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불/왕생사례2-중요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로, 죽은 태아를 제도하다***-싱가포르에서 발생한 염불감응사례

아미연(阿彌蓮) 2021. 3. 2. 21:27

한 구절 아미타불 명호로 죽은 태아를 제도하다

       ―― 싱가포르에서 발생한 염불감응사례

 

  내 이름은 심가훤沈佳萱이고, 올해 19살이다. 어머니가 싱가포르 정토종의 연우이자 독실한 염불인인 관계로 비록 자주 나에게 ‘아미타불’의 자비하신 구제에 대해 설명하며 나더러 늘 염불하라고 타이르고, 특히 어려운 일이 생기면 더욱 염불하라고 타일렀지만, 나는 줄곧 하나의 완전한 개념이 부족했기 때문에 그다지 염불을 하지 않았다. 

 

  2016년 9월 초에, 학교에서 방학을 하여 나는 싱가포르 오절로(Orchad Road)에 있는 대백화점의 옷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9월 5일 대략 오후 3시쯤 되었을 때, 갑자기 안색이 창백하고 하반신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여자 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걸어 나와 나에게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너무 아파요……”라고 말하고는 숨을 가쁘게 들이쉬면서 내 몸에서 쓰러졌다. 내 평생 이런 돌발상황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이 여자 분의 배가 약간 볼록하고 하반신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을 본 나는 상황이 좋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 같이 일하던 점원 한명이 곧바로 병원에 연락하려 하였으나 너무나 긴장한 탓에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가게 사장이 옆에서 말했다. “구급차가 오기 전까지 절대 정신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안 그러면 생명의 위험이 있다!” 그때 어디서 나온 생각인지 내 머릿속에는 어머니가 항상 말하던 ‘염불, 염불’이 떠올랐다. 나는 그 당시에도 도대체 네 글자 ‘아미타불’을 불러야 할지, 아니면 여섯 글자 ‘나무아미타불’을 불러야 할지 몰라서 망설였다. 그러나 사장님이 그녀가 정신을 잃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말이 떠올라, 그럼 여섯 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여섯 자 명호가 좀 더 길어서  그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시간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즉각 그녀에게 말했다. “제가 지금 입으로 무엇을 부르면 당신도 저를 따라서 무엇을 부르세요. 절대 잠들지 마세요!” 나는 그녀의 귀에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 여자 분은 말을 잘 듣고 정말로 이렇게 나와 함께 염불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만 보였다. 아마도 이미 나를 따라서 소리 내어 염불을 할 기력이 없었을 것이다. 

 

  이상한 일이지만 염불을 하고 있을 때, 가쁘게 쉬던 그녀의 숨이 차츰차츰 완화되었고, 주변의 분위기도 매우 불가사의하게 변하였다. 사람들은 거의 전부 한쪽에 서서 조용히 내가 이 여자 분을 부축하며 염불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뿐, 아무도 방해하지 않았다. 대략 15분쯤 지나서 구급차가 왔다. 나는 이 여자 분을 모시고 함께 병원으로 갔다. 도중에 나의 염불도 끊이지 않았다. 나는 이 여자 분이 병실로 들어간 다음에야 가게로 돌아왔다. 

 

  이튿날 이 여자 분은 퇴원을 하였고, 게다가 아무런 고통도 없었다.

 

  3일째 되는 날, 이 여자 분은 직접 가게로 와서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그녀는 “검사를 통해 의사선생님은 이미 유산이 확실하다고 말했어요. 또 5분만 늦었어도 제가 과다출혈로 죽었을 거라고 했어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또 나에게 이 ‘나무아미타불’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좋냐고 물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그녀가 제 품에 쓰러져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염불할 때, 한 줄기 따뜻한 빛이 그녀를 비춰주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몸과 마음이 매우 편안하고 고통도 점점 줄어드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더욱 불가사의한 것은 이 여자 분이 말하기를, 본인이 유산을 하던 그날 밤에 그녀 남편이 장엄하기 그지없는 어린애가 몹시 기뻐하며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꿈을 꾸었다는 것이다. 애기는 당시에 ‘관세음의 대(觀世音的台)’위에 앉아 있었고, 주변에는 또 분홍색 꽃들이 있었으며, 땅위에는 온통 황금색으로 매우 장엄하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생각을 해보니, 그가 말한 ‘관세음의 대’란 응당 연화대일 것이다. 왜냐하면 이 남편 분은 불법을 배우지 않아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연화대인지 몰랐던 것인데, 그 곳은 틀림없이 어머니가 늘 말하던 아미타불의 정토, 극락세계일 것이다. 사후에 그들의 가족 중에 어떤 사람이 금은지를 태워서 인연 없는 이 애기에게 줘야하지 않겠냐고 제의를 하자, 이때 남편분이 “애기가 있는 곳은 도처가 전부 황금인데 우리가 금은지를 태워줘서 뭐합니까?”라고 말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정말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나는 그녀에게 “온 식구가 최대한 이 기간 동안 염불하셔야 합니다. 염불만 하면 애기가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아미타불께서 소원을 들어주실 것입니다”라고 권하였다. 그들은 애기의 시신을 돌려받아 집에서 입관하였으며, 아울러 집에서 “나무아미타불”을 불렀다. 불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염불기도 법기도 곡조도 전부 없이 줄곧 집에서 이렇게 입으로 소리 내어 염불하였다. 

