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불/정토공부2-*중요

극락원문(강의), 티베트정토법(강의) ---(모음)

아미연(阿彌蓮) 2021. 3. 25. 21:06

< 극락원문 >

출처: 극락원문 - 연꽃 위의 부처님 극락원문 - 연꽃 위의 부처님 (daum.net)

극락원문(1)

수행하여 성불하기 위해 보리심을 냅니다.

부모와 같은 모든 중생을 구하기 위해

수행하여 성불할 것을 맹세합니다.

하루빨리 부처님의 도를 완성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수행하겠습니다.

 

오늘은 극락법회의 첫날이다극락법회 기간에 우리는 주로 아미타불을 수행할 것이다아미타불은 연화부의 주존이시다.

 

의궤는 한 가지 방법이 있다. 의궤를 통해 우리와 아미타불의 경계가 하나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 이것이 가장 상등의, 좋은 수행이다. 

 

다음은 아미타불은 무량광(無量光), 무량수(無量壽)의 의미다. 진정한 무량광, 무량수는 불성이고, 자성이다. 우리는 의궤를 통해 아미타불을 수행하고, 불성이 드러나게 해야 한다. 즉 자신이 자성 즉 깨달음과 견성으로 돌아가게 해야 한다. 이런 수준 혹은 경계에 이르는 것이 중등의 수행이다. 극락법회 기간에 여러분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루에 네 번 열심히 수행해서 이와 같은 수준, 경계에 이르라. 

 

가장 하등의 수행은, 죽을 때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최소한의 수준이다. 우리가 극락법회를 열든, 아미타불을 외우든, 아미타불의 정토 요결을 수행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소한의 수준, 경계다. 이 수준에도 도달하지 못한다면 이 수행을 하는 의미가 없다. 

 

임종할 때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이것이 가장 최소한의 요구다또한 하등 근기자에 대한 요구다

정토 수행법의 첫번째는 세 가지 생각의 포와법이다이것은 밀교에만 있는 수행법이다. ‘세 가지 생각이란 중맥을 길로 생각하고신식(神識)을 여행객으로 생각하고서방극락 세계를 가야 할 곳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수행을 잘 하면, 중맥을 통해 자신의 신식을 아미타불의 가슴으로 보낼 수 있다. 밀교에서 말하는 세 가지 생각의 포와법으로 임종시에 왕생할 수 있다

두번째는 <아미타경>에서 말하는 왕생하는 네 가지 인()으로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이다.

 

<아미타경>은 티베트 불교에도 있고중국 불교에도 있다용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의미는 같다

티베트어본 <아미타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난아어떠한 중생이라도

저 여래를 계속 관상하여

여러 무량한 선근을 쌓고

보리심을 내고원만히 회향하며

불국토로 왕생할 것을 발원하면

그는 생명을 마칠 때선서출유괴원만한 정등각이신 아미타불이 여러 비구에 둘러싸여 그 앞에 나타셔서 내려다 보실 것이다무량광불이 나타난 후 그가 청정한 마음으로 죽으면, 그는 극락세계로 왕생한다.’

 

극락원문(2)

저 여래는 아미타불무량광불이다.

여러 무량한 선근을 쌓는’ 것은 자량을 쌓고 업을 청정하게 하고 장애를 없애는 것이다.

보리심을 내고원만하게 회향할 때의 보리심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이다즉 위로는 불과를 구하고아래로는 중생을 구한다.

저 불국토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면’ 아미타불의 불국토인 서방극락세계를 가리킨다

 

서방극락세계로 가기를 발원하는 것이다진심으로 서방극락에 가고자 하면 특별히 강한 욕망이 있다. 

이것이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네 가지 인()이다이 네 가지 인을 갖추면 생명을 마칠 때’, 즉 사람이 죽을 때 선서와 출유괴’ 

선서는 부처님의 별호다이처럼 피안으로 가서 다시는 물러서지 않으며 생과 사가 없다는 의미다. ‘선서도 이처럼 이해할 수 있다자신과 타인을 상하지 않는 길을 통해, 자신과 타인이 상하지 않는 경지에 이른다.

출유괴도 부처님의 별호다. ‘은 삼계를 벗어난다는 의미이고, ‘는 다섯 가지 원만한 지혜를 갖춤을 의미한다. ‘는 네 마구니를 훼멸한 것을 가리킨다그래서 모든 부처님을 출유괴라고 부른다.

원만한 정등각은 아미타불이시다

수많은 비구가 둘러싸고’ 여러 비구가 둘러싸고 있는데왼편에는 대세지보살이오른쪽에는 관세음보살이 있으며아주 많은 대승의 비구들이 둘러싸고 있다. ‘그 앞에 나타나’ 일심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사람 앞에 나타나 

내려다보신다’ 자비로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신다.

그가 무량광불을 본 후에’ 중생이 무량광불과 그 권속을 본 후에,

지극히 청정한 마음으로 죽으면아주 기뻐하고 청정한 마음으로 죽으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한다.’ 임종 시에 이러한 마음가심으로 세상을 뜨면, 마음에 잡념이나 미련이 남지 않는다.

 

임종할 때 마음에 잡념이 없고, 이 세계에 대한 미련이 없는 마음상태로 세상을 떠나면, 반드시 극락세계로 왕생한다이것은 <아미타경>에서 말한 것이다. 

우리는 법회 기간에 모든 수행을 할 때마다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염송하고

평소에는 착메 린뽀체의 <극락원문>을 염송할 것이다.

 

착메 린뽀체의 <극락원문>은 <아미타경등 현교의 여러 경전 내용을 게송의 형식으로 모은 것이다착메 린뽀체의 <극락원문>에서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이다이번 법회에서 우리가 아주 상세하게 착메 린뽀체의 <극락원문>을 설명할 시간이 없다

대신 간단하게 미팜 린뽀체의 <극락원문>을 이야기하겠다미팜 린뽀체의 <극락원문>은 길지 않다. 4개의 게송뿐이다법회 기간 동안 다 설명할 수 있다미팜 린뽀체의 <극락원문>을 통해, 여러분에게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설명하겠다. 

 

극락원문(3)

첫번째는 복전을 관상하고, 시시로 서방극락세계를 기억하고, 시시로 아미타불과 그의 권속을 기억한다. 

두번째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위로는 불과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이타의 보리심이다. 

세번째는 자량을 쌓고 장애를 청정히 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청정한 바람을 갖고 마음에 잡념이 없이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을 발원하는 것이다. 

이상이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4가지 인이다.

 

무량광 스승님 보살펴주소서;

이것은 복전을 관상하는 것을 말한다. 

서방극락세계는 아미타불의 정토다. 아미타불이 법장비구였을 때 세간의 자재왕여래왕 앞에서 수승한 보리심을 냈다. 그리고 갠지스 강의 모래수만큼의 아승지겁 동안 수행에 정진했다. ‘갠지스강의 모래는 갠지스 강의 모래 수와 같다는 것이다. 

보장불이 세상에 계실 때 미래에 서방의 어느 정토에서 성불할 것이라는 수기를 얻었다. 그리고 갠지스 강의 모래 수만큼의 아승지겁 동안 수행하여 서방극락세계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방극락세계에서 성불해서 아미타불이 되었다. 

사실 아미타불이 복륜왕이었을 때, 보장불의 수기를 얻었었다. 그때 그는 이미 8지 보살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긴 세월 동안 수행을 했는가?

 

현재 서방극락세계는 이미 형성되어 있다. 아미타불께서도 이미 성불하셨다. 불서에서 이야기된 서방극락세계의 시간을 계산해 보면, 이미 형성된 지 10일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사바세계의 시간으로 계산해 보면, 이미 10번의 대겁이 지났다. 

서방극락세계는 아직 있다. 아미타불도 아직 계시다. 아미타불이 많은 제자들을 위해 법륜을 돌리고 계신다.

 

 

복전을 관상할 때 다음을 기억하라. 사바세계의 서쪽에, 아미타불과 그 권속들이 계시다.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많은 대승의 비구들이 우리를 보고 계시고, 우리는 죽은 후에 바로 서방극락 불국토로 간다. 

굳건한 믿음으로 극락세계를 기억하고, 아미타불의 명호와 심주를 외우는 것이,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처음 시작할 때 시시각각 서방 극락세계를 생각하고, 아미타불과 권속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들은 모두 불가사의한 공덕을 갖고 있다.

 

아미타불의 공덕은 몸의 공덕, 말의 공덕, 뜻의 공덕 등등이 있다. 

그분의 권속들 즉,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기타 대승의 비구와 서방 극락세계의 공덕을 일일히 생각한다.  

 

서방 극락세계는 청정하고, 장엄하다. 

그곳의 모든 사물은 여러 보석으로 만들어졌다. 보석은 귀하다고 드물다는 의미다. 

그곳의 새는 그 노래소리를 듣고 싶으면 바로 들을 수 있다. 법을 듣고 싶으면 바로 소리가 있고, 듣기 싫으면 소리가 없어진다. 

나무도 소리를 낸다. 나무의 소리를 듣고 싶으면 소리를 내어 불가를 부른다. 나무들이 모두 법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여러 새들도 다 이렇다.

 

극락원문(4)

왜 이런 것을 이야기하는가극락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것이다극락세계는 장엄하고원만하다

극락세계에는 고통이 없다. ‘고통’ 이라는 말을 들어볼 수도 없다

그곳에 있는 대승비구들은 모두 청정하다그곳은 가장 청정하고가장 장엄하고가장 원만하다. 

이런 것들을 통해, 중생에게 설명하고 법을 전한다.

 

서방 극락세계는 정말로 이렇다갖고 싶은 것은 다 갖고하고 싶은 것도 다 한다

이곳은 극도로 장엄하다이보다 더 장엄한 것이 없다

이곳은 지극히 진귀하다이보다 더 진귀한 것이 없다.

이곳은 지극히 청정하다이보다 더 청정한 곳이 없다

이곳은 지극히 원만하다이보다 더 원만한 곳이 없다

우리의 언어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그러나 이것은 경계를 초월했다말로 할 수 없고비유할 수 없고생각할 수 없고상상할 수 없다.

 

<아미타경>과 <극락원문>에서 이야기하는 그런 세계가 정말로 있을까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주로 이야기하는 것은 초월의 경계다처음에는 이런 것을 생각하기 힘들다. 이것은 습관이 되어야 한다

일상생활을 하며 먹고 마시고 싸는 동안에도,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생각하면, 천천히 습관이 된다그러면 서방극락세계가 자연히 생각이 나고아미타불을 기억할 수 있다

우리가 간혹 며칠몇십일 동안 무문관에 들어 전적으로 수행하고 염송하는데이때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오직 서방극락세계만 생각하고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아미타불과 아미타불심주만 생각하라이렇게 하면, 꿈의 경계로 서방극락세계가 나타난다.

 

밤에 잘 때도 아미타불을 생각하고아미타불 심주를 외우라

여기의 한 나이든 라마는 늘 보바금강심주를 외운다밤에 잘 때도 멈추지 않고 쉼없이 외웠다심주를 외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그래서 습관이 중요하다

전에 여러분에게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임종의 날처음에는 병세가 악화되고 다음으로 몹시 아프고모든 것 모든 소유했던 것을 잃어야 한다또한 무서운 모습이 펼쳐진다이런 상황에서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아미타불을 기억하기는 어렵다그래서 습관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늘 이를 습관화하라.

