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광원 벽제분원 박공순 원장
‘동광원’이라는 푯말이 가리키는 곳으로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산길은 계속 이어졌고, 산길을 따라 흐르는 계곡 안쪽으로 몇몇 집들이 보이긴 했어도, ‘동광원’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계곡 옆 취사장 부근에 한 사람이 서 있어, 길을 물었다. 일러 준 대로 아랫길로 내려가 보니 들어가는 곳부터 넓은 밭이 펼쳐져 있다. 거기엔 전날 내린 비로 한층 푸르러진 각종 작물들이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마침 점심 무렵인지라, 몇 분은 식사를 하고 계시고, 또 몇 분은 마당에 앉아 콩나물을 다듬고 있다. 남자도 있고, 의외로 젊은 분들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곳의 농사일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이었다. 감기 몸살로 편찮아 방에 누워 계시던 박공순 원장이 전갈을 받고 나오셨다. 순간 개망초가 아른거렸다. 작고 여린 꽃, 하지만 어느새 여름 들판을 뒤덮곤 하던 꽃. 전날의 통화를 통해 들었던 부끄럼을 타는 듯한 음성이 또다시 들려왔다. 2일 전 수화기를 통해 박 원장은 ‘할 얘기도 없고, 여긴 볼 것도 없어요.’ 그러셨다. 그리곤 ‘나는 말도 못하는데…’ 하시며 기꺼이 승낙해주셨다. 그랬는데 아프시다니 더 송구스러워졌다.
“윗집으로 가시지요.” 안내를 받아 간 곳은 새로 지은 집이다. 1995년도에 시작해서 작년에야 완성된 집이다. 박 원장은 현관에서 신발을 벗어 신발코가 바깥을 향하도록 가지런히 정리하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계셨다. 십분도 못 되어 저려오는 발 때문에 이리 저리 자세를 옮겨 앉는 게 미안해서, 편히 앉으시라 청해도, 원장님은 버릇이 되어 괜찮다며 미소 지으실 뿐이다.
동광원은 여성노동수도원이다. 남원에 본원이 있고, 광주와 화순, 함평 그리고 이곳 벽제에 분원이 있다. 수도원이라고 하지만 담도 둘러쳐져 있지 않고, 특별한 복장으로 세상 사람들과 벽을 두지 않는다. 세상일에 격리되어 있지도 않지만, 특별히 구분지어 생각하지도 않는다. 노동, 특히 농사일을 통해 자립자족하는 생활을 하며, 청빈한 생활 태도와 겸손한 마음을 잃지 않는 수도자들이다. 그렇기에 이곳의 청명한 기운을 알고 찾아드는 사람들은 그 수는 적으나 늘 끊이지 않고 있다.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고아들과 결핵환자들을 돌보기 위해 마련한 수도단체이다. 동광원은 이현필 선생이 늘 말한 바대로 순결과 청빈생활이 곧 수도임을 실천해보였다. 그는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기뻐하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는 것이 전도라고 가르쳤으며, 그의 제자들은 그 뜻을 따라 그렇게 살아왔다. 이 선생은 가시와 찔레와 자갈의 좁은 갈보리로 오르는 길을 걷던 예수를 따라 살기를 평생 소망했다. 일생동안 찾아다닌 길은 주님이 먼저 가신 길이었다. 그 길은 순결의 길이고 탁발의 길, 기도의 길, 고행의 길이었다. 동광원의 수도자들은 그런 스승의 길을 존경하며 따르고 실천해 오고 있다.
동광원 벽제 분원은 이현필 선생의 뜻을 암시 받은 정한나 어머니(동광원에서는 서로 어머니, 언니로 부른다.)가 능곡에서 살다가 이희옥 어머니, 박공순 원장과 함께 개명산 앵무봉 아래 개척한 곳이다. 1957년 3월에 개명산에 들어 간 이들은 풀막을 쳐 살았고, 풀죽을 끓여 먹으며 지냈다.
