가운데서 최상의 수행이요, 기도 가운데서도 가장 올바른 훌륭한 기도를 하시는 것입니다.

 

 

기도를 시작하는 데 즈음해서 생각이 납니다마는, 저는 아예 기도가 뭔지 모르고 시작을 한 것 같습니다. 제가 처음 기도하려고 마음을 냈던 때가 아마 1951년 가을쯤 될 겁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저는 기도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원래 청산이 무엇인가 구경하러 절에 갔던 처지였기 때문에 기도는 아예 생각할 수도 없었고 또 부처님께 대한 예경조차 합리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였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구할 수도 없었던 처지였습니다.

 

 

어쨌든 저는 스님들의 배려로 선방에서 참선을 했습니다. 선이라고 하면 다들 이해하다시피 본래 번뇌가 끊어진 자리를 향해서 살아가는 것이요, 그러기 위해서 번뇌가 없는 실물을 추궁해 들어가는 행법이 선입니다. 선방 생활은 아침에 일어나서 밤에 잘 때까지 밥먹고 그밖에 작용하는 시간 빼놓고는 전부가 선의 시간이기 때문에 기도고 뭐고 생각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 한 일년 정도 절에 있다 보니까 불법에 대해 이해가 생기게 되고 그 다음에는 부처님 그리고 관세음보살 혹은 지장보살 같은 성자들의 큰원과 큰 행에 대해서 감동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한 기도가 지장기도입니다. 대비대원 대성대자 지장보살께서는 일체 중생을 제도하시어서 저들 중생이 결코 악을 짓지 아니해서 지옥의 이름이 없어지며 내지 한 사람도 중생으로 남아 있는 한은 성불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중생도진(衆生度盡), 중생을 다 제도한 후에 깨달음을 이룬다.

‘지옥미제(地獄未際) 서부성불(誓不成佛) 방진보리(方盡菩提)’ 지옥을 제하지 아니하면 맹세코 성불하지 않는다고 하는, 일체 중생을 완전히 제도한 후에 성불하겠다고 하는 큰 원, 지장보살의 대비대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무렵 생각들이 꽉 찼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나의 원을 당신이 증명하시라는 그러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그때 천수다라니를 매일 4분 정근했습니다. 그때는 한 번에 한 20편씩 천수다라니를 지송한 것으로 기억합니다마는 오늘날과 같은 반야바라밀을 몰랐기 때문에 천수다라니에 있는 그대로 “서구 일체 중생 맹세코 일체 중생을 제도하겠다.”
“광발보리심 널리 큰 깨달음에 보리의 마음을 내어서 일체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하는 서원을 당초에 세워 놓고, 그 다음에는 일체 중생의 지옥을 대신 참회하며, “제심일체 상속구단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서 끊임없이 지속해 나아가는 이것이 천수다라니의 지송법으로서 간략하게 나와 있었습니다.”

 

 

 

[상기병 다스리기]

저는 그것에 근거해서 대비주를 일심으로 외웠다고 생각됩니다마는, 그 때만 하더라도 참선을 하다가 참선을 잘못해서 상기가 올라서 참선하기 어렵게 되었을 때였습니다. 참선을 안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하려니 할 수도 없고 그러한 어려움을 당했을 때 주변에 있는 분들은 “수좌가 상기가 오르면 그건 다 틀렸다.” 절에서 하는 말로 “혼자 사는 여자가 바람난 거와 마찬가지다.” “다 틀렸으니 팽개쳐라.” 팽개치면 낫는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나 팽개칠 수 없으니까 못 고친다는 것입니다.