 

처음에는 시간을 정해 놓으라예를 들면 아침점심저녁 정해진 시간에 생각하고아미타불과 그 권속들을 관상하라. 

이 수행을 일상생활과 일하면서도 운용하여 시시각각,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 아미타불과 그 권속을 기억하라

이러면 생활이 원만해지고일도 원만해진다자기는 언제나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등 여러 성스러운 존재들이 자비로운 눈으로 자기를 보고 있으며불보살의 비호 아래 생활하고 일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면 마음이 저절로 좋아지고기분도 좋아진다이런 마음과 기분으로 생활하고 일하면, 여러분의 생활과 일이 저절로 원만해진다.

 

극락원문(5)

복전을 관상하는 것은 늘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종시에 왕생하는 인이고, 임종시에 왕생하는 방법이고, 임종시에 원만한 방법이다. 또한 지금 원만하고 즐겁게 사는 방법이다. 

이것을 중시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임종이라는 말만 나오면, 자기자신, 생활, 일하고 별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 아미타불을 늘 생각하고,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으로 서방극락세계에 아미타불이 계시고, 아미타불께서 나를 보고 계시며 가피하고 계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극락세계의 존재를 믿고, 아미타불의 존재를 믿는 것이다. 굳은 믿음이 있고, 이런 청정한 마음이 있으면,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아예 거리가 없다 해도 틀리지 않다. 아미타불이 여러분을 지켜보고, 가피할 수 있다. 

범부는 맹인 같다. 눈 앞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어떻게 그것에 가까이 갈지 모른다. 아미타불은 언제나 우리를 주시하고 계신다. 우리는 그것을 알지 못할 수도 있고, 이 가피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우리는 극락세계가 끝이 없다는 것을 믿는다. 아미타불이 어디에나 계신다는 것도 믿는다. 바로 우리 눈 앞에, 우리 머리 위에서, 언제나 우리를 보고 계신다. 아미타불의 가피 아래 있는데, 어떻게 마음에 번뇌가 생길까? 오직 비할 바 없는 환희, 비할 바 없는 자신이 있을 때, 많은 번뇌가 그림자도 없이 사라진다.

 

복전을 관상하는 것은, 임종시에 서방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네 가지 인 중의 하나다. 

이것은 붓다께서 우리를 위해 말씀해주신 현재의 원만으로서, 우리의 생활, 일에서 해탈되고 즐거움을 얻는 방법이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여러분 마음 속으로 잘 알겠는가? 막힌 곳이 갑자기 훅 뚫어지는가?

 

내가 왜 이것을 강조하는가?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말하는 티베트 불교 정토법을 전혀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것이 임종할 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죽은 후에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죽음 후를 이야기하는 것이니현실생활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은 생활, 일이 중요하고, 이것은 일, 생활과 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죽을 때 왕생하는 방법은, 늙은이들이나 관심있는 일이고 노인들이 수행하는 법이라고 한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생활, 일이다. 지금 원만하고, 지금 행복하는 방법이다

 

불보살을 생각하는 공덕과 이익이 아주 크다. 

부처님은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구든 붓다를 생각하면, 붓다가 그 앞에 안주하며 늘 가피를 내리고, 모든 죄에서 해탈케 한다.’ 

마음 속으로 부처님을 생각하고 부처님을 부르면, 부처님이 그 앞에 계시며, 늘 그 중생에게 가피와 에너지를 주신다. 

이 중생은 모든 죄와 장애에서 해탈한다. 모든 장애는 병의 장애, 마구니의 장애, 번뇌장, 소지장을 포함한다. 우리의 몸은 여기가 아프고 저기가 아프고 한다. 여기가 병들고 저기가 병든다. 이것이 병의 장애다. 견결한 신념으로 불보살을 생각하고 기도하면, 병의 장애를 없앨 수 있다. 

많은 병이 마음에서 나온다. 자기의 마음이 청정하지 않고 기분이 안 좋으면, 질병이 생긴다. 마음이 좋고 기분이 좋으면, 질병이 자연히 좋아진다. 이렇게 해서 병의 장애를 없앨 수 있다

 

극락원문(6)

마장을 없앤다. 

대개 사람들은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것을 좋아했다가, 조금 뒤에는 싫어한다. 이 사람이 자기를 해치려 한다, 망치려 한다 생각한다. 마음이 좁고 마음이 변태적인 사람은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자기 주변에 좋은 사람이 없고, 청정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모두 마장이다. 

마음에 마장이 일어나지 않으면, 바깥의 마장이 보이지 않는다. 마음에 마장이 없으면, 외부의 마장도 없어진다. 

번뇌장은 해탈을 막는다. 소지장은 성불을 가로막는다. 이런 장애는 모두 없앨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죄업과 장애를 벗어날 수 있다.

 

불보살을 생각하는 공덕이 이렇게 크다. 

그러나 지금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공부하는 우리를 포함해서, 모두 비현실적으로 이상만 높아서, 전혀 불보살을 생각하고 기도하지 않고, 오직 대원만,대중관,대수인만 좋아하고 추구한다. 자가 붙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원만은 안 되고, ‘자를 붙여서 대원만이어야 하고, 광명으로는 안 되고 반드시 자를 붙여서 대광명이어야 한다. 수인이라고 하면 안 되고 자를 붙여 대수인이어야 한다. 중관은 안 되고 반드시 자를 붙여 대중관이어야 한다. 

여러분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여러분은 지금 산 아래 있다. 그리고 대원만, 대중관, 대수인은 산꼭대기에 있는 풀이다. 이 풀을 얻을 수 있는가?  늘 산꼭대기의 풀을 먹을 생각만 하고, 다른 풀을 먹을 생각은 하지 않는다면, 오직 한 가지 길 뿐이다. 죽는 것이다!

 

법을 닦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모두 불보살의 경계다. 여러분은 지금 도저히 여기에 닿지 못한다. 그런데 이것만 원하고 다른 것은 닦지 않으면, 오직 한 가지 결과뿐이다. 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이 산 아래 있으면 산 아래 풀을 먹으라 하셨다. 산 아래 있을 때는 열심히 산 아래 풀을 먹고, 힘이 생기면 산을 올라가야 한다. 제일 마지막에 산 꼭대기의 풀을 먹을 수 있다. 이 비유는 아주 중요하다.

 

여러분은 너무 높은 것만 바라보지 말라. 이런 법이 실재의 법이다. 서방극락세계와 아미타불을 많이 생각하고, 아미타불께 기도하라. 이것이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우리가 지금 이익과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극락원문(7)

오늘 내가 강조한 것은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이것은 임종시에 왕생하는 방법이 아니라, 현재 원만해지는 방법이다. 우리의 생활을 원만하게 하고, 일을 원만하게 하는 구결이다. 

여러분 모두 이 법을 아끼고, 서방 극락세계와 아미타불과 그 권속들을 많이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기도하라. 이렇게 하면 불보살의 가피를 얻고, 서방극락세계의 가피를 얻을 수 있고, 현재 행복하고, 원만해질 수 있다. 이것이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두번째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대승불법에서 말하는 것이다.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는 방법은 대승불법에 속한다. 그러므로 먼저 보리심을 지켜야 한다.

 

먼저 보리심을 낸다. 서방극락세계 아미타불 앞에서 무상의 보리심을 낸다. 

미팜 린뽀체의 <극락원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께서 보리심을 낸 것처럼 나도 무상의 승각심을 냅니다.’ 아미타불은 일찍이 보리심을 내셨다. 나도 아미타불을 따라 보리심을 낸다. 

아미타불이 낸 것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 즉 위로 불과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하려는 보리심이다. 중생을 위해 성불하는 것이요, 성불하여 왕생하는 네 가지 인 가운데 하나다. 우리가 늘 중생을 위해 수행해서 성불하려 한다고 말하고, 성불하기 위해서 육바라밀을 지킨다고 한다. 

서방극락세계에 가는 것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다. 서방극락세계에 간 후에 정진 수행해서 빨리 붓다가 되고, 바램으로 다시 와서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지금 정토법을 수행하면서 보리심을 내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육도가 너무 고통스럽고 윤회가 너무 고통스러우니, 나는 왕생해야겠다. 서방극락세계로 가서 다시는 오지 않아야겠다. 가서 자비로운 관세음보살을 만나고, 관세음보살 어머니 품에 안겨, 다시는 오지 않으리라.’ 보리심을 내지 않는다. 

이런 마음으로 부처님을 부르고 왕생을 추구하면, 왕생할 수 있을까?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을까? 갈 수 없다. 보리심을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대승 모든 수행법의 전제다. 대승불법의 기초석이다. 보리심을 내지 않으면, 대승불법이 아니다. 극락세계에 갈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보리심을 내야 한다.

 

극락원문(8)

보리심을 내는 것은 

나는 왕생하리라, 나는 서방극락세계에 가리라. 그곳에서 수행에 정진해서 빨리 성불하고, 다시 와서 중생을 구하리라.’ 이런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부처님을 부르고 왕생을 추구해야 바르고 정확하다. 중생을 구하는 것은 최종적인 목적이다.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면 아미타불 앞에서 수행하면 빠르다. 

먼저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닦고,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빨리 성불하고, 다시 와서 중생을 구하는 것, 이것이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보리심은 아주 중요하다. 

자량을 쌓고 장애를 없애는 것은 보리심 없이 할 수 없다. 

청정한 발원도 보리심없이 할 수 없다. 보리심이 없으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겠다는 것도 청정한 바람이 아니다. 그래서 보리심이 중요하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이 무엇인가? 위로 불과를 추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구하는 것이다. 위로 불과를 추구하는 것은 성불하겠다는 것이고, 아래로 중생을 구하는 것은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성불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서 한다. 이런 마음이 보리심, 타인을 이롭게 하는 보리심이다.

 

<극락원문>에서 왕생하는 4가지 인을 말한다. 

그중 첫번째 인이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즉 언제나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고, 서방극락세계와 아미타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한다. 

둘째 인은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즉 타인을 이익되게 하는 보리심이다. 오늘은 이 두 가지 인을 주로 이야기했다. 

자량을 쌓고 장애를 청정히 하는 것과 청정한 발원을 하는 두 가지 인은 다음에 이야기하고,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한다. 같이 회향하자.

 

극락원문(9)

오늘은 극락법회 3일째 날이다. 극락법회 기간 동안 우리는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이야기할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아미타부처님과 하나가 되어 궁극의 성취를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견성하고 개오하는 것도 괜찮다. 아미타불은 우리의 자성, 불성을 대표한다. 우리는 수행을 통해 자성, 불성이 드러나게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번에 법회에 참가하고 법을 닦는 것이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마지막에 깨닫고 견성하는 수준에 도달하기가 어렵다.

 

보통 범부는 임종할 때 왕생해야 한다. 임종 때 왕생하려면,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을 닦아야 한다. 

부처님은 <아미타경>에서 누구든지, 어떤 중생이든지, 진심으로 서방극락세계로 가기를 원한다면,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그러나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네 가지 왕생하는 인이다.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임종 때 왕생하지 못하고 서방극락세계에 가지 못한다.

 

네 가지 인 중에, 두 가지는 이미 말했다. 

첫번째는 복전을 관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의인(所依因)이다. 시시각각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 무량광불을 생각하는 것이다. 앉거나 서거나 굳은 믿음으로, 서방극락세계의 내, , 밀의 공덕을 믿는다. 아미타부처님의 신, , 의의 공덕을 생각한다. 