“그해부터 어떻게 알고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어요. 다 여자들이었는데, 저 산 꼭대기 절터 부근에 4,000평을 개간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콩도 심고 밭벼도 심고…또 그땐 직조도 짰어요. 많이 짜서 당시 김현봉 목사님이 있던 서울아현교회에, 거기 분들은 다 한복을 입었거든요. 거기다 팔아서 쓰고 십일조 떼어 갖고 그땐 봄만 되면 마을에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는데, 거기 나눠주고 그랬어요. 다 풀죽만 먹고 살았는데도 처녀들이 차츰 모여들어 4-50명 되었지요. 우리 선생님께서는 자기 손으로 자급자족해서 먹고 사는 것을 제일 좋아했어요.”
이곳은 한때 벽제 수녀의 마을이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불리기도 했다. 이현필 선생은 제자들을 훈련할 때 말보다 실천을 통해 진리를 알게 했는데, 동광원 사람들은 그것을 실천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이 선생은 “땅을 파는 소리를 하나님 음성으로 들으십시오. 시래기국을 먹는 일이 우리의 기도라고 아세요. 그렇게 하면 하늘에서 먹여주십니다.”라며 땅을 남보다 더 깊이 파도록 제자들에게 일렀고. 그대로 따르니 농작물이 실로 좋았다.
동광원의 수도자들에게 농사는 곧 수도였다. 동광원을 여성노동수도원이라 부르는 것은 그 이유이며, 동광원 수도자는 모두 농부인 것이다.
동광원 벽제분원은 지금 본 식구는 6명이다. 모두 연로하신 할머니들이다. 77년도에서야 전기가 들어왔는데 그 이전까지는 호롱불 밑에서 생활했고, 95년도까지도 군불을 때어 밥을 해 먹었다. 지금은 젊을 때처럼 농사를 짓지 못하지만 늘 일을 손에서 놓지 않으신다. 처음에 일구었던 4,000평 땅은 나라에서 돌려달라고 해서 나무를 심어 산으로 만들어 돌려주었다. 나라에서 빌려서 쓴 땅이니 고마울 뿐이라고 생각하여 그대로 되돌려 준 것이다. 그동안 구입한 땅은 현재 귀농운동본부에서 사람들이 주말농장으로 사용하며 농사를 계속 짓고 있는 중이다.
“사람들이 광주에 있는 동광원으로 많이 내려갔어요. 식구도 줄고, 또 세상이 부하다 보니, 사람들 고생하는 것 같아 가스를 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불 때고 살았는데, 이젠 힘이 부족하니 전기 신세를 지고 사네요. 휴우.”
박원장은 힘이 없어서 예전처럼 농사일을 못하고, 세상에 신세를 지고 사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산에서 풀을 베어 퇴비를 만들었다. 그동안 한 번도 제초제를 쓰지 않았기에, 땅의 질은 너무도 좋다. 귀농운동본부에서도 여기의 땅이 일급이라고 말한다.
이현필 선생이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도 지역을 전도하러 다닐 때면 집집마다 그를 따라나서는 이가 많았다. 그 때문에 사유재산제도를 타파하고 가족제도를 파괴한다는 말이 돌아 초기 동광원 운동은 핍박을 많이 받았다. 기성 교회에서도 세속적이고 경건성을 잃은 교회를 떠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이현필 선생을 따랐다. 그를 따르는 것은 고행과 핍박을 의미했지만, 동광원에 들어온 사람들은 누구나 감격하여 “이 길이 옳다!”고 기뻐했다. 그 길에 예수가 있었기에 고난의 그 길도 늘 옳을 수밖에 없었다.
박공순 원장도 그 길에 들어섰다. 열아홉의 나이였다. 일제 시절 일본군이 마을 처녀들을 잡아 간다 해서 일찍 결혼한 남편은 전쟁 중에 전사했다. 그즈음 한 친구가 이현필 선생이 광주 무등산에 계시다고 가보자고 권유했다.