 

 

그 후에 제가 알았습니다마는 저와 같이 참선하다가 상기가 올랐던 사람들이 두 가지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을 봤습니다. 하나는 통도사에 계시던 박병완 스님처럼 끝까지 골이 빠개지든지 열이 나든지 무슨 수가 있든지 그냥 화두를 지속해 나가서 마침내 해결하는 방법이 있는데 성공한 분은 아직까지 그 어른 한 분밖에 못 봤습니다. 그 분의 신앙수기가 월간 불광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어느 어른 스님께서는 상기가 올라서 참선할 수 없으니까 전국에 절 몇 군데를 정해 놓고 뱅뱅 돌아다녔습니다. 여기 가서 일주일, 다음 절에 가서 한 달, 그 다음에 한 달,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하는 참선을 하신 것 같습니다. 그 어른은 지금도 제가 참으로 존경하는 큰스님입니다마는 건강하시고 정말 자비보살로서는 제1호라고 하시는 큰스님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때 상기가 났기 때문에 다 그만두라고 하는데 그만둘 수도 없고 하게 된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방법은 천수다라니를 외는 것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천수다라니를 외워보면 거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한 번에 1,008 편씩 하루에 네 차례씩 정근해서 21일간 하는 기도법이 있습니다. ‘아르륵게’라 하는 향나무를 향으로 차려놓고 향로에다 하나씩 던져가면서 천수 1편에 향 하나씩 사루는 작법이 있습니다마는 향은 안 사루었지마는 하여튼 그것을 목표로 해서 부지런히 지송을 했던 생각이 납니다.

 

 

 

[정진은 힘들여서 해야한다]

형제 여러분들 다들 천수다라니를 외우시지만 하루에 천 편 외우시기는 힘드실 겁니다. 그런데 4천 편이라고 하면 “그것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반문하실 것입니다.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저는 그 당시 부처님께서 경전에 불가능을 말씀하시지는 않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힘들여서 하면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면 됩니다. 있는 힘을 다 들여서 하면 됩니다. 일분간에 5 편이면 한 시간이면 삼백 편, 세 시간이면 구백 편, 세 시간 반이면 천 편이 넘습니다. 그러니까 아침에 세 시간 반, 아침 먹고 세 시간 반, 오후에 세 시간 반, 저녁 먹고 세 시간 반, 그렇게 세 시간 반씩 네 차례, 그렇게 해서 12시간만 지송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하더군요.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뜻은 “정진은 힘들여서 해야한다.” 경의 말씀은 결코 헛된 약속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이렇게 지송하면 이런 결과가 있다.” 하고 경에 말씀이 나왔다면 그것은 확실한 약속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결과를 바라는 것이 있어서도 안 될 것이고 실제로 경에 기록된 말씀을 해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형제들 칠일 기도 중에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있을지 몰라도 어려움을 이기고 돌파해 나가야 합니다. 어려움을 이기는 가운데서 자기 자신의 힘이 늘고 한번 힘을 얻어 놓으면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해낼 수 있는 기초가 거기서 형성되기 때문에 큰 법력을 함께 갖추는 결과가 됩니다.

 

 

제가 그 후에 여러 사람들을 만나봤습니다마는 천수다라니를 하루에 4천 편 이상 하시는 분을 몇 사람 못 보았습니다. 주안에 계신다는 어느 거사님은 하루에 한 이천 편을 하신다고 했고 선방에 같이 계신다던 스님은 하루에 한 오천 편 정도 하시는 분이었고, 그리고는 별로 만나지 못했습니다.

 

 

최근 제가 만난 보살님 가운데 6, 7천 편까지 하시는 분을 만났는데 실지 그 분이 그 정도의 삼매력을 형성하고 있는가 거기까지는 제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 밖에 또 한 분 거사님도 하루에 4, 5천 편을 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생·사를 떼어 놓아야 합니다. 한고비 넘기려면 “죽으면 죽고 살면 살고 나는 한다.”하는 목표를 세워놓고 돌진해 들어가야 합니다. 바위라도 뚫고 들어가는 힘으로 생사를 떼어 놔야 합니다.