그러면 아미타부처님의 가피를 얻고, 동시에 심령이 정화되어,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죽음에 당면했을 때 마음에 두려움이 없으면 이 세계를 편안히 떠날 수 있다. 이것이 왕생이다. 서방극락세계에 가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서방극락세계의 공덕을 생각하고 아미타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여, 자신에게 환희심이 일어나게 하고, 자기 마음의 원망과 원한 등의 번뇌가 자연히 사라지게 한다. 이것은 죽을 때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방법일 뿐 아니라, 우리가 지금 현재 살면서 해탈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방법이다.

 

극락원문(10)

두번째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도와주는 인이다. 우리가 자량을 쌓고 장애를 청정히 하게 도와준다.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을 발원하면 보리심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 보리심의 도움이 있어야 우리가 바라는대로 이루어지고, 궁극적인 원만을 이룰 수 있다. 자량을 쌓고 장애를 청정히 하면 이것이 해탈의 인이 되고, 왕생하는 인이 된다. 그러나 보리심이 없으면 이런 것들이 모두 해탈의 인이 되지 못한다. 왕생하는 인도 되지 못한다. 선한 일을 많이 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해도, 역시 해탈하는 인이 되지 못한다. 왕생하는 인도 되지 못한다. 왕생하는 인이 되는가, 되지 못하는가, 해탈하는 인이 되는가 되지 못하는가는 발심과 동기를 봐야 한다. 위로는 불과를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하는 이타의 보리심이 있어야 해탈하는 인이 되고, 왕생하는 인이 된다. 보리심을 내는 것은 도와주는 인이다. 이타의 보리심이 없으면 안 된다는 것이 전제조건이다. 

이 두 가지 인은 앞에서도 이야기했다. 먼저 간단히 다시 이야기했다. 오늘 주로 이야기할 것은 세번째 인이다. 즉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인이다. 즉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진정한 인이라는 뜻이다. 서방극락세계의 공덕을 생각하고, 아미타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서방극락세계로 가고자 하는 열망과 욕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려면 인이 있어야 하고,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해야 한다. 이런 자량이 있어야 비로소 사방극락세계로 갈 수 있고, 아미타 부처님을 만날 수 있다.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 진정한 인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이 바른 인이다.

 

네번째 인은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을 발원하는 것이다. 즉 청정한 원을 내는 것이다. 이것을 바른 원()이고, ()이라고 한다. 이제 인()과 연이 모두 갖추어진다.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기만 하면 안 된다. 이런 발원을 하지 않고, 서방극락세계로 가기를 원치 않고, 서방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욕망이 없으면 안 된다. 이것이 연이다. 인연이 맞아야 우리의 바람이 이루어진다. 인은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방법은 아주 많다. 84천의 법문이 모두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방법은 7지공양에 포함되어 있다. 7지공양은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7가지 방법이다.  7가지 방법을 통해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할 수 있다. 모두 7가지다. 그래서 7지공양이라고 한다. 7지공양은 법이다. 자량을 쌓고 업장을 없애는 7가지 방법이다. 또한 업을 씻고 복을 쌓는 7가지 방법이다

 

극락원문(11)

7지공양에는 무엇이 있는가? 첫번째, 여래를 예를 갖춰 찬탄한다. 둘째, 여러 부처님께 공양한다. 세번째, 업장을 참회한다. 네번째, 남의 선근을 기뻐한다. 다섯째,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한다. 여섯째, 부처께 세상에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한다. 일곱째, 모든 것을 회향한다오늘은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고, 간단히만 설명하겠다.

 

첫째, 여래께 예를 갖춰 찬탄한다. 즉 시방 3세 모든 부처님께 절하고, 시방 3세 모든 보살께 절하고, 시방 3세 모든 스승, 선지식께 절하는 것이다. 이것이 소의(所依). 절에는 몸으로 하는 절, 말로 하는 절, 마음으로 하는 절이 있다.

 

몸으로 하는 절은 밀교에서 말하는 온 몸을 땅에 대는 절이다. 지금은 이를 큰 절이라고 부른다. 현교에서 말하는 오체투지는 작은 절이라고 한다. 이상이 모두 몸으로 하는 절이다. 그밖에 모든 공경하는 행위, 공경하는 표현방식을 모두 몸으로 하는 절이라 할 수 있다.

 

말로 하는 절은 찬탄하고, 심주를 외우고,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찬탄문을 읽고, 찬탄구를 읽는 등등이 다 포함된다. 구업을 씻는다.

 

 

마음으로 하는 절의 마음은 근()이다. 입으로 찬탄하고, 명호를 부르는데, 마음으로는 공경하지 않는다면 겉과 속이 다른 거짓이다. 몸도 마찬가지다. 몸으로는 절을 해도 마음으로 공경하지 않는다면 역시 겉과 속이 다른 거짓이다. 그러므로 몸, , 마음의 절은 모두 공경심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몸과 말로 공경을 표현하는 방식 혹은 행동은 마음의 절, 공경심이 있어야 몸의 절, 말의 절이 된다. 그래서 마음의 절이 가장 근본이고 가장 중요하다.

  

마음의 절은 공경심이다. 공경심은 마음으로 부처님, 보살님, 스승님의 무루의 공덕을 생각하고 환희심을 갖는 것이다. 동시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자신이 부족한 점이 많고, 잘못이 많은 것을 알고서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부처님, 보살님 혹은 스승님의 공덕에 환희심이 생기고, 자신의 잘못에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 두 가지를 종합해서 공경심이라고 한다. 말로 하는 찬탄, 몸으로 하는 절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무렇게나 하는 것도 아니다. 공경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에서 말하는 절이 아니다. 불법이 아니다. 그러니 겉과 속이 같아야 한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음에서 진정한 공경심이 생기지 않는다면 억지로 이런 일을 하지 말라. 큰 의미도 없고, 자신과 타인을 속이는 것일 뿐이다. 실제로는 업을 짓는 것이다. 우리가 법을 닦을 때 이래야 한다. 이것이 몸과 말과 마음의 절이다. 

 

극락원문(12)

이런 수행법과 불법을 생활에서 실천하고, 일하면서도 실천할 수 있을까? 간단하다. 특히 우리 대승 수행자들, 밀승 제자들에게는 조금도 어렵지 않다. 밀교에서는 청정관을 강조한다. 모든 것을 부처님으로 보고, 보살로 보고, 스승으로 본다. 늘 만나고, 듣고, 생각하는 인연을 가진 중생을 모두 불보살로 보고, 스승으로 본다. 모두 청정하고 원만하게 본다. 청정하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이다. 원만하지 않은 것은 자기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공경심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길을 양보하고, 밥 먹고 옷 입을 때 먼저 남들이 먹게 하고, 입게 하고, 얼굴에 미소를 띠고,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모두 몸의 절이고, 말의 절이고, 마음의 절이다. 상대방을 공경하고 포용하고, 용서하는 것이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자량을 쌓으면서 동시에 죄와 업장을 청정히 한다. 집에서 이렇게 하고, 주변의 대중을 이렇게 대하면 집이 화목해지고, 조화로와진다. 싸우고 원망하는 번뇌가 자연히 없어진다. 이것이 번뇌를 다스리는 방법이다. 고통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이런 번뇌가 없어지면 많은 고통이 저절로 사라진다. 이것이 불법이다

불법은 우리가 일상생활하고 일하면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데 있다.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이것을 진정으로 생활에서 실천하고, 자기가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 자기가 직접 실천하고 생활에서 실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 주변의 중생이 다 부처님이고 보살이다. 모두 스승이다. 우리는 신구의로 공경해야 한다. 대승불법의 이념에 따르면 모두 지난 생 우리의 부모다. 그러니 이들에게 감사하고, 그들의 은혜를 갚겠다는 마음으로 이들을 대해야 한다. 여러분이 대승의 수행자인가? 대승불법의 이념을 믿는가? 그렇다면 모든 중생이 과거 여러분의 부모였고, 여러분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것을 믿는다면, 은혜를 알고, 그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공경심과 감사의 마음으로 주변의 모든 중생을 대하며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이 자량을 쌓고 죄업을 청정히 하는 방법이다. 

요새 불교 사원 중에 아주 큰 불상을 조성하는 곳이 많다. 여러분이 여기 가서 향을 사루고, 부처님께 절하고, 삼보일배를 한다면, 이것이 나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자기 가정을 원만히 하고, 자기 생활을 원만히 하는 것보다 좋지는 않다. 가족들과 잘 지내고, 먼저 인연과 책임을 아는 것이 실제적인 수행이다. 실제적으로 자량을 쌓고 죄업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오늘 대원만수행센터에서 법을 듣는데, 이 점을 기억하고 돌아가서 이를 실천한다면 오늘이 의미있고, 인생이 의미있어진다. 그렇지 않으면 시끌벅적하게 인터넷에서 아무데나 가보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형식적으로 절에 다니고, 인터넷에서도 여기 저기를 기웃거린다. 이런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극락원문(13)

두번째, 여러 부처님께 공양 올린다. 시방삼세 모든 여러 부처님과 보살님, 스승 선지식이 공양올릴 대상이다. 공양에는 재물 공양, 힘 공양, 법 공양이 있다. 돈이나 물건으로만 공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돈을 내고, 힘이 있는 사람을 힘을 대라는 말이 있다. 이것도 공양이다. 불보살, 스승의 사업은 불법을 널리 알리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어떤 장점, 능력, 에너지가 있으면 이것을 모두 불법을 알리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데 써야 한다. 법 공양은 가르침에 따라 행하고, 법을 듣고 사유하고 행하는 것이다. 이것 자체가 일종의 공양이다. 부처님, 보살님, 스승의 최종의 목표는 중생이 불법을 얻고 해탈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공양 올릴 재물이 없고, 능력도 없다 해도 법 공양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보살과 스승님이 여러분더러 동쪽으로 가라 했는데 서쪽으로 가면 안 된다. 가르침에 따라 행해야 한다. 가르침에 따라 행한다는 것은 말을 잘 듣는다는 의미다. 어린이가 부모의 말을 듣는 것과 같다. 가르침에 따라 행하라는 것이 반드시 무엇을 하라거나 반드시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다. 누가 명을 내리고 누구는 그 명을 듣고, 누가 누구를 통제하는 것이 아니다. 불보살과 스승이 여러분에게 명령을 내리지 않고, 여러분의 자유를 통제하지도 않는다.

 

불교를 공부할 때는 발심이 가장 중요하다. 발심은 스스로, 기꺼이 하는 것이다. 어떤 선법을 행하든지 피동적으로 하면 안 된다.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것도 그렇다. 발심하고 나면 행해야 한다. 법공양은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것이다.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함으로써 생활이 변하고, 상속이 변한다. 이것 자체가 공양이다. 재물 공양, 힘 공양, 법 공양의 대상은 불보살, 스승이다. 이런 수행법, 구결은 생활에서 실천해야 하고, 자기가 직접 실천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하다. 우리의 식구들이거나 주변의 중생이 모두 불보살이고 남녀 본존이다. 모두 청정하고 원만한 존재들이다. 여러분 모두 이렇게 말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정확한 인도를 받고, 중생을 위해 한 모든 것이 공양이다. 식구들, 주변의 중생에게 재물로 도움을 주거나, 그들이 어려운 문제를 만났을 때 그들을 도와주거나, 그들이 불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 모두 재물 공양이고, 힘 공양이고, 법 공양이다. 밀교에 자기 집이 만다라이고, 가족이 부처라는 말이 있다. 온 사방이 만다라고 정토다. 사람이 부처님이고 성스러운 존재다. 그들을 위해 한 모든 것, 그들을 위해 치른 모든 대가가 전부 공양이다. 절에 가야만 공양을 하는 것이 아니다. 출가한 스님에게만 하는 게 공양이 아니다.