“가 보니 예배를 드리고 있었어요. 한 방에는 여자들이 모여 있고, 다른 방에는 남자들이 모여 있고, 이 선생님은 마루에서 설교를 하시는데, 처음 보는 순간 이 세상 사람으로 안보였어요. 눈이 반짝거리고, 얼마나 황홀이 넘치는지…. 그때는 교회도 잘 안다닐 땐데, 마음에서 감화가 오는 게 기가 막혀요. 저는 표현을 잘 못하겠어요. 이상하게 마음에 감동이 왔어요. 그때 처음 만나고, 두 번째는 남편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선생님이 다른 어머니들과 함께 전도를 오셨더군요. 세상에 부모를 만나도 그렇게 반가울까. 전 그때 한없이 울기만 했어요.”
6·25가 터지고, 시골에서는 젊은 사람이 더 이상 살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주신 마음’인지 도시로 나갈 생각을 했다. 무작정 광주로 올라왔지만 이현필 선생은 찾을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시내로 나섰는데, 광주 수피아 정문 앞에 서 있던 이 선생을 극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생각지도 못한 만남이었다. 이현필 선생도 산중에서 난리를 피한 뒤 잠시 광주에 와 있던 상황이었다. 그 뒤로 무작정 따라 나섰다. 이 선생은 여긴 쑥죽만 먹고 사는 데 살 수 있겠냐 물었고, 박 원장은 “그래도 살아요.”그랬다. 박 원장은 그렇게 다시 만나게 된 건 이현필 선생의 기도 때문이었을 거라고 믿는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인데 특별히 예수님을 잘 믿어볼 마음으로 들어왔어요. 이현필 선생님은 맨발로 탁발하며 사시는데, 저 같은 사람은 그런 선생님을 감히 따라가지 못하지만 밑에서 우러러 보고 살고 싶었지요. 우리 집안은 불교였지만 내가 나온 뒤로는 동생도 따라 나왔고, 젊은 시절에 여기 들어와서 이날까지 그대로 사는 거죠. 일편단심으로 예수님을 잘 믿고 갈까하는 생각뿐이에요. 이선생님께서 ‘땅 파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거고, 우거지나물 밥도 기도하는 마음으로 먹어야 한다’하셨으니까 농사짓고 살았고요,”
이현필 선생에게 감화 받은 사람들은 많았다. 현재 동광원 본원에서 원장을 하시던 김금남 원장은 어머니와 함께 어릴 때부터 스승으로 모셨던 분이고, 동광원의 많은 수도자들과 오북환 장로, 김준호 선생, 최홍종 목사, 현동완 총무, 강순명 목사, 정인세 선생, 유영모 선생 등은 서로 존경하며 이 선생과 함께 걷거나 교유한 이들이었다.
이현필 선생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의 말씀을 철저하게 실천으로 옮겼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철저히 낮추고, 동광원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훈련시켰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단벌옷을 입고, 그조차도 거지를 만나면 옷을 바꿔 입었다. 추운 날에 화롯불도 없이 지내고 음식은 죄인이라고 꼭 땅바닥에 놓고 잡수셨는데, 그것도 하루에 한 끼씩만 드셨다. 짚신을 삼아 신었지만, 추운 겨울이라도 산중에서는 맨발로 다녔다. 또 이 선생은 훈련해 온 제자들과 함께 탁발수도단을 만들어 전라도 등지를 순회했다. 이때는 넝마주의를 하고, 남의 집 문전에서 걸식하는 탁발훈련을 함으로써 자기를 부인하는 법을 시험하고자 했다. 탁발을 통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전도하고, 가난한 자가 있으면 돕고, 병자가 있으면 몸소 간호하기도 하였다.
이현필 선생은 또 기도생활에 철저했다. 해가 지면 거의 자리에 눕지 않고 새벽까지 묵상했으며, 제자가 모기가 많으니 낮에 기도를 드리라고 권하면,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시간입니다.”그러셨다.
“매일 기도만 하셨어요. 겨울에 산에서 기도를 하시면서 처연히 눈을 그대로 다 맞으셔서 머리와 어깨에 눈이 수북하고, 수염에 고드름이 달리는데도 꿈쩍하시지 않으셨어요. 한번은 기도하시다가 선생님 누님이 사는 곳으로 내려오셨는데, 발이 얼어 터져 있는 거예요. 그 누님이 오죽 짠하셨겠어요? 상 밑에서 고양이가 그 얼어 터진 발이 고기인 줄 알고 먹으려고 하니까 이 선생님께서는 ‘고기 아니다. 내 발이다.’그러셨어요. 참, 자신을 위해서도 기도하셨겠지만, 다른 사람을 위해 나라를 위해 당신 몸을 불편케하고 그토록 망가지도록 기도하셨지요.”