 

 

그 고비를 한번 넘어가야 그 힘이 생겨집니다. 일분간에 3, 4편 고비를 넘기기 시작하면 삼매의 힘이 생겨집니다. 이것은 설명할 것이 아니라 누구든지 넘어 가면 아는 것이기 때문에 지루한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부디 기도 가운데서 다들 어려움을 이기고, 어려움에 적당히 타협해서 지내거나 좌절하지 마시고, 어려움을 이기는 가운데서 힘을 얻는다 하는 것을 마음에 두셔서 큰 성취가 있으시길 바랍니다.

 

 

 

[반야바라밀을 직관하라]

무엇보다도 반야바라밀을 직관해서 반야바라밀 진리의 세계 부처님의 광명, 이 진리가 바로 항상 현전되어 있어서 내 생명 속에 빛나고 있다는 것을 마음의 눈으로 지켜보며 끊임없이 염송하고, 크신 은혜를 받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그것을 긍정하고 감사하는 이러한 생활이 이번 7일 기도 가운데서 순수하게 이어져가면 잘 하시는 기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지난 번에는 여래장경 법문을 공부를 했습니다. 내용인즉슨 별 어려운 내용은 아니고 항상 우리가 반야바라밀을 통해서 이해하고 있는 법문입니다마는 그 경전의 말씀은 우리들이 마음에 새겨둬야 할 말씀입니다. 오늘도 역시 지난 번의 말씀을 조금 더 돌이켜 보겠습니다. 형제들께서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지난 번에는 부처님께서 법을 설하시려 하시는데 부처님 앞에 연꽃이 수없이 피어올랐다고 했습니다. 연꽃 봉우리가 피어올라서 하늘까지 피어오른 연꽃이 곧 시들었고, 시들은 꽃잎이 다 떨어지자 꽃잎 떨어진 그 자리에 부처님이 광명을 놓고 앉아 계십니다.

 

 

이 광경을 보고 대중들이 ‘아 무슨 일인가?’하고 의심을 하고 있을 때 부처님께서 거기 있던 대중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들은 이것을 보느냐.”

 

 

이래서 연꽃이 피기 전에도 부처님이 거기 머물러 계시고, 연꽃 핀 가운데서도 부처님이 머물러 계시며, 연꽃이 시들고 져도 또한 부처님이 거기 머물러서 ‘변치 않는다’하는 내용을 말씀하십니다. 가장 감명깊게 기억에 남는 대목이 바로 이 대목입니다.

 

 “내가 부처의 눈으로 일체 중생을 보건대 저들이 탐심·진심·치심 등 번뇌 가운데 쌓여 있으나…” 여기에서 일체 중생들이 탐·진·치 삼독 번뇌 가운데 쌓여 있다고 했는데 조금 설명하고 지나가겠습니다.


삼계라고 하는 것은 중생이 사는 세계로 욕계 색계 무색계를 말합니다.


그 중 탐심이 기초가 되어서 생을 유지하고 있는 세계를 욕계라고 합니다. 이 인간이 살고 있는 세계가 욕계고, 또 지옥·아귀·축생의 악도에 떨어진 중생들도 욕계고, 또 욕심이나 탐심을 버리고 담담한 맑은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뿌리 가운데에 욕심이 남아있는 중생들은 비록 천상에 태어나지마는 천상 일부도 역시 욕계입니다.


그러니까 중생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는데 천상의 중생도 있고, 인간도 있고, 인간 이하의 악도에 떨어진 중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뿌리는 탐욕심이 뿌리가 되어서 탐욕심이 강하냐, 아니면 담담하냐, 착한 마음이 더 많으냐 아니면 자기 중심적 생각, 집착이 더 많으냐에 따라서 욕계에서도 중생차별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또 그 욕계는 다 떠났다 하더라도 진심(瞋心), 성내는 마음, 자기 뜻에 거슬리면 바로 강하게 반발이 튀어나가는 그러한 진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색계천의 천상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무색계천이라고 하는 천상의 성인은 많은 착한 마음과 밝은 마음과 지혜스러움을 갖추었다 하더라도 그 어리석은 마음, 번뇌의 마음을 완전히 끊지 못한 일부의 성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들 역시 중생에 속합니다.