 

자기 마음이 바뀌고, 생각이 바꾸면 가족이 불보살이고, 가족이 성스러운 존재다. 가족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이 공양이다. 친구를 위해 하는 모든 것도 공양이다. 이런 식으로 계속 확대해 나갈 수 있다. 이것이 밀교에서 하는 말이다. 대승 불법으로 보든, 보리심으로 보든 다 같은 말이다. 이것은 밀교의 경계에서 하는 말이다. 대승불법은 보리심, 자비심으로 중생은 모두 과거 생의 부모였다고 말한다. 그들은 과거에 나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우리가 그들을 위해 하는 모든 것은, 그들의 은혜를 갚는 것이다.

 
 

극락원문(14)

부처님은 불경에서 모든 중생이 과거 우리의 부모였다고 하셨다. 그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여러 번 우리의 부모였다. 그 수가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이나 많다. 모두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었다. 우리가 그들의 은혜를 알고 은혜를 갚는 것이 자량을 쌓고 업장을 정화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생각의 문제고, 마음가짐의 문제다. 경계의 문제이기도 하다. 사실 중생이 모두 우리 식구이고, 우리 친구다.

 우리는 모두 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한다. 내 가족, 내 아이, 내 친척, 내 친구…… 다 나와 관련된 사람들이다. 이것은 다 죄업이다. 윤회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불법에서 가장 강조하는 것은 무아이다. 나를 잊고, 나를 깨뜨리고, 나를 내려놓는 것이다. ‘가 윤회의 뿌리이고, 번뇌의 뿌리이기 때문이다. 나의 견해, 나의 생각이 있는 것이 다 업을 짓는 것이고, 번뇌이고 고통이다. 이 때문에 윤회를 한다.

오늘부터 마음을 바꾸어야 한다.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중생이 과거 생에 모두 우리의 부모였으며 자성이 청정한 불보살들이다. 그러니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들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그들에게 관심을 갖고 보살펴야 한다. 그들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위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것이 업을 씻고 복을 쌓는 것이다. 즉 자량을 쌓고 업장을 깨끗이 하는 것이다.

 

세번째는 업장을 참회하는 것이다. 업에는 몸의 업, 말의 업, 생각의 업이 있다. 살생, 도둑질, 음욕은 몸으로 지은 악업이다. 거짓말, 쓸데없는 말, 이간하는 말, 나쁜 말은 다 말로 하는 악업이다. 탐내는 마음, 남을 해치는 마음, 삿된 마음은 마음으로 짓는 악업이다. 서언을 깨뜨리는 것, 별해탈계를 깨는 것, 보살계를 깨는 것, 밀승계를 깨는 것도 포함된다. 대부분은 탐욕스러운 마음, 성내는 마음, 무지한 마음이 야기한 악업이다

 

우리는 시방삼세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 스승 선지식 앞에서 참회해야 한다. 삼보의 총합인 연화부의 본존 무량광불, 아미타불 앞에서 참회하고 보리심을 내야 한다. 이것이 소의(所依)의 힘이다

 

극락원문(15)

악을 깨는 힘은 자기가 지은 악업과 범한 잘못을 생각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고, 자기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런 말이 있다.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은 깨달음이다. 자기의 잘못을 개선하는 것이 성취다모든 잘못을 발견하는 것이 깨우침이다. 모든 잘못을 수정하는 것은 원만이다.’ 잘못을 알고 그 잘못을 고쳐야 한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왜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해야 하는가? 잘못을 알고 고치기 위해서다. 법을 충분히 듣고 사유하지 않으면, 그래서 충분한 지혜가 없으면 우리의 잘못이 무엇인지 발견할 수 없다. 자기이 잘못이 무엇인지 모른다. 잘못이 무엇인지 알고, 잘못을 발견하면 참회하기가 어렵지 않다.

 

 

참회는 드러내는 것이다. 드러내는 것은 숨기지 않고 덮지 않고 악업과 자기의 상속이 떨어지게 하는 것이다. 후회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방금 부주의로 독약을 먹은 것을 알고 나서 후회하고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 것과 같다. 악업을 많이 짓고 잘못을 많이 했으면 이를 후회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런 후회, 두려운 마음이 악을 깨는 힘이다.

 

회복하는 힘은 다시는 이를 범치 않겠다는 결심이다. ‘생명을 보존키 어려울지라도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다!’ 이런 결심이나 마음 속 맹세를 회복하는 힘이라 한다.

 

마지막으로 아미타불이 빛을 내서 자기의 몸과 말과 마음의 업장을 없애고 자신이 별해탈계, 보살계, 밀승계를 어긴 것을 회복케 하고, 몸과 말과 마음을 청정하게 한다. 이것이 다스리는 힘이다. 모두 4가지의 다스리는 힘이 있다.

 

 

착메 린뽀체의 <극락원문>에서 아주 정확하고 전면적으로 이야기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실천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래에 간단하게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운용하고, 어떻게 참회하는지 이야기하겠다시시각각 자기의 잘못을 발견하는 것이 깨달음이다. 자신의 잘못을 고치는 것이 성취다. 모든 잘못을 발견하는 것이 깨우침이다. 이 모든 잘못을 수정하는 것이 성취이고, 원만이다. 자기의 단점을 많이 보고, 자기의 나쁜 점을 많이 보고, 자기의 잘못을 많이 보고, 자기의 부족한 점을 많이 보라. 상대의 좋은 점을 많이 보고, 상대의 공덕을 많이 보고, 상대의 밝은 점을 보고, 원만한 점을 보라. 이렇게 하면 번뇌가 많이 사라진다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늘 번뇌와 고통을 느낀다. 이것도 보기 싫고 저것도 눈에 안 찬다. 이 사람하고는 원수 사이고, 저 사람하고도 사이가 안 좋다. 이러는 것은 우리가 상대의 장점을 보지 않고, 상대의 공덕을 보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장점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공덕을 갖고 있다. 모든 사람이 좋은 점과 나쁜 점을 갖고 있고, 모두 잘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있다. 지혜로운 이는 지혜의 눈으로 좋은 점, 장점만 본다. 그래서 이들 대상, 모든 사물이 즐거움과 고요함을 가져온다. 우리 범부는 지혜가 없어서 상대방의 결점만 보고 상대방의 잘못만 본다. 전부 안 좋은 점만 보고, 단점만 본다. 이렇게 하면 우리에게 번뇌와 고통을 가져온다

 

극락원문(16)

중요한 것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보느냐, 어떤 각도에서 보느냐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람을 대하고 사물을 대하는가, 어떤 각도로 이 세상을 보고 중생들을 대하는가. 모든 불법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고, 행복을 줄 수 있다. 우리의 상속을 보호하고, 안녕을 줄 수 있다. 따지고 원망하면 즐거움을 얻지 못하고 진정한 행복을 얻지 못한다.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청정해지지 못한다.

자량을 쌓고 죄업을 없애는 것은 자기 마음의 안녕을 위하고, 자기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다. 그래서 살면서, 일하면서 업장을 참회하고, 잘못을 알고, 상대방의 장점을 많이 보고, 상대방의 공덕을 많이 보아야 한다. 그래야 즐겁고, 행복해진다. 집에 있으면 식구들의 장점을 보고 공덕을 보라. 직장에서는 동료, 상사의 장점을 보고 동료, 상사의 공덕을 보라. 그러나 사람이 이렇게 하지 못한다. 사람은 종종 상대방의 약점과 결점을 본다. 사람 뒤에서 남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조금만 들으면 그가 보는 것이 무엇인지, 신경쓰는 것이 어떤 말인지 알 수 있다. 그러면 자기에게 번뇌가 찾아온다. 스스로 번뇌를 찾는 것이다. 자기에게 고통이 찾아온다. 스스로 찾은 고통이다. 이렇게 하지 말라

 

 

네번째는 타인의 선근을 기뻐하는 것이다. 타인이 선근을 쌓는 것을 보고 기뻐하고, 불보살과 스승의 선근을 기뻐하는 것이다.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없지만 혹은 자기가 한 일이 아니지만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좋아하고, 기뻐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상대가 보너스를 받고, 승진하고, 상사에게 칭찬을 받고,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얻는 등 좋은 일이 생겼는데, 자기는 그렇지 않아도 기뻐해주는 것이다. 마음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아 참 잘 되었구나. 저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 자기의 목적을 이루었구나. 마음으로 참 기쁘겠지? 나도 참 좋구나.

 

자신은 아무것도 얻지 못했어도, 같이 기쁘고 이런 좋은 생각이 드는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는데, 어떻게 좋은 생각이 들겠는가? 어떻게 기쁘겠는가?’ 여러분은 대승의 수행자다. 본래 여러분이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행복을 주려고 했다. ‘나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중생을 구도해야겠다.’ 이렇게 발심했었다. 이것은 또 여러분의 임무다. 또한 가장 큰 바람이다. 지금 여러분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저 사람이 이익과 행복을 얻었다. 그런데왜 즐겁지 않겠는가? 왜 기쁨과 행복감이 없겠는가? 그런 기쁨과 행복감이 없다면 여러분의 발심이 정확하지 않은 것이다. 제대로 발심하지 못한 것이다. 이 내용을 잘 알고, 바르게 발심했다면 타인의 행복과 공덕을 같이 기뻐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극락원문(17)

불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천 개의 수미산은 셀 수 있지만, 더불어 기뻐한 선근은 셀 수 없다.’ 더불어 기뻐한 공덕은 대단히 크다. 불가사의할 정도다. 우리 마음이 기쁘고, 즐거운 것이 목적이다. 우리가 불학원에서 수행하는 것은 기쁘고 즐겁기 위해서다. 그러면 된다. 우리가 진정으로 남의 선근을 기뻐하게 된다면 행복하고 즐겁다. 이것이 불법이고 수행이다.

 

더불어 기뻐함은 질투하는 마음을 고친다.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고, 공덕을 얻었는데, 내 마음이 왜 불편한가? 왜 즐겁지 않은가? 질투하는 마음이 치는 장난이다. 중생, 범부 모두 질투심이 있다. 그래서 즐겁지 않다.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 질투심이 가리고, 방해하기 때문이다. 질투심이 없으면 이렇지 않다. 그래서 더불어 기뻐함은 질투심을 다스린다질투심이 강한 사람은 마음이 좁다. 자기가 견디기 힘들고 고통스럽다. 범부로서 정말 공감하는 이야기다.