이현필 선생이 성경을 강의할 때는 먼저 성경을 읽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 말의 감화력은 하루 종일 들어도 싫증이 나지 않았다고 한다. 통속적으로 했기에 듣는 사람들이 다 알아들을 수 있게 했으며, 사람들은 감동을 받았다. 제자들을 가르치면서도 ‘기적 중의 제일 큰 기적이 무엇입니까.’ 물어보고, 제자들이 부활이라고 대답을 하면 이선생은 그보다 더 큰 기적은 “말씀이 믿어지는 일이 제일 큰 기적입니다.”고 가르쳤다.
이현필 선생은 신비주의적인 체험에 대해서는 일체 침묵했는데, 누가 병이 들어 기도해주기를 원해도, ‘저는 신(神)이 아닙니다.’고 거절하고, 다만 “하나님! 저를 아프게 더 아프게 해 주십시오.”하며 기도하라고 가르쳤다.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더 아프게 해주시던지, 그렇지 않으면 병을 낫게 해주시던지, 하나님이 보아서 좋도록 해주실 것이라 했다. 동광원의 제자들은 그대로 순종하여 몸이 아플 때마다 낫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고, “내가 아버지 앞에서 죄만 짓고 있사오니, 더 아프게 하여 주십시오.” 기도했고, 그렇게 기도하고 나면 아픈 것이 훨씬 부드러워졌다고 한다.
이 선생은 찬송을 부를 때는 ‘나’를 ‘저’로 고쳐 불렀고, ‘…겠네’도 ‘…겠소’로 고쳐 불렀는데, 어린아이에게조차 경어를 썼다. 제자가 아이들을 보고 반말을 하면, 예수님이 그 안에 계시는데도 말을 놓겠냐며 엄히 꾸짖으셨다.
이현필 선생은 제자들에게 엄격하게 훈련시키고, 철저했지만, 그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몸소 보여 주었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의를 다해 집중했다. 한번은 한 제자가 3개월간 지리산에서 작정 기도를 할 때였는데, 찬송가 소리가 들려 나가보니, 이 선생이 눈 속에서 제자가 기도를 마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품 속에서 떡 세 덩이를 꺼내 주는 것이 아닌가! 산 속에서 굶주리고 있을 제자를 위해 먼 산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이현필 선생의 이런 사랑과 가르침 때문에 동광원의 수도자들은 여전히 그분을 존경하며, 현재와 함께 살아간다.
“어휴, 참, 그런 선생님을 모시고 산 사람이 아직도 사람이 못되어가지고, 그러니까 부끄러운 마음만 자꾸 생기는 거예요. 그런 어른은 깨끗하니까 깨닫고 가셨는데, 이제 저는 그때만 바라는 거요. 그러면 나 같이 더러운 사람이래도 그렇게 깨달을 수가 있겠나, 그런 생각이 들고 그래요. 예수님은 만민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데, 우린 그런 거 생각도 못하겠고…, 이런 체험을 했어요. 금식하고 기도하는 중에 불쌍한 사람이 왔는데, 나도 줄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눈물겨워서 기도 하는 중에 내가 한술 덜 먹고, 그이를 위해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 형제한테로 보내주시겠다.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박공순 원장에게 현재 기독교를 보면 답답한 부분이 많은데, 그 점을 어떻게 생각하시냐고, 우문했다. 즉답은 없으셨지만, 현답이 돌아왔다.