욕계, 색계, 무색계는 탐, 진, 치가 기초가 된 세상입니다. 욕계는 탐심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색계는 진심이 기초가 되는 것이고, 무색계는 어리석음이 기초가 되는 중생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옥 중생에서부터 인간, 천상, 천상 가운데서도 보다 높은 성자들에 이르기까지 근원적인 자기 본성, 진리를 완전하게 청정하게 실현하기 전까지, 다시 말해서 조금이라도 미혹의 티가 남아 있는 동안은 중생입니다. 그래서 일체 중생을 보건대 저들은 탐, 진, 치  등 번뇌에 쌓여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중생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들과 지옥중생들 뿐 아니라 천상에 사는 중생들까지 다 통틀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본래 물들지 않는 부처님의 성품]
“저들 천상에 사는 중생들이나 인간들이나 지옥 악도에 떨어진 중생들이나 내가 이 깨달은 눈으로 보니 부처님의 지혜, 여래의 눈, 여래의 몸이 엄연부동하다. 비록 겉모습을 보면 탐, 진, 치 삼독 번뇌에 쌓여 있는 듯이 보이지마는 실로 깨달은 눈으로 보건대 그렇지가 않다.”


여래의 지혜, 여래의 눈, 여래의 몸이 엄연 부동하다. 번뇌 가운데 있다 하더라도 그가 지니고 있는 여래장(불성, 부처님의 성품) 이것은 항상 깨끗하여 결코 물들거나 때묻지 아니해서 덕스런 모습이 두루 갖추어 있어서 나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다.
이 대목을 우리는 정녕 기억하셔야 합니다.


‘일체 중생을 보건대 결코 때묻지 않았다. 물들지 않았다.’ 남 보기는 살인도 하고 나쁜 짓 했다고 하지만 그것은 중생세계에서 겉으로 돌아가는 모습이고, 그 내면은 청정해서 결코 때묻지 않고 결코 물들지 않아서 부처님의 지혜 덕상이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어서 나와 더불어 조금도 차이가 없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눈으로 봐서는 일체 중생이 그렇다. 이것이 진상(眞相)이다. 이렇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 대목을 우리들이 정말 깊이 새겨두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끊임없이 그러한 부처님의 지혜의 눈으로 보는 세계는 보지 못하고 범부의 눈으로 탐진치 삼독이 우글거리는 번뇌에 덮여 있는 중생의 모습만 보고는 알맹이는 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취하고 혹은 버리고 온갖 번뇌를 더 일으키고 삼독심을 더 일으켜서 어두운 구름을 지어서 그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있는 것은 때묻지 아니하고, 물들지 아니하고 여래덕상이 구족해서 부처님과 똑같다. 모든 사람의 참모습이 무엇이냐. 부처님이다.” 여기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 자신에 눈뜨라]
우리 불법 공부하는 사람들이 경을 많이 봅니다마는 부처님께서는 여러 측면으로 중생들을 일깨워주시고 계십니다. 중생들이 집착하고 있으면 집착한 것을 떼라고 하시는 법문이 있는가 하면, 중생들이 탐심을 부리고 있으면 탐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수많은 법문이 있지만 근본에 들어가서 “너 자신에 눈 뜨라. 너 자신이 진리광명이 충만한 부처님이라는 사실에 눈뜨라. 너뿐만 아니라 일체 중생이 다 그렇다 하는 것에 눈뜨라.”하는 말씀을 믿고 따르고 행하는 것이 가장 극치에 가는 법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그것은 부처님 눈으로 봐서 그런 것이지 내 눈은 육안밖에 없기 때문에 육안으로 봐서는 범부 중생 밖에 안 보입니다.