 

생활 속에서, 일하면서 남의 선근을 기뻐할 수 있다. 사실 우리 주변의 중생은 모두 세세생생의 부모였고, 모두 자성이 청정한 불보살이다. 그들의 공덕은 자연스러우며 이익을 얻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여러분이 그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하나도 하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공덕과 이익을 원만하게 얻을 수 있다. 여러분은 그것을 기뻐해야 한다. 여러분들은 보리심을 낸 사람들이다. 여러분은 수행을 해야 하고, 성불해야 한다. 3대아승지겁의 시간 동안 고행을 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 성불할 수 있다. 성불하는 목적은 중생을 구하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성불하기 전에, 중생이 스스로 이익과 즐거움을 얻는다면 기뻐할 일이 아닌가? 여기서 가리키는 여러분은 나와 여러분 중의 여러분이 아니다. 모든 중생과 범부를 가리킨다. 거기에 나 자신도 포함된다. 여러분 중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저 사람은 혼자서 높은 데 올라가서 우리를 비난만 하는구나. 나는 그런 뜻으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불법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중생과 범부다. 선근을 더불어 기뻐하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하는 것이다. 대상은 불보살, 스승이다.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위해 공경하는 마음으로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한다. 여러 불보살, 스승들이 법의 바퀴를 잠깐 돌리지 않을 때가 있다. 법을 말하지도 않는다. 이때 법의 바퀴를 돌려주시라고, 법을 이야기해달라고 기도한다. 스스로 법을 구하는 마음이 있고, 공경하는 마음이 있으면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기도한다. 그래야 진정한 불법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부처님이 당시 49일 동안 법을 이야기하지 않으셨다. 그렇게 해서 중생이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하는 기회를 얻었다. 그래야 중생이 법을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의식하고, 이타심과 공경심으로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쌓은 선근과 없앤 업장도 불가사의하다. 이 또한 중생을 보살피는 방법 중 하나다. 또한 중생이 업을 씻고 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였다.

 

법의 바퀴를 돌려주실 것을 청하는 것은 법을 알리는 것이다. 그래야 불법이 있다. 법을 알려야 중생이 이익을 얻고, 불법이 있어야 중생이 즐거움을 얻는다. 법을 알려야 비로소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중생의 상속에 불법이 있으면, 중생은 비로소 진정으로 즐거워진다. 중생이 진정한 즐거움이 없으니, 법을 알려서 중생을 이익되게 해야 한다.

 

자기에게 법의 바퀴를 돌릴 능력이 있고, 법을 설할 능력이 있다면 이것을 설법이라고 한다. 이것을 법의 바퀴를 돌리는 것이라 한다. 자기가 성불해야 법의 바퀴를 돌릴 수 있다. 성불하지 못했다 해도 괜찮다. 자기의 가르침이 아니라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을 쓰고, 이야기하고, 이로써 자신과 타인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다. 나중에 스스로 성불하고 법의 바퀴를 돌리면 그때는 자신의 가르침이 생긴다. 이 능력이 있으면 자기도 법의 바퀴를 돌려야 한다. 자기에게 지식이 있고, 불법을 알면서도 타인에게 이것을 이야기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를 싫어한다. 이러는 것은 좋지 않다. 이런 사람은 이번 생에는 영리하고 지혜로와도 다음 생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된다. 불경에 이런 공안이 있다. 

 

극락원문(18)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한 제자가 있었다. 그는 여러 달 동안 불법을 연구했으나 게송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가? 그가 인색하고 타인에게 설법하기를 원치 않은 업장이 당시의 결과를 초래했었다. 그러므로 자신이 능력이 된다면 반드시 법의 바퀴를 돌리고 경을 설명하고 법을 설해야 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시디나 책을 다른 중생에게 주어서 그들이 많이 듣고, 많이 보게 해야 한다. 이것도 일종의 법을 돌리는 것이고, 경을 설명하고 법을 말하는 것이다. 자기 입으로 직접 하는 것은 아니나, 그래도 경을 설명하고, 법을 말하고, 법의 바퀴를 돌리는 것에 속한다.

 

지금은 인터넷 시대다. 인터넷이 모든 영역을 점하고 있다. 우리는 인터넷의 페이스북이나 블로그 등등을 통해 불법, 정법을 소개하고, 지혜와 바른 에너지를 알릴 수 있다. 자기 블로그나 페이스북에 그림이든 사진이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아무거나 긁어다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여러분이 올린 내용을 보고 사견을 갖고, 번뇌를 갖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잘못이다. 이것도 중생을 해치는 것이다. 여러분은 별 생각없이 했으니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꼭 그렇지는 않다. 의도하지 않았다 해도 무지한 상태에서 한 일이다. 탐욕과 성냄과 무지는 업을 짓는 인()이다. 이 또한 업을 동반한다. 그러니 이 점을 주의하라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이자, 대승불교 수행자로서 바른 에너지를 널리 알리고, 지혜를 알려야 한다. 아무 생각없이 아무것이나 올리면 안 된다. 자기나 다른 사람들의 사진 그리고 온갖 잡스러운 것들을 올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중생의 상속을 오염시키는 일이다. 이 잘못은 아주 크다. 이런 인터넷 공간을 이용해 좋은 에너지를 알리고 지혜를 알려야 한다. 이성적으로 좋은 점을 살리고 안 좋은 점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상속을 더럽히지 말라. 이상이 법의 바퀴를 돌릴 것을 청하는 내용이다.

 

 

여섯째, 부처님께 세상에 머물러 주실 것을 청한다. 부처님, 보살님스승님, 선지식은 열반으로 들어가려 한다. 일반적은 상황에서 부처님, 보살님, 스승님, 선지식이 열반으로 가려 하는 데는 3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 그의 임무를 완성하여 구제할 중생이 없을 때 열반에 들려 한다. 당시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을 때 한 거사가 진실된 마음으로 부처님께 세상에 머물러 주실 것을 청했다. 그 때문에 부처님이 6개월을 미루다 열반에 드셨다. 이 기간에 무수한 중생을 이익되게 하셨다. 임무를 완성하여 이미 구제할 중생이 없으나, 진심으로 기도하는 이가 있었으므로 열반의 시기를 늦출 수 있었다.

둘째, 중생에 염리심이 생기는 경우다. 중생은 구제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 때문에 꼭 열반에 드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일종의 중생에게 보이는 것이다. 불보살, 스승, 선지식이 염리심이 생겨 불법을 전하는 등등의 행위를 하기 싫어할 때, 그분들이 열반에 들지 않게 청해야 한다. 중생은 강팍하고 구제하기 힘들다. 온갖 삿된 행위를 한다. 그래서 불보살, 스승, 선지식이 염리심이 생기고 잠시 떠나고 싶은 생각이 들 때 간절히 청해야 한다

 

극락원문(19)

셋째, 여러 제자나 중생의 업이 나타난 경우다. 중생의 업력은 일부는 현생에 나타나기도 한다. 특별히 심각한 경우 불보살, 스승, 선지식이 열반에 들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

이상의 상황이 모두 불보살, 스승, 선지식이 열반에 들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한다. 이때 중생을 대신해서 간절히 청해야 한다. 시방삼세의 모든 불보살, 스승, 선지식이 모두 지혜의 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알 수 있다. 천안(天眼)을 갖고 있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도 그분들이 열반에 들지 않기를 청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이런 중생이 있을 때 자신과 타인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스승과 선지식이 병에 걸려서 곧 입적하려 할 때 그분들이 열반에 들지 않게 기도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그분들이 열반에 들지 않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이 공경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면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할 수 있다.

 

 

일곱번째는 모든 것을 회향하는 것이다. 모든 선근과 공덕을 회향해야 한다. 과거 자신이 닦는 선근과 공덕, 지금 닦고 있는 선근과 공덕, 장래의 선근과 공덕이 모두 회향에 집중되어 있다. ‘모든 유정 중생에게 회향하고, 모든 부모였던 중생에게 회향하여, 그들이 고통에서 벗어나 안락을 얻기를 바라며, 그들이 서방극락세계로 가기를 바라며, 그들이 신속하게 성불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회향이다

 

또한 보현보살, 문수보살을 따라 회향해도 된다. 삼륜이 모두 공이라는 각도에서 회향할 수도 있다. 자기의 근기와 마음가짐에 근거해서 회향하면 된다. 회향하지 않으면 선근이 쉽게 파괴된다. 예를 들어, 성내는 마음, 후회하는 마음, 자기의 선근을 밖에 알리고 싶은 마음 등은 모두 선근을 파괴한다. 회향하면 선근은 사라지지 않고 파괴되지 않는다. 회향하면 선근의 공덕과 선근의 이숙과가 성불할 때까지 무궁무진하다. 이렇게 해야 우리의 공덕과 선근이 궁극과 원만에 이를 수 있다. 회향이 이렇게 중요하다전에 회향에 대해서 이야기했으니 오늘은 반복해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일곱가지 방법은 모두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하게 하는 방법이다. 자량을 쌓고 죄장을 청정하게 없애는 것은 모두 다 중요하다. 이런 전제조건과 기초가 없으면 우리가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을 바란다 해도 성취하지 못한다. 이런 저런 바람을 해도 성공하지 못한다. <광대유무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복과 덕을 갖춘 자는 모든 바람을 이룬다.’ 이런 선근과 복덕이 있는 사람은 자량을 쌓고 죄장을 청정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발원이 원만하고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복덕이 없고, 자량이 없으면 발원을 해도 원만해지기 어렵다. 성공하기 힘들다. 그러므로 자량을 쌓고 죄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극락원문(20)

우리는 서방 극락세계를 생각하고, 아미타불을 생각하고, 시시때때로 서방극락세계로 가서 아미타 부처님을 직접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세워야 한다. 그러나 자량이 쌓이지 않고, 죄장이 청정해지지 않으면 이 바람은 실현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자량을 쌓고 죄장을 청정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세번째 요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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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극락법회 5일째다. 자신을 잘 관찰해 보라. 그리고 물어보라. ‘극락법회가 이미 5일째인데, 나는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가 되었는가?’ 근기가 뛰어난 자는 7일만에도 무량광불, 아미타불과 하나가 되어 성취를 얻는다.

 

실제로는 자기가 법계고, 법계가 자신이다. 자기가 법계와 하나가 되면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가 된다. 아미타 부처님은 료의의 아미타 부처님과 불료의의 아미타 부처님이 있다. 서방극락세계에서 성불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색신(色身)은 궁극적인 아미타 부처님이 아니다. 료의의 부처님이 아니다. 궁극의 아미타 부처님, 료의의 아미타 부처님은 법계 전체다. 여러분이 법계와 하나가 되는 때, 아미타 부처님이 되고, 무량광 부처님이 된다.

