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허대사염불론’ 중에서 -자재왕생 세분의 사례:
사람이 임명종시 마지막 숨이 끊어지려할 때, 그 사람의 일생 동안 지은 업이 최후의 호흡 한마디 아미타불을 따라 극락왕생하여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다. 염불왕생에 관하여 출가 재가 남녀노소의 임종 시 갖가지 상서로운 모습은 왕생 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런 사례는 하도 많아 이루 셀 수가 없다.
내가 출가 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만도 스무 몇 분이나 되고 기타 전해들은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심을 계발(啓發)하기 위해 제가 본 가운데 세분의 사례를 들겠다.
첫 번째는 출가한 수무(修無)법사이다.
이분은 영구(營口)사람으로 벽돌을 굽고 기와를 쌓는 장인(匠人)출신이다. 생활환경이 좋지 않고 일할 때도 고생이 싫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음을 느꼈으며 여러 번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염불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곧 발심하여 염불을 하였다. 출가 후 정식(正式)으로 불법을 듣고 나니, 염불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졌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염불할 것을 권하였다. 민국18년 내가 동북 하얼빈 극락사에서 제한(諦閑)노스님을 초청하여 계를 전(傳)하였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나를 찾아와서 영구에서 수무(修無)스님이 오셨는데 전계(傳戒)하는 동안 발심하여 고행을 하겠다고 하였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극락사 감원직을 맡고 있던 정서스님이 요사채에서 방하나 내 주었다.
십여 일이 지난 후 다시 나를 찾아와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정서스님이 옆에서 말씀하셨다.
“스님이 발심하여 아픈 사람을 돌보겠다해 놓고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시겠다하는가? 너무 항심(恒心)이 없는 게 아닌가?”
“제가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게 아니라 극락왕생을 하려 합니다. 부탁이니 감원스님께서 자비심을 내어 장작 몇 백 근만 준비하여 죽은 뒤 태워 주십시오.”
정서스님이 물었다.
“언제 갈 것인가?”
“열흘 내에 갈 것이다.”
이 말을 마친 수무스님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수무스님은 다시 나와 정서스님을 찾아오셨다.
“스님들께 휴가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늘 갈 것인데 방하나와 거사님(중국에는 남여신도를 모두 거사라 함) 몇 분을 불러 염불하여 저를 바래다주십시오.”
정서스님은 빈 방을 찾아 널판자 몆 개를 펴서 침대를 만들고 또 외료(外寮)에서 스님 몇 분을 찾아서 염불 해주기로 했다. 수무스님이 왕생하기 전 염불을 해 주려고 모인 사람들이 “수무스님 오늘 곧 불국토로 가실 건데 시를 몇 구절 적어 주시던지 아니면 게송이라도 기념으로 남겨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우둔해서 시를 지을 줄도 모르고 게송도 지을 줄 모르오. 다만 경험의 말을 여러분께 들려주고 싶은데, 바로 말만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지혜가 아니오.”
수무스님의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어 대중이 다 같이 염불하고 수무스님도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을 시작했다.
염불을 한지 15분도 채 못 되어 스님은 왕생을 하셨다. 상주(常住)에서 임시로 감실을 하나 만들고 밤이 되자 그를 감실로 옮겼다. 비록 더운 날씨였지만 그 얼굴이 맑고 수려함이 평소와 달랐다. 몸에서는 조금도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파리 한 마리도 붙지 않았다. 제한노스님과 일반 신도들이 서로 다투어 보러 갔고 희유함을 찬탄하셨다.
이튿날, 나무에 불을 붙여 다비식을 지내는데 빨간 불과 흰 연기에 조금도 이상한 냄새가 없었다
13. 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두 번째는 정석빈 거사인데 산동성 해묵사람으로 장사를 하였다. 불경(佛經)을 읽은 인연으로 염불이 좋음을 알았고, 곧 발심하여 염불하였으며 평생 장가를 가지 않았다. 민국22년 청도에서 내가 귀의와 염불에 대한 법문을 하였는데 법문을 듣고 나니 그의 염불하는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해졌다.
집안일을 모두 동생에게 맡기고는 일심으로 염불만 하였다. 그 후 아미타경을 배워 능숙하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매년 마다 꼭 해묵으로부터 청도로 오셔서 하루 이틀 묵곤 하였으며 평도현(平度縣)의 불자들에게 몇 차례씩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민국24년 정거사가 또 나를 초청하여 평도에서 법문을 한 적도 있었다. 28년 봄 정거사는 또 청도를 거쳐 평도현에서 경전강의를 하셨는데, 그 뒤로 2주후 평도현에서 사람이 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아십니까? 정석빈 거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열흘 전 정거사가 여길 떠날 때도 괜찮던데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그래 무슨 병으로 어떻게 돌아 가셨는가?”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정석빈 거사님이 아미타경을 강의하고 난 후, 법문을 듣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일을 보던 사람만 몇 분 남았다. 서로가 오랜 친구사이였기에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정거사는 친구들에게 가겠다며 방 한 칸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의아해진 친구가 물었다.
“가신다면서 방은 왜 빌리는가?”
“내가 오늘 극락왕생을 하려는데 다른 사람 집에서 죽으면 기휘(忌諱:꺼리어 싫어함)를 범할까 그러내.”
친구들이 말했다.