그러나 금덩어리가 있는데 거기 흙이 묻어서 흙밖에 안 보인다고 하더라도 금은 금인 것입니다. 금이라고 본 사람의 허물이 아닌 것입니다. 금은 금인데 금을 모르고 흙밖에 못 보는 사람의 눈에는 흙이 보일지 몰라도 금인 점에 있어서는 의심할 수가 없고, 금인 것을 본 사람의 말에 대해서는 허망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니까 금이라고 본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면 옳은 것이고, 금인 것을 모르고 흙덩어리라고 내 버리라고 하는 사람의 말을 따르고 내 버릴 때는 그 사람은 손해를 보는 것입니다.


불법을 믿더라도 부처님이 깨달은 진리의 눈으로 보신 바 사실, 그 선포를 믿고 행하는 것이 불자의 믿음 가운데서 가장 깊은 믿음이고, 행 가운데서도 가장 깊은 행이라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중생의 밑바닥 생명의 원모습이 여래장인 것을 믿고 부처님과 똑같다고 하는 것을 다 보고는 법을 설하시고 번뇌를 없애어 불성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모든 중생이 나와 더불어 차별이 없다]
부처님의 설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결국 중생의 눈을 가리고 있는 그러한 것을 제거하기 위해서 법을 설하는 것이고, 눈을 가리고 있다고 하는 것은 바로 번뇌이기 때문에 번뇌의 때를 제거하기 위해서 부처님은 법을 설하십니다.

 

우리는 진리의 대지, 부처님의 광명천지 가운데 우뚝 발을 붙이고 서 있고 내 생명이 그것으로 살고 있는데 다만 내 눈 있는 데는 구름이 딱 가려 버렸습니다.


그래서 내 눈에는 구름밖에 안 보이고 내 귀에는 구름상황밖에 파악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원래 진리 땅 위에 서 있는 것이며 진리생명으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마음의 눈을 돌려서 자신을 바르게 볼 때에 깨달음이라고 하는 자기 참성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앞에서 엄연부동이라고 말씀하시고 거듭 반복해서 중생 가운데 가지고 있는 이 무한절대의 진리, 이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상주불변’이라 결코 변치 않고 항상 거기 머물러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이 진리성은 상주불변이다.” 이 말씀을 확고히 믿어야 합니다.


“만약 기꺼이 이 법을 믿고 전심 수학하여 마음을 오로지 해서 닦고 배우면 문득 해탈하고, 널리 정각을 이루어서 널리 세간을 위해서 불사를 지으리라.” 여기 ‘이 법을 믿고 닦는다.’ 이 말씀을 부처님의 경계로만 돌려 놓지 말고 우리 존재의 참된 실상으로 알아야 합니다. 인간 존재가 무엇이냐 물으면, ‘죄인이다. 악인이다. 무능한 업보중생이다.’ 이렇게 보는 것은 중생의 망견입니다.


부처님이 보신 대로 ‘나와 더불어 차별이 없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것을 믿고 그 다음에는 그 말씀을 믿을뿐만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의 눈으로 그렇게 관하고 지속적으로 생각을 계속하며 전심 수학하면 해탈하리라 했습니다.


해탈이라는 말은 속박된 데서 벗어났다는 뜻인데 이 말은 미혹한 번뇌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진리광명 가운데 나타난 것입니다. 모든 일이 무슨 일이든지 원만하게 성취된다는 뜻이 됩니다.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일체 세계, 일체 국토에 계시는 미진수 부처님께 예경하겠습니다. 혹은 보살신으로 나투시고 혹은 형제나 착한 이웃으로 나투시고 혹은 거친 이웃이나 대립하는 이웃으로 나타나시는 자비하신 부처님께 빠짐없이 예경하겠습니다. 또 일체 중생 모두가 부처님의 공덕을 갖추었으니 일체 중생이 갖춘 모든 공덕을 찬양하겠습니다.”