 

하늘을 보면서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싶다. 법계와 하나가 되고 싶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나가 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모든 법의 궁극적인 실상을 알고, 자성으로 돌아가면 그때 우주와 하나가 되고, 법계와 하나가 된다. 그러자면 깨달아야 하고, 자성으로 돌아가야 한다. 하늘, 허공에 대고 나는 우주와 하나가 되고 싶다고 말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한다고 어떻게 우주와 하나가 되겠는가? 어떻게 법계와 하나가 되겠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여러분이 자성으로 돌아가고, 진정으로 여러 법의 궁극적인 실상을 알면 우주, 법계와 하나가 된다

 

 

 지금은 우리의 근기가 좋지 않아 법계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신이 마음의 귀의처를 찾았는지, 마음의 고향을 찾았는지 본다. 깨달았는가를 본다. 의궤를 통해 법을 수행하는데, 이 의궤에 나오는 여러 인도하는 말들이 우리로 하여금 견성하게 하고, 깨닫게 한다. 우리는 상에 집착하여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생각하고, 보지 그것이 표현하는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때가 많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으면, 견성하고, 깨닫는 것이 가능해진다 

 

 왜 윤회가 고통스럽다 하는가? 윤회는 떠돈다는 의미다. 우리의 마음이 계속 떠돌고 있다. 안식처가 없다. 자기의 집을 찾지 못했다. 인간계, 천계에 있으면 다 윤회하는 것인가? 아니다. 불보살도 천계와 인간계에 계신다. 때론 인간계에, 때론 천계에, 때론 지옥에, 때론 아귀도에 계신다. 마음이 안식처가 없고, 자신의 피난항을 찾지 못해서 계속 떠도는 것이 윤회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자기의 마음의 고향을 찾기 전에는 다 고통스럽다. 어디에도 안락이 없다. 왜 윤회육도에 오직 고통뿐이요, 안락이 없다고 하는가? 어디에도 고통뿐이요, 안락한 곳이 한 곳도 없다고 하는가? 마음이 안식처를 찾지 못해 그렇다. 마음을 내려놓을 곳이 없다. 그래서 오직 고통스럽고 안락이 없다

 

극락원문(21)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아닙니다. 나는 견성하지도 못했고, 자성으로 돌아가지도 못했습니다만, 아주 즐거울 때도 있습니다. 인간세상은 행복이 7, 고통이 3 아닙니까?’ 아니다. 행복이 7, 고통이 3도 아니다. 행복은 없다. 다만 우리가 고통을 행복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전에 여러분에게 지옥 중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부수어지는 벌을 받고, 쇳덩이로 맞아서 기절하는데, 이 순간에 거칠고 견디기 힘든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이 순간이 그들에게는 가장 행복한 때이다. 가장 좋은 상태다. 그러나 기절한 상태가 무엇이 행복하겠는가? 기절했는데 뭐가 좋은 점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좋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고통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사실은 행복이 없다. 인간세상에는 행복이 없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러나 윤회하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지 못한 사람은 행복하지 않다. 업력에 이끌리는 것을 윤회라 한다고 전에 말했다. 오늘은 마음이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을 윤회라고 말했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스럽다.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계속 떠돌아다닌다

 

 

우리는 내려놓고 싶다는 생각을 간혹 한다. 스스로도 잠시 내려놓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진정으로 내려놓은 것이 아니다. 마음이 다시 떠돌 수 있으니, 이것은 궁극적인 것이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내려놓아도 아들만은 내려놓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다른 것은 다 내려놓았는데, 딸은 못 내려놓았습니다.’ 하나를 내려놓지 않았다면 모든 것을 내려놓지 않은 것이다. 그 하나를 내려놓아야 모든 것을 내려놓은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직 이것을 모르는 것이다.

 

우리는 내려놓는 것이 바람에 날리는 모래 한 알을 취해서 땅에 내려놓는 것처럼 어렵다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범부는 이렇다. 땅에 내려놓으면 무엇하겠는가, 또 바람에 흩날릴 것을. 바람이 멈추면 모래는 자연히 땅에 떨어지고 한 알의 모래도 바람에 날리지 않는다. 그래서 자성으로 돌아가고, 마음의 안식처로 돌아가고, 자기의 피난항을 찾고, 자기의 집을 찾으면 된다

 

법회 기간에 날마다 4차례씩 수행을 했다. 모두 경전을 읽고, 심주를 외웠다. 여기에 여러분이 견성하고 깨달을 수 있게 인도하는 많은 말들이 있다. 깨닫지 못했다면 이러한 가피를 진정으로 받지 못한 것이다. 이런 인도를 받지 못하면 마음으로 다른 것을 생각하고, 이런 인도문이 알리고자 하는 진리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자기의 마음이 안식처를 찾았는지 관찰하고 또 관찰하라. 마음이 집을 찾지 못했다면 어쩔 수 없이 계속 떠돌아야 한다

 

왕생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가?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다. 언제 죽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반드시 죽는다. 태어났다면 꼭 죽는다. 이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지극히 무지한 사람을 빼면 다 안다. 과거 황제들은 온갖 방법을 다 써서 불로장생하는 약을 찾으려고 했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려고 했다. 이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보통 사람도 태어나면 죽는 것을 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는 사실이다. 아주 소수의 사람만 불로장생을 꿈꾼다

 

극락원문(22)

그러나 사람들은 죽을 때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을 모른다. 그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든지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다. 한순간에 죽을 수 있다. 죽음은 큰 일이다. 이 세상에 해결못할 문제는 없다. 모든 것이 지나갈 수 있고, 큰 문제가 아니다. 죽음만 예외다. 임종은 큰 문제다. 몹시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지금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은 바로 이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진정으로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는 사람은 다른 것은 문제가 아니고, 죽음이 문제인 것을 안다. 생과 사의 문제를 벗어날 수 있는가, 이것이 문제다. 죽음에 닥쳤을 때 왕생할 자신이 없으면 이번 생에 성취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 경우 오직 하나의 결과만 있을 뿐이다. 악도에 떨어지는 것. 윤회를 계속하거나, 악도에 떨어지는 것 뿐, 다른 결과가 없다. 이번 생에 성불하지 않으면 죽을 때 왕생해야 한다. 죽을 때 서방 극락세계로 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죽을 때에도 왕생할 자신이 없으면, 오직 악도에 떨어질 일만 있다. 윤회할 일만 남아 있다.

 

윤회는 고통이라는 뜻이다고통을 기다릴 수밖에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구 있는가고통에서 멀어지기 원치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그러나우리는 모두 마음의 바람과는 반대로 달리고 있다진정으로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임종을 생각해 보았는가우리는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다이 세상을 떠날 때왕생할 수 있는가자신이 없다왕생하는 네 가지 인()이 없으면 왕생할 조건을 갖추지 못한 것이다그렇다면 악도에 떨어질 뿐이다

 

 

아니에요나는 천계에 가서 제석천범천과 함께 앉을 수도 있어요그러면 괜찮잖아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천계에 가려면 48정을 할 수 있어야 한다그러나 이 마음은 1분도 가만히 있지 않는다그런데도 천계에 갈 수 있겠는가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다불가능하다()이 없는데 어디서 과()가 나오겠는가무상선(無想禪)을 예로 들어보자여러분이 무상선을 잘 수행했다면 이것이 인이다그러면 장래 무상천(無想天)에 간다이것이 과다그러나 이런 선정을 모두 세간의 선이다선정에 든다 해도 반드시 천계로 가는 것은 아니다악행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한다.아주 많은 보조적인 연이 있어야 천계로 갈 수 있다신통신변을 부리고하늘을 날아다니는 아귀도 천계로 가지 못한다여러분이 48정을 하고일평생 악을 끊고 선을 행하고보조적인 연이 있으면 천계에 갈 수 있다. 

 

천계로 안 가도 상관없어요. 계속 사람 하면 되지요. 사람이 되어서 아내하고 잘 살고, 가족들하고 서로 사랑하며 살면 얼마나 좋아요.’ 이것도 장담할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려면 10가지 악을 끊고 10가지 선을 행해야 한다. 그리고 인과와 윤회를 깊이 믿어야 한다. 이것은 세간의 바른 견해다. 바른 앎과 바른 견해를 가진 기초 위에 악을 끊고 선을 행해야 한다. 또 수승한 바람도 있어야 한다. 이런 인연이 맞아떨어져야 사람으로 태어나, 계속 사람으로 살 수 있다

 

이번 생에 사람이었다고 다음 생에도 사람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었다가 지옥에 떨어지는 중생이 많다. 사람 중에는 출가한 승려는 그래도 수행을 하는 편이다. 그러나 지옥 문 앞에 승려들이 많다.’ 지옥에 떨어지는 승려가 많다. ‘다 지옥에 떨어져버리면 이 사람들은 어디서 온 겁니까?’ 아마도 천계에서 왔을 것이다. 그들의 복이 다해서 땅으로 내려온 것이다. 다른 윤회도에서 온 중생도 있다

 

극락원문(23)

사람이 되기도 힘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옥에 가고, 아귀계로 태어나고, 축생계로 가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옥에 가거나, 아귀로 태어나거나, 축생이 되는 것을 악도에 떨어진다고 한다. 지옥, 아귀계, 축생계의 삼악도로 떨어지는 것이다. 삼악도는 우리를 매우 환영한다. 특히 말법시대에 지옥으로 여행하는 것이 매우 유행한다. 지금 사람들은 여행을 가고 싶어하지 않는가? 지옥으로 여행가는 사람들이 특히 많다. ‘내가 지옥에 갈 수 있을까요?’ 이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갈 수 있다. 자신을 잘 관찰해 보라. 지옥으로 떨어질 인을 벌써 갖추고 있다.

 

말이 머리를 거치지 않고 그냥 나오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왕생할 자신이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습니다.’ 왕생하는 4가지 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말하지 못하면서, 서방극락세계로 가겠다고 말하는가? 아미타불의 염원이 크고, 아미타불이 대자대비하고, 우리에게 서방극락세계를 만들어 주셨고, 우리가 그곳에 가기를 원하시나, 우리가 그곳에 갈 수 있는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가지 못한다. 우리가 라싸에 가고 싶어하는데, 그러려면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비행기표를 사든지, 기차표를 사든지, 버스표를 사야 한다. 주머니에 10원도 없는데 라싸에 갈 수 있는가?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고 남도 속이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

 

확실하게 자기는 서방극락세계에 갈 자신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하는가? 왕생하는 4가지 인()을 갖고 있다. 늘 서방극락세계를 잊지 않고, 늘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고, 환희심과 믿음을 갖추고 있다. 

첫번째 인인 복전을 관상하였다면 밤낮으로 쉬지 않고 업장을 없애고 선근을 쌓아야 한다. 

두번째 인인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하게 하였으면 자신이 아니라 중생을 위해 수행해야 한다. 

세번째 인인 보리심을 냈다면 자기를 위하면 안된다. 자기만을 위하는 것은 중생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온 마음과 뜻으로 중생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오직 중생을 위한다. 나는 중생을 위해서 성불한다. 나는 중생을 위해서 수행하고, 보리심을 낸다. 오직 중생을 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자기를 위하는 것이 있으면, 중생을 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온 마음과 온 뜻으로 중생을 위해야 한다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것을 발원하고 나면, 준비를 마쳤고 짐도 다 쌌으니 가려고 할 때 가면 된다. 아미타불께서 마중을 나오신다. 이제 드디어 갈 수 있게 되었다. 이런 마음이 들까? 아미타불께서 마중을 나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가 병에 걸려서 죽었을 때 아미타불께서 마중나오시면 마음에 두려움이 전혀 없고, 미련이 없다. 준비를 마치고 짐도 다 쌌으면 첫째 두려움이 없고, 둘째 미련이 없다. 아들 생각도 하지 않고, 딸 생각도 하지 않고, 재산도 생각하지 않고, 남편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미타불을 뵈러 갈 때 선물을 가져가면 법공양으로 올릴 수 있다. 선물은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한 것이다. 이 준비를 하는 것이 짐을 싸는 것이다

 

극락원문(24)

나는 정말로 서방극락세계에 가고 싶습니다.’ 발원의 내용이 모두 내가 서방극락세계에 가고 싶다, 내가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싶다.’이다. 죽을 병에 걸려서 두려움에 떨며 세상을 떠나게 된 순간에도 미련이 남는다. ‘다른 건 다 걱정이 없는데, 아들이 아직 장가를 안 갔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딸이 시집을 안 갔습니다.’ 이런 것은 다 핑계다. 구경의 경지에 이르면 피안이 차안이고 차안이 피안이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전에는 차안은 차안이고 피안은 피안이다. 앞에서 말한 것은 다 차안이고, 서방극락세계는 피안이다. 두 곳에 다 걸쳐 있는 것을 양다리 걸친다고 한다. 이렇게 하고서 걸을 수 있겠는가? 위험하다. 그런데 우리가 그 위험을 의식하지 못한다. 강이나 바다에 가서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았다 치자. 한 배에 한 다리씩 걸쳐 놓고 시험해 보라. 얼마나 위험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위험하다. 배가 움직이면 끝장이다. 물에 빠지는 수밖에 없다. 누군가 물에서 건져주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하면 지혜의 생명이 끊어진다. 위험하다. 그런데 지금 이런 사람들이 많다. 세상의 번잡한 일을 내려놓지 않고, 묶여서 방해받고 있다. 발원이 진실하지 않고 진실로 서방극락세계로 가기를 원치 않아서 생기는 일이다.

