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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 일대기---진정한 성취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다

아미연(阿彌蓮) 2020. 8. 24. 17:00

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 일대기---진정한 성취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다

 

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 ( 1 )

 

1.세기의 재녀

팡위(方于)선생(1903-2002)은 우리 나라의 저명한 문학번역가、음악교육가이며 중국운남예술학원의 교수다. 

그의 본관은 강소무진(武进)이고 본인은 소주에서 성장하였다. 부친 방의(方毅)는 상해 상무인서관(商务印书馆) 자전편집부에서 부장으로 있었다. 

 

18살이 되던 해 팡위는 상해에서 중국역사상 최초로 국비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가게 되었다.
파리에 처음 도착한 후 리옹중법(里昂中法)대학에서 불문과 음악을 연수하였고 2년후 저명한 리옹대학 문학학부에 입학하였다. 프랑스유학 7년 동안 팡위는 촌음을 아껴 꾸준하게 문학공부에 매진하였으며 저명한 음악가 마타이스부인에게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그는 룸메이트인 반옥량(潘玉良:중국의 저명한 여류화가、조각가)의 처지에 대하여 아주 동정하였는데 반과 같이 소묘와 유화、중국화와 조각을 함께 공부하였다. 당시 프랑스에 수년간 먼저 온 여류화가 방군벽(方君璧:20세기초 중국의 소수 여류화가의 한사람) 은 팡위에 대하여 친절하게 보살펴주었다.

팡위와 남편 리단선생은 함께 프랑스의 문학대가 빅토르 위고의 명저 《레미제라블》을 번역하였는데 장장 반세기 남짓 걸렸다. 또 《시라노》、《시인의 사랑》、《자유를 달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크리스틴》등 극본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2. 밀법을 공부한 인연

 

팡위가 프랑스에서 25살이 되던 해, 그는 늘쌍 많은 유령들을 보게 되었는데  이 유령들은 자신이 나폴레옹、볼테르、루소 등이라고 자처하였다.

이런 현상을 많이 목격한 다음 그는 하루종일 실면증에 시달렸는데, 서약(서양 약)으로 수면과 정신상태를 유지하였다.

이는 가능하게 그가 숙세의 선근이 있으며, 보통사람과 다른 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귀국후, 그는 갖은 방법을 다하여 치료를 하였는데 중약과 서약을 다 써 봤지만 차도가 없었다.

한번은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심지어 자기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응접실에 앉아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금생에 수행의 인연이 아직 성숙되지 않았기에, 목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다.

1934년 7월, 그는 남경에서 차자 리방명을 낳았는데, 산후기간 한창 무더운 여름이어서 선풍기를 틀어놓았는데 그만 심각한 두통병을 남기게 되었다.

도성의 모든 중의와 서의를 찾아다녔지만 효과가 없었다.

하루는 팡위집의 문앞에 목어를 두드리는 탁발승이 나타났다. 팡위의 조모는 불교신자인데 얼른 사람을 시켜 은전을 베풀게 하였다. 헌데 이 행각승은 문밖에 서서 가려고 하지 않았다. 노부인이 다시 사람을 시켜 혹시 돈이 적어서 그런가고 물어보게 하였다. 

행각승이 말하기를 “아닙니다. 다만 댁에 한분 여권속의 병때문에 그러지요. 빈승이 치료할 수 있습니다.” 팡위의 조모와 모친은 그 말을 듣고 얼른 그를 집안으로 청해 가르침을 청하였다. 행각승은 병자의 두통증상을 서술하였는데 팡위의 증상과 완전 일치하였다, 

두분 여주인은 듣고 아주 놀라워서 “감히 스님께 묻고 싶은데 이 병을 치료하는데 얼마만큼의 시간이 걸리고 돈은 얼마 드는지요?” 

행각승이 말하기를 “한달이면 됩니다. 한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병이 나은 다음, 이 사람은 반드시 불법에 귀의해야 하고, 장래 어떤 곤난한 상황을 맞더라도 후회하면 안 됩니다.”

스님이 팡위의 병을 치료하였는데, 불과 한달이 되지 않아 병이 낫게 되었다. 팡위가 생각하기를 “내일 스님이 집에 오면, 꼭 그분께 귀의할 것이다.”

그러나 이 행각승은 그후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얼마후, 팡씨 집안의 어떤 지인이 방문을 왔는데 말하기를 “요즘 남경에 티벳의 뤄나(诺那)활불이 오셨는데, 법을 전하고 병을 치료함에 아주 자비롭답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후 팡위는 지인을 따라 뤄나활불이 계신 곳으로 가게 되었다. 당시 티벳 닝마바의 고승 뤄나후투그투(诺那呼图克图)가 작은 규모의 법회를 열고 있었고, 팡위는 신도들 속에 앉게 되었다.

시작이 되자 뤄나활불이 보현왕 여래의 본각대명주를 노래하기 시작하였다. 이 은은하고 마음을 뒤흔드는 주문의 노랫소리를 듣자, 팡위는 정수리가 금방이라도 우뢰가 터지듯 어떤 광명이 위로부터 쏟아지는 것을 보았는데, 그로부터 오랫동안 낫지 못했던 정신질환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티벳밀종에 강렬한 신심이 생겼는데 1935년 초, 뤄나활불의 문하에 입문하게 되었다. 처음은 주로 본존인 다라모(绿度母)를 수행하였다. 그는  “그때는 내가 별로 기도를 하지 않아도, 눈을 뜨나 감으나 뤄나스승이 나타남을 선명하게 보아왔고 내 정수리의 광명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뤄나스승은 팡위에게 관음수행법을 전해주면서, 심주 600만을 염송할 것을 분부하였다. 그리고 그는 의궤에 따라 6만을 염송하였는데, 이미 본존을 보았고 성취를 얻게 되었다. 또한 비밀본존인 존승불모(尊胜佛母)를 성취하게 되었다.