이 말씀은 보현행원품의 행원을 지금, 우리들의 서원으로 다짐하는 ‘보현행자의 서원’ 중의 일부분입니다.


보현행원품에서는 “마땅히 이렇게 배울지니라.” “마땅히 이렇게 할지니라.” “이와 같이 예경할지니라.” “이와 같이 찬탄할지니라.” “이와 같이 공양할지니라.” “이와 같이 참회할지니라.” 하고 이렇게 “…할지니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혹은 “이렇게 하느니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런데 보현행자의 서원에서는 “이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우리 마음 속에 있는 믿음을 고백하고,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는 서원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어찌하여 부모님 형제 이웃 온 겨레가 모두 부처님이란 말인가. 일체 중생이 어찌하여 무량공덕을 갖추었다 하였는가. “여래의 눈, 여래의 몸, 여래의 지혜가 엄연부동하다. 물듦이 없고 덕성을 갖추어 여래와 다를 바가 없다.” 했습니다.


보현행자의 입각처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마하반야바라밀, 완성된 진리, 불성생명, 내 생명이 부처님 무량공덕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긍정해 놓고 그 토대 위에서 그 생명으로서 부처님의 법문을 받아서 행할 것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 보현행자의 서원에 있는 말씀은 그런 입장이 되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모습으로 나투시든지 그 겉모습을 보지 아니 하고, 그것은 나투신 형상인 것으로 알고, 그 본신은 미진수 부처님 가운데 하나이신 일체 부처님인 것으로 본다고 하는 입장에 서야만 보현행자의 서원이 되는 것입니다.

 



[일체 중생이 부처님의 공덕을 갖추었다]
그리고 찬양분에도 “일체 중생 모두가 부처님의 한량없는 공덕을 갖추었다. 이 한량없는 공덕을 갖춘 것을 긍정하고 찬탄하겠다.” 이런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래장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덕스러운 상이 원만히 갖추어져 있어서 나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다.” 하신 이 대목을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불광이 수행으로 삼는 것이고, 이 독특한 수행만큼 불가사의하고 신묘한 영험이 우리 생활에 나타나는 근거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통해서 우리 생활 가운데 깊이 이것을 실천하는 훈련을 항상 쌓아야 할 것입니다.


