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세로 왕생극락한, 해현海賢 노화상 일대기와 가르침---(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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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토록 사모하며 15:제7장. 노덕화상: 한 차례 맑은 바람 소리 우주에 가득 하네-112세 해현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0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토록 사모하며 15:제7장. 노덕화상: 한 차례 맑은 바람 소리 우주에 가득 하네-112세 해현노화상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5
첫째가 자비이며, 두째는 검소이다.
현공은 평생 근면하고 검소하셨습니다.
제7장. 노덕화상: 한 차례 맑은 바람 소리 우주에 가득 하네 (一聲清風遍寰宇)
현공께서는 생전에 자주 어느 한 승려의 일화를 들려주시곤 하셨습니다. 우리가 고봉사와 청천사에 갔을 때, 연강법사와 인생법사가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현공이 들려주셨던 그 승려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셨습니다.
그래서 이분 승려에 대해 특별히 서술할 필요가 있을 것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노덕老德화상은 현공과는 동년배이시며, 어렸을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 어머니를 따라 밥을 구걸하며 생계를 연명하였습니다. 그러던 몹시 매섭게 추웠던 어느 해 겨울에 온갖 추위와 굶주림의 고통을 실컷 맛본 노덕 모자는 구걸하다가, 동백현 평씨진 금산사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모친은 주지이신 해참海參법사께 자비를 베풀어, 자신들 두 모자를 거두어줄 것을 애걸하였으며, 아울러 노덕을 거두어 제자로 삼아주실 수 있기를 원하셨습니다.
해참법사는 노덕에게 승려가 되게 해주겠다는 대답은 하지 않으신 채, 그를 데리고 위타보살상韋馱菩薩像 앞으로 데리고 가서는 노덕에게 위타보살님께 절하고 스승으로 삼으라 하셨습니다.
노덕은 몹시 얼뜨고 멍청하고 우둔하였기 때문에, 그의 모친은 그를 “노태”(老呆: 멍청이)라고 불렀습니다. 남양 방언에서는 “태呆(dāi)”자와 “덕德(dé)”자는 발음이 같았기 때문에, 세월이 오래 지나자 “노태”라고 부르던 이름이 그만 “노덕老德”이 되었습니다.
노덕화상은 바로 이렇게 출가하시게 되었기 때문에, 그의 머리를 깎아주어 승려가 되게 해주신 스승(剃度師)도 없으시고, 역시 법명도 없으시며, 더욱이 일찍이 계를 받은 적도 없으십니다.
이때부터 평씨진 사방 몇 십리 안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모두, 매일 어깨에 포대를 하나 메고서 밖으로 나가 탁발하는 노태화상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해참법사는 그에게 길을 걸어갈 때, “아미타불”을 부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해참법사가 시키는 대로, 길을 걸으면서 성실하게 염불을 하였습니다.
마을의 아녀자와 장난꾸러기 아이들은 그의 몹시 얼뜨고 멍청한 모습을 보기만 하면, 항상 그를 놀리고 장난쳤습니다. 그러나 노덕은 전혀 화를 내는 기색 없이, 오로지 몇 번이고 사람들에게 절을 하고, 입속으로는 멈추지 않고 “아미타불, 아미타불”하고 불렀을 뿐이었습니다. ……
누군가가 그를 우롱하며 “노덕아, 네가 나에게 이마를 땅에 닿도록 절하면, 내가 먹을 양식을 주겠다.”라고 말하면, 노덕화상은 말씀하시길, “내가 절하지 않는 부처님이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장난으로 돌을 가리키면서, “이 속에도 부처님이 계시다.”라고 말하면, 노덕은 그 즉시 포대를 내려놓고서 돌을 향해 무릎을 꿇고서 곧 “쿵” 하고 머리가 돌에 부딪치는 소리를 내며 절을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재미로 항상 이렇게 그를 가지고 놀려대는 바람에, 노덕의 이마에는 계란만한 큰 혹이 툭 튀어나왔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남을 속이고 골탕 먹이기를 몹시 좋아하는 사람들이 소똥을 가리키면서 노덕에게 말하길, “이 속에 부처님이 계시다.”고 하면, 노덕은 말하길, “부처님께서 계시면 곧 절을 해야지.”라고 한 후에 그 즉시 소똥에 머리가 닿도록 절을 하였습니다.
또 심지어 한 번은 어떤 사람이 장난으로 실 한 가닥을 그의 귀에다 걸어놓고서 말하길, “노덕아, 내가 너를 이곳에 묶어놓았으니, 너는 움직일 수 없어!”
그 사람의 이 말을 듣고서 곧이곧대로 믿고는, 땡볕 아래 서서 울기 시작하였으며, 한나절 동안 그곳에서 꼼짝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나중에 어떤 사람이 그의 앞을 지나가다가 그에게 왜 우느냐고 묻자, 그는 어떤 사람이 자신을 묶어놓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무엇으로 묶어놓았느냐고 묻자, 그는 실로 묶어놓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에게 어디를 묶어놓았느냐고 묻자, 그는 귀를 묶어놓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그의 귀에 걸려있던 실을 집어서 그에게 주면서 말하길, “내가 널 풀어주었으니, 넌 이제 가도 된다.”고 하자, 노덕은 금방 울음을 그치고, 웃으면서 몇 번이고 계속해서 그 사람에게 절하며 염불하였습니다. ……
노덕은 탁발을 하고 절에 돌아온 후에는, 반드시 먼저 위타보살상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하고는 말하길, “스승님, 돌아왔습니다.” 그렇게 한 후 탁발한 음식을 대전으로 가지고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였습니다.
낮에는 밖에 나가 탁발하였고, 저녁에는 위타보살님께 절을 하였으며, 세월이 오래 지나도록 매일 똑같이 이렇게 하였습니다.
1954년 음력 12월에 노덕화상은 병이 났지만, 그러나 탕약을 마시기를 거절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보기만 하면 묻기를, “언제가 음력 12월 8일입니까?” 매일 반드시 몇 번이고 똑같이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래서 해참법사가 슬쩍 그에게 묻기를, “늘 음력 12월 8일을 묻는데, 왜 그러느냐?” 그러자 노덕화상이 대답하길, “제 스승님(위타보살님)께서 저에게 음력 12월 8일에 아미타 부처님께서 저를 데리러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해참법사는 그의 말을 마음속으로 새기면서 그를 찬탄하셨습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어느 덧 그가 말한 음력 12월 8일이 되었는데, 노덕은 오히려 정작 다시 묻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절 안의 승려들이 그에게 일러주길, “오늘이 바로 음력 12월 8일인데, 자네는 도대체 무엇을 하려고 그러는가?”
노덕은 그 말을 듣자, 마치 매우 놀라는 듯이 묻기를, “정말입니까? 그럼 저는 가야 합니다.” 그리고는 그는 그 즉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위해 목욕할 물을 길어다 줄 것을 청하였으며, 목욕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곧 바로 단정하게 앉아 염불을 하며 원적하셨습니다.
노덕화상이 왕생하신 지 거의 2년 가까이 되었을 때,
행상꾼 몇 사람이 장사를 하러 무한에 갔다가, 무한 거리에서 어깨에 포대를 메고 탁발하고 있는 어리벙벙한 화상을 우연히 보았는데, 그 생김새가 노덕과 비슷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그들은 그 화상 곁에 가서 아는 체를 하며 말하길, “노덕, 자네는 어떻게 무한까지 왔는가?”
그 말에 그 어리벙벙한 화상이 그들을 쳐다보면서 마치 바보처럼 히죽히죽 웃으며 대답하길, “탁발하지요!”
그래서 그들이 말하길, “우리와 함께 돌아가겠는가?”
그 어리벙벙한 화상이 대답하길, “난 며칠 있다가 돌아가겠소.”
이 행상꾼들은 무한에서 돌아와서,
평씨진의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무한 거리에서 우연히 노덕을 만난 일을 들려주고 나서야, 노덕이 이미 왕생한 지2년이 되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이 만난 사람은 분명히 노덕화상임이 틀림없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노덕화상의 사적은 남양 지역에 있는 승가대중들 속에서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세월이 이미 오래 되어 전해오는 중에 오히려 와전된 것들이 많습니다. 현공께서 생전에 일찍이 이를 귀찮게 여기지 않으시고서 노덕화상에 관한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려주셨기 때문에, 말학은 반드시 진실하게 서술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말학과 인지법사가 시간을 내어 일부러 평씨진까지 가서 한 차례 자세하고 철저하게 조사를 하였기 때문입니다. 평씨진 관음사 주지이신 인천印川법사를 비롯하여 몇 분의 대덕거사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저희들은 그해 금산사에서 해참법사를 따라 구오사미驅烏沙彌를 지낸 적이 있는 진계秦啟장로거사를 찾아뵈었습니다. 진계노거사는 금년에 이미 83세의 고령이시며, 금산사 뒤에 있는 마을에 살고 계셨습니다.
(주)구오사미: 절에서 음식을 보고 날아드는 까마귀를 쫓거나 파리 따위를 날리는, 7세에서 13세까지의 사미를 말한다.
노거사는 12살 이전에는 늘 금산사에서 살았으며, 또한 해참법사가 인권印權이란 법명을 지어주셨기 때문에, 노덕화상에 대해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아는 분이십니다. 말학은 제가 알고 있는 노덕화상에 관한 일부 자료와 의문 나는 점들을 먼저 진계노거사에게 말씀드려 인증과 대답을 해주시길 청하였습니다. 진계노거사께서는 끈기 있게 일일이 대답해주셨으며, 더구나 친히 저희를 데리고 금산사의 유지遺址와 노덕화상의 묘지를 참관하도록 해주셨습니다. 저희는 일대一代 성승聖僧의 묘지가 제멋대로 무성하게 자란 잡초와 가시나무로 겹겹이 덥혀 있는 모습을 직접 보니, 말학은 저도 모르게 참지 못하고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계속 칭념하였으며, 눈물이 적삼을 적셨습니다. ……
이 기연機緣을 이용해 말학은 옛 대덕의 선시 《주종鑄鐘》을 빌려, 노덕화상께 정례를 올리고 찬탄합니다.
큰 용광로 풀무 속에서 몸을 바꾸어 나오니, 집게와 쇠망치로 치지 않았는데 힘이 30만 근이네. (大爐韝裏翻身出, 不犯鉗錘勢萬鈞.)
한 차례 맑은 바람 소리 우주에 가득 하니, 꿈속의 사람을 몇이나 불러 돌아오게 하였는가? (一聲清風遍寰宇, 喚回多少夢中人?)
1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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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반절구루 죽투’의 일대기 -부탄의 현대 연화생대사심주 성취자 ---(관련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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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9 - 제1장. 해경노화상: 성인은 무슨 일로 말이 없고자 하시는가?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10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9 - 제1장. 해경노화상: 성인은 무슨 일로 말이 없고자 하시는가?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9
제1장. 해경노화상: 성인은 무슨 일로 말이 없고자 하시는가? (聖人何事欲無言?)
20세기 80년대에 래불사는 그때까지도 아직 수돗물이 없어서, 승려 대중들이 마시는 물은 전부 자신들이 직접 판 얕은 우물에 의지하였습니다. 가뭄을 만나기만 하면 그때마다 언제나 우물에서 물을 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을까지 가서 물을 길어다 먹었습니다.
한번은 경공慶公께서 물을 길러 마을에 가셨다가, 공교롭게도 큰 개에 물려 개에게 온몸이 긁혀 상처투성이가 되셨습니다. 그 개 주인이 그 소리를 듣고 급히 뛰어나와, 손에 들고 있던 가죽 채찍을 휘두르며 그 개를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경공은 오히려 그 개 주인을 때리지 못하게 막으면서 말씀하시길, “개가 나를 보고서 물은 것은, 내가 전생에 개였을 때 저 개를 물은 적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요. 지금 저 개가 나를 물었으니 이 빚을 다 청산하였는데, 만약 주인장께서 저 개를 때려 저 개에게 원망하는 마음을 내게 한다면, 이 원한은 여전히 계속해서 맺어지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지금 내 이 몸의 상처 역시 헛되게 받은 꼴이 될 것이요.”(狗見了咬我, 說明我前世作狗的時候咬過牠, 現在牠把我咬了, 這個賬就正好了結了, 假如你打牠, 讓牠心生怨恨, 那麼這個怨就還要繼續結下去, 我這一身傷也就白受了.)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마을 사람에게 밀가루를 조금 얻어서 상처 위에 뿌리셨으며, 또 바늘과 실을 빌려서 찢어진 옷을 대충 꿰매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 두 개의 물통에 물을 반쯤 길어 어깨에 메고, 사원으로 돌아오셨습니다.
경공은 글자를 알지 못하셨으며,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 이외에는 거의 어느 것도 할 줄 모르셨기 때문에, 경공을 존중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대전大殿에 올라갈 때에는, 경공은 어쩔 수 없이 그저 대전 밖에 서서 염불을 하셨습니다.
사원 안의 가장 더럽고 가장 고된 일은 모두 경공께서 도맡아 하셨습니다. 당시에 사원에는 경작하는 척박한 밭이 몇 이랑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경공이 한쪽 팔에는 광주리를 걸고 어깨에는 삽을 메고서, 어느 곳에서나 똥을 줍고 계신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경공께서 나귀 옆에서 똥을 줍다가 나귀의 발길질에 채여 곤두박질쳤습니다. 그 나귀 주인이 황급히 경공을 부축하여 일으키고는, 다친 곳은 어떠신 지를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경공께서 오히려 대답하시길, “나는 아무 일도 없으니, 나귀 다리가 다치지나 않았는지 어서 살펴보십시오.”(我一點事都沒有, 你快看看把驢腿給傷著了嗎?)라고 하셨습니다.
1987년 겨울, 경공께서는 한차례 병을 크게 앓으셨습니다.
그때 마침 사원에 와서 기숙하고 있던 행각승이 자신이 사람의 운명을 점칠 줄 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행각승은 경공의 수명이 머지않아 곧 다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제당齋堂에서 밥 짓는 사람에게 경공께 다시는 음식을 드시게 하지 말고, 약도 드시게 하지 말며, 장을 깨끗하게 청소하여 죽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말하였습니다.
사흘 후에 왕춘생거사가 사원에 갔다가, 평상에 누워서 숨이 곧 끊어질 듯한 경공을 보고 공양을 드셨는지 여쭈었더니, 경공께서 드셨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왕춘생거사는 그 즉시 해현노화상을 찾아, 두 분이서 한 분은 불을 지피고 한 분은 밀가루 반죽을 밀어 국수를 뽑아 국수를 한 솥 끓였습니다. 현공은 경공의 평상 곁에 가서 자신의 등으로 경공을 받치고, 왕춘생거사는 사발을 받쳐 들고서 한 숟갈 한 숟갈 경공의 입안에 국수를 넣어드렸습니다.
경공은 단숨에 국수 네 그릇을 드시고는 차츰차츰 몸이 회복되셨습니다. 왕춘생거사가 경공께 좀 더 드시겠느냐고 여쭙자, 경공께서 대답하시길, “솥 안에 국수가 있으면, 또 좀 더 먹어도 되겠네.”(鍋裏若是有, 再喝點兒也行.)라고 하셨습니다.
현공과 왕춘생거사는 마음이 너무 아픈 나머지 목이 메어 울음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두 분은 경공에게 한꺼번에 너무 많이 먹게 하다가 몸에 탈이 날까 걱정이 되어, 더 이상 먹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왕춘생거사는 운명을 점칠 줄 안다는 그 행각승을 찾아서 시비를 따지려고 하였지만, 경공께서 도리어 가로 막으며 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씀하시길, “이는 모두 내 자신의 업장이니,다른 사람을 탓해서는 안 되네.”라고 하셨습니다.
경공은 일생동안 좋은 일을 하시면서도 명성과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셨으며, 편안한 마음으로 본분을 지키면서 자신이 응당 해야 할 일이면 소리 소문 없이 하셨으며, 호기롭게 자신 있게 말씀하신 어떠한 말씀도 남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마음속으로, “저 어르신은 일생 동안 '남의 나쁜 점'을 마음에 담아두지 않고서, 항상 남에게 '스스로 자신의 잘못을 고치고 스스로 새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남겨 주셨으며, 자비하신 마음으로 평등하게 동물들에게 능히 베푸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러한 행은 만약 살타왕자(석가모니불의 전생의 몸)나 인욕선인(석가모니불의 전생의 몸)과 같은 부류가 다시 이 세상에 와서 응화應化하신 것이 아니라면, 결코 실천하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경공께서 금강의 무너지지 않는 몸(金剛不壞身)을 얻으신 것이 어찌 우연에 속하는 일이겠습니까!
경공의 법체를 모신 항아리를 7년반만에 개봉하니, 썩지 않고 온 몸이 사리가 되어있는 모습. 이에 금을 입혀 모시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말학은 경공과 서로 만날 인연이 없었기 때문에, 경공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의 세 가지 사건은 래불사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는 일이며, 말학 역시 직접 왕춘생대거사께 증명해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수식하지 않고서 여기에 그대로 서술하였습니다.
말학은 일찍이 연세가 많으신 거사들을 적지 않게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분들은 모두가 거의 이구동성으로, 경공께서 언제나 농기구를 어깨에 메고서 밭을 갈며 일하고, 잡목을 줍고 똥을 줍고, 다리를 고치고 길을 보수하는 모습을 본 것 이외에는, 거의 달리 이야기할 만한 거리가 없다고들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경공은 말씀하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경공이 일찍이 무슨 말씀을 하신 적이 있는지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말학은 그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어서 인지법사와 함께 특별히 시간을 내어,
경공께서 출가하여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신 나한산羅漢山 청량사清涼寺에 가서, 연세가 69세인 구국부邱國富 호법거사를 예방하였습니다. 구거사의 부친은 경공과 동년배이시며, 또한 경공이 어렸을 때 같이 놀던 죽마고우라 말할 수 있으며, 게다가 지금도 여전히 건강하십니다.
말학이 구국부노거사에게 여쭙길, “어떤 사람이 인터넷에서 경공께서 열아홉 살에 출가하셨다고 말하는데, 제가 여러 해 전에 전해들은 말에 의하면, 경공께서는 열한 살에 출가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과연 어느 것이 진실로 신빙성이 있는 말인지 부친께서 혹 노거사에게 말씀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러자 구노거사가 아주 분명하게 대답하길, “부친께서 말씀하신 적이 결코 한 번만이 아닙니다. 경공께서 막 사원에 오셨을 때에는 키가 그다지 크지 않았으며, 여전히 어린아이였다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겨우 열 살 쯤 된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고 하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열아홉 살에 출가하셨다고 말하였다면, 그것은 완전히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말학이 다시 또 여쭙길, “인터넷에는 또 경공의 사진이 한 장 올라와 있는데, 그 사진은 경공께서 생전에 남기신 것이라 말합니다.” 그때 옆에 있던 거사 한 분이 끼어들며 말씀하시길, “맞아요. 저도 보았어요. 게다가 마치 칼라사진 같았어요?”
구노거사가 웃고는 여전히 매우 단호한 어투로 말하길, “경공께서 남기신 사진이 있을 리가 없습니다. 칼라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흑백사진이라 해도 있을 리가 만무합니다. 그들이 인터넷에 그렇게 올린 것은 경공께서 그 시절에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고생했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학이 경공의 구체적인 사적을 이야기해줄 수 있는지 여쭈었을 때, 구노거사는 대답하기 조금 난처해하였습니다.
한참 생각한 후에 단지 한 마디 말씀하길, “경공께서는 성품이 좋으셔서, 사람들의 기분을 건들려 번뇌를 일어나게 한 적이 한 번도 없으십니다. 왜냐하면 경공께서 말씀하실 때 좀 더듬거리며 말하여 무슨 말을 해도 매끄럽지 않았기 때문에, 한담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경공께서 오직‘아미타불’명호를 부르실 때만은 더듬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저는 단지 경공께서 염불하시는 것을 좋아하셨다는 이것만이 기억날 뿐입니다.”
왕춘생거사와 같은 마을에 사는 당만당黨萬堂거사가 뜻밖에도 이야기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을 하나 들려주었습니다.
문화혁명 초기에 경공은 하방下放을 당하여 래불사 근처인 장장촌張莊村에 가서 노동에 참가하신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바로 당만당거사가 있던 생산대에 함께 계셨습니다. 그 당시에 당만당거사는 아직 나이가 어려서 경공과 함께 장난치며 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저녁에는 또 자신의 평상을 경공의 평상과 나란히 붙이고서 함께 자려고 하였습니다.
하루는 어느 여름날 밤에 당만당거사가 몽롱한 상태에서 화장실에 가려고 잠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뜻밖에도 경공이 평상 위에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당만당거사는 깜짝 놀라 급히 평상에 올라 경공의 등을 치면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더니, 경공이 대답하길, “낮에는 염불하지 못하게 하니, 밤 시간을 틈타 잠시 염불하네.”(白天不讓念佛, 我趁夜裏念會兒佛.)라고 하셨습니다. ……
(주) 하방下放 : 간부나 지식인들이 사상 단련을 위해 공장·농촌·광산 등지로 노동하러 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외에 또 왕봉림거사가 있는데, 그가 말하길,
한번은 경공께서 인분을 한 짐 짊어지고, 밭으로 가는 중이었습니다. 근데 공교롭게도 때마침 어떤 한 젊은이가 자전거를 타고서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는데, 그 자전거의 속도가 너무 빨랐기 때문에, 경공이 미처 몸을 피할 겨를도 없이 한 순간 달려오는 그 자전거에 몸이 부딪혀 옆에 있던 웅덩이에 넘어지는 바람에, 짊어지고 있던 인분이 몽땅 쏟아져 온몸이 인분으로 뒤덮었답니다.