 

뤄나활불은 한지에서 광범하게 밀승의 기청송(祈请颂)、본존법(本尊法)、주문、파와(破哇)、호마(护摩) 등을 전수하였다. 스승은 한지에서의 마지막 시기에 남경의 어떤 도장에서 극히 조심스럽게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닝마바구승도차제(宁玛巴九乘道次第) 및 대원만룽친심수(大圆满龙钦心髓)등 깊은 법을 전수하였다. 팡위거사는 법을 수혜받은 제자 중의 한사람이다. (뤄나스승의 근본스승은 패야달라이금강(贝雅达赖金刚)이고 제 4대 좌친법왕 민제난카도제(四世佐钦法王敏觉南喀多杰)로부터 대원만 법요를 전수받았다.)     1935년 5월까지 팡위거사는 뤄나스승으로부터 모두5개월동안 법을 공부하였다. 

뤄나스승이 남경을 떠나 티벳으로 갈 무렵, 숙세의 지혜가 남다른 이 여제자에게 법을 전수함이 많지 않음을 애석해한 나머지 수제자인 왕가제(王家齐)스승에게 “나를 대신해 팡위에게 법을 전하거라”고 하였다.

1936년, 뤄나스승은 깐즈에서 원적하였는데, 금강심(金刚心)을 시현하고 불상을 나타내었으며 위에는 주문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출처: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1) - 티벳불교게시판 - 미륵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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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2)

 

곤명(昆明),  남쪽으로 이주하다.

 

그후, 팡위거사는 왕가제스승에 의지하여 법을 배웠고 “왕사부님”이라고 존칭하였다.

1937년말, 왜구들이 남경으로 다가오게 되었는데 그는 스승에게 간청하여 묻기를 “중국은 이렇게 큰데, 어디로 가면 이 난을 면할 수 있습니까?” 왕스승이 말하기를 “운남의 곤명에 가거라, 곤(昆)자는 일(日)자보다 높으니 일본군이 그까지는 침략할 수 없을 것이다.”

  떠날 때 모든 재산을 수습할 시간이 없었다. 

팡위거사는 덮개가 있는 대바구니를 찾아 집에 모시고 있는 박달나무로 된 관음상 한기를 보며 말하였다. “보살님, 제자가 만약 보살님을 여기에 모실 수만 있다면 함께 가련만 그렇지 않으면 정말 어쩔 수 없군요.” 그리고 관음상을 바구니에 놓아 두고 덮개를 덮자 마침 안성맞춤하였다. 이는 팡씨 집안이 남경을 떠날 때 유일하게 가져간 불상이다.

  이렇게 팡위거사와 부모、남편、여동생은 도중에 전란과 비적을 피하기 위하여 미얀마를 에돌아 천신만고끝에 곤명에 오게 되었다. 그의 남동생은 당시 학교수업이 아직 끝나지 않아 한발 늦게 되었는데, 남경을 떠나 일주일이 지나자 세계를 경악케 하는 남경대학살 참사가 발생하였다.

1939년, 리강보제사(丽江普济寺)의 성로후투그트(圣露呼图克图)가 곤명 원통사(圆通寺)에 와서 신해혁명이래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수행천도를 거행하였다. 

팡위거사는 성로 후투그트에서 법을 배우고 까규파의 많은 관정을 받게 되었다. 성로상사는 팡위에게 독자적으로 극히 비밀법을 전수하고 혼자만 수행하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말도록 하였다. 그는 파와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공력이 아주 깊었는데 범정혈(梵顶穴)이 깊이 안으로 움푹 패이었다.

  1940년 꿍까활불(贡嘎活佛)이 곤명에 왕림하였는데, 팡위거사는 좌전에서 대량의 까규파와 닝마파의 관정을 전수 받았다.

당시 왜구의 비행기가 미친듯이 곤명을 폭격하였는데 민중들은 모두 경보음에 맞추어 방공동으로 피신하느라 인심이 흉흉하고 식품공급이 부족하였다.

팡위거사와 동문들은 자신들이 만든 음식을 들고 서쪽교외 묘고사(妙高寺)의 산위에서 스승을 공양하면서 진실로 법을 구하였다. 그리하여 《大圆满彻却脱噶三虚空会合瑜伽修持法不共口诀》등 깊고 오묘한 밀법을 전수받았다.

그는 꿍까스승의 지도하에 폐관수행(闭关)을 하였는데 출관(出关)후 체험과 경계를 스승께 진술하였는데 꿍까스승께서 하나씩 해석하고 평가를 해 주었다. 그의 일생 중에서 뤄나활불과 꿍까활불을 그의 근본상사로 삼았다.

왕가제스승은 선후 세차례나 곤명에 와서 법을 널리 알리었는데, 팡위는 뤄나 전승의 많은 법을 모두 왕스승에게서 전수받았다.

꿍까활불은 친히 일찍 왕가제상사가 연화생대사의 화신이라고 인정하였는데 뭇제자들을 이끌고 왕스승에게 예배를 올리었다. 왕상사의 심주는 연화생대사의 심주와 글자 하나의 차이가 있다.

이상 세분의 대덕들은 팡위거사를 모두 중요시하였는데 선후로 그에게 “金刚阿阇黎灌顶” 을 베풀었다.

4 . 고행을 통한 성취

 

생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팡위는 서남연대(西南联大)、중법대학(中法大学)에서 교편을 잡았다. 스승을 따라 법을 구하고 법을 널리 알리는 외에, 자신 역시 교학과 번역사업이 있고 또한 남편과 두 아들의 일상생활을 돌보아야 했다.

그는 인생의 무상과 시간의 귀중함을 깊이 체험하고 있기에, 매일 수행을 견지하였고 만년에 까지 좌석에서의 수행이 적어도 4시간 부터 6시간사이까지였다. 좌석에서 내려서는 또 주문을 수지하였다.

만약 많은 사람과 일이 그의 일상수행과를 방해하면, 그는 병이 심해지는 모습을 시현하였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뤄나활불、성로활불、꿍까활불、왕가제 상사님들은 선후로 무상을 시현하였다. 그리하여 다시는 상사님들의 면전에서 가르침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자신의 수행이 깊을 수록 어떤 경계는 더욱더 분별할 수 없었다. 그는 수행 중에서 한동안 곤혹을 느꼈는데 “그때, 나는 자신의 마음을 천천히 뤄나상사님 쪽으로 접근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불법이 거의 완전 상실상태에 처해 있는 10년 대동란 속에서, 그는 스승에 대한 신심과 기도로 겹겹이 둘러싼 갖은 장애를 초월하면서 고행을 통해 성취를 이룩하였다.