“일체 중생은 원래로 죄인이 아니다. 중생은 악에 물든 존재가 아니며, 미움의 대상이 될 존재가 아니며, 슬픔과 고난에 관계한 존재가 아니다. 일체 중생 모두가 대립된 존재도 아니고 그는 병고와 재난과 불행에 관계있는 존재가 아니다. 중생의 겉모습이 어떻게 되었든지, 그 본질인즉슨 악이고 불행이고 고통스러운 존재는 아니다. 참으로 인간은 진리공덕이 갖추어져 있는 지혜와 덕성과 위신력을 갖춘 존재이며, 건강하고 평화하고 기쁨과 성취와 그리고 왕성한 희망으로 활동하는 무한한 창조를 전제할 수 있는 권능적인 주인공이다.” 하는 것이 이해가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이 보건대 한 사람 한 사람이 부처님의 덕상을 갖추었다. ‘부처님과 차이가 없다’ 하는 이 말 가운데서 우리들의 삶 가운데는 어둠과 불행은 없는 것입니다. ‘생명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이 바로 권능적인 절대자다.’ 하는 것에 대한 긍정이 서야 하고 그런 긍정 밑에서 생활하는 것이 우리의 수행이고 우리의 기도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보현행자의 서원 가운데서 모든 이웃은 착한 이웃 나쁜 이웃 할 것 없이 모두가 부처님의 나투심입니다. 순수한 자기 가운데 이런 기도를 실현해갈 때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마음이 어두운 결과를 가져온다]
월간 「불광」 초기에 나왔던 내용 중에 생각나는 분은 김현진 거사님의 수기 내용입니다. 어느 날 60대의 거사님이 찾아오셔서 부인의 병이 낫지 않는다고 호소하였습니다. 그 거사님의 부인의 병은 신경통으로 시작해서 당뇨에다가 근래에 와서는 심장병까지 겹쳐서 중태에 있으며, 7년 동안 투병 중이라고 합니다. 또한 본인이 무엇을 해도 백사불성으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거사님은 고민스런 얘기를 구구절절이 털어놓았습니다. 그 분의 얘기를 장시간 들은 결과 마침내 결국 가정 가운데 불화가 있는 것을 알고 그것을 풀었더니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분은 이북에서 월남해온 분인데 이 쪽에 와서 열다섯 살 차이나는 부인과 결혼했습니다. 사업이 잘 될 때에는 일남 일녀의 자녀를 두고 평화스럽게 살았는데 사업이 뜻대로 안 되면서부터는 서로 불화하기 시작했습니다. 더욱이 남편에 대한 모멸이라고 해야 할까, 늘 부인의 핀잔이 심해서 가정이 항상 어두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두운 마음 가운데에는 어두운 결과밖에 오지 않고, 불꽃 튀는 것 같은 분노심이나 미운 감정을 품어서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결과밖에 오지 않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수많은 기억들이 되살아납니다마는 한 부부가 가정에서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밝은 마음을 지키지 못하면 그 집안의 자녀들에게까지 불행스러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부모가 불화하고 부모의 마음이 어두우면 그 집안에 어두운 그림자가 끼어서 마치 겨울에 창문이 뚫린 것처럼 집안에 찬바람이 들어와서 집안에 불화스러운 일들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왔습니다. 지금 이 거사님의 경우도 결국 그러한 환경 가운데서 먼저 부인의 병이 나온 것입니다. 이 분은 기독교를 믿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도저히 참을 수가 없으니까 방향을 바꿔서 법문을 듣고 자기 마음을 고쳐서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우선, 그 마음을 바꾸라]
“항상 잔소리만 하고 무능하다고 모멸을 주는 부인이라고 할지라도 부처님이 보셨을 때에는 부처님의 공덕이 충만한 사람이고, 참으로 착한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믿기 전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잔소리꾼이고 병으로 아무 것도 못하고 정말 고통주머니라고만 알고 있던 그 마음을 바꾸어야 합니다.”라고 조언을 해주었습니다.


그 분은 마침내 마음을 돌이켜서 집에 가서 다른 방에 혼자 앉아서 염불을 하고 아내에 대해서 “당신은 훌륭한 사람, 부처님의 은혜를 갖춘 사람. 그런데 이제까지 당신을 나쁘게 봤다. 내가 잘못했다.” 하고 참회하는 말을 하고 그 쪽을 향해서 절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부인한테 사실을 털어놨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그 말을 듣더니 눈물을 흘리며, “제가 당신 같은 분을 잘못 섬겨서 이렇게 병이 나서 집안걱정을 시켰다. 정말로 잘못했다.”고 하더랍니다. 서로 눈물을 흘리고 7년 동안 얼었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렇게 서로 참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부인도 마음을 고치고 기도를 하기 시작한 며칠 뒤에 아침에 일어나서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더운 기운이 자기 다리쪽으로 화끈한 것 같더니 그 동안 얼음같이 차가웠던 다리가 정상적으로 되었습니다. 그러자 “내 다리좀 봐요.” 하면서 벌떡 일어나 남편을 깨워서 “내가 여지껏 잘못했다. 당신 한 푼도 안 벌어주더라도 불평하지 않겠다. 앞으로 내가 광주리 장사를 하더라도 당신에게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말한 뒤 차츰 모든 병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바뀌었을 때 환경도 바뀐다 ]
“모든 사람은 부처님 공덕을 갖추어서 부처님의 지혜와 위신력을 갖추고 있는 분이다”하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고 그렇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대했을 때 내 마음이 바뀌고 내 마음이 바뀌었을 때 나의 환경도 바뀌는 것입니다. 대개 우리들은 생활 가운데서 귀로 들리고 눈으로 보이는 현상에 내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반야바라밀 수행이라는 것은 보고 듣는 환경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부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으로써 자기 마음을 채워서 그 믿는 마음을 일시적으로 아는 것으로 지나치지 말고 항상 담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고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지혜, 부처님의 위신력이 내 생명에 넘치고 있다’ 하고 끊임없이 관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소 대하는 사람들마다 그렇게 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생활 가운데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에 있어서 화목은 서로 존중해 주고, 화합하고 광명스런 부처님의 은혜의 몸이라고 알아주고 대해주는 데부터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부처님의 말씀을 우리 생활 가운데 실천해 나아가지 아니 하면 지식밖에 안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부처님의 말씀을 알고 믿다가도 경계를 보면 다른 생각이 들어옵니다.