 

  4일째 되는 날, 이 여자 분도 애기가 허공에 서서 매우 기뻐하며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것을 봤으니, 부부 둘이 모두 애기보살이 극락왕생했다는 통지를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5일째 되는 날, 그들은 집에서 족히 열 시간을 염불하였고, 6일째 되는 날 그들은 또 12시간 염불하였으니, 지극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며칠은 이 여자 분과 시어머니는 거의 집에서 염불만 하였다. 염불하다가 힘이 들면 좀 쉬고, 쉬고 나면 다시 염불하였다.

 

  6일째 되는 날에 남편이 퇴근하고 집 문을 들어서는 순간 기이한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그들 집에서 향을 피우지 않았고, 또 향수를 바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이러한 향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처님의 감응일 것이다.

 

  그들 집에서만 이런 감응이 있었던 게 아니라 나 자신도 두 번 정도 만난 적이 있었다. 6일이 지난 후의 어느 날 밤에 나는 이 애기보살이 나를 향해 미소를 지으며 작은 연꽃을 나에게 주는 꿈을 꾸었다. 그 후에 나는 다시 한 번 애기보살을 꿈꾸었는데, 이번에 그는 큰 연꽃위에 앉아 있었다. 이 연꽃의 크기는 거의 우리 집 객실을 가득 채울 정도였으나, 그가 나에게 준 것은 여전히 작은 연꽃이었다. 꿈에서 깬 나는 마음속으로 “어쨌든 이렇게 큰 연꽃을 갖고 있는데, 나에게 반만 나눠줘도 과한 것은 아니잖아!”라고 투덜거렸다.사후에 정본스님은, 아마도 애기보살이 나더러 염불을 많이 하라고 권하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평소에 염불을 적게 했기 때문에 작은 연꽃밖에 없는 것이니, 이제 염불을 많이 해야만 ‘큰 연꽃’이 있게 된다고 하였다. 

 

  비록 인연 없는 이 애기가 이미 떠났지만 이 어머니는 도리어 기쁨과 위안을 느꼈다. 애기가 이미 아미타불의 극락정토에 왕생한 것을 제외하고, 애기의 시신은 매우 온전하고 예뻤는데(비록 어머니가 유산할 때 임신한지 4개월밖에 되지 않았으나) 보통 유산아들과 달랐다. 그래서 비록 지금까지 이미 이주 정도 지났지만 이 어머니는 여전히 매일 염불하고 있었다. 그녀는 어차피 지금 몸을 풀고 있어서 딱히 할 일이 없기에 염불만 한다고 말했다. 또 말하기를, 염불할 때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갈 뿐만 아니라 무척 즐겁고 편안하게 느껴지는데, 일반적인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아마도 아미타불의 자비하신 구제의 섭수일 것이다! 나도 매우 위안이 되었다. 어쨌든 그날 직접 이 애기가 내 눈앞에서 죽는 것을 보고 괴로웠지만, 지금은 그가 이미 영원히 고난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무아미타불.

 

  (싱가포르 심가훤이 2016년 9월 18일 적음)

 

(부록:)   정종법사 평어

 

본 사건의 주요인물: 심가훤, 유산한 임신부. 태아

 

본 사건의 주요 줄거리: 심가훤이 유산한 임신부를 위해 염불을 해주어, 위험한 상태를 벗어나 안전하게 되었으며, 태아가 정토에 왕생하였다.