그런데 의외로 그 젊은이는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웅덩이에 넘어진 경공에게 자기가 가는 길을 막았다고 마구 욕을 퍼부었습니다.
그때 마침 왕봉림거사가 삽을 들고 이 길을 지나가던 중이었는데, 이 젊은이가 이처럼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을 보고, 그 순간 화가 나서 들고 있던 삽을 힘껏 휘둘러 그 젊은이를 때리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물웅덩이에 누워있던 경공이, 그 순간 거사에게 계속해서 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말씀하시길, “때리지 마시요! 때리지 마시요! 저 젊은이를 원망하지 않소. 모두가 다 내 잘못이요.”(不要打他! 不要打他! 不怨他, 都是我的錯.)라고 하셨습니다. ……
경공께서 왜 언교言敎를 조금도 남기지 않으셨는지, 그 이유는 아마도 그 어르신께서 중생을 제도하시는 또 다른 일종의 대 자비심이며, 대 지혜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 염불하여(念佛) 성불하는 것(成佛)에, 어찌 구태여 많은 말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고덕의 선시禪詩에서 말하길,
성인은 무슨 일로 말이 없고자 하시는가? 이는 아마도 말로 인해 본원을 잃을까, 두려워서 일 것이네. (聖人何事欲無言? 蓋恐因言失本源)
청정한 선의 마음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 아니거늘, 불법을 분명하게 알지 못해 바람이니 깃발이니 하네. (清淨禪心非月指, 糊塗佛法是風幡.)
(주)清淨禪心 : 불교용어로, 맑고 텅 비고 안정된 마음을 가리킨다. 지금 현대 사람들은 대체로 이 말을 가지고 불법을 깨닫는 마음을 가리킨다.
정공노법사는 경공의 비범한 성취를 아신 후, 얻기 어려운 일이라 극찬하셨으며 또한 희유한 일이라 찬탄하시면서, 경공의 성취는 틀림없이 “깨달음을 종지로 삼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는 모든 이들이 다 함께 경축할 일이다.”(覺海同慶)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정공노법사는 친히 제자題字를 써서 찬탄하셨습니다.
(주) 제자 : 기념을 남기기 위해 쓰는 글자를 가리킨다.
한 평생 계율 지니고 수행하시어, 금강처럼 부서지지 않는 몸 원만하게 성취하셨네. (一生持戒修行, 圓滿金剛不壞體)
일심으로 염불하여 왕생하시어, 구경에 극락세계의 걸림 없는 몸 이루셨네. (一心念佛往生, 究竟極樂無礙身.)
완성의 대덕이신 섭진도聶振弢교수 역시 경공을 위해 시를 지어 찬탄하셨습니다.
(주) 섭진도 교수 : 한국경기대학객좌교수、중국풍우란연구회상무이사、하남성공자학회부회장、중국음운학연구회이사、남양사범대학교수.
산 역시 높지 않고, 물 역시 깊지 않으나, 풀이 저절로 무성하고, 나무는 저절로 숲을 이루었네. (山亦不高, 水亦不深. 草自豐茂, 木自成林.)
래불선사에 훈풍 불고 단비 내리고, 해경법사 어린아이처럼 앉아 계시네. (來佛禪寺, 薰風甘霖. 海慶法師, 童稚坐臨.)
여든 두 살에 자재하게 숨소리 멈추고, 7년을 항아리에 앉아 계시니, 웃으시는 얼굴 마치 읊조리는 듯하네. (八十二歲, 自在息音. 坐缸七載, 笑面如吟.)
육신은 썩지 않아 이 세상에 계합하고 저 세상에 계합하며, 하늘은 높고 구름 한 점 없나니, 오직 우리 스승의 마음일세. (肉體不腐, 副陽副陰. 天高雲淡, 唯吾師心.)
9편♣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24-제16장.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자재하리라 -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9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24-제16장.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자재하리라 -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4
해경노화상 전신사리
제16장.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몸과 마음이 자재하리라 (知所在自然自在)
당수파黨秀坡
해경노화상께서는 한 평생 계율을 지키고 염불하여 마침내 육신보살이 되셨습니다. 승려를 위해 몸소 실천하여 모범을 보이셨고, 불법을 위해 몸소 실천하여 증명을 보이셨으며, 또한 수없이 많은 평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로 하여금 감화를 받게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알고 있는 경공의 몇 가지 사적을 글로 정리하여 많은 학인들의 요구에 부응하고자 합니다.
래불사의 사방 10리에 있는 여덟 촌락의 주민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해경노화상의 인품이 진실하고 후덕하고 곧고 바르며, 성품이 온화하고 선량하시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해경노화상께서는 말씀을 하실 때 더듬는 현상이 매우 심각하셨지만, 오직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부를 때만은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하고 또렷하게 발음하셨으며, 염불하는 소리는 마치 큰 종이 울리는 소리와 같으셨으며, 오로지 이 한 마디의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만을 아실뿐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사원의 생활여건이 넉넉하지 않았으며, 청빈함이 극도에 달하였었습니다. 경공은 겨울에는 솜옷 한 벌(이 솜옷은 현재 래불사 금강관金剛館 안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뿐이셨고, 여름에는 홑옷 한 벌 뿐이셨습니다. 이는 보통 사람들은 상상하기조차 어렵고 견뎌내기 힘든 일이지만, 그러나 경공은 하루 종일 늘 언제나 희희낙락하며 항상 웃으셨습니다.
경공은 언제나 늘 일할 공구를 들고 나가서 똥을 줍기도 하고, 땔나무를 줍기도 하고, 부서진 벽돌들을 주워 도로에 깔기도 하셨습니다.
사원으로 돌아오셨을 때, 밥이 이미 식어 차가워졌으면 조금 드셨고, 남아 있는 먹을 밥이 없으면 한 끼를 굶으면서도, 언제나 한 번도 불평하지 않으셨고 또한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당시에 사원에 욕하기를 좋아하는 군인출신의 화상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화상은 경공을 보기만 하면, 자신의 눈에 거슬려 시도 때도 없이 경공에게 상스러운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거사들은 경공에 대해 너무 심하게 욕설하는 것을 더 이상 참고 볼 수 없어, 어느 때에는 그 화상에게 대들어 따지기도 하였습니다. 그래도 경공은 그저 빙그레 웃으시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시길, “화상이 나를 위해 업장을 소멸시켜 주시니, 나는 극락세계에 갈 것입니다.”(你爲我消業障, 我上極樂國.)
사원에 공양으로 올린 과일이나 과자나 사탕들이 놓아둔 시간이 오래되어 맛이 변질되고 곰팡이가 피어오른 것들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좋은 것을 다 고른 후 남아 있는 좋지 않은 것을 경공에게 줄지라도, 경공은 조금도 화를 내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말하길, “이것은 먹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니, 소에게 먹이세요!”
그러면 경공이 말씀하시길, “소는 쟁기를 끌고 쇠스랑을 끌면서 마른 풀을 먹으며 매우 고생하면서 사는데, 소에게 이런 것을 먹게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응당 받아 누려서는 안 되는 것은 제가 죄업이 있는 것이니, 더 이상 소를 괴롭혀 해쳐서는 안 됩니다.”(老牛拉犁拉耙,吃乾草,活得夠苦了,不能讓它吃這東西,我不該受用是我有罪業,不能再去坑害牛.) 그래서 먹을 수 없게 된 것들은 전부 나무뿌리 옆에 파묻거나 농작물에 뿌렸습니다.
조서진曹書珍거사가 말하길, “노화상은 참으로 검소하고 알뜰하게 생활하십니다!”
그 말에 경공께서 말씀하시길, “불조께서 다 보고 계시며, 우리들 머리 위 석 자 되는 곳에는 바로 신령이 계십니다. 만물은 모두가 불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어떻게 받아 누려야 한다면 바로 그렇게 받아 누려야 합니다.”(佛祖看著哩, 頭上三尺有神明, 萬物都有佛性, 該咋受用咋受用)
한 번은 성이 도陶씨인 열여섯 살 된 소년이 자기 또래 친구를 몇 명 데리고 함께 사원에 와서 떠들며 놀았습니다. 그 소년들은 경공의 순진무구하신 모습을 보고는 못된 욕설을 마구 퍼부었으며, 또 작은 몽둥이로 경공의 삭발한 머리를 톡톡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경공께서는 머리를 갸우뚱하면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너는 나와 인연을 맺고 싶은 게냐? 원하면 내가 너를 내 제자로 삼아, 너에게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을 가르쳐주마. 좋은 공부를 하고 좋은 일을 하면, 어른이 된 후에 네 집안은 자자손손 부귀할 것이라고 네 부모님께 말씀드려라.”(你想和我結緣啊? 給你爹媽說說我收你當徒弟, 教你念阿彌陀佛, 上好學做好事, 長大你家輩輩有富貴.)고 하셨습니다.
1973년 음력 섣달 초에 날씨가 몹시 차갑고 추웠습니다. 장장촌張莊村에서 태어난 지 겨우 열 며칠 밖에 되지 않은 송아지가 깊이가 10미터 정도 되는 우물 속에 빠진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우물은 이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식수 우물이며,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물 벽은 불에 잘 견디는 내화耐火 벽돌로 쌓아 만들었고, 우물 입구 사방에는 네 개의 석조石條가 둘러져 있습니다. 우물 벽의 여러 곳은 세월이 오래 되어 이미 깎이고 부식되어 군데군데 구멍들이 생겼습니다.
송아지가 우물 안에서 발버둥치는 과정 속에서 벽돌이 계속해서 우물 바닥에 떨어져 대단히 위험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길, “송아지 한 마리를 구하자고 위험을 무릎 쓸 필요는 없소이다.” 그러나 만약 송아지를 건져내지 않는다면, 그 송아지가 우물 속에서 막고 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몇 백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먹는 이 물에 그야말로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에 부닥치게 될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로 얼굴들만 쳐다볼 뿐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송아지가 곧 숨이 끊어질 듯 하며 이제는 지쳐서 더 이상 발버둥조차 치지 못하게 된 모습을 자신들의 두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러나 어느 누구도 우물 속으로 내려가길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마침 경공이 이 길 앞을 지나가다가(당시에 경공은 때 마침 이 마을에서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시고는 다짜고짜 담력이 큰 젊은이 세 사람에게 밧줄을 끌어당기라고 시키고는 사닥다리를 내려뜨리고서, 자신이 직접 당장 우물 속으로 내려가셨습니다.
경공은 우물 속에서 간신히 힘들게 자신의 무명조끼를 벗어서 송아지 몸을 휘감았으며, 다시 밧줄로 동여 맨 후에 사람들에게 천천히 송아지를 끌어올리라고 하였습니다.
송아지를 어렵사리 구하고 나서 경공을 위로 끌어 올리려고 할 때, 때마침 공교롭게도 벽돌 하나가 바로 경공의 머리 위에 떨어지는 바람에 순식간에 경공의 얼굴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우물에서 나오신 후, 여러 사람들이 둘러서서 경공의 머리를 싸매어주었습니다.
그러자 경공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웃으며 말씀하시길, “내가 흘린 피는 불조께서 나에게 성불할 때 얼굴 위에 기호를 표시하라고 하신 것이지요.”(我流的血是佛祖叫我成佛時臉上做個記號)
옆에 있던 정鄭씨 성을 가진 중년 부인은 원래 불법을 믿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부인은 그때 자신도 모르게 말하길, “소식素食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정말 좋겠어요!” 나중에 그 부인은 불법을 공부하기 시작하였으며, 시부모님을 공경하고 효도하였으며, 늘 언제나 좋은 일을 행하였습니다.
경공은 바로 이처럼 진실하신 분입니다. 경공은 정규교육을 받지 않아 큰 도리를 강설하시지는 못하셨지만, 그러나 몇 십 년 동안의 수행 생활 속에서 그 분은 항상 이렇게 실제의 행동으로 불법을 설명하고 불법을 널리 드날리셨습니다.
1957년 8월, 며칠 동안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물을 퍼붓듯이 내린 장대비로 인해 장장張莊의 서쪽에 있는 작은 강물의 수위가 갑자기 불어나서 몇 백 년 된 돌다리가 강물에 쓸려 무너졌습니다. 당시에 여전히 생산대에 계시던 해경노화상과 마을 사람 몇 분이 함께 밧줄과 강철 끌을 가지고 가서 위험을 무릎 쓰고 대충 응급조치를 해놓았습니다. 그러나 몇 십 명의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있는 힘을 다해 오전 내내 구조작업을 하였지만, 돌다리를 완전히 복구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천근이 넘는 석조石條가 강물에 휩쓸려 교각橋脚에서 멀리 5미터나 떨어진 진흙 속에 곤두박질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만약 이 석조를 들어내어 옮기지 못한다면, 이 돌다리는 영원히 무너질 것이라 근심하였습니다.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실의에 빠져 낙담하고 있을 때, 해경노화상께서 천천히 더듬더듬 말씀하시길, “곧 점심때가 다가오니, 저에게 다시 한 번 해보게 해주십시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건널 다리가 없음으로 인해, 힘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는 단지 경공이 중얼중얼 혼자서 한참 동안 말하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사실 사람들은 해경노화상께서 “아미타불”을 부르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시절의 정책은 염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리를 내어 염불할 수가 없었습니다.) 노화상은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강철 끌 하나와 완구(碗口: 화포의 일종) 크기의 나무 막대 두 개를 가지고서, 놀랍게도 진흙 속에서 석조를 몇 차례 곤두박질을 하더니 어느 순간 교각 옆에 기대어 세워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 광경을 보고 모두 놀라 어리둥절하였습니다! 경공을 도와준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렇게 몸집이 왜소하고 연세가 60이 넘은 노화상이 도대체 어떻게 이 천근이 넘는 석조를 진흙 속에서 끌어올렸으며, 그 뿐만 아니라 멀리 5미터나 떨어진 곳에서 그것을 끌어내어 옮겨놓을 수 있었는지, 사람들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생산대 대장이었던 훈지발黨志發은 경공께서 진흙 속에서 석조를 꺼내어 옮길 때, 노화상의 이마에서 땀이 나고 빛이 나는 것을 보았지만, 그러나 몸에서는 오히려 땀이 나지 않았다고 말하였습니다.
후에 어떤 사람이 경공에게 여쭈었을 때, 웃으면서 대답하시길, “그것은 전부 아미타 부처님의 가피이시지요. 만약 그렇지 않다면, 제가 어떻게 그렇게 큰 힘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那全都是阿彌陀佛加持, 要不然我怎麼可能會有那麼大力氣呀!)
해경노화상은 생활이 극도로 곤고했던 자연재해가 발생했던 3년 동안, 항상 위험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고 곤궁에 빠진 사람을 구제하셨으며, 이뿐만 아니라 오가는 행인들을 위해 큰 길옆에서 죽과 차를 베푸셨습니다.
해경노화상은 자신은 먹고 마실 것이 모자라 항상 굶으시면서도, 오히려 남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그 지역의 연세가 많은 노인들은 다들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시절에 경공께서 밥을 먹을 때 사용했던 그릇은 띠로 엮어 짠 풀 주발(草碗)이었으며, 경공은 직접 황무지를 개간하여 손수 고구마와 수수를 심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은, 경공은 항상 자신이 직접 삶은 고구마와 야채를 넣어 끓인 수수죽을 띠로 엮어 만든 주발에 담아서, 길가는 사람들에게 먹도록 주신 일입니다.
래불사가 막 중건되었을 당시에는 겨우 동쪽 건물에 띠로 엮어 지은 세 칸짜리 작은 방, 작은 가마 솥 한 개만이 있었고, 모초茅草 뿌리를 지펴서 밥을 지었으며, 생활은 궁핍하고 어려워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기조차 힘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공은 언제나 물을 끓여 질항아리에 버드나무 잎을 넣어 길가는 행인들에게 마시도록 주는 것을 꾸준히 하셨습니다.
당동립黨同立 호법노거사는 여러 해가 지난 후, 경공에게 여쭙길, “고생스런 이러한 생활을 스님께서는 어떻게 참아내셨습니까?” 그 말에 경공께서 대답하시길, “모든 걸 다 아미타 부처님께 의지합니다!”(全都靠阿彌陀佛啊)
경공의 인품은 더없이 너그럽고 인정이 많으셨기 때문에,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경공을 대단히 존경하였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원에서는 그 영문을 모르겠는데, 오히려 언제나 늘 경공을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대략 1982년 즈음에 현공노화상은 자비하신 마음을 베풀어 경공에게 동백산에 가서 상주하도록 배려하셨으며, 1987년 2월까지 동백산에서 사시다가 다시 래불사로 돌아가셨습니다.
경공의 너그러우신 덕행과 선행은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어느 덧 이 지역의 사람들에게 깊이 영향을 주셨으며, 매달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모두들 경공께 가서 절을 하였습니다. 지금은 누구를 막론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모두가 육신보살께 가서 구할 생각을 합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주의 깊고 세심하신 당수파거사께서 저희들을 위해 경공노화상에 관한 이러한 귀중한 자료를 강술해주신 은혜에 감사드리며, 이 자리를 빌려 당거사의 무량한 공덕에 수희隨喜합니다!
말학은 또 많은 인자仁者들로부터, 경공노화상에 관해 대단히 중요한 작용을 일으켰던 작은 일 하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르신은 평소에는 늘 오직“아미타불”의 명호만을 부르셨지만,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어르신께 인사를 하면, 그 사람에게는 오히려 “관세음보살” 하고 화답하셨으며, 몇 십 년 동안 늘 언제나 이와 같이 하셨다고 합니다.
관세음보살상 앞에 대대로 전해 내려온 대련이 한 폭 걸려 있습니다.
자재하게 관하는 속에서 관자재보살을 보니, (自在觀, 觀自在)
존재하는 “나”도 없고, 존재하는 “사람”도 없는 경지에 이르렀을 때 (無我在,無人在)
묻겠노니, 이때에는 그대 자신은 어디에 있는가? (問此時自家安在?)
자신이 있는 곳을 알면 자연히 자재하다. (知所在自然自在)
(주)만약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 지를 알 수 있으면, 그대는 곧 자연으로 돌아가 심신이 자재하다.
여여하게 오시는 부처님, 부처님 여래께서 관세음보살에게 말씀하시길, (如來佛, 佛如來)
장차 올 것이 있고 아직 오지 않음이 있다고 하셨나니, (有將來, 有未來)
구경에 이 몸은 어떻게 얻어 온 것인가? (究這身如何得來)
이미 지나간 세월은 마치 여래를 본 것과 같이 분명하고 또렷하다. (已過來如見如來.)
24편♣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6 - 해회성현(내불사 이름의 유래)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7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6 - 해회성현(내불사 이름의 유래)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6
♣해회성현
고찰 내불사는 하남성 사기현 요량진의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수당隋唐 연간에 상책진羊冊鎭에 사는 곡물상 주인 왕王거사라는 사람이, 어느 날 소달구지를 몰고서 원담진源潭鎭에 곡물을 팔러 가는 도중에, 노인 세 분을 만나 그 노인들을 수레에 태우고 함께 갔습니다. 가다가 보니 깊은 밤이 되어, 길 옆에 소달구지를 세워놓고는 쉬었습니다.
그 다음 날 희미하게 동이 틀 무렵이 되었을 때, 뜻밖에도 이 세 분의 노인이 이미 세 분의 돌부처로 변해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믿는 사람들이 즉시 그 자리에 도량을 세운 후, 이름을 “내불사來佛寺”라고 지었으며, 바로 “불타의 화신이 이곳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주) 진 鎭 : 중국 縣 아래의 행정구획 단위
여러 차례 상전벽해桑田碧海의 변천을 거치고, 또 여러 차례 강산의 주인이 바뀜으로 인해, 그 당시에 그렇게 위풍당당하던 전각은 지금은 모두 태허太虛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공문空門은 영락하였지만, 다행히 기쁘게도 정법正法은 오히려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옛날 말에 “산은 높은 곳에 있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명성이 있게 되고, 물은 깊은 곳에 있지 않아도 용이 살면 신령스런 기운이 있게 된다.”(山不在高, 有仙則名; 水不在深, 有龍則靈.)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시골 들판 황량한 이 암자에서, 오히려 생각지도 못하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신통력을 지니신 두 분의 승려, 바로 육신보살肉身菩薩이신 해경海慶법사와 112세에 자재하게 왕생하신 해현海賢노화상을 성취하였습니다.
(주) 공문 : 불교를 말함
♣ 부록: 육신보살 해경법사의 간략한 전기
해경화상
스승의 속성은 이李씨이고, 이름은 부귀富貴이십니다. 스승의 선조는 예동(豫東: 하남성 동부)의 남쪽 필양현泌陽縣에 사셨습니다.
청나라 말기 선통 원년(1909년)에 태어나셨으며, 집안이 빈천하여, 글자를 익히거나 《주역》, 《서경》, 《시경》, 《춘추》, 예禮, 악樂 등 시서육예詩書六藝를 배운 적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후덕하여, 태어나면서부터 어질고 효성스럽고 예의를 알았습니다.
11살 때에 삼보에 귀의하여, 완동宛東 나한산羅漢山 청량사清涼寺 전동傳東법사에게 예를 올리니, 전동법사가 그를 위해 머리를 깎아주고 승려가 되게 하였으며, “해경海慶”이라는 법명을 지어주셨습니다.
스승은 42세 때에 래불사에 들어가 상주常住하셨습니다. 오로지 정토법문만을 닦으셨으며, 성실하게 염불하셨습니다. 1989년에는 백마사에 가서 구족계를 증수增受하셨습니다.
1991년 음력 12월 11일에 스승은 담소하시면서 원적하셨으며, 서방 극락세계에 자재하게 왕생하셨습니다. 세수는 82세이고, 승랍은 71세이셨습니다.