“전도에 대해서도 그래요. 내 자신이 깨어나지 못하면 남도 전도 할 수 없어요. 내 자신이 깨어나야 남도 인도할 수 있고, 남을 볼 수 있지. 내가 못됐으니까, 내 속에 못된 것이 있으니까, 다른 형제자매에게 불순한 게 보이지요. 저도 젊은 날에는 욕망도 있었고, 배움에 대한 거, 그걸 저 버리려니 힘들고 그랬는데, 이제는 다 하나님이 알아서 할 것이라는 것만 믿어지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하나님 앞에 기도할 뿐이지 사람이 이렇다 저렇다 말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요즘은 사랑이라는 말이 너무 흔하지만 진짜 사랑은 못한다고요. 진짜 사랑은 하나님인데, 내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진정으로 있으면 자신을 해하려는 사람을 감화시켜서 똑같은 형제자매로 만들어야지요.”
박 원장은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쌀 한 톨을 못 만드는 게 사람이 아니겠냐며, 하나님만이 그 일을 하실 수 있지 않냐고 반문하셨다. 이현필 선생이 맨발로 헐벗고 굶주려 사셨던 것도 당신이 안 먹음으로 하나님께서 배고픈 사람에게 갖다 주시는 그런 능력을 믿었기 때문에 그렇게 사셨던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현필 선생은 평생 약한 몸으로 사시다가 말년에는 후두결핵으로 피를 토하고, 말씀도 못하셨지만, 필담으로 사람들과 대화하셨다. 병을 보내주신 것도 하나님의 사랑인 줄 깨달았기에 “오! 축복하신 이 결핵병이여! 내게서 영원히 떠나지 마옵소서”하고, 또 제자가 고통스럽지 않으시냐고 물으면 “글쎄 잘 모르겠소.”하시면서 고통을 옆에서 보다보면 그 고통 속에 일치가 되어 형제의 고난에 참예하기에 두 사람은 하나가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현필 선생은 결국 1964년 3월 18일 돌아가셨다. 광주 동광원에서 마지막 집회를 여실 때 당신의 별세가 가까워짐을 알고는, 시대가 위급함을 경고하면서 형제자매들의 이웃돕기 운동을 전개해주기를 구체적으로 제안했다. ‘일작운동(一勺運動)’이 그것으로 한술 덜 먹는 운동이었다. 이것으로 불쌍한 사람이나 고아들을 돕자는 것이다. 서울로 상경할 때는 기차를 탔는데, 스스로도 가누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늙은 노인을 보면 자기 좌석을 계속 양보하며 올라왔다.
벽제분원에는 3월 12일 오셔서 몸이 편찮은데도 예배를 드렸다. 그땐 이곳에 식구가 많았으니까, 찬송을 부르면 음성이 맑으니 너무 기쁘다며 감사해했다. 돌아가시기 전날에는 동광원 식구가 모두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고린도전서 7장을 다 읽게 하셨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동정을 잘 지키고, 앞으로 태어날 자손들이 두 손 모아 감사 기도하고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때 박 원장은 아래채에 있었는데, 거기 임종 시에 모인 사람들에게 각각 한명씩 유언과 당부를 하셨다. 그리고 그날 당신이 입으셨던 옷을 벗어 착착 개어, 가난한 사람 입히라고 내 놓으셨다.
이현필 선생이 적어놓은 유언 중에 이런 글이 있다. ‘임종 때 입은 옷은 죽으면 도로 벗겨 빨아서 다른 이 드리시오. 방문에 걸었던 가마니로 싸서 묻어 주시면 참 좋겠습니다.’
“제가 아래채에 있다 기분이 이상해 선생님 계시던 곳으로 가다가 칠흑같이 캄캄한 곳인데 환한 빛이 비추고 소리가 짝 나는 것을 들었어요. 너무 놀라서 뒷걸음을 치다 개울에 빠졌어요. 그러다 용기를 내어 올라가 방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틈으로 보는데, 그 아픔 중에도 ’오 기쁘다. 기쁘다. 오 기뻐, 오메 못참겠네, 이 기쁨을 종로 네거리에 가서 전할까. 오 기뻐라. 내가 죽어도 영원히 여기서 살고, 살아도 여기서 살겠다.’ 그러셔요. 선생님이 엄하시고, 무서울 땐 무섭기에 제가 방구석에 가서 앉으니까 저보고 가래요. 내일 손님이 많이 오실 텐데, 피곤하니 쉬시라고. 그땐 누가 선생님이 세상 떠서 사람들이 많이 올 줄 알았겠어요? 왜 가시면서도 이 천한 인간이 내일 피곤해 하시는 것까지 걱정하시냐고요? 그날 3시가 가까운데 이상한 예감이 들어 가보니, 고개를 떨어뜨리세요. 수종하는 언니가 울고 난리예요. 그 순간에 선생님이 다시 고개를 들어 저를 보세요. 내 느낌에 ‘내가 너를 기억한다.’ 그러신 것 같아요. 반듯하게 누워드리니 그대로 곱게 가셨어요. 참 얼마나 내 속을 칼로 쑤시는 것 같이 아픈지. 어휴, 그 뒤에 동광원 오신 분들 만나보니 저 만이 아니라 만나는 사람마다 다 똑같이 그렇게 위로를 받으셨더라고요.”