 

 

네번째 인을 갖추었으면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것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시방삼세 부처님이 이구동성으로 하신 말씀이다. 우리는 부처님을 믿어야 한다. 이것은 진리다. 이러면 왕생할 자신이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까지 도달하지 않았다면 왕생할 자신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왕생할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불이 붙은 것처럼 마음이 조급한가 보라. 불법에서는 미녀의 머리에 불이 붙는다고도 하고, 겁쟁이 품에 뱀이 뛰어든 것 같다고도 했다. 미녀는 용모에 관심이 많다. 그런데 머리에 불이 붙으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제일 먼저 불을 끈다.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불을 끈다. 절대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겁쟁이는 간이 작다. 그런 사람이 어느 순간 자기 품에 뱀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면 얼른 도망간다. 그 사람이 이것이 뱀일까? 이 뱀이 나를 물까?’ 하고 고민하고 있지 않는다.

 

내가 왕생에 자신이 없는 상태인데, 죽음이 언제든 닥칠 수 있다. 그러면 죽어서는 악도에 떨어진다. 삼악도밖에 갈 곳이 없다. 얼마나 무서운가! 서방극락세계로 갈 자신이 없으면 마음이 조급하지 않겠는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겠는가? 내일, 다음 달, 아들이 결혼할 때, 퇴직할 때까지 기다릴 수 있겠는가? 퇴직할 때까지 살아있을지 알 수 없다. 아직 살아있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진정으로 불교를 배우고 수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사람들이 많다. 퇴직하기 전에는 아주 정진한다. 날마다 인터넷에 들어가서 날마다 법을 수행한다. 그러나 퇴직하고나서는 게을러진다. 일도 많아진다. 손자손녀 일만 해도 한무더기다. 그러니 인터넷에 들어가고, 불교를 공부할 시간이 없다. 회사에 다닐 때는 약간의 시간이 있어서 인터넷에도 들어가고 법도 공부했다. 퇴근하고 집에 가서도 인터넷으로 공부도 했다. 그런데 퇴직하고 나면 이 시간도 없다. 퇴직하고 나면 한마음으로 불법을 공부하려고 했었는데, 퇴직하기 전에 정진하지, 퇴직하고 나서는 손자손녀 보는 데 시간을 다 써버린다.

 

극락원문(25)

기다릴 수가 없다. 내일 정진하고 오늘은 쉬자, 오늘 밤에는 일찍 자고, 편히 지내다가 내일부터 정진하자. 이달에는 쉬고 여행을 좀 간 다음에 다음달부터 정진하자. 올해는 회사에서 할 일이 많으니 내년에 집중해서 공부하고 정진하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정진하지 못한다. 진정으로 불법을 공부하지 못한다. 계속 미루고 미루고 미룰 수 없다. 모르면 하지 못한다. 알아야 할 수 있다. 꿰뚫어보아야 내려놓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은 모른다. 내려놓지 못했다. 그래서 하지 못한다.

법을 배우는 것도, 일을 하는 것도 간혹 자기 느낌이나 생각을 따르는 경우가 있다. 생각이 나면 정좌를 하고, 느낌이 들면 수행을 한다. 이러는 것은 믿을만하지 않다. 이런 사람은 끝까지 가지 못한다.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무상을 몰라서이다. 불법에서 가장 핵심적이고 가장 근본적인 내용은 무상이다. 무상을 모르면 다른 모든 것이 사상누각이다. 쓸모가 없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다른 할일이 없을 때 법을 공부하고 수행한다. 그러나 조금 복잡한 일이 있거나,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면 법을 듣지도 않고 공부도 하지 않는다. 이들은 진정으로 무상을 사유해 보지 않은 사람들이다. 무상을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많이 관찰하고, 많이 사유해야 한다왕생할 자신이 없으면 지금은 촌각을 다투어서 4가지 인()을 갖추어야 한다. 앞에서 왕생하는 4가지 인 중에서 3가지를 말했다. 오늘은 4번째를 말할 차례다. 이야기하는 시간은 짧지만 여러분에게 명확하게 이야기했다는 생각이 든다. 명확하면서도 간단하고 쉽다. 이것은 여러분 자신의 일이다. 잘 실천하라.

 

 

네번째 인은 청정한 발원을 하는 것이다. 발원이 중요하다. 서방극락세계는 이미 만들어졌다. 아미타 부처님은 우리가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것을 환영하신다. 이것은 사실이다. 거짓이 아니다. 극락세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아미타 부처님이 무량한 겁 동안 고행을 하여 만들었다. 어떤 고행인가? 인간은 돈을 많이 벌고, 승진하기 위해 노력하고 분투한다. 이 과정은 몹시 힘들다. 아미타 부처님이 무수한 겁 동안 극락세계를 만들기 위해 겪은 고통과 고난은 셀 수가 없을 정도로 많다.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은 우리가 그 분의 세계로 가는 것을 환영하신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즐기는 것을 바라신다. 그런데 우리는 극락세계에 가고 싶어하는가? 아미타 부처님과 함께 불교를 공부하고 수행하고 싶어하는가? 진심으로 가고 싶은 것이 아니라면 아미타 부처님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진심으로 가고 싶다면 우리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세간의 작은 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냥 성공하는 일은 하나도 없다. 서방극락세계에 가고 싶고, 영원한 안락을 얻고 싶으면 반드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일평생의 정력과 온힘을 다해서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치러야 하는 대가다. 대가를 치르지 않고 편안히 앉아서 성공할 수 없다.

 

진심으로 극락세계에 가고 싶고, 진심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싶은 바람이나 마음이 있다면, 먼저 출리심을 가져야 한다. 톡미 린뽀체가 <극락원문>에서 말했다. 먼저 윤회의 고통을 생각하고, 윤회를 싫어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번거로운 일을 내려놓는다. 이렇게 해야 죽을 때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배 두 척에 한 다리씩 걸치고 있으면, 위험하다. 우리는 윤회의 고통을 간략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간략한 일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는 상속이 전혀 변하지 않는다. 많이 생각하고 자세히 생각해야 한다. 지옥은 8개의 불지옥, 8개의 한냉지옥…… 이것을 하나하나 생각해야 깊이있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극락원문(26)

과거의 고승대덕들은 8가지 불지옥을 관상할 때 화로에 살을 대어 보고 살이 타들어가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았다. 한냉지옥을 관상하지 못하고, 마음 속에 아무 느낌이 없을 때는 아주 추운 겨울날, 눈이 내리고 바람이 불 때 옷을 입지 않고 밖에 한 시간 동안 앉아 있으면서 한냉지옥이 무엇인지 체험했다. ‘아이고 추워라. 얼어죽겠네.’ 이렇게 한냉지옥의 중생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 사유한다. 우리는 이런 고통을 진심으로 사유해 보지 않았다. 우리는 간혹 주변의 맹인이나 질병을 가진 사람 등 약한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이 참으로 고되고 힘들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런 고통을 지옥 중생이 받는 고통과 비교하면, 고통이라고 할 수도 없다. 지옥 중생이 힘들고 고통스럽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나는 이미 사가행을 끝냈다, 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렇다면 이런 깊은 느낌을 갖는가?

아귀는 외부 장애를 가진 아귀, 내부 장애를 가진 아귀, 특별한 장애를 가진 아귀가 있다. 아귀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 있는가? 조금 있다 질문 시간에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스승님, 특별한 장애를 가진 아귀는 무엇입니까?’ 책을 열심히 보지 않으면 이런 질문을 한다. 이런 내용을 다 자세히 관상했는가? 하늘을 떠도는 아귀는 무엇인가? 숨어지내는 아귀는 무엇인가? 외부 장애를 가진 아귀, 내부 장애를 가진 아귀, 특별한 장애를 가진 아귀가 느끼는 고통은 배고픔뿐 아니다. 그들은 더 참기 어렵고 상상하기 어려운 고통을 겪는다.

 

축생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바다속 축생은 서로 싸우고, 서로 먹는다. 그들은 이렇게 공포스러운 상태에서 산다. 풀 한 입을 먹으려도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한다. 두려움에 떨어야 한다. 다른 동물이 나타나 자기를 죽일까 두려워한다. 그들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위험에 처해 있다

 

서로 죽이고 서로 잡아 먹는다. 이런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이렇게 하나하나 생각해 보면 마지막에는 진정한 출리심이 생긴다. 이렇게 분석하다 보면 우리 인간 세상에 즐거움이 없다. 생로병사의 고통뿐이다. 태어나는 고통, 늙는 고통, 병드는 고통, 죽는 고통이다만약 불치병을 앓고 있다면 유일한 문제가 병이다. 유일한 큰 일이 병이다. 다른 것은 다 문제가 아니고, 일도 아니다. 이때는 알게 된다. ‘내가 언제 알게 될까? 스승이 나에게 관정을 주고, 구경을 줄 때 알게 될까?’하고 생각했지만 아니다. 우리는 모두 우리도 자신에게 힘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진짜 병을 앓고 있으면 그 때의 유일한 문제는 병이다. 유일한 일은 병이다. 다른 것은 아니다

 

다른 것은 전부 문제가 아니다. 일도 아니다. 뒤에 죽음이 있는데, 우리가 죽을 때, 이 세상을 진짜 떠나려 할 때, 이런 것은 더구나 일이 아니다. 문제도 아니다. 죽게 생겼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는가? 무슨 일이 있겠는가? 영원히 떠나가야 하는데 말이다

 

극락원문(27)

정말로 문제가 아닌데 문제로 삼는 것이다.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 자기를 즐겁게 하는 법을 모르고, 자기를 고통스럽게만 한다. 자기를 번뇌스럽게 하고 자기와 잘 지내지 못한다. 범부는 우매하고 어리석다. 사람을은 이런 말을 듣기 싫어한다. 특히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 ‘나는 우매하지 않습니다. 나는 없이 잘못되지도 않았는데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이고, 업이 잘못된 것이다. 

부처님은 다른 것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부처님이 이야기한 것은 번뇌를 찾지 말고,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더욱 즐겁고 행복하게 살라는 것이었다. 자기를 즐겁게 할 수 있고, 자기를 행복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불법이다. 번뇌를 찾지 않고, 고통을 찾지 않으면 그것이 해탈이다. 얼마나 간단한가.