스승이 수항壽缸에 앉아 계신 지 6년 9개월이 지난 후, 그의 사형인 해현노화상은 스승을 위해 다비를 하여 탑에 봉안하고자 발심하였습니다.
스승이 앉아 계시던 항아리를 열자, 대중들은 모두 다 놀라며 찬탄하였습니다! 오로지 경공께서 가부좌를 한 채 똑바로 앉아 계시는 모습만을 보았을 뿐이며, 얼굴과 모습은 마치 살아 계신 것 같았습니다. 게다가 입고 계셨던 옷가지 역시 전혀 손상된 곳이 없었습니다. 사부대중이 금강법체金剛法體이며 전신사리全身舍利인 것을 알고서, 곧 스승의 법체를 모셔다 절 안에서 공양하고, 조석으로 예배하였습니다. 2005년에는 광주廣州 지역의 대덕인 이원첨李元添거사가, 경공의 성스러운 사적을 듣고서 크게 기뻐하고 더욱 더 공경하고 앙모하여, 이에 스승을 위해 금박을 입혀서 공양할 것을 발심하였습니다.
(주) 금강법체 : 승려의 몸에 대한 경칭敬稱
경공의 생평을 처음 접하고서 읽을 때, 지극히 평범하다고 느낄 것 같습니다. 한 마디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 이외에, 이야기할 만한 특별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자세히 음미하면, “한 법문에만 깊이 들어가, 오랜 시간 동안 몸에 배이도록 닦으셨으니”(一門深入, 長時薰修), 이것이 어찌 스승께서 암암리에 도道의 미묘한 곳에 계합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으로 분명하게 깨달아야 “대도는 지극히 간단하며, 중생과 부처가 둘이 아니며”(大道至簡, 生佛不二), “염불이 인이고, 성불이 과이다.”(念佛是因, 成佛是果)라는 것을 비로소 믿을 수 있습니다. 오직 이러할 뿐입니다.
지금 정토법문을 공부하는 어떤 한 학인(淨業學人)이, 스승을 위해 찬탄하며 지은 게송이 있습니다.
한 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는 법 중의 왕이나니, 70년 동안 마음속에 간직하셨네. (一句彌陀法中王, 七十年來心中藏)
선종의 이치를 참구하지도 않고 교하의 이론을 연구하지도 않았으며, 경문과 주문을 알지 못하였다고 해서, 또한 무슨 상관이 있으랴! (不參禪理不研教, 不解經咒又何妨!)
믿음이 깊고 원이 간절하여 끊임없이 계속해서 염불하니, 극락국토에 자연히 꽃이 폈도다. (信深願切直念去, 自然花開極樂邦.)
이곳에 금강의 무너지지 않은 법체 남기시고, 증명의 법륜을 굴리어 미혹한 중생 제도하시네. (留此金剛不壞體, 證轉法輪度迷茫.)
부처님 머리 낮게 늘어뜨린 곳 자세히 관찰하니, 마치 육조대사가 자비의 배를 타신 것과 같네. (細觀佛首低垂處, 恰似六祖駕慈航)
(주) 부처님 : 해경화상을 가리킴.
지금 연화대 아래에서, 스승께 저희를 인도하여 미몽의 땅에서 벗어나도록 구해주시기를 지성으로 기도하네. (今虔祈禱蓮台下, 求師引我出夢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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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23일, 음력 임신년 12월 오전, 사람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보잘 것 없는 시골마을의 이 작은 절 래불사 앞에, 산개傘蓋가 빽빽하게 늘어섰고, 당번幢幡이 하늘 높이 솟았으며, 남양과 전국 각지의 3천 명이 넘는 정종학인들이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 모였으며, 모두가 더없는 지극한 공경의 마음을 품고서 해현노화상의 사리탑봉안법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주) 남양 : 하남성 남서부에 있는 도시
112세의 해현노화상은 2013년 1월 17일, 음력 임신년 12월 6일 새벽에, 아무런 고통 없이 편안하게 적멸을 보이셨습니다(示寂). 노화상의 초탈하고 자재하신 왕생은, 이를 보고 들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지없이 찬탄하고 앙모하게 하였습니다.
(주) 示寂 : 바로 원적圓寂이며, “세상을 떠났다”는 뜻이다. “시적示寂”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바로 장로長老는 이 세상에 다시 오신 보살이며, 우리의 이 세간에서 시현示現하시고, “원적圓寂”을 나타내 보여주시기 때문이다.
해현노화상의 제자이신 인지印志법사, 인함印涵법사, 인공印空법사, 인영印榮법사, 인보印寶법사 등은, 노화상의 왕생소식을 듣고 급히 서둘러서 달려온 사부대중 제자들을 이끌고서, 노화상을 위해 7일 동안 영전을 지켰으며, 염불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노화상이 원적하신 후 3일째 되는 날,
급히 막 도착한 한 제자가 왕생피往生被를 걷어 올리고서 노화상의 얼굴을 우러러보다가, 놀랍게도“노화상께서 얼굴은 미소를 띠고 계시고, 입술은 발그스름하고, 희었던 눈썹과 수염과 머리카락은 뜻밖에도 검어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다.그 자리에 함께 있던 수십 명의 정종학인들은 또 다시 한번 “아미타불”의 원력이 불가사의함을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전통적인 불교의 장례의식에 따라, 사부대중 제자들이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를 부르는 장엄한 소리 속에서 해현노화상의 법체法體는 항아리 속에서 가부좌를 한 채 래불사의 탑원塔院에 봉안되셨습니다.
지금 이 시대의 정종의 도사導師이시고 덕망이 높으신 정공淨空노법사는, 해현노화상께서 자재하게 왕생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신 후, 크게 찬탄하시면서 정종의 사부대중 제자들에게 “해현노화상을 배울 것”을 호소하셨으며, 또한 노화상을 위해 친히 만련挽聯과 비명碑銘을 쓰셨습니다.
(주) 만련 : 돌아가신 분을 애도하기 위해 쓴 대련
6편 ♣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0 - 제2장. 해경노화상: 단전에 보물 있으니, 도를 찾지 말라--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15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0 - 제2장. 해경노화상: 단전에 보물 있으니, 도를 찾지 말라--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0
해경 노화상
제2장. 해경노화상: 단전에 보물 있으니, 도를 찾지 말라 (丹田有寶休尋道)
저는 개인적으로 경공과 관계있는 불가사의한 일을 하나 간직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인연의 기회를 빌려 이야기하여, 대중에게 공양합니다.
2009년 초봄에 저의 부친께서 한 차례 큰 병을 앓으셨습니다. 복부가 팽창하고 통증이 있으신 증상이 여러 달 계속되었지만, 병은 전혀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러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별의별 약을 다 써 보았지만, 전혀 아무런 효과가 없었습니다. 병원에서는 검사를 한 후, 간 부위에 음영陰影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간종양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몹시 괴로워, 매일 저녁마다 몰래 향으로 연비燃臂하고, 《지장경》을 독송하여 부친께 회향하였습니다.
인지법사의 속가는 바로 제 외갓집의 사촌형제이며, 우리의 관계는 더없이 가깝습니다. 그래서 저는 인지법사에게 전화를 걸어 《지장경》을 들을 수 있는 mp3(播經機)가 있는지를 여쭈었더니, 인지법사는 하나 있다고 말씀하면서 저에게 와서 가지고 가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절에 mp3를 가지러 갔을 때, 인지법사는 저에게 경공을 위해 소전小傳을 한 편 써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때 마침 절에 온 손님(제가 기억하기로는 사기현에 사는 성이 이씨인 거사였습니다.) 한 분이 계셨기 때문에, 제가 떠나올 때 인지법사는 저를 배웅해주지 못하셨습니다.
주: 소전小傳 :간략하게 줄여서 쓴 전기 傳記
제가 절을 나와 막 산문을 걸어 나오려고 할 때, 한 노인이 문루門樓아래에 놓여 있는 나무 걸상에 앉으셔서, 누군가에게 약 처방을 해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노인께서는 약 처방을 써주면서,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이 의료를 행한 지 이미 6,70년이 되었으며, 윗대의 여러 조상님들께서 모두 의사이셨네. 그런데도 자네는 아직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자네는 그에게 이 약 처방대로 세 첩만 먹이면, 틀림없이 아무 일도 없을 것이네.”라고 하셨습니다.
그 노인께서 이처럼 자신 있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서, 저는 그 순간 마음이 동하여 부친의 병 증세를 그 노인에게 자세하게 설명해드렸더니, 그 노인은 전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셨습니다.
“그 병은 별 것 아닐세. 내가 약 처방을 하나 써 줄 것이니, 단지 다섯 가지 맛의 약초만이 있을 뿐이네. 약값은 몇 원 되지 않을 것일세. 자네는 가서 부친께 이 다섯 첩의 한약을 달여서 그것을 다 드시게 하면, 병세는 호전될 것이야.”
저는 노인께서 적어주신 약 처방을 가지고 서둘러 약방에 가서 약을 지었으며, 한 첩에 겨우 5원(인민폐)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그 약을 달여서 부친께 드시게 하였더니, 노인의 말씀대로 정말로 병의 증세가 가벼워졌습니다. 그 후 제 누이가 부친을 모시고 남양에 가서 다시 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누이가 의사의 말을 믿지 못하고서, 병원에 입원하게 하고서 병세를 살펴보려 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바람에, 그 의사를 또 다시 한바탕 웃게 만들었습니다. 누이의 말에 그 의사는 “멀쩡하게 건강하신 분을 무엇을 자세히 검사해보라고 하십니까?”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육신보살해경법사약전肉身菩薩海慶法師略傳》을 완성하여 인지법사에게 보낼 때,
저는 그 김에 저에게 약 처방을 써 주신 그 노인에게 대해 여쭈었더니, 인지법사께서 말씀하시길, “이 근처에는 그런 분이 분명히 없는데, 아마도 자네의 효심과 경공을 위해 전기를 쓴 공덕이 감응하여 보살님께서 오셔서 도와주셨다 보네.”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애석하게도 그 약 처방은 제가 부주의한 탓에 잃어버렸지만, 그러나 말학은 지금 이 글을 통해 이 일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드리며, 이것 자체가 매우 얻기 어려운 약 처방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면 할 수 없겠습니까?
― 여순양呂純陽 진인眞人의 시에 보면 이러한 문구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조용하고 한적하니 자재한 신선이며, 여섯 장기가 화합하니 몸이 편안하네. (一日清閒自在仙, 六神和合報平安.)
단전에 보물 있으니 도를 찾지 말며, 경계를 대하여도 무심하니 선을 묻지 말라. (丹田有寶休尋道, 對境無心莫問禪.)
주 :六神: 여섯 장기로, 염통·허파·간장·콩팥·지라·쓸개를 가리킨다.
10편♣
♣각정정보살님께서 몇 년간의 각고의 노력으로 번역불사하시고, 아무 댓가없이 법보시해주신 공덕 수희찬탄합니다. 이 공덕으로 극락왕생하시고 무상보리 이루소서!
우리도 세 분 성현의 아름다운 수행공덕 따라서 기뻐한 공덕과, 각정정보살님의 법보시공덕을 수희한 공덕으로, 여법하게 수행하여 모든 중생과 함께 극락왕생하고 무상보리 이루길 서원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
돌아오는 길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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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13-제5장.해현노화상: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잘못을 범함이 없으셨네-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 |https://cafe.daum.net/bangseng/RgWK/18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13-제5장.해현노화상: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잘못을 범함이 없으셨네-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 |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3
제5장. 해현노화상: 입을 지키고 뜻을 거두어들이고, 몸으로 잘못을 범함이 없으셨네 (守口攝意, 身莫犯)
2008년 겨울, 저는 학우學友 두 사람을 데리고 천불사에 현공노화상을 찾아뵈러 갔었습니다.
당시에 노화상께서는 한창 앞마당에서 대단히 큰 나무뿌리를 파내고 계셨으며, 깊은 큰 구덩이의 흙을 파내시느라 몸과 얼굴이 온통 진흙으로 뒤범벅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인함법사가 말씀드리길, “스승님, 이제 그만 더 이상 파내지 마십시오. 이렇게 큰 나무뿌리를 언제까지 파시렵니까? 저쪽에다 던져 놓아 나무뿌리가 저절로 다 썩도록 기다리는 게 좋겠습니다.”
그래도 노화상께서는 여전히 흙을 파시며 말씀하시길, “무슨 일을 하거나, 힘든 것을 두려워하지 말거라. 내가 이 나무뿌리를 쉬지 않고 파다보면, 언젠가는 다 파낼 수 있을게야. 나무뿌리를 다 파내면 그것으로 불을 지펴 밥을 지을 수도 있고, 또 파낸 그 구덩이에 땅을 일구어 채소를 심을 수도 있을게다. 자네는 이곳에 내버려 나무뿌리가 저절로 썩기를, 언제까지 기다리려 하는가?”
인함법사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저에게 말씀하시길, “본래 생각은 노화상님을 이곳에 모시고 와서, 며칠 동안이라도 여유롭고 한적한 생활을 보내시게 하려고 하였던 것인데,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르신을 내 대신 일하시게 만든 꼴이 되었어. 하루 종일 저녁까지 가만히 편안하게 계시지를 않아. 아무리 노화상께 권해도 도무지 아랑곳 하지 않으시네. 난 정말로 이제 더 이상 노화상님에 대해 아무런 방법이 없네!”
인함법사는 그렇게 말씀하시면서 몸을 돌려 뒷마당으로 가셨으며, 노화상께서는 고개를 돌려 인함법사의 뒷모습을 쳐다보면서 마치 어린아이처럼 헤헤 하고 웃으셨습니다.
우리 세 사람이 노화상이 계신 곳으로 가서 정례를 하자, 노화상께서 연거푸 절하지 못하게 하면서 말씀하시길, “절하지 말거라! 절하지 말거라! 땅바닥이 아주 지저분해.”
저와 함께 간 두 학우는 이전에 천불사에서 노화상과 조석으로 3개월 동안이나 함께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노화상은 그들이 온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시고는, 하시던 일을 그만두고 저희들과 이야기를 나누셨습니다.
어르신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길, “자네 마을 사람들은 선근이 깊어 불법을 배우는 사람이 많아.” 제가 대답하길, “맞아요. 저희 마을 사람들은 거의가 다 집집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노화상께서 저에게 물으시길, “자네 마을에 오래 전에 어떤 노화상 한 분이 사신 적이 있었는데, 혹 기억하는가?” 제가 대답하길, “그때에 제가 너무 어리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 노화상님은 인상이 매우 남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그 법사님을 저희 할머니께서 보살피셨기 때문입니다. 그 법사님은 나중에 백마사로 가셨습니다.”
노화상께서 말씀하시길, “그때 내가 그 법사님에게 래불사로 갈 것을 청하였는데, 가시기를 원치 않으셨어. 지금까지도 여전히 살아 계신지를 모르겠네.” 제가 대답하길, “이미 세상을 떠나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자 노화상께서 물으시길, “어느 때 세상을 떠나신 것인가?” 제가 대답하길, “오래 전에 벌써 세상을 떠나셨으며, 그것은 이미 지난 세기의 일입니다.” 그 말을 하면서 저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그 법사님께서 만약 지금 이 세상에 살아계신다면, 역시 당연히 연세가 백 살은 넘으셨을 것입니다. 어르신께서는 어느 누구나 모두가 어르신처럼 이렇게 장수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노화상은 저를 쳐다보면서 제가 웃는 이유를 알지 못해 물으시길, “어째서 웃느냐?” 제가 대답하길, “어르신께서는 서태후가 아직도 이 세상에 살아계신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노화상은 제 말에 크게 웃으시고는 말씀하시길, “난 아직 그렇게까지 멍청하지는 않아. ― 허참! 난 업장이 무거워서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어. 지난날 함께 불법을 닦았던 사람들이 하나하나 모두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을 내 눈으로 직접 보면서, 이미 늙은 요괴가 다 되었지.” 노화상의 말씀을 듣고서 우리들은 모두 “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었습니다.
저는 손을 쭉 뻗어 노화상께서 나무뿌리를 파낸 웅덩이 속에서 나오시도록 잡아드리며 말씀드리길, “어르신께서는 잠시 쉬셨다가, 저희들에게 또 이야기를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노화상은 옆에 있는 나무토막 위에 앉으시며, 다른 몇 개의 나무토막을 가리키면서 저희들을 부르며 역시 앉을 것을 권하셨습니다. 저는 노화상 옆에 앉았으며, 두 학우는 앉고 싶지 않다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노화상은 두 학우에게 말씀하시길, “이 나무토막 위에 앉고 싶지 않으면, 방안에 의자가 있네.” 제가 말하길, “어르신은 저들에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들은 앉을 수가 없답니다.”
제 말에 노화상께서는 “하하” 하고 웃으시며 말씀하시길, “내가 자네들에게 불교 경전에 있는 공안을 하나 들려주겠는데, 정말로 들어 볼만한 이야기이지!”(이하는 현공께서 강설해주신 말씀에 근거하여, 대강 정리한 내용입니다.)
어떤 한 아라한이 있었지.
그는 밖으로 탁발하러 나갔다가, 길에서 우연히 아름다운 여자 귀신을 만났어. 그 여자 귀신은 그 아라한에게 자신이 공양을 하고 싶다고 말하면서, 그 즉시 그 아라한을 청해 자기 집으로 갔다네. 그 아라한이 둘러보니, 이 여자 귀신의 집안에 있는 진주와 보석이 휘황하게 빛나는 것이 대단히 기품이 있었지. 그 여자 귀신은 그 아라한에게 공양할 음식을 탁자 위에 차려놓고서 그 아라한에게 먹을 것을 청하였네.
그 아라한이 음식을 먹으려고 고개를 숙였는데, 그때 굶주려 피골이 상접한 네 명의 아귀가 탁자의 네 다리에 꽁꽁 묶여 있는 것을 보고는 매우 신기하여 호기심을 느꼈네. 그러자 그 여자 귀신이 말하길, “존자께서는 잠깐만 기다려주십시오. 제자가 중요한 일이 있어, 우선 잠시 밖에 나갔다가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청컨대 존자께서는 자비를 베풀어, 저들 네 아귀에게 먹을 것을 절대로 주지 마십시오.”
그 여자 귀신이 밖으로 나가자, 그 아라한은 음식을 먹으면서 도대체 왜 저들 네 아귀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말라고 하였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 답답하였네. 네 아귀는 음식을 주기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그곳에서 그 아라한이 먹는 모습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뿐, 감히 달라는 소리를 내지 못하였다네.
그 아라한은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사실은 더 이상 견딜 수 없어서 먹을 것을 조금 나누어 이들 네 아귀에게 주었지. 그런데 전혀 생각하지도 못하였는데, 뜻밖에도 그가 준 음식이 그 네 아귀의 입으로 들어가자, 그 순간 그 아귀들이 몹시 고통스러워하면서 미친 듯이 소리치기 시작하였네.
왜냐하면 한 아귀가 먹은 음식은 그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 즉시 그 아귀의 살로 변하였고,
한 아귀가 먹은 음식은 그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 즉시 쇠 덩어리로 변하였고,
한 아귀가 먹은 음식은 그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 즉시 똥으로 변하였고,
한 아귀가 먹은 음식은 그의 입에 들어가자마자 그 즉시 피고름으로 변하였기 때문이었네.
그 아라한은 이러한 장면을 보고는 몹시 놀라하였지!
그 아름다운 여자 귀신은 급히 서둘러 밖에서 집안으로 뛰어 들어와서는, 매우 고통스러워하며 그 아라한에게 말하길, “제가 나갈 때 존자님께 절대로 저들에게 음식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거늘, 어째서 제 말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어찌 존자님이 저보다 저들을 사랑하시겠습니까? 저들은 저의 전생의 남편이요, 아들이요, 며느리요, 하녀입니다!”
그 아라한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를 알지 못해 묻기를,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여자 귀신이 대답하길, “제가 전생에 한 아라한에게 공양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제 남편에게 말을 해주어, 남편이 제가 지은 공덕을 함께 기뻐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제 남편은 제 말을 들은 후 도리어 헐뜯으며 말하길, ‘그 아라한은 어째서 자신들의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어찌 자신의 살을 먹지 않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남편의 말을 듣고 매우 상심하여, 당장 이 일을 제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들 또한 헐뜯으며 말하길, ‘그 아라한은 어째서 쇠 덩어리를 먹지 않는 것입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더욱 더 상심하였습니다. 때마침 그날 친척이 저에게 보낸 음식이 있었는데, 제 며느리가 그 음식을 몰래 훔쳐 먹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며느리에게 음식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며느리가 그 음식을 자신이 먹은 것은 인정하지 않고서, 도리어 저에게 말하길, ‘어머니의 음식을 먹는 것은 똥을 먹는 것만 못합니다.’고 하였습니다.
제가 답례로 친척에게 보낸 음식을, 제 하녀가 갖다 주러 가는 길에서 몰래 훔쳐 먹었기에, 제가 하녀를 나무라니, 하녀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서 도리어 말하길, ‘마님의 음식을 먹는 것은 피고름을 먹는 것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속으로 저들 네 사람에 대해 '몹시 화나고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났기 때문에, 반원反願을 일으켜 제가 내생에 '저들 네 사람이 죄악의 과보를 받는 것을 볼 수 있는 곳'에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그래서 금생에 저는 '대력귀왕大力鬼王'이 되었답니다. 만약 이러한 '나쁜 원'이 아니고, 단지 제가 아라한에게 공양한 공덕에만 의지하였다면, 저는 금생에 틀림없이 도리천에 태어나 천상의 복을 누렸을 것입니다.”