박 원장은 아직도 그 일들이 생생한지 떨리는 음색으로 말씀하시다 끝내 눈가에 눈물을 비쳤다. 이현필 선생이 존경받는 것은 금욕 고행이나 뛰어난 선행을 해서가 아니라, 대오각성하여 자기 잘못을 인정한 것이다.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위선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의지하여 구원 얻을 사람이지 선행이나 금욕 고행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근본신앙을 밝혀, 자신으로 인한 파벌이나 교파가 생기는 것에 대해 경계했다. ‘오직 주님’뿐이었다.
이현필 선생은 벽제 분원 위의 산 속에 묻히셨다. 박 원장과 함께 이현필 선생의 묘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르는 길이 꽤 가팔랐지만, 박 원장은 가볍게 오르셨다. 묘지에 다다르자마자 잡초를 뽑느라 여념이 없으시다. 평소 이 선생은 평토장으로 풀밭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하셨다. 무덤에는 단이 올려져 있다. “서울에 높은 분들이 시간이 지나면 흔적도 없어진다고 해서 이렇게 만들었어요.”
시간이 아무리 흘러가도 이현필 선생의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졌기 때문이다. 한국의 프란치스꼬라 불리는 이현필 선생의 삶은 동광원의 제자들 뿐 아니라, 그 길을 흠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전해져 귀감으로 남겨질 것이다. 가난하였으나 가장 부유한 삶, 가시밭길이었으나 찬송하며 지나갈 수 있는 길. 그 순결의 길은 여전히 열려있는 현재의 길로 뻗어있다.
동광원을 나서는 길, 하늘은 청명하고, 땅은 복스럽다. 가슴이 벅차오른다. 여러 번 먼저 가시라고 박공순 원장에게 권해 그 뒷모습을 오래 지켜보았다. 갸날픈 등 뒤로 눈부신 햇살이다. 부끄러운 마음이 되어 하릴없이 개명산 산자락만 자꾸 올려다보았다.
글/이영란·사진/김승범, 조연현
출처: http://www.clsk.org/bbs/board.php?bo_table=gisang_cover&wr_id=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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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과 사는 하나
두 철로가 하나로 만난다. 둘이 하나 되는 비밀도 믿음이다. 1 더하기 1은 2가 아니고 1이 되는 것은 신비에 속한다.
믿음의 사람들은 죽음도 감동이다. 벽제 동광원의 박공순 원장이 최근 소천하였는데, 87세로 몸소 농사일과 공동체 집안일을 직접해 오다 노환으로 거동하기 힘들자 한 달 반 동안 스스로 곡기를 끊고 밝고 맑은 모습으로 작별을 고했다 한다.