그때 비판투쟁과 가택을 수색하는 년대였는데, 팡위선생은 여전히 뤄나활불의 법의와 골사리를 간직하고 있었다. 훗날 남경 뤄나정사가 회복되어 그는 법의를 증정해 모두들 우러러 보게 하였다.

뤄나활불의 골사리에 한해서는 반세기동안 줄곧 집에 모셨는데, 해외의 뤄나법맥의 도장에서 조사의 유골을 모셔갈 것을 간청하여 팡위선생이 열어 보았는데 그 자신도 깜짝 놀라게 되었다. 뤄나활불의 한조각 원형경골이 의외로 완벽한 다라모상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형태의 올록볼록함이 동전의 도안보다 더 선명하였다. 스승의 공덕과 제자신심의 감응은 실로 불가사의하였다.

무지개빛 몸으로 화한 성취자 씨로어러(喜绕俄热)른보체는 “팡위선생은 진정으로 다라마와 사비관음(四臂观音) 이 두 본존을 성취하였다. 안에서의 공덕이 밖으로 나타났기에, 그분이 늘 사용하는 염주의 모주(母珠) 양쪽 염주알이 각기 투명하고 혼돈한 음양수정으로 변했다.”고 말하였다. 팡위선생이 다라모법(绿度母法)을 수행할 때 한꿰미의 염주알이 모두 자색으로 변하였는데, 그가 원적한 후에야 이 자색이 차츰 퇴색을 하였다.

팡위선생은 아주 많은 밀법을 정통하였다. 이를테면 꽃병호흡(宝瓶气)、홍관음본존수햅법(红观音本尊法) 등이며 특히 彻却、脱噶수행에서의 깨달음과 체득은 남다르게 깊었다.

환갑이 지나서 그의 수행중에서 자신만의 심주가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었다.

평생동안 수행한 본존、대수인과 대원만의 지혜신통(이를테면 천안、숙명지、무애분신타처(无碍分身它处))을 시현하였고, 비밀스럽게 사람과 사람아닌 중생(非人)을 제도하는 감응 사적들은 실로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는 실로 관음다라모의 소리를 듣고 중생을 고통에서 구해주며 그 어디서나 몸을 나타내는 대자대비의 마음과 다를바 없었다.

팡위선생의 전생에 대하여 어떤 이는 그가 향바 까규파의 일대 조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팡위선생은 수행이 상당한 정도에 이르렀을 때, 또렷하게 기억하시기를 자신은 티벳왕의 명비라고 말씀하였다.

팡위선생이 일흔 얼마가 되었을 때,

어떤 외성의 제자가 법을 구하려고 다시 곤명으로 갔을 때 문앞에서 그를 만나게 되었다. 팡위선생은 문을 열고 들어가 이 제자를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몸소 밥을 지어 제자에게 먹이었으며, 법을 전하였다.

이 제자는 감사하기 그지없는 마음으로 하직을 하고 나왔는데, 돌아오는 길에서 다른 한 동문을 만나게 되어 기쁜 마음에 법을 구한 일들을 말하게 되었다. 그 동문은 의하하게 여겨 말하기를 “그럴리가 있나? 내가 듣기를 팡어머니께서는 귀양에 법을 전하러 가셨고, 지금 아직 곤명에 돌아오지 않았다네.”

그리하여 이 사람은 귀양에 있는 동문의 주소를 물어봐 그 구경을 알아보기로 하였다. 그 곳에 가 보니, 팡위선생이 한창 몇명의 거사들에게 법을 강의하고 있었다. 모두들에게 물어보니 한결같이 “팡어머니께서 여기에 오신지 몇주일이 지났어요.”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는 놀라기 그지없었다.

그리하여 팡위선생과 단독면담의 기회를 기다려 그는 급히 이 일이 어찌된 것이냐고 묻게 되었다, 팡선생은 웃기만 하시고 대답을 하지 않았다.

      또 한번은 외성의 어떤 젊은이가 이름을 듣고 팡위선생의 집에 오게 되었다. 법을 구했는데 허락을 받지 않아, 그대로 주저앉아 물러가지 않으면서 간곡하게 애원하였다.

밤에 객실의 소파에서 자게 되었는데, 깊은 한밤중이 되자 그는 어둠 속에서 몸 옆의 지면이 갈라지면서, 팡위선생이 몸을 나타네 지옥으로 들어가 중생을 구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90년대, 곤명 주변의 어떤 지방에서 지진이 발생하였다. 곤명에서도 지진파를 감지하였다. 그리하여 얼마지 지나지 않아 지진이 일어날 것이라는 소문이 성중에 무성하게 나돌아, 어떤 주민은 지진대피용천막으로 피신하기도 하였다. 훗날 사람들이 그 어떤 동정도 없는 것을 보고서야 일상생활을 회복하였다.

사실 팡위선생은 선정속에서, 이 곳이 확실하게 지진이 일어날 것을 관찰하였다. 그리하여 수행을 통하여, 지진파를 다른 편벽하고 외진 산지로 전이하였는데 그 곳은 사람과 각종 동물이 극히 적었다. 당시 뉴스에서도 보도하기를, 지진후 그 어떤 인원사망이 없었다고 하였다.

      팡위선생은 항상 자신의 공덕을 감추었는데, 이 일은 다만 신변의 제일 친근한 사람들에게만 언급하였다. 팡위선생이 원적한 몇년이 지나서야, 필자는 이 일을 알게 되어 기록을 하였다.

여러분들도 이 속에서 깨닫을 수 있는데, 그것은 실제 수행(实修)이야말로 자비행이며, 실제수행의 성취자는 중생의 현실과 훗날의 이익에 대하여 참으로 중대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법계의 인연은 아주 복잡하고 또한 미묘하기 그지없다. 중생의 업장 역시 복잡하고 지중하기 그지없다.

당년 뤄나활불과 허운대사(虚云大师)는 아주 일찌기 남경대학살이 곧 발생할 것을 예견하고, 두분 다 법을 수행하여 막으려고 하였다.( 回遮). 그러나 이는 중생의 정해진 업을 개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팡위선생의 이 일을 기술하였지만, 절대로 밀법이 이 세상의 일체 재난을 구할 수 있다는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실제수행자들에게 전문 이 글을 보이려고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니 이에 변론을 전개하려는 인사들께서는 이를 통하여 방해를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팡위선생은 청정한 계율과 수행의 공덕、초월적인 식견을 가지고 있다.