노화상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후에, “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저에게 “재미있었는가?”하고 물으셨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놀라서 몸의 솜털이 다 일어났습니다.
저는 원래 노화상께서는 단지 노동과 염불만을 아실뿐, 심오한 불법의 이치는 틀림없이 모르실 것이라 생각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이 이야기를 들려주심을 통해, 순간 한 방에 그 즉시 저로 하여금 노화상님을 완전히 철저하게 믿고 따르게 만들었으며, 또 저는 마음속으로 이 어르신은 절대로 아무 것도 모르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노화상은 제가 멍하니 있는 것을 보시고는, 곧 이어서 말씀하시길,
“이 이야기는 바로 사람들에게 '말'을 할 때, '말을 날카롭게 하여'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함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言鑱口滿)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지나치게 많은 밥은 먹을 수 있어도, 분수에 넘은 과장된 말은 해서는 안 된다.’(能吃過天食, 不說過天話) 말을 할 때 '함부로 말'을 하면, 남의 원한을 초래하고,남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있어.
또한 '나쁜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며, 나쁜 생각이 있으면 손해를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이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말학은 송구합니다. 벌써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노화상께서 들려주신 이야기 가운데 세세한 내용은 아마도 조금 정확하지 않은 점이 있을 것입니다. 말학은 확실히 덕이 적고 재주가 모자라서, 이 공안의 출처가 어느 경전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본래 출처를 찾아서 참고하고 대조해보려고 몇 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오히려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하였습니다. 시방세계의 어진 이들께서 너그럽게 봐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고덕이 말씀하시길, “출처에서 진실한 자취를 구할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진실하고 선량한 것을 좋아하는 것으로 화두로 삼아라.”(不須出處求眞跡, 卻喜忠良作話頭.)고 하셨습니다. 말학이 현공께서 들려주신 이야기를 다시 서술하는 중에, 혹 세심하고 치밀하지 못한 점이 있을지 모르나, 그러나 이 이야기 속에 내포되어 있는 이치는 오히려 차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정공노법사께서 저희들에게 “좋은 마음을 지니고, 좋은 말을 하고, 좋은 일을 행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存好心, 說好話, 行好事, 做好人.)고 가르치셨습니다. 정공노법사의 가르침과 현공의 가르침이, 어찌 부처님들마다 도가 같은(佛佛道同) 것이 아니겠습니까?
“언참구만言鑱口滿”이란 이 말은 단지 우리 남양지역의 방언에 있는 속어에 불과하며, 대체로 노인들이 즐겨 쓰는 말입니다. “언참言鑱”은 말이 '날카롭고 각박한 것'을 가리키며, “구만口滿”은 도리에 맞지 않게 말을 '함부로 지껄이는 것'을 가리킵니다.
“능흘과천식能吃過天食, 불설과천화不說過天話” 역시 순수한 남양지역의 속어로, 역시 사람들에게 '너무 무례하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말입니다.
이는 진실로 옛 현인의 시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과 부합됩니다.
입을 다물고 있는 동으로 된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 몸을 조심하고 삼가며 두려워하라. (緘口金人訓, 兢兢恐懼身.)
말을 할 때 '칼처럼 날카로우면', 원한이 쌓여 귀신도 성을 내느니라. (出言刀劍利, 積怨鬼神嗔.)
입을 닫고 침묵하면 응당 복이 많아지나, 과장해서 말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음이니라. (緘默應多福, 吹噓總是蠢.)
《경행록》에서 말하길, “'입과 배를 절제하지 못함'이 질병을 초래하는 원인이고, '생각이 바르지 않음'이 몸을 죽이는 근본이다.”(口腹不節, 致疾之因. 念慮不正, 殺身之本.)고 하였습니다.
'나쁜 말(惡口)로 인해' 초래한 네 명의 악귀의 과보는 참으로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할 만한 일이지만,
그러나 아라한에게 공양한 여인 역시 결국에는 '일시적인 감정으로 인해' 이러한 '황당한 반원反願'을 일으켰으니, 역시 너무나 어리석음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생각이 움직인 곳'을 사람들이 어찌 더욱 더 무서워할만하다고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반드시 즉시 자신을 돌이켜 살펴보아야 합니다.
“'망념이 일어나는 것'은 두렵지 않지만,
단지 '알아차리는 것이 늦음'을 두려워할 뿐입니다.”(不怕念起, 只怕覺遲) '나쁜 생각'이 움직일 때, 그 즉시 바로 그 생각을 알아차려야 하며, 그 다음 생각이 바로 “아미타불”이어야 하며,
“모두 육근을 거두어들여”(都攝六根) “청정한 생각이 서로 이어지도록”(淨念相繼) 하고, 훈습薰習하여 수행한 시간이 오래되면, 나쁜 생각이 저절로 숨을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마음을 조절하고 행동을 제어하여 다스릴”(調心禦行) 수 있어야, 진정한 대장부입니다.
각명묘행보살게覺明妙行菩薩偈에서 말하길,
'한 구절의 말'을 적게 하고, '한 마디 부처님 명호'를 많이 부를지니, (少說一句話, 多念一句佛,)
좌선하여 '망상의 생각'을 그치게 하였다면, 그대의 '법신'이 살아있음을 인가하리라. (打得念頭死, 許汝法身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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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공은 이전에 어르신께서 어렸을 때 “동과冬瓜를 심었던” 일화를 들려주신 적이 있습니다.
현공은 자신이 심은 동과를 사촌남동생이 몰래 따서 훔쳐 갔기 때문에, 3일 동안 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리길, “내 동과를 훔쳐간 사람은 누구든지 부스럼 병에 걸리게 하라.”
그런데 뜻밖에도 현공의 말대로, 결국 사촌남동생이 정말로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를 숙모가 아신 후에 현공에게 말씀하시길, “너는 이제 그만하고 다시는 중얼거리지 말거라. 네 동생이 네 동과를 하나 땄다고 해서, 동생의 온몸에 부스럼이 나라고 주문을 외우는데, 너 같은 어린아이 마음이 어떻게 이렇게 독할 수 있느냐?”
그 당시에 현공은 '마음속으로 남을 생각하고 있는 그 생각'이, 정말로 이처럼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단히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 즉시 당장 말을 바꾸어 중얼거리길, “빨리 그의 부스럼 병을 낫게 하라! 빨리 그의 부스럼 병을 낫게 하라.”고 하였는데, 사촌남동생의 병이 정말로 금방 완쾌되었습니다.
현공은 그때 이후로, 다시는 감히 '남을 원망하지 않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송나라 때의 대현大賢이신 소강절선생께서 지으신 시를, 말학은 대단히 좋아하여 늘 독송합니다. 그 성인의 흉금은 사람들을 감동시켜 눈물을 흘리게 하며, 또한 바르고 크고 강직하신 그 기상은 사람들의 심혼心魂을 뒤흔듭니다.
지금 여기에 소강절선생의 시를 서술하여, 많은 이들과 함께 힘쓰고자 합니다. 동인同仁들이 이 시를 마음속 깊이 새겨, 자신의 힘이 닿는 곳에서는 항상 방편方便을 행하고, 자신의 힘이 모자라는 곳에서는 항상 좋은 마음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매일 이른 아침 향 하나 피워놓고, 하늘에 감사하고 땅에 감사하고 국왕에게 감사하네. (每日清晨一炷香, 謝天謝地謝君王.)
단지 곳곳마다 논의 벼가 잘 익기를 구할 뿐이며, 오직 사람들이 다 수명이 길기를 원할 뿐이라네. (但求處處田禾熟, 惟願人人壽命長.)
나라에는 사직을 안정시키는 어진 신하가 있고, 집에는 부모를 괴롭히는 불효하는 자식이 없으며, (國有賢臣安社稷, 家無逆子惱爺娘.)
천하가 평온하고 전쟁이 그친다면, 내가 혹 가난할지라도 또한 괜찮네. (四方寧靜干戈息, 我若貧時也不妨.)
13편♣
해현화상 불문모범(賢公和尚 佛門榜樣) 3 :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p/4
해현화상 불문모범(賢公和尚 佛門榜樣) 3 :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출가전 :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해현스님의 속성은 문씨이고 이름은 천현(川賢)이며 자(字)는 청선(淸選)입니다. 고향은 예남 당하현 소배사진으로, 청나라 말기인 1900년 8월 19일에 태어나셨습니다.
부모님과 조부 모두 신심이 돈독한 불자로, 농사를 지으며, 남에게 베풀기 좋아하셨습니다.
세간에 흔히 하는 말로 ‘태평시대의 개로 태어날지언정, 난세에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해현스님에게는 형제자매가 5명이 있었는데, 부모님께서는 힘들게 자식을 기르셨는데 그 어려움은 차마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스님이 10살이 되었을 때, 고향에 가뭄이 들어 생활이 어려워서 아버지는 식량을 구하고자 집을 떠났습니다. 호북성 수주지역에서 마을이 도덕 떼에 의해서 불타는 것을 보고 물을 길어 불을 끄다가, 살피러 되돌아온 도적들에게 맞아 죽었습니다.
해현스님: ‘부친은 식량을 구하러 가셨다가, 도적한테 맞아서 돌아가셨어’
나중에 마을로 돌아온 촌민이, 동네를 도우려던 은인의 시신을 굶주린 개들이 지키고 있던 것을 보고서,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개조차도 은인의 고마움을 알고서 보답하는데, 하물며 인간으로서..! 촌민들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서 스님의 모친이 시신을 고향으로 모시고 가도록 하였고, 마을 어르신의 예로써 안장했다고 합니다.
스님은 어린 시절 자신 주변에서 벌어진 가슴 떨리는 몇 가지 사건으로 놀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염불하여 극락왕생하고자 하는 굳은 마음을 갖도록 하는데 있어서 큰 작용을 하게 되었다고 하십니다.
그 당시 고향 친척 가운데, 가족이나 이웃들과 수시로 욕하고 싸우는 성격이 아주 못된 아줌마가 있었습니다. 어느 한번은 친척과 싸우고 욕하면서 옷까지도 찢어버리기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그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과응보의 결과가 연달아서 발생하였는데,
아줌마가 낳은 아들4명이 전후로 해서 다 요절하게 되었습니다.
아줌마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혀를 자주 깨물어 피가 나게 되었는데 나중에는 결국 혀가 끊어져서 밥을 먹기 힘들어지고,
결국 32살에 딸을 낳고 몸조리를 하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사람이 착하고 아량이 있어야지, 절대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시던 모친의 말씀이, 어린 스님의 머릿속에 깊게 각인되었다고 합니다.
마당에 심은 동과(冬瓜)를 사촌동생이 훔쳐갔는데, 어린 마음에 내 동과를 누가 훔쳤는지 종기가 나고 아프라고 입으로 계속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생각지도 않게 3일후, 사촌동생이 정말 병이 나서 자리에 드러눕게 되었고, 숙모가 찾아와서 사촌동생이 동과를 땄다고 네가 그렇게 저주를 해대니까, 온몸에 종기가 나서 아파죽겠다고 난리라면서 제발 그만 하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얼른 났게 해주세요. 얼른 났게 해주세요라고 염송하였고, 사촌동생이 정말 곧바로 나았다고 합니다.
"아~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도 큰 위력이 있고 이렇게 크게 작용을 하는 것이구나" 하고 깨닫고 나서, 다시는 남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생에 대해 깊은 생각을 갖고 있던 스님은, 이 일로 인해서 훗날 염불수행법문에 대한 신념에 흔들림이 없었고, 결국에는 극락왕생의 정과(正果)를 성취하시는데 있어서 견실한 기초를 쌓게 되신 것입니다.
스님이 18살 때, 다리에 악성종기가 나서 짓무르고 헐게 되자, 모친은 사방으로 약을 구하고 의사를 찾아다녔지만 전혀 났지 않았습니다. 스님은 인과에 의한 것임을 아시고, ‘원한으로 찾아온 병은 신통한 약으로도 치료하기 어렵다.’라고 탄식하시고, 치료를 멈추시고는 조석으로 관세음보살 명호를 염불하였습니다. 한 달여 지나자, 전혀 차도가 없던 질환이 저절로 나았다고 합니다.
스님은 이로 인해서 더욱 굳은 신심으로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하시고, 허투로 하는 말씀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불보살께서 ‘세간의 괴로움을 다 제도하였다(度一切苦厄)’고 말씀하셨듯이, 인과는 결코 사람을 속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생사의 큰 재난을 겪으시면서, 해현스님은 윤회의 길이 험난하고 생사를 가늠하는 일이 중대함을 깊게 깨달으시고서, 세속을 떠나려는 마음을 내게 되셨습니다.
해현화상海賢和尙 수행이야기 2 : 제1장 출가전 出家前(2) 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p/13
해현화상海賢和尙 수행이야기 2 : 제1장 출가전 出家前(2)
그해 중국은 북양정부北洋政府에 진입하여, 군벌이 혼전하던 중화민국의 시기였습니다.
부친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오래지 않아, 해현화상의 큰 형이 붙잡혀서 강제로 징집당하는 바람에, 형제 두 사람은 24년이란 긴 세월동안 헤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뒤 이어 바로 해현화상의 둘째 형을 양자로 삼아 기르던 친척집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에, 부득이 15살이나 된 아이를 다시 문씨 집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둘째 형은 몸이 허약하고 병치레를 많이 해서,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도리어 집안의 부담을 가중시켰습니다.
다행히도 누나의 병이 마침내 완치되었으며, 또한 그 이듬해에 시집을 갔습니다.
해현화상의 어머니께서는 손재주가 좋으셔서, 여자들이 하는 길쌈을 비롯해서 바느질과 수예 등을 대단히 잘 하셨습니다. 집안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었으므로, 황씨 부인은 어쩔 수 없이 남에게 바느질하고 수선하고 옷을 빨아 풀을 먹이는 일들을 해주며 얻은 보잘 것 없는 품삯으로, 이 만신창이가 된 가정을 가까스로 유지해 나가셨습니다. 황씨 부인은 언제나 늘 밤 새워 술이 달린 긴 허리끈에 수를 놓고, 꽃신에 수를 놓아 그런 다음, 나가 팔아서 먹을 양식과 바꾸셨습니다.
해현화상께서는 매우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서, 이에 어머니를 속이고 몰래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걸하였으며,이렇게 하여 어머니의 부담을 들어드리려고 했습니다. 3개월이 좀 더 지난 후, 결국 어머니에게 들켰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 바탕 통곡하셨으며, 다시는 그에게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집가朱集街에 성이 최씨인 음식점 주인이, 해현화상의 효행을 들은 후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이에 직접 해현화상을 만나러 집에 찾아 와서, 나이가 겨우 13살 밖에 안 된 해현을 자신의 음식점에 와서 일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집안 형편이 조금씩 좋아졌습니다. 해현화상께서는 그 음식점에서 줄곧 18세 까지 일했습니다.
그 해에 다리에 악성 종기가 생겨서, 하마터면 이로 인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소년 시절 그의 신변에 몇 가지 일이 생겼습니다. 이는 후일 그에게 확고부동하게 출가의 길을 걸어가도록, 매우 큰 촉진 작용을 일으켰습니다.
그의 8촌 아줌마는 천성이 아주 못되어 매우 사납고 가족이나 이웃들과 수시로 때리고 욕했습니다. 한번은 5촌 아줌마를 때리고 욕하면서 그녀의 옷마저도 찢어버리고 발가벗기기기 까지 했습니다.
나중에 그녀의 신상에 수많은 일들이 연달아 발생하였습니다.
즉 아줌마는 4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전후로 해서 요절했습니다.
아줌마는 자신의 혀를 자신의 이빨로 깨물어(속된 말로 「혀뿌리 씹기」) 선혈이 계속 흘렀는데 나중에는 결국 혀가 끊어져서 밥을 먹기도 어려웠습니다.
그 후 아줌마는 32살에 딸을 낳고 몸을 풀다가 고통스럽게 죽고 말았습니다.
그녀가 죽었을 때 그 참상으로 인해, 해현화상의 누나도 놀라 병을 얻었고, 8촌 아저씨도 스스로 연거푸 병든 몸으로 인간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해현화상의 어머님께서는 8촌 아줌마가 하루 종일 시비를 일으키다가, 최후에는 죽어버리는 보기 힘든 모습까지 보면서, 해현화상에게 반드시 기억하여, 결코 그녀를 배우서는 안 된다고 이르셨습니다. 해현화상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선량하고 너그러워야 한다. 절대로 나쁜 짓을 하지 말거라!” 어머님께서 하신 이 말씀은, 그의 뇌리에 깊이깊이 각인되었습니다.
그밖에 다른 사건이 소년 해현화상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한번은 그가 심은 큰 동과冬瓜를 사촌 남동생이 몰래 따서 훔쳐 갔습니다. 그는 3일 동안 내내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내 동과를 훔쳐간 사람은 누구든지 부스럼 병에 걸리게 하라.”
3일 후에 누구지 알게 되었는데, 사촌남동생이 정말로 부스럼 병에 걸려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못했고 고통이 말로 다 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습니다. 이를 사촌 아줌마가 아신 후에, 그를 찾아서 말했습니다. “다시는 중얼거리지 말거라. 네 동생이 그 동과를 땄다고 해서, 동생의 온몸에 부스럼이 나라고 주문을 외우는 바람에, 너무나 아파서 아버지 어머니 불러가며 큰 소리로 외쳤단다.”
해현화상은 대단히 놀라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남에 대한 생각이 정말로 이렇게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나?’ 이에 곧바로 말을 바꾸어 중얼거렸습니다.
“빨리 그가 낫게 하라! 빨리 그가 낫게 하라!”고 하였는데, 사촌남동생의 병이 정말로 금방 나았습니다.
무엇을 생각하던 그것이 나타나므로, 다시는 악을 생각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 상관없이, 그 일이 있은 이후로 그는 다시는 감히 남에게 주문을 외우지도 남을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일은 그에게 염력의 불가사의를 알게 해 주었습니다.
비록 그가 성현의 책을 읽은 적도 성현의 경전을 배운 적도 없었지만, 그는 본성이 선량하고 마음바탕이 청정하고 자비로워 언제나 일상생활에서 계발되었습니다.
전하는 바로는, 해현화상이 18살 되던 해, 그의 다리에 악성 종기가 나서 크게 짓물러 매우 심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그를 위해 도처에 의사를 찾아 약을 구해도, 치료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것이 업장에 의한 병이고 인과응보임을 알고서 탄식했습니다. “원한으로 찾아온 병은 신통한 약으로도 치료하기 어렵다.” 이에 치료를 포기하고, 방향을 바꾸어 관세음보살께 간구했습니다.
중국의 민간에는 관세음보살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는 대자대비로 괴로움과 액난으로부터 사람을 구하시므로, 구하면 반드시 감응이 있습니다. 이에 그는 매우 참되고 정성을 다해, 관세음보살 성호를 일심으로 칭념하셨습니다. 한 달여간 염불한 후 악성 종기는 절로 나았습니다. 이것은 감응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관세음보살께서 괴로움과 액난으로부터 사람을 구하시는 것에 대해,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보살께서 확실히 자비하심을 점점 더 견고하게 믿으시고,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부처님을 염하고 관음보살을 염하면, 정말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명호의 공덕도 불가사의하고,염력도 불가사의합니다.
왜 어떤 사람이 염하면 영험이 없는데,
그가 염하면 영험이 있습니까? 그것은 그의 생각이 순수하고 온 마음을 다 기울이며 그렇게 많은 망상과 잡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일심으로 전념하면, 념념마다 영험이 있습니다.
해현화상께서는 천성이 착실(老實)하고, 말씀을 잘 듣고 순종(聽話)하며, 진실하게 실천(真干)하였고, 참되고 성실한 마음(真誠心)청정한 마음(清淨心)공경하는 마음(恭敬心)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조건을 갖추어서 그가 염하면,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의 신심과 생각으로, 자신의 병을 잘 치료하였습니다.
이로부터, 해현화상께서는 생사의 길이 험난하고 생사를 가늠하는 일이 중대함을 깊게 깨달으시고서, 세속을 떠나려는 마음을 내게 되셨습니다. 그가 19살 되던 해 22살의 둘째 형이 병으로 일찍 죽자, 해현화상은 출가하여 수행하기로 결심을 철저하고 확고하게 가졌습니다.
2012년 10월 해현 노화상께서는 남양에서 몇분 거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도적떼들이 내 부친을 떼려죽였지. 그 때 내나이는 12살이었지. 나는 비럭질을 해야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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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현 노화상께서는 글자를 전혀 몰라도 염불하여 명심견성明心見性하셨고, 염불하여 112세로 자재왕생하셨다.
또한 염불하여 인욕바라밀을 닦아
전기공이 그에게 침을 뱉자 “(그대 덕분에) 얼굴을 씻었다.” 하셨고,
전기공이 그의 뺨을 때리자 “ (그대 덕분에) 가려운 데를 긁었다.” 하셨다.
노화상께서는 아상我相도 없었고, 인상人相도 없었고, 중생상衆生相도 없었고, 수자상壽者相도 없었다.
출처: https://story.kakao.com/_0TD4u/kKcpIEJtsyA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9:제11장. 얼굴을 마주하고도 아미타 부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네- 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4
114세로 왕생극락한 등신불(육신보살), 해현海賢 큰스님 일대기(김미화 번역)https://youtu.be/a7t7cc96qj8
#해현큰스님_일대기_자막
사기社旗에 살고 있는 이윤봉 신도가 하남성 남양시 래불사에 계시는 해현 큰스님을 찾아뵈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해현스님의 귀중한 말씀을 핸드폰으로 녹음하였어요.
해현 노스님: “나는 이젠 나이도 많이 먹어서 죽을 때도 거의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죽음이 두렵지 않아요. 목숨이 끊어지면 (왕생)성불할 것입니다.”
