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문관 6년 정진 후 홀연히 사라진 제선스님 이야기
: 몽중에 극락 친견하신 일화 큰스님 모시고 염불철야(2/23 대전 관음사)
“간절히 믿고 염불하면 그대로 이뤄진다”
2/23 대전 관음사 일화 큰스님 모시고 철야정진
한국 불교 현대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선객(禪客)이 있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 유학,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들의 죽음, 방황과 출가, 목숨을 건 치열한 정진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는 절정의 순간 사라져 버린 … 드라마 보다 더 극적이고 영화보다 긴 여운을 던졌던 수좌. 바로 이름만 전해오는 제선스님이다. 스님이 떠난 지 30년, 여전히 생사(生死)를 모른 채 평생을 스님과 함께 살아가는 또 한 명의 스님이 있다. 제선스님의 마지막을 지켜본 유일한 동반자, 대전 관음사 주지 일화스님이다.
무문관 6년 정진 후 홀연히 사라진 제선스님 마지막 동행
‘생불’ 모신다며 뒷바라지 자청했던 ‘자비보살’ 혜원스님
두 스님 모시고 배운 공부 평생 가르침 삼아 40여년 정진
“믿고…염원 모아 기도하면 모든 것 이뤄져” 아미타불기도 강조
1965년 하안거, 도봉산 천축사에서 제선(濟禪)스님이 6년 고행정진을 시작했다. 부처님의 설산 고행을 본받아 세계불교사에 유래를 찾기 힘든 무문관(無門關) 공사가 시작되는 가운데 제선스님이 홀로 정진에 들어갔다. 한 평의 좁은 방에 갇혀 햇볕도 받지 않고 외부에서 들여다 주는 음식만 먹으면서 오직 화두만 드는 고행중의 고행. 이 해 겨울 무문관이 개관했다. 제선스님의 사제로 스님을 대신해서 관촉사 주지 소임을 보던 혜원스님은 ‘살아있는 부처님’을 시봉하겠다며 무문관 정진에 합류했다. 관응스님은 폐관정진 대신 산문을 나서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 정진에 들었다. 후일 종정을 역임한 서암스님도 함께 했다. 2년 뒤 총무원장 자리를 내놓은 경산스님이 합세하고 범어사에서 은사 동산스님을 모시고 3년 결사를 주도했던 지효스님도 봉은사에서 상좌들을 데리고 올라왔다. 무문관을 개설한 이는 제선스님의 사제로 오랫동안 천축사에 머물며 불사했던 정영스님이었다.
1960년대 하루 한 끼 해결하기도 힘든 어려운 사찰 형편이었지만 스님들은 불퇴전의 각오로 정진했다. 전국의 토굴에서 선원에서 화두 하나만 든 채 목숨을 내걸고 정진하는 스님이 넘쳐나던 시절이다. 그 중에서도 백미는 도봉산 천축사의 무문관이었다. 세간의 이목이 모두 이곳에 집중됐다. 종단도 어려움이 많고 정화 후 원성의 목소리도 높아갈 때였지만 무문관 하나 만으로도 충분히 환희에 찼다. 그만큼 무문관은 모두의 희망이고 기쁨이었다. 그 중심인물이 제선스님이었다. 은사 포산스님이 제주에서 온 선객이라고 해서 제선(濟禪)이라는 법명을 붙인 스님의 소식은 방송에서 탐을 낼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일화스님은 그 때 군(軍)에서 막 제대하고 천축사로 올라갔다. 관촉사 아래 마을에 살며 어려서부터 제선스님을 비롯한 관촉사 스님들과 인연이 많았다. 친하게 지냈던 스님들이 모두 천축사로 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곧바로 찾아갔다. 혜원스님이 상좌로 맞았다.
지난 11월26일 제선스님의 탄신 98주년 다례제 전날 대전에서 일화스님을 만났다. 스님은 “제선스님께서는 표고버섯을 미역에 끓인 점심만 드셔서 은사 스님과 함께 의정부에 가서 장을 보고 가끔 스님께서 정진하는 방을 청소하며 시봉했다”고 회고 했다.
1971년 마침내 단 한 순간도 방을 벗어나지 않는 6년 폐관정진을 회향했다. 음력 5월5일 단오날 제선스님이 산을 떠나겠다고 통보했다. 혜원스님은 상좌 일화스님을 불러 시봉토록 했다.
“김포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부산으로 갔다. 해운대에서 이틀을 자며 바닷가를 거닐고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중앙동 여객터미널에서 여수로 가는 배를 탔다. 스님은 오랜 좌선으로 걸음을 잘 못 걸었는데 배를 타자마자 3등 칸에 드러누우셨다. 나보고는 가라고 하셔서 순진하게도 나는 내렸다. 아마 지금 같으면 절대 안 내리고 동행했을 것이다” 그것이 스님의 마지막이다. 일화스님은 그 뒤 제선스님을 찾아 전국을 누볐다. 제선스님을 보았다는 소식만 들리면 어디든 찾아갔다.
“섬에서 보았다는 이야기도 있고 강원도 산골에서 보았다는 소문도 있어 찾아 갔지만 전부 거짓이었다.”
제선스님은 평소 몸을 바꾸어야겠다는 말을 했다.