호법을 찬송하고 공양하는 일에 십분 정중하고 진지하였다. 물질이 궁핍한 년대에도, 그는 호법공양을 종래로 끊은 적이 없었다. 회공을 할 때 늘 통닭과 통오리를 올려 마하까라(玛哈嘎拉)에 올리기도 하였다.
팡위선생은 늘쌍 “호법의 힘이야마로 실로  위대합니다.” 라고 진심으로 찬탄하였다. 호법은 언제나 유력하게 그가 늘 분부하는 일을 해결하였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그 좌우를 호위하였다.  

우리 후학들 중에는 이런 재미있는 일이 전해지기도 하였다. 어느날 오후, 팡위선생이 집에서 요긴한 법사를 의논하기로 하여 어떤 거사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그 사람은 오지를 않았다. 그리하여 급해서 두번이나 손목시계를 보았는데, 옆에서 호법이  “나 조차도 급해하지 않는데, 선생께서는 왜 그리 급해하십니까?”라고 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출처: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2) - 티벳불교게시판 - 미륵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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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3)

 

동문을 사랑하고 존중하다.

팡위선생은 자신의 스승이 받아들인 동문들에 대해서는 몹시 존중하고 사랑하였다.

동문사제 쉬웬(徐源)이 있었는데 혼자서 생할하였다. 팡쉬선생은 자신의 아들을 시켜 그를 의모로 삼게 하였다. 매월마다 며느리를 시켜 40위안을 공양하게도 하였는데 쉬어머니가 원적할 때까지 이렇게 10년간 끊어지지 않았다.

쉬어머니의 선정의 법력은 아주 깊은데 특별히 망령을 천도하는데 뛰어났다. 망령의 천도수행에는 많은 과일과 과자 등 수행필수품들을 공양하기 하기에, 팡위선생이 보낸 돈은 대부분 여기에 사용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보아 동문수행자에 대한 공덕은 참으로 크다고 할 수 있다.

또 동문수행자인 쑤어머니가 있는데 스승과 불법에 대한 신심이 견고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그는 혼자서 계족산(鸡足山)을 순례하였는데 산위의 모든 절이란 절은 다 파괴를 당하였다. 또 군대가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작은 길로 돌아올 때 비가 내려 그는 이류에 휩쓸려가게 되었는데 다리뼈가 골절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아무런 원망과 후회도 없었다. 팡위선생은 그를 찬탄하고 상처를 치료해 주었다. 

불교가 여지없이 파괴되던 년대에 쑤어머니는 자신이 모시고 있던 불상을 보존하기 위하여, 구멍탄으로 자신의 거실을 연기로 쏘이어 네 벽이 새카맣게 되도록 하였다. 다만 한잔의 작은 등잔을 켰는데, 광선이 없어 앞이 깜깜하였다. 누구도 손을 내밀어도 지척을 분간할 수 없는 작은 집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았다.

쑤어머니의 두눈은 한동안 실명되기도 했는데, 드팀없는 불법수행으로 시력을 회복하였다.

그는 또 간암을 앓고 있었는데, 아들 딸들이 모두 의사임에도 불구하고 속수무책이었다. 역시 지속되는 법수행에 의하여, 수십년간 지속되던 종양덩어리는 더이상 악화되지 않았고 팔십살까지 살다가 왕생하였다.

암담한 시국의 세월 속에서 팡위선생의 주위에는 이렇게 불퇴전의 신심을 가진 노부인들이 여러명 더 있었다. 그들은 호상 고무격려하고 불법은 토론하고 연마하였는데 최후의 성취는 모두 다 높았다.

황념조(黄念祖)스승은 뤄나활불이 왕스승에게 전해준 법위를 물려받았는데, 팡위선생에 대하여 몹시 공경하였다. 팡위선생 역시 황장로를 아주 존경하여 곤명의 후학들로 하여금 북경에 가서 황장로에게서 법을 구하라고 하였다.

황장로는 “팡장로는 오랜시간 왕스승께 의지하였기에, 그분이 받은 밀법은 제보다 더 많습니다.” 황장로가 원적한 다음 황장로의 아들이 곤명에 와서 팡위선생에게 법을 구하였는데, 공손한 태도로 “사백”이라고 칭하였다. 

팡위선생은 황장로가 원적하기전의 상황을 자세히 물었는데, 원적하기전 황장로가 오른쪽으로 몸을 돌이켜 누웠다는 말을 듣고 팡위선생은 긍정적으로 기쁨에 겨워 말하였다. “이렇게 한번 누움으로 해서 그분은 성불을 이룩했습니다.”

그리고는 황장로의 아들에게 “넌 먼저 시로어로 스승에게 귀의하거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법을 전수하마”라고 말하였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

또 한분의 거사가 있었는데 나이가 팡위선생에 비해 몇살이 적었다. 예전 꿍까 활불에게 파와법을 구하게 되었고 이십년동안 《금강경》을 지송하였는데, 가석하게 훗날 중단하였다.

80살이 되어 그는 팡위선생에게 다시 가르침을 청하였는데 “예전 꿍까스승에게서 전수하신 파와법을 지금까지 몇십년이 지나도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이 법을 내가 얻었다고 할 수 있나요?  아니면 선생께서 다시 저에게 전수할 수 있는지요?”

 

팡위선생은 “사부님께서 전해주신 법은 당신이 긍정코 받았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니 다시 전할 필요가 없어요.” 그리하여 노거사는 팡위선생에게 “백자명”을 전할 것을 청하여, 팡위선생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의 원을 만족시켜 주었다.
그러나 노거사는 훗날 문장을 짓고 시를 읊느라, 백자명을 수행하지도 않았다. 하루는 밤에 침대에서 땅에 떨어졌는데, 이튿날 자식들이 와서 볼 때 이미 세상을 떠난지 몇시간이 되었다.

행운스럽게 이 노거사는 생전에 정토종 도장에서 불법을 강의하였는데, 이 도장은 그의 공헌을 기리어 노거사를 위해 《三时系念(하루 세차례 망자를 위해 법사를 진행하는 의궤)》법사를 진행하였다.