신도: “스님은 언제 출가하셨나요?”
노스님: “20살 되던 해에 출가했어요.”
신도: “어느 곳에서 출가하셨습니까?”
스님: “태백령에서요. 전계스님이 나의 사부입니다.”
노스님은 23살때 호북성 롱보사에서 전계傳戒스님한테서 계를 받았습니다. 전계스님은 본래 임제종 백운계파의 대덕스님이었지만 해현스님한테 참선수행법 및 불교경전과 교리에 대해서도 전혀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신도: “전계스님이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으셨나요?”
스님: “네, 그냥 나무아미타불 육자명호만 끊임없이 외우라고 하셨어요.”
“문화대혁명(1966~1976)이 터지고, 홍위병들이 절에 있는 스님들을 내쫓고, 산에 스님이 있으면 안 되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어요. 나는 집이 없다고 했지요. 그들은 나한테 (노동) 생산대 대장을 시키더군요.”
신도: “스님, 그럼 염불은 어떻게 하셨나요?”
스님: “그들이 염불을 못하게 하니, 소리 내어 할 수 없으니 마음속으로 했지요.”
“밭에서 일하면서도 속으로 염불하고, 산에서 소를 방목할 때도 돌 위에 걸터앉아 속으로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면서 염불하고, 일하면서도 언제나 마음속으로 염불했어요.”
신도: “스님은 술을 마시나요?”
스님: “불교계율이 있으니 마시지 않겠죠? ...왜 마시지 않겠어요? 설 명절이나 또 남들이 집들이할 때 청하면, 가서 마시죠.”
(스님의 말씀에 모두들 웃었습니다.)
스님은 천성이 순박하고 성정이 온화하여 제자들한테나 모든 사람한테 언제나 상냥하게 대하니, 보는 사람들마다 스님을 존경하고 또 스님과 접촉하기를 좋아하였습니다.
2012년 3월 인륭 법사님이 해현 노스님을 원명사에 모시고, 승복을 스님께 공양 올리셨습니다.
노스님이 승복을 입어보시더니 사이즈가 큰 것 같으니,
그 자리에서 갖고 다니시던 바늘을 실에 꿰매어 손수 단을 줄이시는데, 보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2012년 추석을 앞두고 남양의 몇몇 신도들이 래불사에 계시는 해현 노스님을 뵈러 갔습니다.
노스님은 신도들한테 감을 맛보여드리겠다시면서 절에 있는 감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겠다고 하시는데,
고령의 연세에 올라가시지 말라고 누구나 말렸지만, 스님의 고집을 꺾지 못했습니다. 110세가 넘는 연세에 나무에 올라가서 감을 따가지고 내려오시는 스님을 보고, 모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중국에서 유명한 행각승이자 선종의 고승 가운데 한 분이신 조주스님도, 글 한 자도 모르지만 일심으로 부처님을 믿고 “아미타불” 명호만 부르시는 해현 노스님을 보시면, 아마 감탄을 금치 못할 것 같습니다.
신도: “잡념(일심불란)을 갖지 말라는데, 어떻게 하는 겁니까?”
스님: “말해줄 수 없어요. 열심히 부처님을 믿고 하면 됩니다.
염불하고 나서 회향도 중요한데, 다 하고 나서 부처님 전에 꼭 회향해야 합니다.
스님: “이렇게 나는 염불을 몇십 년 했어요. 하다 보니 귀신이 다 된 것 같아요.”
신도: “하긴, 스님의 제자들도 다 돌아가셨는데, 스님이 아직 이렇게 살아계시니.”
(신도들과 스님 모두 웃었습니다.)
신도: “스님은 염불하실 때 어떤 경계를 보셨습니까?”
스님: “말해줄 수 없어요. 말하면 안됩니다.”
신도: “스님은 극락세계를 보셨나요?”
스님: “말해줄 수 없어요.”
신도: “부처님께서 말하지 말라 하셨나요?”
스님: “부처님이 염불할 때 보이는 일체 현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하셨어요.”
신도: “스님은 극락세계를 보셨나요?”
스님: “말해줄 수 없어요.”
신도: “부처님께서 말하지 말라 하셨나요?”
스님: “부처님이 염불할 때 보이는 일체 현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 하셨어요.”
불교 계율에 따르면, 종파마다 수행의 경계에 대해 말하는 것을 기피한다고 합니다. 가르침에 있어서도 실력(功夫)을 논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논하지 않고, 권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을 논하지 않습니다. 장군은 군사를 논하지 않고, 스님은 선禪을 논하지 않습니다.
스님은 비록 글자를 모르지만 염불에 대해 말을 하실 때면 한마디 한마디가 다 주옥같은 말씀이어서, 듣는 사람들마다 감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2012년 추석에 노스님이 래불사에서 한창 장작을 패고 계셨습니다.
타지에서 온 몇몇 신도들이 법당에서 염불을 하다가, 스님한테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스님은 장작을 패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르칠만한 것이 별로 없습니다. 염불만 잘하면 됩니다. 어려운 것이 하나도 없어요. 일심으로 염불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어서 노스님은 그들한테 “어디에서 왔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들의 대답을 들으신 후,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있는 이 절은 아주 작은 절입니다. 매일 쓴 음식을 먹고, 낡고 기운 옷을 입습니다.
당신들은 여기 와서 나를 따라 고생할 수 있습니까? 고생을 해봐야만, 고생을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당신들이 여기에 오지 않아도, 나는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만약 오게 되면, 나의 계戒를 받아야 하고 여기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어디에 가면 어디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선구자는 평범한 말씀을 하시지만 들어보지 못한 말이어서,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미타불” 성호를 염하였고 크게 감동을 받았습니다.
『논어』‘학이’편에서 단목자는 공자를 “온화한 마음”, “어질고 정직한 마음”, “공경하는 자세”, “검소한 생활자세”, “남을 배려하는 자세” 등 다섯 가지 미덕을 가지고 있다고 찬탄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현공(해현 노스님)께서 자재롭게 왕생할 수 있었던 원인을 분석하면서, 현공께도 이 다섯 가지 미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현공은 성정이 온화하여 누구도 그가 성내는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모든 일에 대해 웃어넘기고 모든 사람들을 포용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남녀노소, 출가ㆍ재가 누구든 현공과 가깝게 지내면서 환희심을 내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옛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마음속의 번뇌 없애버리고, 부처님 전에 등불을 밝혀라.”
나는 이것이 진정으로 불문에 들어가는 대 전제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현공은 한평생 자비로운 마음으로 사물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일체 중생을 대했습니다.
인연과 본분에 따라, 왕생하시기 전까지 모든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번거로움도 주지 않았습니다.
어르신은 일찌기 여러 차례 제자들에게 “저속한 입으로 염불할지언정,
불도佛道를 닦는 입으로 상스럽게 남을 욕하지 말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현과 범부가 구별되는 곳입니다.
어느 날 오후에 스님이 평소처럼 낮잠을 주무시지 않고 오후에 래불사 밖에 있는 옥수수밭에 가서 한바퀴 돌아보다가,
한 촌민이 옥수수를 가만히 따고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 촌민은 스님을 보고 난처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스님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찮아. 계속 옥수수를 따시게나. 나를 신경쓰지 말고.”
그리고는 그 자리를 떠나셨습니다.
현공은 한평생 다른 사람을 공경하고 정중하게 대했으며, 수십년간 방석을 깔지 않고 예불했습니다. 그 누구도 그가 다른 사람을 비방하거나 무시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아미타불!
『역경易經(주역)』에 따르면, 공경하고 삼가면 패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인조(인광대사)께서도 “성경誠敬(성실과 공경)”을 가장 빨리 성취하는 유일한 지름길이라고 했는데, 나도 당연히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현공께서는 한평생 근검하시여, 모든 사람들에게 남긴 인상이 매우 깊었습니다.
석가 세존께서 “고통을 스승으로 삼고,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고 당부하신 유언을 기억하고, 백장선사의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법어를 생각하면,
노자께서 왜 스스로 “세 가지 보배가 있으니, 첫째는 자애요, 둘째는 근검이요, 셋째는 세상에 나를 내세우지 않는 것이요.(노자 67장)”라고 말한 이유가 명백해집니다.
한번은 전기세 수금원이 전기세를 받으러 왔는데,
스님이 수금원한테 “지난달에 낸 전기요금보다, 이번 달에 내는 게 왜 더 많나요?” 라고 말하시니,
그 수금원이 두말않고 스님의 얼굴을 후려쳤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수금원한테 전기세를 말없이 내어주었어요.
그 자리에 있던 신도들이 수금원한테 따지려고 하자,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만둬. 그가 내 얼굴 가려운 데를 긁어주었다고 생각하면 돼.
우리 출가한 사람들은 마음이 넓어야, 모든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
현공께서는 여러 차례 사람들한테 말씀하셨습니다.
“염불할수 있는 사람은 모두다 큰 복과 큰 지혜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열심히 염불해야 한다. 전일하게 잘 염불해야만 한다.”
-김미화 번역
2009년 가을, 저는 스승님(해현海賢 큰스님, 1909~2013)과 함께
들에서 땅콩을 캐내고 있었을 때였습니다. 저는 스승님께서
땅콩을 캐내시면서, 입을 여전히 조금 살짝살짝 움직이고 계시는
것을 보고는 참을 수가 없어서 스승님께 여쭙길,
“스승님, 입을 늘 움직이고 계시는데,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어르신께서 “아미타불!” 하셨습니다.
저는 그때서야 원래 노화상께서는 평소에 언제나 염불하고 계시며,
지금까지 중단한 적이 없으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래불삼성영사집來佛三聖永思集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 (정공법사님 서문)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3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 (정공법사님 서문)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2
정공법사님 서문
2. 육화경六和敬
견화동해見和同解 계화동수戒和同修 신화동주身和同住 구화무쟁口和無諍 의화동열意和同悅 이화동균利和同均
첫째, 견해로서 화합하여 똑같이 이해하시다(見和同解)
현공은 불법의 바른 앎(正知)과 바른 견해(正見)를 원만하게 갖추셨으므로, 해묵海墨법사를 비롯한 세 분의 스님들과 동백산 탑원사에서 초막집을 짓고서 함께 수행하실 때 서로 뜻이 계합하여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현공은 정종淨宗의 바른 견해(正見)를 받드셨으며, 일찍이 말씀하시길, "우리 이곳은 오로지 염불만을 닦는 곳이며, 경참불사經懺佛事는 행하지 않는다. 차라리 사원이 없을지언정 도가 없어서는 안 되며, 차라리 사람이 없을지언정 법이 없어서는 안 된다.”(咱這裏是專修念佛, 不搞經懺佛事. 寧可沒有廟, 不能沒有道; 寧可沒有人, 不能沒有法.)고 하셨습니다.
현공께서는 어느 도량에 머무시거나, 그때마다 늘 대중과 견화동해見和同解로서 화합하여 사이가 벌어지게 하시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주) 불사 佛事 : 불사佛事는 중생을 깨닫도록 하는 일이며, 불佛은 覺悟(깨달음)의 뜻이며, 각오覺悟(깨달음)의 대상은 일체 중생입니다. 그러므로 불사의 진정한 의미는 '중생을 깨닫도록 하는 일'입니다.
죽은 이를 위해 경전을 독송하며 참회하고 예배하여 복을 빌어주거나 천도해주는 경참 經懺 또한 당연히 불사입니다. 그러나 이는 불사 중의 부대附帶적인 의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간세상인 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49년 동안 일체 사람을 가르치셨는데, 이것이 正法정법이며,
경참불사를 하여 귀신을 제도해주는 것은 부대적인 의식이며, 정법은 아닙니다. (정공법사의 《대방광불화엄경》제1060권 중에서 발췌)
(주) 경참불사經懺佛事 :죽은 이를 위해, 경전을 독송하며 참회하고 예배하여 복을 빌어주거나 천도해주는 일. 승려를 청해 경전을 독송하며 참회하여 복을 빌고 천도하도록 행하는 의식을 가리킨다.
둘째, 계로서 화합하여 함께 닦으시다(戒和同修)
현공은 계로서 대중을 독려하는 데에 뛰어나신 분으로,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선행을 칭송하셨고, 사적인 자리에서는 잘못을 바로잡아 주셨습니다.”(揚善於公庭,規過於私室)
현공은 일찍이 선교방편으로 거사들에게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시길, “나의 이곳은 작은 절입니다. 그래서 먹는 음식은 맛없는 쓴 것들이고, 입는 옷은 다 떨어져 기운 것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온 이상, 힘든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잘 참아낼 수 있어야, 고통을 끝마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난 꾸짖지 않겠지만, 이곳에 온 이상 이곳의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곳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俺這是小廟, 吃的是苦的, 穿的是補的. 你們來這兒要能受苦, 能受苦才能了苦. 你不來, 我不怪; 來了就要守我戒. 走到哪裏要守哪裏規矩.)고 하셨습니다.
셋째. 몸으로 화합하여 함께 머무시다(身和同住)
현공은 인품이 진실하고 온후하며 선량하시어 한평생 남과 다투는 일이 없으셨으며(與人無爭), 세상에 대해 구하는 것이 없으셨습니다(於世無求). 사람을 대하실 때의 태도는 언제나 자상하고 친절하셨기 때문에, 누구를 막론하고 대중들은 현공과 가까이 지내기를 좋아하였습니다.
해묵법사를 비롯한 당대當代의 세 분 대덕들께서 초막집을 지으실 때, 비록 닦으신 법문들은 각자가 다르셨지만, 오히려 서로 화합하여 함께 지내면서 정진하고 서로 독려할 수 있으셨습니다. 이는 말법시대에 보여준 가장 중요한 본보기이며, 지금 이 시대에는 이러한 화합한 승단을 찾아보면 실제로 많지 않습니다.
넷째. 입으로 화합하여 다툼이 없으시다(口和無諍)
현공은 구업口業이 청정하신 분으로, 현공께서 일찍이 남과 다투었다거나, 혹은 어떤 사람을 비방하고 업신여기셨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남과 우열을 다투지 말아야 번뇌가 없으며, 참으면 마음이 자연히 편안하다!”(跟人不要爭高論低, 就沒煩惱, 忍者自安啊!)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다섯째. 뜻으로 화합하여 함께 기뻐하시다(意和同悅)
현공은 천성적으로 성품이 온화하므로, 화를 내시는 모습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으며, 또한 대중으로 하여금 조금의 번뇌도 일어나게 하신 적이 없으십니다. 그래서 어느 곳을 가시든 노화상께서 그곳에 가시기만 하면, 사람들에게 언제나 늘 환영을 받으셨습니다.
노화상은 항상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길, “내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다 좋으며, '좋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네.
어느 것을 보아도 모두 좋다고 말하고, 어느 것을 보아도 늘 기분이 좋아야,
마음이 언제나 늘 법의 기쁨으로 충만할 수 있으며, 마음이 청정할 수 있고, 번뇌가 없고, 화를 내며 미워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은 좋고 저것은 좋지 않다는 '구분'이 없고, 또 이것은 맛있고 저것은 맛이 없다는 '분별'이 없이,
일체를 모두 '인연에 따르면', 마음이 안정되어 편안하다!”(在我眼裏, 一切都好, 沒有啥不好的. 見啥都說好, 見啥都高興, 心裏才能經常充滿法喜, 心裏才能清淨, 才無煩惱, 才不生氣恨人. 沒有這好那壞之分, 也沒有這好吃、那不好吃的啦, 一切都隨緣, 心裏就安心踏實啦!)고 하셨습니다.
여섯째. 이익으로 화합하여 똑같이 균등하게 하시다(利和同均)
현공은 일생 동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남김없이 전부 다 대중에게 공양하셨습니다. 혹 누군가 절에 와서 머물면, 절에 있는 물자를 그 사람에게 베풀어 주셨으며, 힘이 닿는 한 상대방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켜 주셨습니다.
3. 三學: 계학戒學 정학定學 혜학慧學
첫째, 계학戒學
현공은 평생 정계淨戒를 엄격하게 지키셨습니다.
자신을 단속할 때에는 가을의 차가운 기운처럼 냉정하셨지만, 남을 대할 때에는 오히려 봄바람처럼 부드러우셨습니다. 90 여 년의 출가생활 동안 계율을 지키시길, 처음부터 끝까지 언제나 늘 똑같이 엄격하셨습니다.
둘째, 정학定學
현공은 평생 정과定課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도록 견지하셨습니다. 매일 새벽 3시가 되면 즉시 몸을 일으켜 부처님께 예배하고(拜佛), 요불繞佛, “아미타불”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셨습니다(念佛).
항상 말씀하시기를, “마음이 전일하면, 어려운 일은 아무 것도 없다.”(心專無難事)고 하셨습니다. 이는 경전에서 “마음을 한곳에 묶어두면, 세간의 일이나 출세간의 일이나 성취하지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制心一處,無事不辦)고 강설한 말과 마치 하나의 수레바퀴에서 나온 것처럼 완전히 일치합니다.
부처님 명호를 부르지만 부른 것이 없으며(念而無念), 부처님 명호를 부른 것이 없으나 부르는(無念而念), 이러한 경지에 염불공부가 도달하셨기 때문에, 일이 염불에 방해가 되지 않았고 또한 염불이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수 있으셨습니다.
(주)요불繞佛 : 일반적으로 천천히 시계방향인 오른쪽으로 돌면서 염불하는 것을 말하며, 혼침昏沈(졸림. 흐리멍덩한 상태)하지 않고 도거掉擧(들뜬 마음)하지 않도록 하는 효과가 있다.
셋째, 혜학慧學
현공의 불도수행(道行)의 공부는 높고 깊으셨고, 지혜는 마치 바다와 같아 “나는 무엇이든지 전부 다 안다.”(我啥都知道)고 하신 말씀에 부합되셨지만,
그러나 엄숙하고 중후하여 자신의 경계를 이야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건으로 미루어 보면, 노화상은 분명히 미래의 일을 점치지 않아도, 미리 아시는 선견지명의 능력과 무엇이든 알지 못하는 것이 없으신 지혜를 구족하셨음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4. 육바라밀: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정진바라밀 선정바라밀 반야바라밀
첫째, 보시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은 일생 동안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하셨으며, 왕생하시던 그 날까지도 평소와 다름없이 하루 종일 채소밭에서 일을 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내재보시內財布施”입니다.
또한 자신이 손수 직접 경작하여 수확한 농산물을 포함한 일체를 전부 다, 기쁜 마음으로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셨으며, 이것이 바로 “외재보시外財布施”입니다.
그리고 친히 몸으로 행하시고(身行) 말씀으로 가르쳐(言敎), 사람들에게 간파看破하고 내려놓고서(放下) 성실하게 염불할 것을 독려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법보시法布施”입니다.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지극한 자비하신 마음으로, 아픈 사람들을 돌보시고 재난을 당한 사람들을 구제하셨으며, 심지어는 자신의 물건을 훔친 도둑에 대해서조차도 마음을 놓도록 안심시켜 그를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셨으며, 이것이 바로 “무외보시無外布施”입니다.
둘째, 지계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은 일생 동안 계율을 엄격하게 지키고 위의威儀가 구족하셨으니, 이는 바로 “섭율의계攝律儀戒”를 실천하신 것이고,
일생 동안 선을 즐기고 보시를 좋아하여 부지런히 선행을 닦으셨으니, 이는 바로 “섭선법계攝善法戒”를 실천하신 것이고,
일생 동안 온 마음과 뜻을 다해 중생에게 이익이 있게 하고 일체를 중생을 위해 생각하셨으니, 이는 바로 “요익중생계饒益眾生戒”를 실천하신 것입니다.
(주) 삼취정계三聚淨戒 : 대승보살의 일체 계법에 대한 총칭으로, (섭율의계, 섭선법계, 요익중생계로 나눔) 중의 하나로, 불가에서 제정한 각종 계율을 준수하는 것을 가리키며, 이러한 계율은 우리가 선을 쌓고 악을 방지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따라서 모든 악을 끊을 수 있으며, 법신法身의 인因이 된다.
(주)섭선법계攝善法戒 : 삼취정계의 하나로, 부지런히 선법을 닦는 것을 가리키며, 보신報身의 인因이 된다.
(주)요익중생계饒益眾生戒 : 삼취정계의 하나로, 중생에게 이익이 되게 하는 계를 가리킨다.
셋째, 인욕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께서 행하신 인욕공부는 대단히 훌륭하시며, 일생 동안 한 번도 화를 내신 모습을 뵌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가 없는 사실을 거짓으로 꾸며 함정을 빠트리는 상황을 만났을 때에도, 편안한 마음으로 인내하면서 그들과 시비를 가리지 않으셨으며,
이 뿐만 아니라 이러한 모함이 완전히 해명된 후에는, 거짓으로 헛소문을 퍼트린 사람에 대해 질책하거나 조금도 원망을 품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또한 누군가가 아무런 이유 없이 때리거나 욕하는 상황을 만났을 때에도, 묵묵히 그대로 받고서 편안하게 인내하면서 마음을 움직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는 진실로 노화상께서
“남이 나를 때리면 그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준 것이라 여기고,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가 내 얼굴을 닦아준 것이라 생각한다.
남과 우열을 다투지 않으면 번뇌가 없으며, 참으면 마음이 자연히 편안하다!”(他打了, 算是給我抓癢哩; 唾沫吐到臉上, 當是洗臉啦. 跟人不爭高論低, 就沒煩惱, 忍者自安啊!)고 하신 말씀과 부합됩니다. 이것이 바로 “내원해인耐怨害忍”입니다.
(주) 내원해인耐怨害忍 : 3인忍 중의 하나이며, 남이 자신에게 원한을 품고 해칠지라도, 능히 편안한 마음으로 인내하여 상대방에게 보복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또한 노화상께서는 평생 동안 고달프고 힘든 생활과 일을 참고 견디면서, 고난 속에서 청정하게 수행하셨습니다.