그러나 다른 생각이 들어와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늘 말씀드렸듯이 힘들여서 염불하는 것입니다. 힘들여서 바라밀 염송하고 힘들여서 금강경을 읽고 반야심경을 읽고 석가모니불을 염불하고, 하여튼 염불을 일심으로 함으로써 부처님의 말씀이 말씀이 아니라 바로 내 생명의 존재라고 하는 것을, 내 생명의 참모습이라는 것을, 자신이 보고 알아버리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일심으로 염송하면 깊은 마음이 서 있는 자기 자신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때는 불법이 남의 것이 아닙니다. 불법은 바로 나이며, 불법의 진리는 내 생명의 진리입니다. 이렇게 해서 부처님의 말씀은 나의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서 불법은 바로 진리생명의 말씀이고 자기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 생명에 깃든 부처님 진리를 내어쓰자 ]
‘어떤 이유라도 분노심을 가슴에 두지 말자. 내 생명에 깃든 부처님의 진리, 부처님의 태양을 꼭 생각하고 내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깃든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을 꼭 지켜보고 내 마음에서 부정적인 생각을 제거하자’고 생각하고 제거해 버렸을 때 만인이 태양 앞에 밝은 빛을 받는 것처럼 부처님의 무량공덕생명을 제각기 체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기도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활 하나하나가 진리 위에서 성취되는 그러한 성취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아는 데 그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누구든지 깊은 진리를 알고 모르고간에 그저 내 생명에 깃든 부처님의 광명을 믿고 일심으로 바라밀을 염송하게 되면 이해를 안 하더라도 눈으로 봐버리는 것입니다.


심정국토정(心淨國土淨), 마음이 청정하니 국토가 청정하다는 이 대목은 항상 외우는 말씀이고 이 문자는 유마경의 말씀입니다. 이 법문은 우리가 끊임없이 내 마음이 청정한 것을 현전함으로써 우리 국토 즉, 몸도 국토요, 가정도 국토요, 우리사회, 우리 나라도 국토요, 세계가 국토요, 온 중생세계가 국토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청정하므로 국토가 청정해진다는 대목이며, 이것을 알아서 반야바라밀을 염해서 자신과 이웃에 빛나는 부처님의 청정광명을 생각하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누구 때문에 안 됐다’ 하는 원망은 없습니다. 결국 내게 나타나 있는 불행스러운 것은 내 마음이 청정한 것을 모르고 부정한 마음을 가지고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끓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다 비워버리고 부처님의 청정광명이 끊임없이 충만한 것을 생각하고 감사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핵심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디 이번 기도에 성취를 빌어마지 않습니다. 감사합니다.

 

 

                                                            월간 불광... 

출처 : 화엄경보현행원(부사모)

글쓴이 : 파랑새 원글보기

출처:[광덕 큰스님] 최상의 기도법http://cafe.daum.net/bohhyun/ITPD/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