 

두번 정사(精舍)를 건립하다.

팡위선생의 일생에서 그는 온 심혈을 기울이여 두번 “연화정사”를 설립하였다.

첫번째는 지난세기 40년대 이래 왕가제스승이 제안하고, 팡위선생은 남편 이단선생의 이해와 지지를 받고 집안의 저축을 모두 털어, 금강동문들과 함께 곤명 문림가(昆明文林街)에서 기초를 쌓고 연화정사를 건립하였다.

당시 물가가 폭등하고 신도들이 기부한 돈은 대다수가 금원권(金圆券)이었는데 순식간에 가치가 하락하였다. 그리하여 팡위선생은 어머니를 설복하여 어머니가 그 당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혼수인 금과 옥 등 엑세서리를 내게 하여 건축자재를 사게 하였으며, 몸소 그 기와를 하나하나 점검하였다.

1948년 연화정사가 낙성되었고 당시 곤명에서 밀법을 전수하고 수행하는 주요도장이 되었다. 몇년이 지나 변경되고 점용이 되어 끝내 다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90년대초, 아흔이 된 팡위노교수는 해내외의 뤄나활불과 꿍가활불 법통의 동문들에게 호소하여, 힘을 합쳐 연화정사를 재건하기로 하였다.

종교수속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팡위선생은 편지를 써서 조박초(赵朴初)선생의 지지를 바랐다. 조박초선생은 이 일을 성사시켰는데, 훗날 “연화정사”라는 이 네글자를 편액에 써서 기증하였다.

팡위선생은 정책이 낙실된후 보충 발급한 봉급과 평상시의 저축,《레미제라블》을 번역한 원고비를 기부하였으며, 또 남편 리단교수 조상의 산호나 마노、고명(诰命: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문서) 등을 꺼내어 돈으로 바꾸어 기부하였다. 또 명인들이 기증한 진귀한 서화를 해내외의 옛친구들에게 보내어 시주를 청하였다.

상사삼보의 가피하에 팡위선생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헌신정신의 감화하에, 해내외의 인사들은 분분히 아낌없이 주머니를 털었다. 많은 곤명의 거사들도 돈과 힘을 내었는데, 수년동안의 굴곡과 간난신고를 거처 1995년 곤명의 번화가 원통사옆에서 한채의 새로운 티벳밀종도장이 일떠섰다.

일층의 대전에는 연화생대사、아미타불、사비관음、밀래레빠존자、백마등등존자(白玛邓灯尊者)등을 모셨고, 이층에는 스승의 선실과 도서관이 있으며, 제일 윗층의 전에는 본사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주위에는 전경통을 세웠다. 이것은 바로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신통의 시현과 같은 기적이었다.

연화정사가 건설된 후 팡위선생은 여러차례 金刚阿阇黎의 관정을 받았으나,

그는 왕가제상사의 자신에 대한 “스승이라 칭하지 않고 제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가르침을 시종 받들었다. 여러방면에 걸친 신중한 관찰을 거쳐, 중전(운남성에 있음) 운등사(云登寺) 향·추청쨩추활불을 초대하여 금강상사를 담당하게 하였다. 

1996년 활불이 몸소 임하여 개안을 하고, 또 시로어러른보체를 몹시 받들고 추천하여 정사에서 법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팡위선생은 기뻐서 “연화정사에 두분의 상사가 있습니다. 저는 상사의 조교가 되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후학거사들로 하여금 진정한 두분의 대덕들을 신뢰하고 의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성취한 팡위선생은 솔선수범하여 그에게 예배를 올리고 귀의하였다.

평소와 다른 것은 3일 후에 시로어러른보체는 팡위선생을 위하여 법명을 지었는데, 팡위선생이 받들어 보니 “성취문수”라는 법명이 씌어져 있었다. 이는 60년전 뤄나활불이 그에게 법명을 하사한 것과 똑같았다.

연화정사에서 두분의 성품이 어질고 덕스러운 스승은 각지의 인연있는 중생들을 자비롭게 받아들이고, 신심있는 이들로 하여금 진정한 밀법의 수행길에 오르게 하였다. 훗날, 시로어러른보체와 향·추청쨩추른보체는 선후로 무지개빛 몸으로 화하는 열반을 시현하였다.

사실이 증명하다시피 팡위선생은 중생의 이익을 이룩함에 있어서 무아의 자비와 통찰력의 지혜를 구비하였다.

출처: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3) - 티벳불교게시판 - 미륵암
https://m.cafe.daum.net/mireuk-am/5hAO/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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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4)

 

7. 자비로움으로 중생을 제도하다.

 

황념조상사의 《곡향집(谷响集)》에는 “곤명연화정사의 수좌 큰사형은 수행이 극히 훌륭하다. 이 분 대덕은 예전 여러차례 금강阿阇黎의 관정을 받았지만, 지금까지 법을 전하려고 하지 않는다. 법을 구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분은 다만 ‘스승님의 허락이 없기에, 저는 함부로 전할 수 없어요’라고 말한다. ”가리키는 사람은 바로 팡위선생이다.

 

대다수 법을 구하고 스승을 모시려고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팡위선생은 가르침을 주고, 그들에게 한지와 티벳의 훌륭한 스승과 대덕들을 추천해주고 그들을 의지하게끔 하였다.

황장로는 여러차례 서신을 써서 그에게 제자를 받을 것을 권고하였는데, 그리하여 그는 먼곳에서 경건한 마음을 안고 스승에게 의지하려는 극히 적은 소수의 인연있는 사람들에게는 자비롭게 받아들이고 겸허하게 말하였다. “뤄나스승을 대신해서, 여러분들을 제자로 받아들입니다.”

 

헤아릴 수 없는 후학들이 그분의 건강장수와 맑고 깨끗한 지혜、사람을 대하는 자비로운 마음、법을 위해 자신을 잊어버리는 덕행을 흠모하여 신심이 생겼고, 불법을 공부하고 밀법을 공부하는 수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또 그 얼마나 많은 후학들이 불법을 향한 마음이 있지만, 어떻게 입문할지 몰라 맹목적으로 수행하고 혹은 경론의 이름만 거론한체 심지어 기로에 들어서며 혹은 삿된 ‘스승’에 의지하다가,  팡위선생의 자비로운 가르침을 받고 다시 감화를 받아 참된 스승을 의지하여 실제수행과 실체체득의 길에 들어섰는지 모른다. 이런 법보시의 공덕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다.