 

  본 사건의 가장 신기한 점은 4개월 된 태아가 왕생한 것으로, ‘나무아미타불’의 명호기능이 불가사의하고, (범부의) 감정과 견해를 벗어났으며, 순수한 타력이고, 자연스러우며, 법이 본래 그러하고, 자발적이고 평등하고 무조건적이며, 제한이 없고 장애가 없다는 것을 충분히 드러내었다. 

 

  본 사건은 염불을 할 때 이렇게 해야 하고, 저렇게 해야 하며, 어떻게 정진하고, 어떻게 노력하고, 어떻게 마음을 조절하고, 어떻게 청정하고, 어떻게 망념을 극복하고, 어떻게 복과 선을 닦아서 도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왕생하기 어렵다는 갖가지 의혹과 걱정들을 철저히 분쇄하였으며, 이런 의혹과 걱정들은 모두 용인이 스스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것이고, 기우이며, 꿈꾸는 사람이 잠꼬대하는 것이고, 오직 스스로 자신의 몫을 국한 시키는 것이며, 전혀 사실이 아님을 알게 한다. 

 

  4개월 된 태아는 아직 형체를 갖추지 못한 고깃덩어리로서 육근이 완전하게 발육된 상태가 아니며,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는 작용이 아직 열리지 않았고, 무지 몽매하여 문사수聞思修가 없을뿐더러 계정혜戒定慧 역시 없었으며, 심지어 신원행信願行조차 없이 누군가 그의 어머니의 평안을 위해 염불하자 기대한 바는 아니지만 역시 왕생한 것이다. 

 

  19살 심가훤은 고승대덕이 아닐뿐더러 오래 수행한 거사도 아니며, 평소에 그다지 염불을 많이 한 것도 아니고 부처님 명호의 의의를 이해한 것도 아니다. 그녀는 여섯 자가 좀 더 길어서 임신부가 정신을 잃지 않도록 시간을 더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에, 기껏해야 그의 어머니가 평소에 자주 염불하라고 타일렀기 때문에 아미타불에 대해 친근감과 호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위급한 상황에서 문득 염불이 생각났지만 단지 임신부의 안위를 위해 생각한 것이지 특별히 태아를 위해 염불한 게 아니며, 심지어 태아를 생각지도 못했으며, 더욱이 위패를 세우고 천도재를 지내지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아는 여전히 왕생하였다.

 

  임신부는 이제까지 부처님을 믿은 적이 없었고 부처님의 존재조차 모르고 있었기에 “이 나무아미타불이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좋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이다. 단지 위급한 가운데 심가훤이 하는 염불을 따라서 입만 움직여 소리 내지 않고 염불하였으니, 자연히 자신의 뱃속에 있는 애기를 천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려는 생각만 했을 뿐,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으며, 전적으로 태아를 위해 염불해서 회향을 하겠다는 생각은 더욱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아는 여전히 왕생하였다. 

 

  태아를 말한다면, 무지 몽매하여 심가훤과 임신부가 모두 그 존재를 소홀히 하였고, 자신이 아는 게 없고 관심을 쏟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왕생하였다. 유일한 이유가 바로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이다.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자마자 불광佛光이 곧바로 이르렀고, 어느새 빌고 구하지 않았지만 명호가 자연스럽게 구제를 베풀어 정토에 왕생하게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것은 명호자체에 구비되어 있는 기능으로서 법이 본래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치 식물이 햇빛의 반사를 받으면 비록 무심하여 알지 못하고 기구祈求하지 않아도 저절로 생장하는 것처럼 역시 광명이 비추는 자연스런 작용과 같다.

 