“겨울에 오대산 북대에서 정진하는데 아무리 추운데 앉아도 춥지 않고 따뜻한 기운이 올라와 정진력을 시험한다며 나무를 쌓고 자화장(스스로 火葬)을 시도했다. 처음에는 무념의 경지여서 불이 붙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만 성불했다고 생각을 하는 순간 불이 붙어 3도 화상을 입었다. 당시 희찬스님이 앰뷸런스로 서울 큰 병원으로 옮겨서 목숨을 건졌지 그렇지 않으면 큰 일 났을 것이다. 스님은 후일 이 일화를 언급하며 마장에 걸리지 않도록 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화상 후 제선스님은 그 전과 같은 정진력이 나오지 않아 몸 바꾼다는 이야기를 자주 한 것이다. 몸 바꾼 스님들의 일화는 많다. 얼마 전 마곡사의 진철스님이 몸 바꾼다며 배낭에 돌을 가득 넣고 통영 앞바다로 들어갔으며 어떤 도인들은 짐승들에게 보시라도 한다며 홀로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는 등 선객들은 정진이 잘 되지 않으면 다양한 방법으로 육신을 벗는다.
특별한 수행법 고집 보다
믿고 정진하는 마음 중요
1년을 더 천축사에 머물던 혜원스님과 일화스님은 대전으로 내려와 작은 사찰을 건립했다. “은사 스님과 대전으로 내려와 벽돌을 쌓아 관음사를 창건했다. 나는 다시 걸망을 지고 선원으로 다니며 정진했다” 23세에 6.25전쟁을 피해 남으로 내려와 제선스님을 만나 그림자처럼 옆에 있으면서 공부를 돕는다는 원력 하나로 무문관에 함께 입방했던 혜원스님은 그토록 그리워하던 사형의 소식을 끝내 듣지 못하고 지난 1999년 75세로 입적했다.
“은사 스님은 말 그대로 자비보살이셨다. 어린아이가 와도 존댓말을 썼고 새 것은 전부 남 주고 당신은 양말, 옷 등을 직접 기워서 입었다.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 늘 버스만 타고 다녔으며 정신이 혼미해진다며 밤에도 승복을 차려 입고 양말도 신고 주무셨다. 같이 40년을 모시고 살았지만 화내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혜원스님은 상좌를 선원으로 보냈다. 일화스님도 스승의 뜻을 좇아 수좌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대구 염불선원의 수산스님(서상을 보이며 왕생)과 함께 7일간 참회기도를 했는데 그 일이 있고 나서 노스님께서 세 번이나 선방을 찾아오셨다. 아미타불 염불 함께 하자고. 유비가 공명을 찾아 삼고초려(三顧草廬)하듯 노사가 찾아왔는데 소원을 안 들어주겠느냐고 간청하시는 뜻에 결국 아미타불 염불을 시작해 30여년이 됐다” 일화스님은 지금도 매일 새벽 아미타불 기도 정진한다. 천일기도를 시작한 지 800일이 넘었다.
“기도는 믿음이 중요하다. 간절히 믿고 염불하면 그대로 이뤄진다”는 스님은 “염불은 사시기도에 하고 아침과 저녁에는 참선을 하는데 수행에 차별은 없다”고 강조했다. “믿음과 서원을 갖고 부처님 이름을 부르면 정토에 왕생하는 기쁨을 찾게될 것”이라며 아미타 기도를 적극 권장했다.“제선스님, 혜원스님 두 분을 모시며 보고 배운 것만으로 행복했으며 최고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일화스님은 자비보살로 존경받던 은사 스님을 닮아 천진난만하고 부끄러움이 많은 모습이다. 목소리가 조용하고 늘 웃는다. 세월이 흘러 군에서 갓 제대한 20대 청년은 이제 68세의 노스님이 되었다.
대전=불교신문 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몽중에 극락세계 친견한 일화스님은…
대전에서 태어나 논산 관촉사 밑 은진초등학교를 다니며 관촉사 스님들과 가깝게 지냈다. 1968년 군 제대 후 천축사에서 혜원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72년 대전 사정동에서 은사 스님과 함께 관음사를 창건했다. 통도사 극락암, 해인사, 송광사, 봉암사 등에서 10여 년간 정진했다. 1984년부터 아미타불 정근기도를 시작,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대전 복수동 오량산 자락에 관음사를 새로 창건, 도심포교당으로 일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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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대전 관음사에서 일화 큰스님 모시고 제3회 철야정진
대전 무량수여래회는 2월 23일(매달 넷째 토) 밤 6시반부터 익일 5시까지 대전 관음사(회주 일화 큰스님)에서 세번째 염불철야정진을 갖습니다. 이날 법회는 일화 큰스님의 법문과 아미타경 독경 및 나무아미타불 정근, 나무아미타불 48참회, 아미타불 정좌 및 경행염불 등의 순으로 진행됩니다. 서상을 보이며 왕생하신 수산 큰스님의 법제자인 일화 큰스님의 전통염불의 향훈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이번 법회에는 전동표 김경애 연우님이 <아미타경 심요>를 법보시 하셨습니다. 강릉의 임옥이 보살님이 5만원, 부산의 윤정인 거사님이 5만원의 공양비를 내셨습니다.
주소 : 대전시 서구 복수동로52번길 119(복수동 235-1) 관음사
문의 : 박필종 연우님 010-6430-2356, 김성우 연우님 010-6790-0856
일화 큰스님 염불 모습(유튜브로 보기) : https://youtu.be/eV6OtX6wZYc
출처 : 무량수여래회無量壽如來會
글쓴이 : 慈航(푸른바다)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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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화 큰스님
대전시 서구 복수동로52번길 119(복수동 235-1) 관음사
대표전화: 042-581-4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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