후학들은 모두 친절하게 그분을 “팡어머니” 혹은 “팡할머니”라고 칭한다. 스승과 제자간에 마치 모자、 조모와 손군의 관계와 같았다.

 

만년에 이르러 매일 4시 이후는, 바로 팡선생께서 방문객들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무릇 방문을 하는 사람들은 남녀노소、승려와 거사、관원과 평민、학자나 백정을 물론하고, 그는 언제나 평등하게 대하였다.

특히 무지하고 불경하며 불교를 밎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종래로 싫어하는 마음이 없고 권태의 기색이 없었다.

곤명에서 몇십년을 생활한 그는 당지인들에게 곤명말을 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에게서 친절감을 느끼었다. 일반 곤명의 노부인과 다른 점이라면, 팡선생은 코가 예리하고 눈이 컸으며 용모가 서구적이었다.

정원주위의 문화가 높지 않은 가정주부들에 한해서, 그는 언제나 그들의 생활을 관심하였는데 일상사를 이야기하면서 그들이 알아듣는 말을 하였다. 팡위선생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함께 왔으니 함께 가야 합니다.”

 

어떤 의문이 가득하고 마음에 온통 의문투성이인 사람들은 물어보기도 전에, 팡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눈앞이 환해지고 미간을 펴게 되었다.

또한 스스로 학식이 높다고 생각하면서 오만한 사람들도 팡선생의 겸손 온화함과 꾸밈없는 태도와 지혜가 담긴 가르침을 듣고는 스스로 부끄러워하면서 공경하게 법을 구하고 물러가게 되었다.

꽃과 과일을 들고 온 사람이나 빈 손으로 방문을 온 사람들에게, 팡선생은 종래로 그들이 빈손으로 가지 않게 하였다. 언제나 불당에 올린 과일을 가져와서는 “가져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인연을 맺읍시다.”라고 말하곤 하였다.

 

만약 방문할 때 팡위선생이 한창 식사를 한다면, 반드시 손님을 불러 함께 식사를 하곤 한다.  또한 한창 드시고 있는 찰기가 있는 옥수수에 대하여 다른 옥수수와 어떻게 다른지를 말하고 “채소시장에 가면 구분할 수 있는지요?”라고 묻기도 하였다. 때로는 자신이 드시던 음식을 다른 손님의 그릇에 나누어 주기도 했다.

 

하루는 어떤 젊은이에게 묻기를 “듣건데 자네의 사부와 자네가 모두 신통이 있다면서, 그런가?”

젊은이가 머리를 끄덕이자, 팡위선생은 “그런 작은 신통은 있으면 있지, 재간으로 여기지 말게” 라고 말하자, 젊은이는 연신 머리를 끄덕이었다.

 

팡위선생은 언제나 후배들에게 자신의 신체를 소중히 여길 것이며, 다른 사람과 화목하게 지낼 것을 권고하였다.

팡선생은 지혜와 자비、장수와 건강한 모습을 시현하였기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불법에 대하여 호감과 신심을 내게 되었다.

단 한번 그는 치아가 붓고 아파서, 집사람들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어도 의사에게 가 보일 것을 간청하여 어느 후학의 동행으로 병원에 가게 되었다. 간호사가 그에 침을 놓자 팡선생은 “아이구, 아프군요!”하고 소리를 지르자, 그 후학은 먼발치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기도하였다. “나무관세음보살. 팡선생께서 아프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팡선생은 아프다고 외치지 않았는데 곧 몸을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돌아보는 그 눈빛을 보는 순간, 이 후학은 그로부터 불법에 대하여 더할나위 없는 신심을 내게 되었다.

팡선생은 예전에 “관음보살은 한번을 불러도, 감응이 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팡선생이 도와준 중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나 마음 속 깊이 그 감사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잊지 않았다. 이를 테면 남편 리단선생이 중병에 걸렸을 때 우선생이라는 분이 와서 맥을 짚고 처방전을 썼는데, 이미 밤이 깊어서 마지막 버스를 놓쳐 걸어 집으로 가게 되었다.

팡위선생은 이 일을 언급할 때 마다 감격하여 “우선생은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실 이단선생과 우선생은 이미 선후로 세상을 떠난지 20년지 지났다.

 

팡위선생의 장손 이홍도가 출생할 때 모친이 난산이었는데, 다행이도 의술이 고명한 유의사가 아이를 받아 모자는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매년 홍도의 생일이 될 날이면, 팡위선생은 땅콩과 집에서 찐 단설기 등 속을 챙겨 유의사를 보러 가기도 하였다. 이러한 식품은 공급이 어려운 60년대에 참으로 보기 어려운 것들이다. 이는 자신이 평소 드시기 아까워하는 것들이라서, 가히 진실한 그 성심을 엿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남을 대신해 경비일을 보는 어떤 연로한 어머니가 있는데 넝마를 주워 생활에 보태였다. 하루는 지적 장애가 있는 손녀를 데리고, 값이 싼 마른 국화 한묶음을 사들고 팡선생을 보러 왔다. 팡선생은 즉시50위안을 꺼내여 주면서 “손녀에게 맛나는 음식을 사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팡위선생은 사람에 대하여 자비로울 뿐만 아니라, 기타 중생에 대해서도 똑같이 무량한 자비심을 갖고 있다.

시대의 분위기가 아무리 살벌하더라도, 기회가 있으면 그는 조용히 많은 추어들을 사서는 뎬츠(곤명호)에 방생을 하였다.

90살이 될 때까지 매일 그는 집사람들로 하여금 채소시장이나 시장에 가서 고기를 사오게 해서는, 그날 도살된 중생들을 대신하여 그들을 위해 법을 수행하여 천도를 진행하였다.