“먹는 것은 보잘 것 없는 맛없는 쓴 음식들이고, 입는 것은 다 떨어져 기운 옷들”(吃的是苦的,穿的是補的)이었으며,
낮에는 노동을 하여 머리가 빙빙 돌고 눈이 어질어질할 정도로 몸이 몹시 지치고 피곤했지만, 밤에는 여전히 밤새토록 염불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안수고인安受苦忍”입니다.
제법諸法은 마치 '허깨비와 같음'을 분명하게 알아, 불성의 진실을 믿고(信) 이해하여(解), 마음에 망령된 움직임이 없고 편안하게 인가忍可하셨습니다. 이는 노화상께서 진실로 “성실하게 염불하라. 부처가 되는 것은 큰일이며, 다른 것들은 어느 것이나 모두 다 거짓인 것이다.”(老實念佛, 成佛是大事, 其他啥都是假的.)고 하신 말씀과 부합됩니다. 이것이 바로 “체찰법인諦察法忍”입니다.
(주) 안수고인安受苦忍 : 3인忍 중의 하나이며, 질병, 화재, 수재,전쟁 등 자연적으로 발생한 고통을 참고 받아들이고, 태연자약하게 마음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 체찰법인諦察法忍 : 3인忍 중의 하나이며, 제법의 '생멸하지 않는' 참된 이치를 자세히 관찰하여, 마음에 망령된 움직임이 없으며, '무생無生의 이치'에 편안하게 머무는 것을 말한다.
넷째. 정진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은 보리심을 내어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진을 쉬지 않으셨습니다. “염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에는 마음속으로 묵묵히 염불하셨고, 부처님께 절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을 때에는 밤중에 남들 모르게 조용히 절하셨습니다.”(不許念佛時, 即於內心默默念; 不許拜佛時, 即於夜間悄悄拜.)
한가할 때나 바쁠 때나 “아미타불” 부처님의 명호가 끊어지지 않으셨으며, 이것이 바로 “피갑정진披甲精進”입니다.
일생 동안 부지런히 선법善法을 닦아 불도佛道에 계합하셨고, 한 번 하고자 마음먹은 일은 중도에 그만두지 않고 끝까지 하여 잠시도 떠나지 않으셨으며, 이것이 바로 “섭선정진攝善精進”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중생에게 두루 이익이 있게 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셨으며, 이것이 바로 “이락정진利樂精進”입니다.
(주) 피갑정진披甲精進 : 보살이 발심하여 곤고함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감하게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으로, 비유하면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사람이 갑옷을 걸치면 자연히 믿는 것이 있어 두려움이 없는 것과 같음을 말한다.
(주) 섭선정진攝善精進 : 선법을 부지런히 행하여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주)이락정진 利樂精進 : 일체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섯째. 선정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의 염불공부는 깊으며, 일찌감치 오래 전에 이미 삼매의 경지에 이르셨습니다. 현공께서 말씀하시길,
“부처님 명호를 '한 번 두 번' 부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지 말라.
'일심불란의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염불하지 않았으면, 염불했다고 할 수 없다.”(不要以爲念一句兩句就行了, 不念到一心不亂不算念佛.)고 하셨습니다.
현공은 마음속으로 항상 부처님 명호를 부르고, 중간에 끊어짐이 없으셨으며, 지혜와 신통이 개현開顯한 경지에 이르셨지만 역시 침묵하고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염불삼매는 “위없는 가장 높은 경지의 깊고 미묘한 선”(無上深妙禪)이며, 또는 “보왕삼매寶王三昧”라 칭하기도 합니다.
(주)보왕삼매 寶王三昧 : 불삼매를 보왕이라 말한 것은, 마치 마니보주와 같이 일체 모든 삼매의 보배를 두루 내리고, 마치 전륜왕과 같이 일체 모든 삼매의 왕을 두루 통솔하기 때문이다.
(주) 일심불란一心不亂: 생각 생각이 부처님의 명호를 꽉 붙잡아 흩어지지 않으며, 다른 마음이 없는 것을 말한다.
여섯째. 반야바라밀을 행하시다
현공께서는 한 마디 “아미타불” 부처님 명호로 명심견성明心見性의 경지에 이르러, 중생이 본래 갖추고 있는 이체理體인 “실상반야實相般若”를 깊이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는 자성이 나오도록 절해야 하고, 청정한 마음이 나오도록 절해야 한다.”(拜佛要拜出自性, 拜出清淨心啊!)고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현공은 언제나 늘 염불하셨는데, 이것은 바로 언제나 늘 실상實相을 관조觀照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처가 되는 것이 큰일이며, 그 밖의 것은 어느 것도 모두 다 '거짓'인 것이다.”(成佛是大事, 其他啥都是假的.)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관조반야觀照般若”입니다.
현공은 선교방편으로 세간의 모든 법(현상)을 분별하셨고, “무엇이든지 모두 다 아셨지만”(什麼都知道), 그러나 또한 침묵하고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직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신이 아는 것을 조금 드러내 보이시어 중생을 이롭게 하고 구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방편반야方便般若”입니다.
2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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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8:제10장. 몸과 마음 내려놓으니, 모두가 원만하고 밝네-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3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8:제10장. 몸과 마음 내려놓으니, 모두가 원만하고 밝네-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8
제10장. 몸과 마음 내려놓으니, 모두가 원만하고 밝네 (身心放下皆圓明)
인영印榮법사
2007년, 저는 남양시 남소현南召縣에서 출가 스승님 한 분을 호지護持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하루, 불칠佛七법회를 원만하게 마친 후, 정공노법사께 정례하였습니다. 저는 두 번째 절을 할 때, 정공사부상인께서 지혜가 있고 식견이 있는 스승님과 순수하고 바른 정종도량을 찾을 수 있도록 가피를 주신다면, 제가 그곳에 가서 오로지 수행에만 전념하겠다고 발원하였습니다.
그리고 난 후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서, 어떤 한 선지식께서 저에게 사기현에 있는 래불사에 가서 육신보살님께 예배하라고 소개해주셨습니다. 래불사에 도착한 후, 행운이 있어 해현노화상님을 뵈었습니다. 노화상님을 뵈는 순간 저는 한없는 기쁜 마음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바로 노화상님께 절하면서 철없는 저를 제자로 거두어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노화상님 역시 저의 청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3일이 지난 후, 노화상님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길, “관음보살님께서 나에게 제자 하나가 올 것이라 말씀하셨는데, 그리고 나서 바로 자네가 왔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들었어도 마음에 두지 않았으며, 노화상님께서 공연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옆에 있던 마을사람이 말하길, “이 노화상님은 진짜 보통 분이 아니십니다! 한 번은 마을에서 우물을 파고 있었는데, 여러 날 팠는데도 물이 도무지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어요. 노화상님께서 가서 살펴보시고는, 지팡이로 한 곳을 가리키시면서 ‘여기부터 파게나, 이곳에 좋은 물이 있네.’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래서 그들이 노화상님께서 일러주신 곳을 파니, 과연 금방 물이 나왔어요.”
2008년 초 여름, 문천汶川지역에서 지진이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다시 남방의 어느 지역에 곧 큰 지진이 날 것이라는 뜬소문이 돌아, 한때 사람들의 마음을 불안에 떨게 하였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노화상께서 저에게 말씀하시길, “아무 일도 없을게야. 천신이 《무량수경》을 바로잡아 놓으셨네.” 저는 그 말씀을 듣고는 얼떨떨하였으며, 노화상께서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시는지 몰랐습니다. 노화상께서는 제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것을 보시고는 분명하게 설명하시길, “어느 방향에 재난이 있으면, 나는 곧 바로 《무량수경》이 그쪽으로 넘어지는 것을 보네. 어제 저녁 꿈속에서 어떤 한 천신이 넘어져 있는 《무량수경》을 바로잡아 일으켜놓으신 것을 보았지. 그래서 나는 아무 일도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
같은 해 여름, 어떤 한 농부가 사원 문 앞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는 데 쓰는 수활기收割機로 잘게 부순 밀짚에, 불을 붙이는 바람에 순식간에 사원이 온통 짙은 연기로 가득차서, 사람들이 숨이 막혀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사원에서 뛰쳐나와서, 한창 일하고 계시는 노화상님께 이 일을 알려드렸으며, 뜰 안에 연기가 너무 자욱하여 숨이 막혀 경전을 독송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노화상님께서는 제 말을 들으신 후, 손 가는대로 땅에서 낡아서 못 쓰게 된 비닐봉지를 하나 주워 올리시더니, 남쪽을 향해 몇 번 흔드셨으며, 입속으로 “저쪽으로 가거라! …… ”고 하면서 여러 번 반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신기한 일이지만, 저는 이 짙은 연기가 정말로 모두 고개를 돌려 남쪽으로 나부끼며 날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너무 감격하여 노화상께 한 번 정례한 후, 뜰 안으로 돌아가 계속해서 《무량수경》을 독송하였습니다.
또 한 번은 노화상께서 저에게 마당 한가운데에 있는 채소밭에, 배수구排水溝를 파라고 시키셨습니다.
그때는 날씨가 여러 날 동안 계속 기온이 높아 심어놓은 채소들이 모두 말라 시들시들하였으며, 사원 문 앞에서 보리를 말리고 있는 마을 사람들 역시 텔레비전에서 며칠 동안 비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보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저는 매우 갑갑하게 느껴졌으며, 마음속으로 채소들도 모두 곧 말라서 죽을 판인데, 노화상께서는 어째서 나에게 배수구를 파라고 시키시는 것일까 라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노화상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저는 즉시 삽을 들고 배수구를 파기 시작하였습니다. 옆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제가 너무 어리석은 탓에 노화상의 터무니없는 말씀을 듣고 시키는 대로 그대로 한다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예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 다음 날 오전에 장대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으며, 여러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퍼부어댔습니다. 이렇게 큰 비가 내리기 전에 미리 방비하였기 때문에, 채소밭과 사원에 모두 물이 고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에 이 일에 대해 여전히 완전히 간파할 수 없었지만, 그러나 마음속으로 노화상에 대해 오히려 더욱 더 공경하고 감복하게 되었습니다.
같은 해 초가을에 장씨라는 성을 가진 노부인이 래불사에 노화상을 뵈려고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두 세 달 동안 머물러 지내셨습니다. 노부인은 이미 88세의 고령이 되셨고, 게다가 당뇨병이 있어 하루에 밥을 일곱 번에서 여덟 번 드셔야 했습니다. 노화상은 저에게 노부인을 잘 보살피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습니다.
노부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노부인의 부친은 노화상보다 연세가 두 살이 더 많으시며, 노화상의 어렸을 때의 동무이시며, 노부인이 태어나신 그 해에 바로 노화상께서 출가하셨다고 합니다. 노화상이 출가하신 후에도, 노부인의 부친은 평생 동안 꾸준하게 노화상과 연락하며 관계를 유지하셨습니다. ― 저는 당시에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속으로 대단히 강렬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모두가 “아무리 아름다운 꽃이라도 백일 동안 붉게 피는 꽃은 없으며, 아무리 사이가 좋은 사람이라도 천 일 동안 사이가 좋은 사람은 없다.”(花無百日紅,人無千日好)고 말들을 하지만,그러나 노화상의 옛 벗은 오히려 한 번의 사귐이 자신의 일생에만 그치지 않고, 자신의 자식에게까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스승님께서는 아침에 공부하는 공과功課와 저녁에 공부하는 공과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비하신 마음으로 매일 여러 번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저에게 아침저녁 두 차례의 “공과를 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비록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말씀이었지만, 오히려 늘 제가 용감하게 위를 향해 정진할 수 있도록 독려하셨습니다. 지금도 저는 제 자신이 조금이라도 나태해질 때마다, 언제나 마치 스승님께서 여전히 저에게 “공과는 했느냐?”라고 물으시는 것 같은 말씀을 듣습니다.
2009년 그 해가 끝나갈 무렵, 저는 혼자서 여러 해 동안 황폐한 채로 그대로 방치되어 있던 원명사의 옛 도량에 왔습니다. 당시 저는 원명사의 황량하고 쇠락해진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순간 바로 도량을 옛 모습으로 회복하고 이곳에서 정토법문을 널리 펼 것을 발심하였습니다.
원명사는 래불사와는 거리가 100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에 있으며, 게다가 단지 출가자인 저 한 사람과 밥을 지어주는 노보살만이 있을 뿐이어서, 자주 노화상께 문안하러 갈 수가 없었습니다.
스승님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 저는 세월이 좀 지나서야, 어르신을 원명사로 모셔와 잠시 지내시게 할 수 있었습니다. 노화상이 오셔서 층집에서 지내시게 되면 화장실에 가시기가 불편하실 거라는 생각이 들어, 저는 특별히 노화상을 위해 한 칸짜리 작은 방을 지었으며, 방안에는 좌변기를 놓아드렸습니다.
노화상께서는 아침에는 언제나 일찌감치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염불하는 것을 견지하셨으며, 원명사에서도 똑같이 행하셨습니다. 저희들이 아침 공과를 하기 전에, 어르신의 작은 방에는 매일 언제나 이미 등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고, 곧 이어서 노화상께서 뜰에서 “아미타불”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던 일이 아직도 마음속에 깊이 남아있습니다.
본래 노화상께서는 금강지金剛持에 익숙하시어, 소리를 내어 염불하는 시간은 언제나 길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원명사에서는 오히려 매일 아침 뜰에서 천천히 걸으시면서, 매우 긴 시간 동안 염불하시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금강지金剛持:금강지염불법金剛持念佛法: 큰소리가 아닌, 약간의 소리가 치아와 입술사이에서 돌도록 염불하는 법으로, 소리도 내고 기운도 돋우는 수행법을 금강지라 함. 청정한 곳에서는 금강지 혹은 더 작은 소리로 하는 염불도 가능함. (정공스님 말씀에서)
매일 아침을 드신 후에는, 노화상께서는 일거리를 찾아서 일하시기 시작하셨으며, 늘 한 번 일을 하셨다 하면 보통 몇 시간 동안 하셨습니다.
제가 일을 하려고 할 때마다, 노화상께서는 언제나 말씀하시길, “자네는 일 하지 말고, 가서 염불이나 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리길, “스승님! 연세가 백 살이 넘으신 어르신에게 일을 하시게 하고서, 저희같이 젊은 사람이 도리어 일을 피하고서 한가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면 노화상께서 말씀하시길, “자네는 염불했어도 공부가 될 정도로 염불하지 않았기 때문에, 많이 염불해야 하네. '일정한 경지에 이를 때까지' 염불해야 하며, '어느 때를 막론하고 늘' 염불하고 있어야 해. ― 나는 일 하는 것이 염불에 지장을 주지 않아!”라고 하셨습니다.
2012년 여름, 낯선 사람 몇몇이 사원에 와서 괘단掛單하려고 하였는데, 그때 마침 노화상께서는 침상에 누워 쉬고 계셨습니다. 그들은 백 살이 넘으신 고승이라는 말을 듣고는, 노화상의 방에 가서 참배하려고 하였습니다.
노화상께서는 그곳에 누워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신 채, 입속으로 말씀하시길, “내 나이가 이미 많고, 이 사원에는 단지 인영 한 사람과 또 여자거사뿐이기 때문에, 우리 이곳은 손님을 좋아하지 않으니, 머물 수가 없소이다.”
저는 당시에 대단히 의아하게 생각하였습니다! 만약 평소의 노화상님이라면, 틀림없이 매우 기뻐하시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에게 아는 체를 하셨을 분인데, 오늘은 어째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이렇게 냉담하실 수 있으며, 게다가 이렇게 기괴한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후에 그 내막을 잘 아는 한 거사가, 저에게 그들은 다름 아닌 삿된 가르침을 전파하는 사람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주)괘단掛單:불교술어로, 행각승이 사원에 가서 투숙하는 것을 말한다. 單은 승당 안의 명단을 가리키고, 행각승이 자신의 옷을 명단 아래에 걸기 때문에 괘단掛單이라 칭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상관없이, 노화상께서는 사원에서 늘 언제나 일거리를 찾아 일하셨습니다.
바로 노화상께서 왕생하시기 한 달 전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여전히 원명사에서 장작을 패고, 또 나무 위로 올라가 나뭇가지를 베셨습니다.
게다가 대전 옆에 있는 큰 돌 위에, 무게가 천 근이나 되는 석조(石條: 가늘고 긴 돌)를 올려놓으셨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입니다. 백 살이 넘으신 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건장한 젊은 사람에게 그 무거운 석조를 올려놓으라고 시킬지라도, 들어서 올려놓기가 어렵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고령의 노화상께서 도대체 어떻게 그 무거운 석조를 올려놓으신 것입니까?
노화상께서 마지막으로 원명사에 오셨다가 돌아가실 때, 주장자와 옷 한 벌을 그대로 놓아두셨기에, 제가 노화상께 가지고 가시라고 말씀드리자, 노화상께서는 저를 향해 손을 저으시며 말씀하시길, “필요 없어, 이젠 쓰고 싶지 않아졌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고덕께서 말씀하시길, “종은 치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으며, 북은 때리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 보살이 신통을 나타내 보여주지 않으면, 범부는 공경하여 앙모할 줄을 모른다.”(鐘不敲不鳴, 鼓不打不響. 菩薩不顯神通, 凡夫不知敬仰.)고 하였습니다.
말은 비록 이러할지라도, 그러나 복덕만으로는 윤회에서 벗어나기가 어려우며, 신통은 생사윤회를 그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불보살님께서는 신통으로 사람을 제도하지 않으십니다.
《능엄경》에서 말하길, “만약 만물을 변화시킬 수 있으면, 여래와 똑같으며, 몸과 마음이 원만하고 밝다.”(若能轉物, 則同如來. 身心圓明.)고 하였습니다.
원명사는 금나라 때(1115~1234년)에 창건된 사원으로, 지금까지 거의 8백년에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명대(1368~1644년), 청대(1616~1912년), 민국시기(1912~1949년)에 모두 중수한 적이 있습니다.
노화상께서 80여 년 전에 원명사에 참학하려고 오셨을 때만 해도 도량은 대단히 번창하였고, 상주한 승려대중이 200여 명이나 계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원명사는 문화대혁명 시기에 파괴된 이후로, 줄곧 학교가 점거하여 사용하였습니다. 당초에 인영법사께서 도량을 원래의 모습으로 회복시키겠다고 발심하셨지만, 쉽지 않았던 일들을 말학이 일찍이 제 눈으로 직접 보았기에 잘 알고 있습니다.
인영법사는 근검절약하고, 진실로 닦고 진실로 행하셨습니다. 말학이 2012년 여름에 원명사에 노화상을 찾아뵈러 갔을 때, 제 눈으로 직접 노화상께서 단석斷石을 담장 밑까지 옮겨 놓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인영법사께서 서술하신 일들은 전부 분명히 실제로 있었던 일이며, 시방의 어진 이들께서 소중하게 여겨 선용善用하시기를 바랍니다!
남양 의오義烏염불당의 유봉지劉鳳芝거사가, 한 번은 현공에 관한 옛날 일을 이야기해주셨습니다.
어느 날 하루는 아침에 유거사가, 향로 속에 향 개비들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아침밥을 먹을 때 호기심이 나서, 노화상께 어째서 이렇게 많은 향을 태우셨느냐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노화상께서 대답하시길, “천기는 누설해서는 안 되네.”
그 말씀에 유거사는 더욱 호기심이 발동하여 노화상을 귀찮게 하면서, 반드시 자신에게 말씀해 주셔야 하며, 또한 절대로 외부에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노화상께서 그때서야 유거사에게 말씀하시길, “내가 허공에 가득 온통 아미타 부처님뿐인 것을 보았거든!”(我看到滿天都是阿彌陀佛啊)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학에게 현공의 신통과 감응한 일들을 들려주었지만, 말학은 일체 수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통에 관해 많이 언급하는 것은,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혜를 드러내려고 하면, 도리어 마치 요괴에 가까워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말학은 모든 이들에게, 현공께서 나타내 보여주신 신통유희神通遊戲에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으며, 노화상의 덕행과 지혜를 배우는데 마땅히 더욱 더 힘써야 한다는 것을 환기시킵니다.
당나라 때의 대덕이신 중국의 유마힐거사라 불리는 방온龐蘊거사는 자신이 지은 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용궁을 알지 못하면 구슬을 말하지 말지니, (未識龍宮莫說珠)
구슬을 아는 것이 그대와 다르다고 말하리라. (識珠言說與君殊)
빈주먹은 단지 어린아이만이 믿을 뿐이니, (空拳只是嬰兒信)
어찌 장차 늙은이를 속일 수 있으랴! (豈得將來誑老夫!)
18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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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현화상 불문모범(賢公和尚 佛門榜樣) 4 : 출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 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p/5
해현화상 불문모범(賢公和尚 佛門榜樣) 4 : 출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
출가,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
1920년, 스님은 20세가 되자 모친을 떠나서, 동백산(桐柏山) 태백정(太白頂) 운대사(雲台寺)에서 전계(傳戒)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됩니다.
인함스님: 해현스님께서 젊으셨을 때, 이곳에서 전계스님한테 머리 깎고 출가하셨습니다.
인지스님: 은사스님(해현스님)의 은사스님께서는 그 당시 이 절을 떠나, 북경 광제사 선방에서 12년 동안 나오시지 않고 수행하시고 나서, 동백산으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절 주위에 풀이 많이 우거져 있었는데, 그 당시 아픈 사람이 있으면, 스님께서는 주위에 있는 풀을 한 움큼 주면서 집에 가져가서 달여 먹으라고 하셨는데 ,어떤 병이라도 효험을 보았다고 합니다. ‘어떤 병이든 집어주는 풀이 다 약이 된 거지요.’