박공순의 원장의 스승은 이현필 선생으로 ‘맨발의 성자’ 또는 ‘동방의 성 프란체스코’로 불렸던분이다. 이현필 선생 역시 소천할 때 “만물은 나와 한 몸이요 이웃은 나의 지체입니다. 나의 완성이 곧 우주완성입니다. 사랑은 주려는 것입니다. 받으려는 것은 미움입니다. 귀일원을 시작하십시오. 가장 비참한 사람을 보거든 모셔다 하룻밤이라도 따뜻하게 재워드리는 일입니다. 바로 실행 하십시오” 라는 귀일원의 꿈을 남기고 1964년 경기도 벽제 수녀골에서 고요히 세상을 떠나면서 “이 기쁜 소식을 종로 네거리에서 외치고 싶소. 하나님을 믿고 가난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합니다. 먼저 갑니다. 깨끗하게 살다가 오시오.”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은 기독교공동체를 꿈꾸며 끼니를 잇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던 1950년대 당시 “내가 밥을 먹으면 다른 사람이 먹을 몫이 줄어든다”며 거의 밥을 입에 대지 않고 피골이 상접한 몸으로, 고아와 장애인들을 먹여 살렸으며 폐결핵 환자를 돌보다 쉰한 살에 폐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한다. 이현필 선생이나 박공순 원장 같은 분은 생과 사가 하나임을 믿음으로 입증한다.
고성신문 기자 gosnew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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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www.gosnews.kr/default/all_news_body.php?part_idx=466&idx=18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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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 "나는 동광원의 사진사입니다"
입력 2019.09.24. 20:15
【서울=뉴시스】조수정 기자 = “나는 동광원의 사진사입니다”
동광원은 경기도 벽제에 있는 기독교 수녀원이다. 맨발의 성자 이현필 선생을 따르는 기독교 신자들이 세운 수도회로 1957년부터 독신 여신도들이 기도하며 살아가는 곳이다. 한때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세 명만 남았다. 평생 노동과 기도로 자급자족하며 수도원을 지키고 있다.
김원(53) 작가는 열네 번의 봄을 동광원에서 보냈다. 그의 직업은 정부출연연구소 연구원이다. 30년 동안 홍수 가뭄 물관리 등 강(하천)을 연구하며 30년 가까이 일하고 있다. 그런 그가 14년 동안 300-400번이나 동광원에 드나들었다. 사진을 찍고 또 찍었다. 그런데도 갈 때마다 매번 새로웠다고 말한다. 해마다 흙집은 나이 들어가고 가마솥은 일손을 놓았다. 밭벼는 줄어들고 산에서 내려오는 고라니는 늘어났다. 동광원에 있는 어르신들의 모습도 조금씩 바뀌었다.
ⓒ김원
김 작가가 그동안 기록한 동광원의 사진들을 모아 28일부터 서울 중구 필동 갤러리 꽃피다에서 전시한다.
ⓒ김원
“어르신들은 ‘늙은이들 사진 찍어 뭐 하냐’고 손사래 치며 ‘꽃이나 찍으라’ 하십니다. 하지만 한 해 동안 찍은 사진책을 보고 소녀처럼 웃으십니다. ‘돈 들어가니 내년에는 만들지 말라’는 얘기는 매년 되풀이하십니다.”
ⓒ김원
그 사이에 열권이 넘는 사진집이 쌓였다. 작년에는 ‘피안의 사계’(눈빛)라는 사진집도 발간했다.
ⓒ김원
김 작가는 동광원에 드나들게 된 사연을 털어놓는다. “시작은 우연이었습니다. 지인의 주말농장에 갔다가 인근의 동광원에 가게 됐습니다. 세월이 흐르며 알게 됐습니다. 그곳에 가는 이유는 사진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은 내 삶의 에너지였고 카메라에 담은 사진은 그분들의 사랑이었습니다. 가지 않을 수 없었고 찍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진은 더 이상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그분들 사랑으로 인해 동광원은 늘 봄이었습니다. 2019년 가을, 동광원은 여전히 봄입니다.”
그가 묵은 사진을 한 장 꺼낸다. “모든 것이 그대로 입니다만 한 분이 계시지 않습니다. 박공순 원장님. 평생을 동광원에 사시며 맨 손으로 모든 것을 일구신 분입니다. 2년 전 여름, 곡기를 끊으시고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가셨습니다. 모든 기력을 잃으신 후에도 어서 집으로 돌아가라 손짓하던 모습만 사진으로 남았습니다. 살아계셨으면 ‘늙은이 사진 뭐 볼 게 있냐’고 하시겠지만 내게는 최고의 사진입니다. 원장님을 사진으로 기억하는 일이 내가 받은 사랑과 에너지를 갚는 길입니다. 지금은 계시지 않는 원장님과 동광원 식구들에게 전시를 바칩니다.”