 

팡위선생은 예전 필자에게 이런 진실한 이야기를 말한 적이 있다. “어떤 중학생이 수업을 빨리 가야 해서 집을 나설 때, 집에서 기른 어미고양기가 그의 책가방을 붙잡고 놓지 않았습니다. 급한 김에 그는 호되게 어미고양이를 발로 찼는데, 어미고양이가 그만 유산을 한겁니다.” 선생의 얼굴에는 참을 수 없는 슬픔의 표정이 역력하였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훗날 그 애는 꿈에 다섯마리의 작은 고양이들이 그의 다리를 끌어안고 우는 꿈을 꾸었답니다.-그건 다섯목숨이지요!”

 

팡위선생은 단아하고 품위가 있다. 용모가 수려하고 자애롭다. 행동이 민첩하고 귀와 눈이 밝아 노쇠한 모양을 전혀 나타내지 않았다. 90살이 되어서도 안경을 끼지 않고 수를 놓고 바느질을 할 수 있다. 두눈에서는 맑고 투명한 지혜의 빛을 발하였다. 팡선생의 목소리는 낭랑하고 풍도가 있으며 유머가 있다.

늘 방문을 온 사람들에게 2,3시간씩 불법을 가르치는데 피곤한 기색이 없었다. 사유가 명석하고 기봉이 뛰어난데 참으로 믿기 어려웠다. 내가 대면한 분은 아흔살이 되는 노부인이다.

 

팡위선생은 이렇게 말씀하였다.

“상사의 은덕이야말로 아주 큽니다.

스승이 제자 한사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바로 제자의 삼생삼세의 죄업을 질머지는 것입니다.

일체는 상사를 기도해야 하고, 상사는 바로 우리가 의지하는 큰 산입니다!”

 

“윤회는 고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삼대아승지겁은 기다릴 수 없어요. 바로 일생동안 성불을 해야 해고, 밀법은 즉신성불의 법이지요. 우린 석가불의 정법을 전해야 할 것입니다.” 

“밀법은 대학원생의 과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밀법 수행은 특수한 근기를 수요하는데, 근기가 적합하지 않은 사람은 공부를 한 후에도 후퇴합니다.

후퇴를 한 사람은 퇴전마(退转魔)를 받게 되는데 몸과 마음이 다 좋지 않습니다. ”

 

“사실, 주문을 염송하고 염불하는 것은,  바로 도움을 청하는 것이고 윤회 속에서 구조를 청하는 것이지요.”

“우린 본래 모두 부처입니다. 지금 길을 잃었어요. 집에 갈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하지요? 억지를 부립니다.

불보살의 다리를 붙잡고 ‘집에 돌아갈 수 없어요. 제발 데려가 주십시오’라고 하지요. ”

 

“때리고 욕하고 언쟁하고 살생하고…이 짧디짧은 몇십년동안 불보살님들로 하여금 통탄스럽게 하는 일을 얼마나 했습니까? 만약 참회하지도 않고, 가피를 받아 해탈하려고 한다면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 일일까요?”

“문화대혁명때 나를 괴롭힌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사죄하더라구요. 그분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너무 큰 부담을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만약 입장을 바꾸어 놓고 생각하면, 나 역시 그럴거예요. 모두 지난 일입니다. 나를 놓고 말하면 고통속에서 업장을 소멸했다고 생각합니다.’”

 

“백살은 신기하지도 않아요. 여러분들 한번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이 왜서 늙기도 전에 먼저 노쇠해지는지?”

“이 껍데기 같은 몸을 집착하지 마십시오. 이 몸은 마치 집과 같이 계속해서 수리해야 하고, 몇년을 더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요.

나보다 젊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나를 앞서 세상을 떠납니다. 나와 같은 연령에 이르면, 이미 철거를 해야 하는 임시주택에 불과해요. 여러분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3, 5년밖에 안돼요.”

“과거는 생각할 필요가 없고, 미래에 대해서는 불안할 필요가 없어요.

지금은 긴장해하지 말고 염불하고 주문을 수지하면, 자연적으로 편안하게 됩니다.”

 

“참회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께서 지금 나쁜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어릴 때 벌레를 잡고 새를 붙잡아 놀고 또 변소에 가서 파리를 죽이고, 몇십년동안 길을 가면서 얼마나 많은 벌레와 개미를 죽였습니까? 이런 것들은 살생에 속하지 않나요? 또 업장이 아닌가요?”

“백자명을 만든 불보살은 우리로 하여금 염송할 때, 마음과 대자연이 함께 일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관음성호를 한번 읊으면, 몸에서 한줄기 빛이 나와요.

그런 가련한 중생들은, 여러분들의 옷자락을 붙들고 여러분의 구제를 바랍니다. 때문에 염송한 다음 그 공덕을 중생들에게 회향해야 합니다.”

 

“현종에서는 ‘나무아미타불’을 염하고, 밀종에서는 ‘옴마니반메훙’을 염하지요. 모두다 여섯글자인데 공덕이 같아요. 

오래 읽으면 만념이 하나로 돌아갈 뿐만 아니라, 이 하나는 또 공으로 돌아갑니다.”

“관음보살의 육자대명은 육도중생을 제도할 뿐더러, 매 하나의 글자에서는 한 줄기 빛이 나와 매개 육도로 흘러갑니다. 마지막에 보태는 ‘쓰’자는 힘이 더 큽니다.”

“큰 절을 올리면 업장소멸이 아주 대단한데 10만의 절을 올리고 나면, 여러분들의 일체 모든 병은 다 낳을 수 있어요. 또한 심장에 특별히 좋은 점이 있어요.”

“온마음을 기울여, 네가지 예비수행(四加行)을 하십시오.

가능하게 여러분이 절을 하는 도중에 선정에 들 수 있어요. 만다라를 공양하면서도 정에 들 수 있고요.”

(*참고:

***당신은 부처님께 10만번 절했습니까? / 남회근선생설법 http://cafe.daum.net/MRSB/RCpP/927

염불ㆍ간경으로도, 삼매에 들고 깨닫습니다---독경讀經은 지극히 높고 위없는 불법을 전수하는 관정灌頂
https://blog.daum.net/ntassabas/199 )

 

“헤이함도 없이, 집착함도 없어야 해요.

헤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들의 마음이 밖으로 흩어져 있지 않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은, 외계의 일체 모든 것을 진실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이에요.”

“나는 수시로 선정 속에 있어요.”