노스님께서는 직접 해현스님을 삭발시켜주시고, 해현이라고 법명을 주셨습니다. 해현스님은 23살에 호북성 영보사에서 구족계를 받으셨습니다.
전계노스님은 본래 임제종 백운파 법맥을 받은 고승이시지만, 해현스님에게 참선좌선을 가르치신 적이 없고 경전을 가르치거나 설법을 하신적도 없으시며,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만 계속해서 염불하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해현스님은 동백산 보화사(普化寺), 운대사(雲台寺), 탑원사(塔院寺) 등에 거쳐서 주석하시면서, 황폐지를 14군데나 개간하셨습니다.
인함스님: ‘그 당시 이곳을 개간하셨는데, 여기 전체를 개간해서 경작지로 만드셨어요.’
1966년,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홍위병들이 절에 난입하여, 경전을 불사르고 불상을 깨부수고 스님들을 강제로 환속시켰습니다. 홍위병들이 전계노스님의 묘탑을 헤쳐서 뒤졌지만, 속이 빈 것을 보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인함스님: ‘탑원사에서 홍위병들이 줄곧 노스님의 유골을 찾으려고 했지만, 찾아내지 못했어요. 노스님은 이런 법난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겁니다.’
해현스님은 나중에 묘탑바닥에 깔린 석판 밑에서 은사스님의 유골을 찾고 나서, 전계노스님께서 깨달으신 고승이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은사스님께서는 일찍이 이런 법난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아시고, 유골을 묘탑바닥의 아래에 숨기도록 하신 것입니다. 홍위병들의 위협을 받는 고난 속에서도, 해현스님은 스승의 유골을 보존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91년 해현노스님은 제자들을 직접 이끌고, 스승을 위해서 동백산 도화동 옆에 새롭게 탑을 세우고 다시금 안장하였습니다.
해현스님은 문화혁명기간에, 산 아래에 있는 마을에서 생산대장역할을 배당받았습니다.
그 당시는 염불이 허용이 되지 않았기에 스님은 묵묵히 마음으로 염불하였고, 절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아서 밤에 몰래 절을 하셨습니다. 가마솥으로 모두 같이 끼니를 때워야 해서, 비린 냄새가 나는 음식이 담겼을 때는 솥 옆에 둔 채소로 연명했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스님은 줄곧 승가의 모습을 대중들에게 보여주었다고 하니,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하겠습니다.
인강스님: ‘생산대에서 일을 하셨어도, 환속하신 게 아니었어요.’
나중에 상황이 좀 진정되자, 스님은 다시 절로 돌아가셨지만 식량 배급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인강스님: 전부 황폐한 벌판이라서 땅을 파서 토란이나 고구마를 좀 심어서 그것을 먹고, 혹시 절을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것이라도 먹으라고 내놓기도 했지요.
한해, 한해를 어렵게 몇 년간 보냈지만, 절에는 향을 피우러 오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 들어오는 수입이 전혀 없었습니다. 해현스님 혼자서 힘들게 일하면서, 늙고 허약한 다섯 분의 노스님이 한 분 한 분 입적하실 때까지 모시고 사셨습니다.
해현화상海賢和尙 수행이야기 5 : 제4장 스승과 어른을 받들어 모시다 (1) 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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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11-제3장. 해현노화상의 어머니 황태부인:이 어머니가 아니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16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11-제3장. 해현노화상의 어머니 황태부인:이 어머니가 아니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112세 해현노스님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1
제3장. 해현노화상의 어머니 황태부인: 이 어머니가 아니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 (非此母不生此子)
현공의 모친 황씨 노부인은 청나라 목종 동치 10년(1871년)에 태어나셨습니다. 노부인의 친정은 조상 대대로 사기현 주집향 자원초에서 사셨으며, 조상들은 모두가 본분에 만족할 줄 아는 성실한 농부셨습니다. 부모님이 독실한 불제자이셨기 때문에, 노부인은 어려서부터 오신채와 육식을 끊고 불문에 귀의하셨습니다.
17세 때에 황씨 부인은 당하현 소배사진 초사촌의 문씨 집안에 시집을 가셨으며, 부군의 이름은 문수근文修勤이었고, 나이가 부인보다 여덟 살이 더 많았습니다. 문씨 집안의 조상은 본래 학문을 하는 집안이었고, 가문이 평범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부친 무수근의 대에 이르러 가문이 이미 몰락하여, 그저 먹고 살만한 중등정도의 생활수준이 되었습니다. 문씨 집안은 대대로 삼보를 공경하고 받드는 훌륭한 전통을 계승하여 내려왔기 때문에, 문수근의 부모님은 “선인善人”이란 명성이 있어 주변 사방 몇 십리 안에 사는 아녀자와 어린아이들까지도 다 알고 있었습니다.
황씨 부인과 문수근은 비록 젊은 부부이었지만, 오히려 의기가 맞고 지향하는 것이 같아, 서로 상대방을 존경할 줄 알았습니다. 황씨 부인은 시집오신 그 해에 바로 아들(현공의 맏형)을 낳았으며, 3년 뒤에는 딸(현공의 누이)을 낳았습니다.
그 후 두 번째 아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황씨 부인의 유방에 종기가 자라서 아이에게 모유를 먹일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방도가 없어서, 둘째 아들을 친척에게 보내어 양육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현공이 태어났을 때, 황씨 부인의 나이는 29세였습니다. 문씨 집안은 대가족이었으므로, 사촌형제 간의 장유의 서열에서 현공은 일곱째였습니다.
황씨 부인은 35세 때에 또 다시 아들을 낳았는데, 생긴 모습이 대단히 준수하였으며, 사촌간의 서열은 여덟 번째였습니다. 이 어린 아들이 태어난 지 몇 개월이 채 되지 않았을 때, 어느 한 탁발승이 집에 와서 황씨 부인에게 이 아들은 비록 외모가 출중하고 준수하지만, 그러나 문씨 집안에서는 오히려 제대로 성장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과연 그 탁방승의 말대로 이 어린 아들은 태어난 후로 줄곧 몸이 허약하고 병이 많고 재앙이 많아, 걸핏하면 여기저기 넘어지고 부딪치면서 세 살까지 성장하였습니다. 황씨 부인은 이 어린 아들이 불쌍해서, 남편과 상의한 후 자식이 없는 친정 쪽 친척에게 양자로 보내었습니다.
그 당시에 여러 해 동안 계속된 흉작과 도적의 환난은, 원래 그다지 넉넉하지 않은 이 가정으로 하여금 급속도로 빨리 곤경에 빠지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현공의 누이가 그 시절에는 치료하기 어려운 폐병에 걸리는 바람에, 이미 생계조차 유지하기 어려운 이 가정을 더욱 곤경에 처하게 하였습니다. 딸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부친 문수근은 선조가 남겨주신 7묘의 척박한 밭을 팔고서 맏아들과 남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며 솜 타는 일을 하였으며, 나이가 겨우 아홉 살밖에 안 된 현공까지도 부잣집에 보내 소치는 일을 하여 집안 살림에 보태었습니다.
현공이 열두 살이 되던 해에, 하남성은 큰 가뭄이 들어서 낱알조차도 수확하지 못하였습니다. 부친 문수근이 고용살이하던 솜 타는 가게 역시, 할 수 없이 장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이러한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부친 문수근은 하남성과 인접해 있는 호북성 수주에 가서 밥을 구걸하여, 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였습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나쁜 도적떼를 만나, 타향에서 객사하셨습니다. 현공은 부친께서 해를 당하신 그해에, 부친의 연세가 48세이셨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난 지 얼마 안 있어, 큰 형이 또한 강제로 징집되어 군인이 되었으며, 그 후 형제가 다시 서로 만난 것은 이미 24년이란 긴 세월이 지난 후였습니다.
또한 뒤 이어 바로 현공의 둘째 형을 양자로 삼아 기르던 친척집에 변고가 생겼기 때문에, 부득이 15살이나 된 아이를 다시 문씨 집안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둘째 형은 몸이 허약하고 걸핏하면 병을 앓았기 때문에, 그가 집으로 돌아온 것은 도리어 집안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누나의 병이 다 완치되었으며, 또한 그 이듬해에 시집을 갔습니다.
집안에는 농사지을 땅이 없었으므로, 황씨 부인은 어쩔 수 없이 남의 집에 기대어 바느질하고 수선하고 옷을 빨아 풀을 먹이는 일들을 하였으며, 이러한 잡일을 하여 얻은 보잘 것 없는 품삯으로, 이 만신창이가 된 가정을 힘겹게 지탱하셨습니다.
현공은 이전에 여러 차례 모친의 손재주에 대해 언급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황씨 부인은 여자들이 하는 길쌈을 비롯해서, 바느질과 수예 등을 대단히 잘 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늘 밤을 새워가며, 술이 달린 허리끈(汗巾)에 수를 놓고, 꽃신에 수를 놓아, 그것을 가지고 밖에 나가 팔아서 먹을 양식과 바꾸셨습니다.
현공은 어머니께서 너무나 힘들게 고생하시는 것이 마음 아팠기 때문에, 어머니를 속이고 몰래 밖에 나가 밥을 구걸하였으며, 이렇게 하여 집안 살림에 대한 어머니의 부담을 줄여드렸습니다. 3개월이 좀 더 지난 후에 결국에는 어머니에게 들켰으며,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 바탕 통곡하셨으며, 다시는 현공에게 밖에 나가 먹을 것을 구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주집가朱集街에 성이 최씨인 음식점 주인이, 현공의 효행孝行을 들은 후 대단히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주인 최씨는 자신이 친히 현공의 집에 찾아 와서, 나이가 겨우 13살밖에 안 된 현공을 자신의 음식점에 와서 일을 도와줄 것을 청하였으며, 이때부터 집안 형편이 조금씩 나아졌습니다.
현공은 그 음식점에서 5년 동안 일하였으며,
18세가 되던 그 해에, 큰 병을 앓음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였습니다. 이는 《해회성현》 중에 이미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더 이상 자세히 서술하지 않겠습니다.
현공이 19살이 되던 그 해에, 22살이었던 둘째 형이 병으로 인해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이 일은 막 생사生死의 대겁大劫을 경험한 현공으로 하여금 출가하여 수행할 결심을 철저하게 굳히게 하였습니다.
또한 바로 이 해에 양자로 보내졌던 동생이 양부모가 두 분 다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다시 문씨 집안으로 돌아와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현공이 모친을 떠나 동백산에 올라간 후, 황씨 부인은 어린 아들과 서로 의지하며 고생하며 어렵게 지내셨습니다. 현공은 자애로운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산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땅에 씨를 뿌리고 약초를 캐어 양식과 바꾼 후, 양식을 등에 짊어지고서 100리 길을 걸어 고향집에 가서 모친을 봉양하셨으며, 이렇게 하기를 9년 동안 중단하지 않으셨습니다.
민국 18년(1929년), 현공의 22살 된 어린 남동생이 또 불행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로 인해 어머니를 보살필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자, 현공은 이 일이 매우 마음에 걸렸으므로, 그래서 당장 어머니에게 자신과 함께 동백산 동화동에 가서 사실 것을 권하였습니다. 이렇게 한 번 올라와 머무신 것이, 27년 동안 함께 사셨습니다.
1957년, 막 중추절이 지났을 때, 황씨 부인께서는 별안간에 느닷없이 현공에게 고향집으로 돌아가 사시고 싶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현공은 어머니에게 돌아가시지 말라고 권하였는데, 그 이유는 고향집은 이미 없어지고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의 뜻을 고집하며 기필코 돌아가시고자 하셨습니다. 여러 번 간곡하게 권유하였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후, 현공은 짐을 싸서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당하현 초사촌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를 우선 마을의 어느 한 이웃집에 지내도록 하신 다음, 현공은 촌장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촌의 지부支部의 동의를 거친 후, 생산대 채지에 있는 세 칸짜리 초가집을 수리하였으며, 그렇게 한 후 어머니와 함께 그곳으로 옮겨 들어가 지내셨습니다. 현공 모자 두 분은 이곳에서 한편으로는 염불하셨으며, 또 한편으로는 생산대를 도와 채소를 가꾸셨습니다.
1957년 7월 4일 저녁에, 황씨 부인은 손수 밀가루를 반죽하여 만두를 빚어서 드셨으며,
그리고 현공에게 그의 누나와 손아래 사촌누이에게 편지를 갖다 주고, 그들에게 '다음날' 반드시 집에 와야 한다는 말을 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오전에, 현공의 누나와 손아래 사촌누이가 백설탕과 통조림을 들고서 집에 왔습니다. 노부인은 너무나 즐거워하시면서 그녀들을 위해 손수 만두를 빚으셨고, 또 자신이 직접 통조림을 따서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다 드셨으며, 또 설탕물을 한 사발 마시셨습니다.
그렇게 하신 후 모두에게 말씀하시길, “난 배가 고프지 않으니, 오늘 점심은 먹지 않을게야.” 그렇게 말씀하신 후에, 나가서 소변을 보셨습니다. 잠깐 지나서 또 대변을 보시러 가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돌아오셔서 침상 위에 잠시 누우셨으며, 혼자서 웃으시면서 말씀하시길, “나는 다시 잠시 앉아야지!”그리고 책상다리를 하고서 다시 잠깐 앉아계셨으며, 그렇게 하신 후에 길상와吉祥臥로 침상 위에 누워 숨을 한 번 길게 내시고는 왕생하셨습니다.
현공의 누나는 자신의 눈으로 직접 어머니께서 왕생하신 불가사의함을 보았기 때문에,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데리고 함께 동백산에 가서 출가하여 수행하셨습니다.
이상은 바로 현공의 어머님 황씨 부인의 일생에 대한 간략한 총결이며, 이는 전부 현공께서 생전에 들려주신 것이며, 이 가운데 대부분은 참조할 수 있는 현공의 영상자료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말학은 현공의 어머님의 일생에 대해 수식하지 않고 진솔하게 사실 그대로 서술하였으며, 결코 조금의 의론도 그 안에 보태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을 살펴보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학인學人들이 진정으로 입장을 바꾸어 다른 사람이 처한 상황에서 그 사람을 한 번 생각해보고, 또 사람이 정으로 느끼는 감정과 마땅히 행해야 할 도리로 미루어 헤아려 여러 번 숙고해 봄을 통해서, 말학이 느끼는 감정의 영향을 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말학이 여러 번 생각한 뒤 이런 저런 형용사들을 끌어다가 현공의 어머님을 찬탄해보았지만, 결국에는 무색함을 느꼈으며, 저는 동진 시대에 범규范逵(생졸연대 미상)가 일찍이 도간(陶侃: 257~332년)의 어머니를 찬탄했던 “이 어머니가 아니었으면 이런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으리라!”(非此母不生此子)고 한 말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남양사범대학 섭진도교수가 시를 한 수 지어, 현공의 어머님을 찬탄하셨습니다.
태어나 어지러운 세상 만나 육신이 뜻대로 되지 않고, 다섯 아들 두어 온갖 어려움과 고생 겪으셨네. (生逢亂世不由身, 有子五兮歷苦辛.)
중도에 아들들이 의지할 아버지 세상 떠나는 것 직접 보았나니, 어머니 홀로 외로운 배 노를 잡아 강나루 건너셨네. (中道眼看兒失怙, 孤舟獨掌渡河津.)
스스로 타고난 수명이 86세임을 아시고, 대청에 누워 자손들과 작별하셨네. (自知大限八十六, 臥寢中堂別子孫.)
정과正果를 마침내 성취한 효성스런 아들 있어, 훌륭하신 어머니 정토에 봉안하셨네. (正果終成有孝子, 足安淨土好娘親.)
(주) 정과正果 : 도를 닦아 증득하여 깨달은 것이 있는 것을 가리킨다.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글 속에 나오는 현縣의 이름과 향진鄕鎭의 이름은 기억하기 쉽게 하기 위해, 지금 현재 속해 있는 지역에 의거해 기재한 것이니, 너무 얽매이지 않으시길 바랍니다.
현공의 어머니는 실제로 래불사에 들어가 지내신 적이 없기 때문에,
정공노법사께서 “래불사의 세 분 성인”이라는 말씀을 언급하셨을 때, 말학은 인지법사를 대신하여 노법사님께 “세 분의 성인”이란 표현이 적합한지에 대해 가르침을 청한 적이 있습니다. 노법사는 분명하게 밝혀주시며 말씀하시길, 래불사는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며, 단지 사원 안에만 국한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말학은 노법사의 가르침을 간파하였으며, 그 순간 바로 그 가르침으로 인해 마음의 눈이 환하게 열렸습니다. 이에 즉시 석가모니 부처님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하마야摩訶摩耶”이며, 중국어로는 뜻이 “대환大幻”이며, 대환술大幻術을 잘 시연示演하여 항상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가 되셨기 때문에, “마하마야”라는 이름을 얻으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
보살이 꿈에 들어와 연기하는 것은, 꿈속에 깊이 빠져있는 사람을 일깨우기 위함입니다.(菩薩入夢來演戲, 爲喚沉迷夢中人.)
― 조과鳥窠선사가 향산香山거사에게 보낸 시 한 수를 지금 여기에 수록합니다.
(주) 조과鳥窠선사 : 753~833년. 당나라 때의 유명한 선승. 속성은 潘이고, 本號은 道林이고, 법명은 圓修이다.
(주) 향산香山거사 : 722~846년. 당나라 때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를 가리킨다.
올 때도 종적이 없고 갈 때 또한 자취가 없나니, 가고 올 때의 일이 하나이며 같네. (來時無跡去無蹤, 去與來時事一同.)
어찌 다시 뜬 구름 같은 삶의 일을 물을 필요가 있으랴! 단지 이 뜬 구름 같은 삶의 일은 '꿈속의 일'일뿐일세. (何須更問浮生事, 只此浮生是夢中.)
11편 ♣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7 - 비명碑銘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8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1 (정공법사님 서문) --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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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0 - 제2장. 해경노화상: 단전에 보물 있으니, 도를 찾지 말라-- 112세 해현 노스님 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15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17:제9장. 천 분 부처님 항상 세상에 머물 수 있기 원하네 (願得千佛常住世)-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2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23 :제 15장.사나운 모래를 불어 다 걸러내야 비로소 황금이 나타나리라-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28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27:제19장.부처님 명호 공덕 불가사의하네- 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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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세 해현 노스님의 어록 (증보판)https://cafe.daum.net/bangseng/RgWK/1
112세 해현 노스님의 어록 (증보판)
112세 해현 노스님의 어록 (증보판)
내불사 112세 해현 노스님 어록1-11 (각정정보살님 번역법보시). (증보판).hwp
어록1
노스님께서는 저희가 가는 것을 배웅하려고 사원의 문밖까지 걸어 나오셨으며, 저희에게 거듭 간곡하게 당부하시길,
“염불해야 하네. 그 외의 나머지 다른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거짓'인 게야!”
또 저희에게 이르시길,
“난 새벽 3시, 어느 때에는 밤 1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염불하네.
때로는 염불할 때 입 밖으로 소리를 내지 않고 마음속으로 염불하네.”
저는 그 말씀을 듣는 그 순간 바로 노스님께서 하시는 염불이 금강지염불법이며, 언제 어디에서나 항상 선정 속에 계시며, 항상 염불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金剛持念佛法: 염불하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입술이
움직이지 않고, 치아를 움직여서도 안 되며, 단지 입을 약간 벌리고 혀를 움직여 염불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때에 소리는 입술과 치아 사이에 있도록 해야 하며, 입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재왕생하시기 4일전 112세 해현 노스님의 모습(1900.8 - 2013.1.17)(한국연세 114세)
어록 2
노스님께서는 또 웃으시면서 모두에게 이르시길,
“우리 이곳은 작은 절입니다. 그래서 먹는 것은 맛없는 쓴 음식이고, 입는 것은 다 헤지고 떨어져서 기운 옷입니다.
여러분이 어차피 우리 이곳에 왔으니, 힘든 고통을 참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참아낼 수 있어야, 고통을 끝마칠 수가 있답니다. 여러분이 우리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내가 나무라는 말을 하지 않겠지만, 어차피 이미 여기에 온 이상 이곳 우리의 계율을 지켜야 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반드시 간 그곳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112세로 자재왕생하시기 넉 달 전인 추석 전 날, 절에 오신 분들께 감을 대접하려고 손수 감나무에 올라 감을 따시는 모습
어록 3
옛 대덕께서 말씀하시길,
“마음이 텅 비어진 경지에 이르렀을 때 이익을 얻을 수 있으며,
일은 자신이 몸소 겪은 것이 아니면 그 어려움을 알지 못한다.”
해현노스님께서는 매번 이 지나간 일(일찍이 예전에 탑원사에서 해묵법사․해원법사․체광법사 등 이 세 분 법사와 초막집을 짓고 함께 수행하신 적이 있으셨던 일)을 이야기하실 때마다, 이들 세 분 법사께서 계율을 지키고 수행하신 공부를 힘껏 찬탄하지 않으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낮추시고 남을 높이시는 노화상의 한없이 넓으신 도량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도 모르게 저절로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흠모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어나게 하십니다.
여러 해 전에 어떤 한 전기요금 수급원이, 무턱대고 다짜고짜 노화상의 따귀를 때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노스님께서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길,
“참으면 그만이네. 참을 수 있으면 마음이 편안하지.
남이 나를 때리면, 그가 나의 가려운 곳을 긁어줬다고 여기고,
남이 내 얼굴에 침을 뱉으면, 그가 내 얼굴을 씻어줬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과 서로 우열을 다투고 따지지 않으면 번뇌가 없으며,
참으면 마음이 자연히 편안해!”