  만약에 태아가 아니고 보통 성인들처럼 ‘어느 수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비록 염불하더라도 왕생하기 어렵다’는 등등의 여러 가지 선입견을 갖고 있다면, 틀림없이 범부의 선입견에 걸려서 도리어 이 태아가 명호의 기능에 수순하여 편안히 왕생한 것만 못할 것이다. 그래서 여러 가지 오염되고 전도된 선입견을 갖고 있는 범부들을 위해 그들의 전도된 집착과 견해를 깨트리기 위해 갖가지 법을 설하여, 듣고 나서 믿고, 믿고 나서 발원하고, 발원하고 나서 칭명하도록 한 것이다. 만일 명호의 자연적인 기능에 수순할 수만 있다면, 이런 것들은 모두 쓸데없는 분별이어서 모두 필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염불은 지혜를 구하지 않고 도리어 어리석음을 즐긴다. 왜냐하면 이른바 ‘지혜’란 모두 범부들의 전도된 분별심이어서 오직 장애만 될 뿐, 일을 성공시키기는커녕 오히려 망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무지하여 아는 게 없으므로 자연히 분별심을 일으키지 않고 명호자체의 기능에 수순하여 저절로 이끌려서 위없는 도로 나아가게 된다. 어리석은 자는 부처님의 지혜에 맡기고 어리석은 자는 불력의 구제를 위해 해석의 공간을 넓혔기 때문에 어리석음이 곧 지혜이다. 지혜로운 자가 스스로 총명하다고 여기어 자신의 지혜를 뽐내는 것은, 허공을 맞이하거나 거스르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효과가 없을뿐더러 도리어 아미타불의 구제를 장애하기 때문에 지혜가 곧 어리석음이다. 범부에게 어찌 지혜가 있겠는가! 조금 어리석은 게 나을 것이다! 

 

  조사께서 “한결같이 오로지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라(一向專稱彌陀佛名)”고 말씀하신 것이 바로 선악과 시비,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 나아가 믿음과 의심 등등의 모든 계산을 내려놓고 오직 헤아리지 않는 마음으로 어리석은 사람처럼, 술에 취한 사람처럼, 꿈꾸는 사람처럼,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처럼,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부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미 믿음과 발원의 구덩이를 뛰어넘어 오로지 칭념專稱하는 평지에 이른 것이다.

 

  생명은 신비한 것이다. 이 태아의 형체는 비록 온전하지 않지만 생명은 완전한 것이다.

 

  ‘시방중생’에는 뱃속의 태아도 포함되고, ‘내지 십념’에는 남들이 해주는 칭념도 포함된다.

 

  다시 이 임신부를 보면, 비록 급박한 가운데 이 한 구절 '나무아미타불'에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을 따라 "나무아미타불"을 불렀지만, 여전히 불광이 비춰주어 심신이 편안하고 고통이 완화되었으니, 어찌 명호의 자연스런 기능이 아니겠는가! 만일 그 자리에서 과다출혈로 죽었다면 당연히 부처님의 광명을 따라 정토에 왕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견해에 구애받는 사람은 본인의 눈으로 직접 보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지 못한다고 해서 혹 염불에 영험이 없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우리에겐 타심통이 없어서 이 태아가 대체 어떤 인연이고, 어떤 심리활동이 있었으며, 아미타불께서 어떻게 구제를 해주셨는지 알 수 없기에 눈앞의 사실만 믿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경에서 설하시길, “여래의 지혜바다는 깊고 넓어서 끝이 없으니, 이승이 헤아릴 수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홀로 분명히 아신다”“성문이나 보살들은 부처님의 거룩한 마음 다 알지 못하여, 마치 태어날 때부터 눈먼 사람이 다른 사람의 길을 인도하려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남들에게 염불을 권하면, 비록 상대방이 잠시 완전히 신수봉행하지 못하더라도 큰 이익이 있으니, 식을 훈습하여 종자가 되어(熏識成種) 인연만 있으면 자연히 현행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심가훤의 어머니가 평소에 그녀에게 자주 염불을 권하지 않았다면 이 임신부와 태아가 둘 다 봉변을 당하여 헛되이 윤회해야 할 것이다. 지금은 심가훤의 어머니의 평소 가르침으로 인해 임신부가 평안하고, 온 식구가 염불하게 되었으며, 태아가 극락왕생하여 영원히 윤회에서 벗어났고, 심가훤도 이 사건의 영향을 받아 틀림없이 신심이 개발되고 믿음의 뿌리가 증장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가족을 사랑하는 인연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모든 기연을 이용하여 그들에게 염불을 권할 것이니, 지나치게 인정人情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속담에 ‘차라리 만일의 경우를 위해 쓰지 않고 준비해둘지언정 쓰기만 하고 준비해두지 않아선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나무아미타불 만덕홍명을 어찌 내가 가장 사랑하고 가장 아끼는 사람들로 하여금 늘 마음속에 준비해뒀다가, 모든 위급한 재난을 구제하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지극히 간단하고 편리하여 금전·심력·시간을 들이지 않고 단지 한 생각 믿어 알아서 항상 마음과 입으로 부르기만 하면 만사가 충족하고 모든 일이 뜻대로 될 것이다.

 

출처 : 순정시대 純淨時代

글쓴이 : 淨傳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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