팡위선생의 가르침은 대원만의 경계속에서 흘러나오는 방편 속의 정교한 말씀들이었다. 이는 티벳대덕들의 가르침과 그 종지가 몹시 일치하고 또한 근기와 상황에 맞았다. 그리고 한지 중생들의 근기에도 적합하였다.

팡위선생을 바라보노라면 자기도 모르게 “관음보살” 、“다라모”의 뜻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관음보살” 、“다라모” 존재의 진실성과 그 지혜와 자비의 묘력에 더이상 의심을 하지 않게 된다.

 

8. 편안히 입적을 시현하다.

 

곤명 연화정사를 건설하고 원만하게 개안을 한 다음, 97살이 된 팡위선생은 아픈 몸을 시현하였다. 눈언저리와 입술이 자색을 띠었고 백옥같은 면색이 암담하게 변하였다. 그리고 심장이 편치 않은 증상을 나타내었다.

식견이 있는 어떤 사람이 문안을 하고 나서 “팡선생은 사실 아무런 병도 없어요. 다만 정사를 다시 만드는 중이에요. 중생을 위해, 너무 많은 업장을 질머지고 있습니다. 그분은 본래 100살을 살 수 있지만, 지금 보건대 불가능할 것 같군요.”라고 말하였다.

 

문안을 온 많은 사람들이 모두 “팡선생은 병이 아주 심각해, 말씀과 가르침이 분명하지 못하고 앞뒤말을 뒤바뀌게 말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시기, 그분이 하신 대부분 말은 단어와 단어사이、구절과 구절사이에 의미가 연관되지 않았다. 심지어 절반은 혼잣말을 하는데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였다. 그리고 얼굴 역시 몽환과 같은 표정이었다.

필자는 아무런 수행도 없다. 다만 줄곧 마음 속에 존경하는 마음과 신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팡선생은 결코 의식이 분명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한번은 방문을 하였는데 그분께서 침실의 의자에 앉아서 여러 손님들과 꿈과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여러 손님이 하직을 한 다음, 나는 곧 다가가 공경하게 가르침을 청했다. 팡선생은 아주 명백하게 가르침을 주셨다. 또 한번은 많은 손님들이 물러나 선생의 객실에서 서로 이야기를 할 무렵, 나는 살며시 작은 침실로 들어가 꿇어앉아 예배를 올리었다. 팡선생은 즉시 나에게 주문 하나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이 주문을 염송하면, 뤄나스승과 꿍까스승의 가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이외에 불가사의한 것은,

중병에 걸려 침상에 있는 백세의 팡위선생이 갑자기 집안사람들에게 대량의 돼지족발을 고아서 자신에게 주기를 요구하였다. 이틀동안 한가마의 족발을 다 먹을 수 있었다. 이는 선생이 자신이 최대의 노력을 다하여 방생도의 중생들과 인연을 맺는 것으로, 그들을 제도하는 것이다.

이는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고기를 먹고 중생을 제도한다. ”며 사실 마음 속에는 고기맛을 탐해 이로써 자신의 몸을 보신하려는, 수행공덕이 얼마 되지 않는 사람과는 본질적으로 구별된다.

 

그동안 몇번 병세가 심각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긍정적으로 집사람들에게 “괜찮다. 아직 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였다. 2002년 초의 어느 하루, 팡선생은 “이번에는 정말로 가야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였다.

2002년 2월 4일, 입춘이 다가올 무렵, 99살 고령의 팡위선생은 집안에서 화장실에 가 몸안을 비운 다음 침실로 돌아와, 가부좌를 하고 항마 수인(降魔印)을 지은 다음 편안히 마음을 법계로 귀속하였다.

이튿날이 지난후 가슴부위의 여온이 흘어지지 않았다. 수일이 지나 다비를 치렀는데, 법체가 유연하여 마치 솜과 같았다.

 

2월 8일, 곤명 서쪽교외의 옥안산 공죽사(筇竹寺) 옆에서 항아리에 앉을 화로를 안치하였는데, 어떤 제자들은 지장보살이 현현하여 공중에서 꽃을 뿌리는 것을 보기도 하였다.

2월 9일 다비식을 할 때, 구름 한점 없이 맑은 하늘에, 마치 귀의경(皈依境)에 나오는 좌우 대칭되는 몇개 조의 빨간색을 주로 하는 연화꽃모양의 상서로운 구름이 출현하였다.

이튿날 항아리를 열자, 영골에는 극히 선명하게 다라모관음본존(度母观音本尊)의 전신형상과 종자글자가 현현하였고, 여러 색들의 각종 사리가 무수히 나왔다.

 

열반에 들기 1년 전, 선생은 제자 한명에게

“지금 내가 보는 것은, 주위의 벽이나 건축물 등이 아니라, 다만 온통 빛일 뿐이다.”

 

제자가 묻기를 “선생님께서는 다음 세에 어디에 가시려는지요?”

선생이 대답하기를 “곤명에서 몇십년을 생활했으니 여기 모든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곤명에 다시 올 것 같다.”

 

이분 지혜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3년 뒤, 사계절이 봄과 같은 곤명의 시 중심에 40미터 넓이의 난빙(南屏) 보행거리를 만들었는데 이는 세계에서 제일 넓은 보행거리고 사람들이 인산인해를 이룬다. 길거리에 4개의 약 6미터 높이의 석주가 서 있다. 위에는 서법의 대가들이 쓴 글이 있는데 명대의 장원  원양신(元杨慎)、청나라때의 이름난 대신 전남원(钱南园)、민족영웅 임측서(林则徐)등 역사인물들이 쓴 시문과 격언 등이 있다.

그중 유일한 당대명인의 격언은 바로 팡위교수의 말씀이다. 큰 글자로 된 금빛글자로 조각해 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일을 하고, 진심으로 당신보다 고통스러운 사람을 도와줄 때, 당신은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谨按: 본문의 주요내용은 장기간 팡위선생을 가까이한 몇분의 거사들의 서술을 기록하였다.  또 기타 문장의 회억문들을 절록하였다. 그리고 적은 량의 일부분은 필자본인이 직접 가르침을 받은 것이다. 임진년 입추, 觉迈거사 합장.

 

출처:백세의 선지식 팡위(方于)교수(4) - 티벳불교게시판 - 미륵암
https://m.cafe.daum.net/mireuk-am/5hAO/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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