“자네와 우린 오랜 친구사이네 극락왕생이 아니라 병이 들어 누워 우리 집에서 죽어도 마땅한 것인데 무엇 하러 따로 방을 찾는가. 지금 여기에는 불법을 믿고 염불하는 불자들이 많이 있는데 자네가 참말로 왕생할 수 있다면 이 지방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주시고 본보기가 되어 주시게”
그의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방 두 칸을 정리해주고 침대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정 거사는 친구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는 옷을 몇 번 툭툭 털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앉았다.
“여러분께 휴가를 드립니다. 난 지금 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불법의 인연으로 만났는데 마지막으로 염불하여 날 바래다주시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임종이 다 됐는데 아직 게송을 짓지 않는가? 우리에게 기념으로 남겨주시오”
정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게송이 더 필요한가? 지금 나의 이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자네들도 나처럼만 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기념인가?”
이 말을 마치고 장엄한 염불 속에서 15분도 채 안되어 웃음을 머금고 왕생을 하셨다.
그 후로 평도현 일대 사람들은 모두 염불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정거사의 동생은 처음엔 형님이 가정과 사업을 다 버리고 염불만 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중에 형님의 여러 차례 권유로 마지못해 염불을 하였지만 간절하지 않았다.
이번에 형님이 염불왕생하고 미리 갈 시간도 알고 오고감이 자재(自在)함을 직접 본 그는 염불이 절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일심으로 염불하였으며 3년 후 미리 갈 시간을 알고 염불왕생 하였다. 다만 임종시 약간의 병이 있어 형님처럼 시원스레 가지는 못했다.
14. 여거사 장씨 이야기
세 번째는 女거사 張씨인데 청도사람이고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남편은 항구부두에서 인력거(人力車)를 끌어 생계를 유지했다. 장 씨는 청도시내 항산정사(港山精舍)근처에 살았는데 정사(精舍)내에 염불회(念佛會)가 있어 일요일이면 담산사(湛山寺)로부터 이곳에 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다. 거사님들은 경을 듣고 난 후면 한 시간씩 염불을 하였다.
장 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불법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믿음이 아주 독실했다. 평소엔 집에서 염불하고 일요일만 되면 두 아이를 데리고 염불회(念佛會)에서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대중과 함께 염불을 하였다. 민국26년 겨울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장 씨는 문득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잘 지내세요. 나는 오늘 불국토로 왕생할 거예요.”
장 씨의 남편은 먹고 사는데 바빠서 불법에 대한 훈습이 적었으므로 화난 얼굴로 꾸짖었다.
“그만해 ! 우리 집이 궁한 것도 모자라 당신까지 왜 이러는가.”
남편은 아랑곳 않고 차를 끌고 부두로 달려갔다.
장 씨는 또 두 아이에게 당부했다.
“난 오늘 극락세계로 갈 것인데 너희들은 앞으로 아빠 말씀 잘 듣고 말썽 피지 말거라.”
이때 두 아이는 큰애는 열 살이고 작은 애는 다섯 여섯 살 밖에 안됐다. 비록 어머니의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문 앞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장 씨는 집안일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워낙 어려운 살림이었기에 갈아입을 새 옷이 없어 빨아놓은 헌 옷을 입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하면서 왕생하였다.
장 씨의 두 아이는 밖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서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침대위에 앉아있고 밥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손으로 밀어 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알고 울면서 옆집으로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이웃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장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비록 죽은 지 한참 지났지만 얼굴은 살아생전과 같은 것을 보고 염불공부(念佛功夫)가 깊음을 찬탄하였다.
나중에 남편이 돌아와서 한바탕 슬피 울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염(殮)할 돈이 없어서 불학회(佛學會)의 여러 거사님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요긴한 일은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 바쁜 시간 속에서도 짬을 내어 조용히 앉아서 한 시간씩 염불하여야 하고 일을 할 때도 마음속으로 염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매일 살생 투도 사음을 일삼고 온갖 업을 짓는다면 삼악도에 타락함을 면치 못할 것이며 육도를 윤회하면서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에게 목숨을 빚졌고, 나는 너에게 빚을 갚아야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늘 생사에 있다.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빛깔(色)을 가엾이 여기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속박에 있다. 오직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의 결과가 이어져 끊이질 않는다.” 하셨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살(殺), 도(盜), 음(淫)의 업을 지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받들어 권 하건데 여러분이 하루빨리 염불하고 염불을 많이 해야 한다.
이른바 “염불 한마디에 무량한 복이 늘고 부처님께 한번 예배하면 항하의 모래와 같은 죄업이 소멸된다.”
念佛一聲 福增無量 禮佛一拜 罪滅河沙
염불일성 복증무량 예불일배 죄멸하사
이상 염불의 좋은 점을 매우 산만(散慢)하게 대충 설명하였다. 자세한 내용과 구경처를 알려거든 정토오경(淨土五經)과 정토십요(淨土十要)등을 참고로 하면 된다. 바라건데 여러분이 염불의 좋은 점을 안 이상 참된 신심으로 六根을 도섭(都攝:모두 거두어)하여 잘 다스리고 정념(淨念)이 이어져서 착실하게 지극정성으로 노실(老實)하게 염불하여 장차 다 같이 서방극락세계에서 만납시다.
1950년(庚寅) 1월1일
香港華南學佛院
大光敬記
南無阿彌陀佛
출처: https://inseng.tistory.com/142 [하늘의 기운, 인연, 수양. 보은사 태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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