어록 4
그 당시에 노스님께서는 한창 젊은 나이여서 부지런하셨고, 손발놀림 또한 매우 빨랐으며, 무슨 일을 하거나 자신의 힘을 조금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물 긷는 일, 채소 씻는 일, 밥 짓는 일, 솥과 그릇 닦는 일 등등 언제나 늘 앞장서서 하셨습니다.
또한 사형과 사제들에게 될 수 있는 한 이러한 일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셨으며, 마음속으로 언제나 늘 그들로 하여금 불도를 수행하는 시간을 더욱 더 많이 가질 수 있도록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노스님께서는 사원의 위아래의 일, 안과 바깥의 일을 전부 도맡아 하셨으며, 심지어는 화장실까지도 깨끗하게 청소하고 정리하여, 다른 이들로 하여금 쾌적하고 편안한 환경 속에서 지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형과 사제들의 옷가지와 그들이 사용하는 물건, 사원의 법기法器까지도, 모두 혼자서 때에 맞추어 깨끗하게 닦고 정리하여 더러운 것이 묻지 않도록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노스님이 이렇게 행하는 것을 은사이신 전계화상께서는 보시고서, 항상 제자들에게 이르시길, “해현은 참으로 실제생활 속에서 불도를 닦고 있지. 이는 가장 행하기 힘든 일이네!”라고 하신 말씀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어록 5
해현노스님께서는 또 저희들에게 말씀하시길,
“염불수행은, 힘든 고생을 참아 견뎌낼 수 있어야 하네.
고통을 스승으로 삼고, 계율을 스승으로 삼으며, 공양을 받아 누리려고 생각해서는 안 되네.”
그 말씀을 하시고 나서 다시 구체적으로 이르시길,
“맛없는 쓴 음식을 먹고, 다 떨어진 기운 옷을 입고, 만약 화상이 되고 싶으면,
아낙(이는 화상이 되려면, 우선 마치 그 당시에 시집간 여자가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바느질하고, 시부모를 봉양하고, 자식을 보살피는 것처럼, 이런저런 일을 가리지 않고 다 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을 아낙에 비유한 말이다)이 될 수 있어야 하네.(남의 시중을 들고 돌볼 줄 알아야 하네) …… ”
어록 6
비록 해현노스님께서는 지금 이미 연세가 112세의 고령이 되셨을지라도,
만약 어느 곳이든 가실 일이 있으시면, 늘 언제나 지금까지도 여전히 실과 바늘을 넣은 꾸러미, 송곳, 가위 등 작은 공구들을 몸에 지니고, 그곳에 가십니다.
노스님 자신이 사용하는 도구나 몸에 걸치는 옷은 전부 손수 닦고 빨래하시고, 손수 꿰매시며, 지금까지 입을 열어 남을 귀찮게 하거나 번거롭게 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노스님께서 말씀하시길,
“내가 아직은 몸도 움직일 수 있고, 눈도 어둡지 않아. 그러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스스로 해야지.
어떤 일이고 전부 다 남을 시켜 돌보고 시중들게 하면, 의지가 약해져서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뒷걸음치게 될 것이야.”
공양받으신 승복이 길자 늘 몸에 지니고 다니던 실 바늘을 꺼내 그 자리에서 단을 줄이시는 모습
어록 7
노스님께서는 거사들이 부처님께 절하는 자세가 제멋대로 법도에 맞지 않게 하고 위의가 부족한 것을 보시고는, 그 자리에서 당장 모두를 위해 바르게 절하는 자세를 몸소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말씀하시길,
“부처님께 절하는 마음은 정성이 지극해야 해.
등을 평평하게 펴서 그 위에 물 사발을 올려놓아도 조금도 쏟아지지 않도록 해야 하네. 절할 때의 자세는 마치 개구리의 엎드린 자세와 같아야 하지. …… ”
노스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또 한편으로는 절을 하시어 몇 번이나 저희에게 절하는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평소에 노스님께서는 방석 위에서 부처님께 절을 하신 적이 없으시며, 언제나 늘 방석을 깔지 않은 채 맨 바닥에서 절을 하셨습니다. 이처럼 노스님의 부처님에 대한 공경과 정성은, 더할 나위 없이 지극하셨습니다.
또 노스님께서 이르시길,
"부처님께 절을 할 때에는 자성이 나오도록 절을 하여야 하며, 청정한 마음이 나오도록 절을 하여야 하네"
중국의 법당은 신발을 신고 들어가게 되어있고, 바닥이 마루가 아닌데도 맨바닥에서 절하고 계십니다
어록 8
해현노스님께서는 저희들에게,
어르신의 눈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좋으며, 어떠한 것도 좋지 않은 것이 없으며, 어느 것을 보아도 다 좋다고 말하고,
어느 것을 보아도 다 기뻐야 마음속이 항상 법희로 충만할 수 있으며,
또한 그렇게 해야 마음속이 청정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해야 남에게 화를 내거나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는 분별이 없고, 또 이것은 맛있고 저것은 맛없다는 분별이 없으며, 일체를 다 인연을 따르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록 9
저희들이 제목이 《약요불법흥, 유유승찬승 若要佛法興, 唯有僧讚僧》(만약 불법을 흥성하게 하려면, 오직 승가가 승가를 찬탄하는 것일 뿐이다)인 책을 가지고서 노스님을 찾아뵈려고 갔었을 때,
노스님께서는 이 책의 제목을 들으시고는 대단히 기뻐하셨으며, 자발적으로 노스님께서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는 가사를 꺼내시고는 저희에게 이르시길,
“내가 이 가사를 걸치고 이 책을 손에 들고 있을 테니, 자네들이 나에게 사진을 찍어주게나.”
마치 노스님께서는 이러한 표법表法이 가장 의의가 있다는 것을, 아시는 것 같으셨습니다.
자재왕생하시기 4일전 "승찬승" 책을 들고
112년 평생 처음으로 "사진을 찍어주게나" 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어록 10
해현노스님은 이 세간에 머물러 수행하신 100년이 넘는 긴 생애 속에서,
계율을 스승으로 삼고, 고통을 수행으로 삼으셨으며, 도심道心이 견고하고, 계율을 전일하고 엄격하게 지키셨습니다.
노스님의 순박하고 진실하고 겸손하고 온화하신 성품은, 사람들이 노스님 곁에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또한 일생동안 명예와 이익에 담담하여 욕심이 없으시고, 겉만 화려하게 꾸미는 직함에 물든 적이 없으셨습니다.
노스님은 이 세간의 습속을 따라 인연을 맺으시고, 항상 중생을 따르셨습니다. 이는 마치 사발 속에 담긴 맑고 깨끗한 물이, 사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주고 만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윤택하게 해줍니다.
노스님께서는 남양 사기현 “래불사”라는 궁벽한 시골의 작은 절에 몇 십 년 사시는 동안,
농사짓는 일과 참선을 둘 다 중시하셨으며,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의 종자를 널리 퍼뜨렸습니다.
밭에 계실 때에는 땅을 갈고 풀을 뽑으셨으며, 사원 안에 계실 때에는 등불을 켜고 향을 사르고 장작을 패고 밥을 짓는 등 하루도 쉬시는 일이 없으셨습니다.
경참불사經懺佛事를 하지 않으셨으며,
오로지 한 마디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만을 뼈에 새기고 마음에 새기시어, 밭에 계실 때나 대전에 계실 때나 꿈속에 있을 때나, 혹은 걸어 다니실 때나 서 계실 때나 앉아 계실 때나 누워 계실 때나, 어느 한 순간도 “아미타불”의 성스러운 명호를 일찍이 내려놓아 잃어버리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노스님은 곁에 있는 인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늘 당부하시길,
“땔나무를 옮기고 물을 긷고 하는 이러한 일들이, 도가 아닌 것이 없네. 거칠고 소박한 밥과 반찬이 모두 수행일세.
열심히 염불하게나. 부처가 되는 것이 대사이며, 그 외의 나머지 다른 것은 그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거짓이네!”(搬柴運水, 無非是道: 粗茶淡飯, 皆是修行, 好好念佛, 成佛是大事, 其他啥都是假的!)
어록 11
해현노스님께서는 은사이신 전계화상의 가르침을 공경히 따라,
일생동안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육자홍명六字洪名을 마음속에 지니고서 시시각각, 날마다, 달마다, 해마다 일찍이 중단한 적이 없으시며, 매일 일찍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염불하셨습니다.
노스님께서는 부처님께 절하실 때, 방석을 사용하지 않음을 끝까지 견지하셨습니다.
염불을 하시다가 힘이 다해 지치거나 절하시다가 힘이 다해 지치시면, 잠깐 눈을 감고 잠을 잤으며,
잠에서 깨어나면, 다시 계속해서 염불하시고 계속해서 절을 하셨습니다.
한 마디 “나무아미타불” 성호聖號를 뼈에 새기시고 마음에 새기시어, 대전에 계실 때나 밭에 계실 때나 산에 계실 때나, 혹은 걸어 다니실 때나 멈추어 계실 때나 앉아 계실 때나 누워 계실 때나, 일찍이 한 순간도 “나무아미타불” 성호를 잃어버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노스님께서는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하시길,
“열심히 염불하게나. 부처가 되는 것이 대사이네. 그 외의 나머지 다른 것들은 그 어떠한 것도 모두가 다 거짓인 게야!”(好好念佛, 成佛是大事, 其他啥都是假的!)
♣
내불사 112세 해현 노스님 어록1-11 (각정정보살님 번역법보시). (증보판).hwp
♣ 각정정보살님께서 지극한 정성으로 해현노스님의 어록을 또 다시 다듬는 번역불사 하신후
정리를 마치시고 무상법보시하여 주셨습니다. 깊으신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해현 노스님께서 실천하신 법의 향기가 온 누리에 퍼지길 .............
나무 아미타불 나무 관세음보살 ()()()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30:제22장.연지해회에서 서로 만나길 원하네 - 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https://cafe.daum.net/bangseng/RgWK/35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30:제22장.연지해회에서 서로 만나길 원하네 - 112세 해현 노화상이야기
내불사 세 성인을 영원히 사모하며 (내불삼성영사집 來佛三聖永思集) 30
정공법사님께서 강설하신 책으로, 무량수경 5가지 번역경전을 모두 모은
<불설대승무량수장엄청정평등각경>(하련거거사님 회집본)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제22장. 연지해회에서 서로 만나길 원하네 (蓮池海會願相逢)
영박榮博
2013년 1월 13일, 저와 의오염불당의 유劉거사, 부付거사, 증曾거사, 장張거사 일행 다섯 사람은
사기현 래불사에 가서 112세의 해현노화상을 찾아 뵈웠습니다.
그날은 날씨가 유달리 구름 한 점 없이 쾌청하여, 엄동의 음력 섣달의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졌습니다. 저와 유거사가 노화상의 료방에 들어갔을 때, 어르신께서는 빛깔이 이미 누렇게 바랜 책자를 하나 들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저희들이 그 책자를 받아서 펴서 보았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노화상께서 구족계를 받으신 계첩戒牒이었습니다.
노화상은 저희들을 보고는 몹시 기뻐하는 기색을 보이셨으며, 또 지난달에 찍은 사진 몇 장을 꺼내시어 저와 유거사에게 한 장씩 주셨습니다. 자비하신 어르신의 모습을 좀 보십시오! 저는 그 어르신의 모든 것을 대단히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래서 사진을 매우 조심스럽게 저의 특별한 가방 속에서 넣어 간직하였습니다.
저희가 사원에 주려고 가지고 온 《약요불법흥, 유유승찬승若要佛法興, 唯有僧讚僧》이라는 책을 차에서 내릴 때, 유거사가 그 중 한 권을 가져다 먼저 노화상께 드렸습니다.
어르신은 책 제목을 들으시고는 대단히 기뻐하셨으며, 정말로 유거사가 형용한 것처럼 마치 이미 오래 전부터 간절히 원하던 보물을 얻으신 것과 같은 표정이셨습니다. 어르신은 그 자리에서 당장 새 가사를 찾아 꺼내시더니 장중하게 승포僧袍를 입고 그 위에 가사를 걸치셨으며, 또 아주 꼼꼼하게 몸의 앞과 몸 뒤의 세세한 부분까지 일일이 한 차례 점검하고 정리하셨으며, 그렇게 하신 후에 말씀하시길, “내가 이 책을 들고 있을 테니, 자네들은 나에게 사진을 찍어주게나?”
지금 모두가 보고 있는, 노화상께서 두 손으로 《승찬승僧讚僧》을 바쳐 들고 계시는 그 사진이, 바로 그 당시 아주 잠깐 사이에 남기신 더없이 완벽하고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저는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마치 어르신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만약 불법을 흥성하게 하려면, 오직 승가가 승가를 찬탄하는 데에 있을 뿐이다. ……”(若要佛法興, 唯有僧讚僧)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저희 몇 사람은 이 사람이 한 마디 여쭈고 저 사람이 한 마디 여쭈면서, 노화상께 가르침을 청하였습니다.
그때 순간 갑자기 저는 그지없이 장엄하신 어르신의 얼굴을 발견하고서, 그 자리에서 저도 모르게 엉겁결에 말하길, “노화상님, 어르신께서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시면, 저희들을 데리러 오시는 것을 절대로 잊으시면 안 됩니다!”
그러자 제 말에 어르신께서 연거푸 대답하시길, “데리러 와야지! 암 데리러 오고말고!” 그 말씀이 다른 때와 달리, 유달리 확고하고 힘이 있으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어르신은 얼굴에 마치 아름다운 연꽃이 활짝 핀 것처럼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그 순간 저는 갑자기 기이한 향기를 맡았으며, 무의식적으로 사방 주위에 무슨 꽃이 피어있는 것이 아닌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나무 위의 마른 가지와 시든 잎을 보고서야, 저는 돌연히 제정신으로 돌아왔으며, 지금은 바로 엄동인데, 어디에 피어있는 무슨 꽃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이 향기는 결코 꽃 냄새가 아니었습니다!
저는 고개를 돌려 한창 열심히 사진을 찍고 있는 증거사를 부르며, “혹 무슨 향기를 맡으셨습니까?”하니, 그들 몇 사람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 똑같이 “맡았어요!”라고 말하였습니다. 향기는 대략 3분 정도 지속되었으며, 노화상 곁에 있던 거사들 역시 동시에 자신들이 서있는 그 자리에서 나는, 먼 곳으로부터 가까이 곁에 와서 풍기는 이 미묘한 향기를 맡았습니다. 정말로 “만물의 공명空鳴을 마음속으로 알지만, 말로 전할 수 없는 그 미묘한 곳을 여러분들에게 말해주어 함께 나누기가, 실로 어렵습니다.”(悠然心會, 妙處難與君說.) ……
그때 저희들과 헤어지기 아쉬워하시던 노화상의 모습이 생생하여, 지금까지도 눈에 선합니다. 그때의 광경을 정말로 저로 하여금 잊기 어렵게 합니다! 저희들은 차를 세워둔 곳까지 걸어왔으며, 어르신 또한 차 앞까지 오셔서 저희를 배웅해주셨습니다. 저희들은 다시 한 번 노화상께 정례하고 “가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자,
노화상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길, “염불해야 하네. 다른 것은 모두 거짓인 게야!
― 난 매일 3시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불상 앞에서 20분 염불하고, 곧 바로 요불하며, 그렇게 한 후에 다시 앉아서 염불하네.
어느 때에는 소리를 내서 염불하고, 어느 때에는 소리를 내지 않고 염불하며, 또 많은 시간은 마음속으로 염불하지.
부처님께서는 언제나 늘 내 마음속에 계시네.”(要念佛啊, 其它都是假的! ― 我每天三點起床拜佛, 在佛像前念二十分鐘, 隨後繞佛, 然後再坐下念, 有時出聲, 有時不出聲, 更多時候是默念, 佛時時都在心中.)
아마도 저희들에게 더욱 강렬하게 마음에 새기게 하기 위해서 이셨는지, 어르신은 다시 한 번 더 저희들에게 신신당부하시길, “어느 때이건, 남을 귀찮게 하지 말라!
평소에 남들이 내 그릇에 담아준 밥이 많아도 괜찮고 적어도 괜찮으며, 나는 언제나 무어라 말하지 않으며, 내 그릇에 담아주는 대로 먹네.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이리저리 바삐 뛰어다녀야 할 게야. 그래서 난 남을 번거롭게 하는 것을 원치 않아!”(什麼時候都不要給別人添麻煩! ― 平時他們給我盛飯, 多也好, 少也好, 我都不會說啥, 盛多少吃多少, 不然人家還要跑來跑去, 我不願麻煩別人!)
저는 어르신의 명치가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씀드리길, “어르신의 이곳은 정말로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시죠!”(您這是不增不減啊!) ……
당시에 무엇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저희들은 또 한 사람 한 사람씩 자신들의 이름을 노화상께 한 번 더 분명하게 알려드렸으며, 마치 노화상께서 우리 자신들을 잊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 이것이 해현노화상께서 이번 생에 이 세간에서, 저희들과 마지막으로 보고 마지막으로 하신 약속입니다! 저희들은 노화상께서 한 사람 한 사람 저희들을 모두 분명하게 기억하고 계실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현공상인께 정례합니다! 제 이름은 영박이며, 어르신께서는 반드시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었을 때 저를 데리러 오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인연생거사)
나무아미타불! 《전국책․중산책》에 보면, “욕망이 같은 사람들은 서로 미워하고, 근심이 같은 사람들은 사이가 서로 가깝다.”(同欲者相憎, 同憂者相親)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현공은 정공노법사와 평생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으십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승찬승僧讚僧》을 보고서 오히려 더할 나위 없이 기뻐하셨는지 그 이유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천인天人의 찬탄을 받는다 해도 역시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지난해 동백산에 가서 현공의 평생 행적과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할 때, 영박거사 역시 함께 그 일에 참여하셨습니다. 그는 바르게 알고 바르게 보며, 절대로 거짓으로 말하고 거짓으로 행하는 일이 없습니다.
그의 일행들이 《승찬승僧讚僧》을 현공에게 보내드린 것은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정공노법사는 경전을 강설하실 때 이미 인증印證하시면서 “아미타불께서 현공을 빌려서 법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阿彌陀佛說要借賢公表法)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특히 이 일을 가리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거짓말은 바로 불문의 근본대계根本大戒입니다. 현공께서는 이미 “반드시 데리러 오겠다.”고 대답해주셨으니, 분명 사람들의 믿음을 저버리실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저희들은 극락세계는 원래 중생의 유심정토唯心淨土이고, 자성미타自性彌陀이라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중봉삼시계념中峰三時繫念》에서는 바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황금빛 팔 밤낮으로 항상, 곧게 내려뜨리고 계시지만, (黃金臂晝夜常垂)*주1
오로지 염불하는 사람의 청만을 들어주실 뿐이라네. (惟許行人獨委)*주2
백호광명을 옛날부터 지금까지 감추지 않나니, (白玉毫古今不昧)*주3
오로지 발원에 기대는 사람만이 승당할 수 있으리. (全憑願者承當)*주4
주1: 이는 아미타불께서 마음이 급박하고 절실하여 때를 기다릴 여유가 없어서, 시시각각 항상 손을 드리우고 기다려, 우리를 접인하여 서방에 왕생하도록 하심을 비유한 말이다.
주2: 아미타불은 비록 환한 대낮이나 컴컴한 밤에 황금빛 팔을 곧게 드리우시고서 그곳에 서 계실지라도,
그러나 오직 염불하는 사람의 청에 응답하실 뿐이고, 오직 깊이 믿고 간절하게 원하여 서방에 왕생하기를 구하는 사람만을 윤허하실 뿐이며, 오로지 믿음과 원願과 행行이 다 갖추어 있어야 부처님께서 접인하심을 가리킨다.
주3: 불매不昧는 불상불실不爽不失하여 옛날부터 변함없이 항상 그러하다는 뜻이다. 이 구절은 아미타불의 미간의 백호광명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일체 중생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주4: 아미타불의 광명은 오직 “원願”자가 있어야만, 비로소 받아들여 감당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정공노법사는 현공의 최후의 표법表法을 말씀하실 때, 저희들을 위해 바른 지견知見을 열어 보여주셨습니다.
“해현노화상님의 표법表法은 우리들에게 세 가지를 증명해주셨습니다.
첫째는 하련거노거사의 회집본은 정확한 것이니 의심해서는 안 되며,
둘째, 황념조노거사의 집주 또한 정확한 것이고, 바른 법이며,
셋째, 우리가 최근 20, 30년 동안 이 회집본을 널리 알리고, 이 회집본에 의거하여 학습한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실하게 증명해주셨습니다.
우리가 《대승무량수경과주大乘無量壽經科註》를 학습한 세 번째의 원만을, 해현노화상께서 92년 동안의 표법表法이 우리에게 최후의 총결을 해주셨습니다. 《무량수경》은 석가모니 세존과 연공대사蓮公大士께서 우리를 위해 시전示轉과 권전勸轉을 해주셨으며, 황념조노거사의 주해는 권전勸轉이며, 해현노화상은 증전證轉을 해주신 것입니다. 삼전법륜三轉法輪이 모두 우리 앞에 있는데, 우리가 어찌 믿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 시전示轉 권전勸轉 증전證轉 : 아미타불께서 因地인지에서 일으킨 48대원과 5劫겁을 걸쳐 수행한 공덕으로 자연히 성취한 극락세계가 분명히 있으며, 따라서 진실로 믿고 간절하게 발원하여 일심으로 염불하면 반드시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시전示轉이라 하고,
극락세계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도록 권하는 것을 권전勸轉이라 하고,
일심으로 오로지 염불하여 왕생을 구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함을 증명해주는 것을 증전證轉이라 한다.
30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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