개막식은 28일 오후 5시, 전시는 10월 11일까지다. 일요일은 휴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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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http://news.sarangbang.com/detail/culture/17278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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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에서는 100세 이상 노인이 7만명을 돌파했다고 한다. 한국도 비슷한 추세로 장수노인이 늘고 있다. 예전엔 장수를 최고의 축복으로 여겼지만 지금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통계청 추계를 보면 2047년엔 1인 가구가 전체의 37.3%에 이르고 이 가운데 절반은 노인 혼자 살게 된다고 한다. 그러면 고독사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홀로 외롭게 죽어가는 것도 비극이지만 가족들의 돌봄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원치 않는 기계적 장치 등으로 생명이 연장돼 폐를 끼치게 될 것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한 여론조사에서 80%가 안락사 허용이 필요하다고 답한 데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숙고가 깊어지면서 자신이 죽음을 준비하고 존엄하고 품위있게 생을 마무리하고 싶은 바람이 커진 것이다. 일반인들도 자신의 삶과 유산을 정리하고 가족.지인들과 제대로 이별하며 웰다잉을 할 수 있도록 임종교육의 보편화와 법제도 마련이 필요하다.
예로부터 자기 죽음을 관리하고 선택하는 것은 수행.수도자들의 꿈이었다.불교에서는 견성 해탈하면 생사를 넘어선다고 했다. 그러나 그토록 생사자재와 무집착을 역설해온 명승이 정작 자신이 암에 걸렸을 때는 몇번이고 수술을 하며 끝까지 생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기도 하고 이름없는 보살이 생사자재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미국의 환경.평화운동가 스콧 니어링은 백세가 되자 스스로 곡기를 끊었다, 간디의 제자 비노바 바베도 생의 마지막에 80일간 단식으로 삶을 마무리 지었다,
2년 전엔 개신교수도원 동광원의 설립자인 "맨발의 성자" 이현칠의 제자인 벽제 동광원의 박공순 원장이 한달 반 동안 곡기를 끊고 주위 사람들과 작별을 하며 청빈 단순의 삶 그대로 갔다,
최근 원불교에서는 융산 김법종 교무와 은산 김장원 교무가 그렇게 곡기를 끊고 맑은 모습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삶을 정리했다고 한다.
원불교에서는 지난 2004년 그렇게 열반한 용타원 서대인 교무를 비롯해 많은 수돚가 병이 들거나 더는 기동이 어렵게 되면 스스로 미음을 들다 나중엔 물만 먹으며 명상과 기도로 삶을 정리하는 사례가 늘어가고 있다.
누구도 타인에게는 이런 죽음을 권장해서는 안되지만 자신이 그토록 초연하고 평화롭게 삶을 마무리하고 싶은 이들이 적지 않다.
한국죽음학회 회장인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가 최근 펴낸 (삶을 여행하는 초심자를 위한 죽음 가이드북)을 보면 죽음의 연습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훈련임을 알게 해준다.
누구라도 언제든 맞이해야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이다.이 책은 동서양의 죽음의 고수들 35명의 삶과 사상을 소개하고 있다. 통상 지식과 실천은 별개라고 한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들이나 근사체험자들을 많이 지켜보고 죽음에 대한 이해가 깊어갈수록 "잘 죽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후생)과 (인생수업)이란 책으로 국내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진 스위스 태생의 정신과 의사 에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인간이 죽음을 맞이하는 단계를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 5단계를 나누었다.
그는 임종을 앞둔 어린 환자들에게 애벌레 인형을 보여주었다. 죽음이란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처럼 더 높고 멋진 세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신의 장레식도 나비로 뒤덮게 했다. 조문객들이 미리 받은 봉투를 그의 관 앞에서 열때 파란 나비가 공중으로 날아가게 한 것이다. 이제 나비처럼 자유롭게 되었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고비도 우리의 자유를 막을 수는 없다.
한게례신문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출처:https://story.kakao.com/_GGvAj6/gScEEICN6o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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