사람들은 대공성, 대광명을 추구한다. 대광명이 무엇이가? 지금이 공성이고, 지금이 대광명이다. 이것을 모르면 그것을 얻지 못한다. 여러분이 진정으로 자성에 돌아가고, 자기가 되면 대공성이 바로 여기에 있고, 대광명이 여기에 있다. 붓다께서 우리가 우리이게 하셨다. 우리가 스스로의 운명을 장악하고, 스스로가 주인이 되게 하셨다. 우리는 우리의 주인이 아니었다. 자기 운명은 더욱 장악하지 못했다. 우리는 모두 어리석다. 스스로 번뇌를 찾고, 스스로 고통을 찾는다. 자기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도 모른다.

 

발원이 중요하다. 우리가 진심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아미타 부처님도 어떻게 할 수 없다

첫번째, 출리심이 있어야 한다. 출리심은 어떻게 해야 생기는가? 윤회의 잘못에서 말했던 것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라. 하나하나 생각하고, 알면 마지막에 출리심이 생긴다. 출리심이 없고, 세상의 번거로운 일을 내려놓지 않았고, 아직도 머뭇거려진다면 왕생할 수 없다. 

둘째. 한마음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가겠다고 생각하고, 한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뵙기를 생각한다. <아미타경>에 이렇게 말했다. ‘사리불이어. 선남자, 선여자가 아미타 부처님의 법을 듣고, 명호를 부르면서 하루, 이틀, 삼일, 4, 5, 6, 7일을 들으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 특히 사람의 임종 때 아미타 부처님이 여러 성스러운 존재들과 함께 머리맡에 나타나신다. 이 사람이 임종할 때 마음이 잘못되지 않으면 세세생생 아미타 부처님의 불국토로 태어난다

 

극락원문(28)

만약 선남자와 선여자가 아미타 부처님을 듣고, 그 명호를 부른다면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부르는 것이다.

만약 하루, 이틀, 삼일, 사흘, 나흘, 닷새, 엿새, 이레 동안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는다면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것은, 한 마음으로 서방극락세계를 생각하고,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밖의 다른 것은 모두 잡념이고 망념이다. 잡념이 없고, 망념이 없이, 오직 서방극락세계만 생각하고, 아미타 부처님만 생각하면 서방극락세계로 갈 수 있다.

그 사람이 임종할 때 아미타 부처님이 여러 성스러운 존재들과 그 앞에 나타나신다.’ 임종할 때 관음보살, 대세지보살 등 대승의 비구들이 아미타 부처님을 둘러싸고 마중나온다.

 

이 사람은 마지막에 마음이 잘못되지 않는다.’ 마음이 잘못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잘못되면 마지막 순간에 세상의 번잡한 일을 생각하고, 자기의 아들 딸을 잊지 못한다. 이것이 잘못되는 것이다. 그 반대는 아미타 부처님과 여러 성스러운 존재들이 와서 둘러싸고 스스로도 드디어 떠날 수 있게 되었구나 하면서 매우 원하며 뒤돌아 보지 않는다.

 

<극락원문>에서 이런 비유를 든다. 곧 목이 베일 중죄를 저지른 범인이 만약 감옥을 탈출할 수 있다면 분명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갈 것이다. 이것은 비유다. 이런 신심이 있는가? 이런 마음가짐이 있는가? 아미타 부처님이 오셨을 때,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되었는데, 그 순간에 아들 생각을 하고, 딸 생각을 하고, 자기 재산이 어디 있는지 생각하면서 내려놓지 못한다. 모으고 모으고 또 모아서 2억원을 모았는데, ‘ 2억원이 은행에 있는데 아들이 비밀번호를 모른다, 어쩌지?’ ‘고생해서 모은 재산인데 어쩌지? 나중에 누가 가지려나? 아들이 가지면 괜찮은데, 다른 재산들은 어디에 뒀더라?’ 이런 것을 생각하면 서방극락세계에 가지 못한다.

 

마음이 잘못되면 바로 삼악도에 떨어진다. 마음이 잘못되지 않으면 서방극락 불국토로 갈 수 있다.’ 죽을 때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이 편안하다면 서방극락세계로 간다. 이 세상을 떠날 때 걸리는 것이 많고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 많으면 안 된다.

 

 

발원이 중요하다. 방금 계속 발원을 이야기했다. <극락원문>에서는 회향의 방식으로 발원한다. 

회향과 발원은 어떻게 다른가? 발원은 바람을 내는 것이고, 회향은 공덕을 돌리는 것이다. 선근이 없으면 발원을 하고, 선근이 있으면 회향을 한다.

지은 모든 선근을 이것은 앞에서 말한 자량을 쌓고 업장을 청정히 한 것을 가리킨다. 자기가 선근을 많이 쌓고, 복덕을 많이 쌓아놓고 이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회향한다면, 이것이 자원이다. , , 마음으로 지은 선업이 아주 많다그것을 지금 투자한다. 어디에 투자할지 고른다. 서방극락세계가 좋겠구나. 고른다. 이제 투자한다. 나는 서방극락세계에 가겠다는 것이다

 

극락원문(29)

서방극락불국토에서 아미타 부처님 앞에 날 때까지

모든 광대한 불자행을 원만히 하기 위해 회향합니다

 

서방극락불국토에서 아미타 부처님 앞에 날 때까지

이때는 야심을 조금 가져야 한다. 서방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아미타 부처님 앞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 앉겠다. 아미타 부처님 가장 가까운 데 앉겠다. 대세지 보살이나 관음보살보다 더 아미타 부처님께 가까운 자리다.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은 잘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안락이다. 그곳은 청정한 불국토다. 거기서 얻는 것은 수백만 수천만이 아니다. 수백만 수천만원은 다 종이다. 은행에 넣어두면 숫자에 불과하다. 돈을 집에 두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면 안전하다고 느낀다. 집에 두고 가끔 몰래 꺼내보면서 마음이 편해진다.

나는 돈이 많다.’

 

집에 두면 그저 종이일 뿐이다. 자기가 얼마나 많이 먹을 수 있고, 얼마나 돈을 많이 쓸 수 있나? 돈을 못 쓰는 사람들이 있다. 아까워서 못 쓴다. 돈이 있으면 무슨 소용인가? 죽어서는 다 유산이 된다. 다 다른 사람 것이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선근, 복덕에 투자해야 한다. 선근을 많이 쌓고, 복덕을 많이 쌓아야 한다. 칠지공양은 앞에서 이야기했으니 여기서는 더 이야기하지 않겠다.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조건도 이야기했다. 서방극락세계로 가서, 아미타 부처님의 법좌 앞에 앉고, 아미타 부처님의 연화좌 앞에 앉아야 한다

 

모든 광대한 불자행을 원만히 하기 위해 회향합니다.’

아미타 부처님 가장 가까운 데 앉아서 무엇을 하는가? 서방극락세계에 가서 무엇을 하는가? ‘모든 광대한 불자행을 한다. 성불한다! 모든 보살이 하려 하고, 해야 하는 것을 모두 바로 원만히 한다. 이것이 회향이다.

 

 

우리는 선근이 귀한 것을 모른다. 우리가 쌓은 선근이 얼마나 귀한가! 우리에게 끝없는 이익과 보답을 준다. 

그러나 지금 사람들은 이것을 모른다. 선근은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인가? 선근을 회향한다고 하면, ‘그럽시다. 나의 선근을 회향합니다!’ 라고 말한다. 무척 호탕하게 말한다. 천원, 만원은 내기 힘들어하는데, 선근은 조금도 거리낌없이 낸다. ‘, 내 선근을 당신에게 회향하겠소. 나의 복덕을 당신에게 회향하겠소.’ 선근의 가치, 귀함을 전혀 모른다. 

돈도, 황금도, 마노도, 마니보석도 다 아무것도 아니다. 선근과 복덕이야말로 진정으로 가치가 있다. 진정으로 귀하다. 지혜로운 사람은 함부로 꺼내지 않는다. 그러나 중생을 위해서는 꺼낸다. 다른 상황에서는 함부로 내지 않는다. 자기가 힘들게 쌓은 선근이 아닌가

 

왜 선법에 대한 집착도 마지막에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가?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선근에 대한 집착, 공덕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러나 누구나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금 너무 호탕한 것이다. ‘내 선근을 회향하겠습니다. 내 복덕을 회향하겠습니다.’ 이렇지 않다. 지혜로운 사람은 심사숙고하고, 아주 많이 생각한 다음에 회향에 투자하고 서방극락세계로 간다. ‘나는 아미타 부처님 앞에 앉아야겠다. 수행에 정진해서 빨리 보든 부처님과 보살님의 학처를 원만히 해야겠다.’ 이렇게 최후에 결정하는 것이다. 심사숙고에서 한 결정이 틀릴 수 있는가?

 

극락원문(30)

선근을 회향하는 방식으로 이렇게 발원한다.

 

선근을 회향함:

이 생명을 마칠 때 찰라에

서방 극락세계에 나서

스승님 아미타 부처님이 수기를 받아

원만, 성숙 청정의 바람을 이루기 원합니다.

 

이것은 선근을 회향하는 것이다. 또한 서방정토에 나기를 발원하는 것이다. 생명을 마치는 것은 찰라다. 그러나 범부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범부의 사유는 정확하지 않다. 서방극락세계는 십만억 나라 밖에 있는데 찰라에 극락세계에 날 수 있는가, 라고 생각한다. 마음이 청정하면 땅이 청정하고, 마음이 청정하면 그 순간이 서방극락세계다. 마음이 청정하지 않으면 서방극락세계가 없다.

 

찰라에 극락세계에 나서 우리가 임종할 때, 숨이 끊어지는 동시에 서방극락세계 연꽃 속에서 태어난다. 그리고 아미타 부처님께 수기를 받는다. ‘선남자(선여자), 네가 왔구나.’ 그리고 관정을 내려주신다. ‘아 스승님이 나에게 관정을 내려주시는구나. 활불이 내게 관정을 내려주시는구나!’ 아미타 부처님이 관정을 내려주신다. 손을 여러분의 머리 정수리에 올려 놓고 수기를 내리신다. 장래 얼마의 겁이 흐른 후에,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에, 동방 혹은 서방 어느어느 불국토에서 너는 성불할 것이다. 그때 불호를 편안한불이라고 하라. 이렇게 수기를 받았으니, 미래에 편안한불이 될 수 있다. 

 

현대인들은 다 이렇게 생각한다. 편안하게 성불하고 싶어 한다. 아미타 부처님의 수기를 받고 나중에 편안한불이 되려고 한다. 아미타 부처님이 여러분을 보고 불러서 머리를 만져주고 수기를 내리면 장래 어느어느 불국토에서 어느어느 부처님이 되면 좋겠다고 한다. 얼마나 좋은가? 운이 좋다. 계속 노력하라. 수기를 받았으니 앞으로 정진하면 된다

 

 

원만, 성숙, 청정의 바람을 이루기 원합니다 수기를 받아도 장래 성불하려면, 세 가지 일을 해야 한다.

1. 유정의 상속을 성숙케 해야 한다. 권속을 찾아야 한다. 성불했는데 권속이 없으면 어쩌겠는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다섯 비구의 상속이 성숙하기를 바랐다. 그래서 부처님이 첫번째 법의 바퀴를 돌렸을 때 다섯 비구가 등지에 올랐고, 깨달음을 얻었다. 부처님은 자신과 가장 인연있는 일부 중생의 상속이 성숙되게 했다. 부처가 되어 법의 바퀴를 돌릴 때, 첫번째 제자들은 법을 듣고 바로 깨달아 등지에 올랐다.

이것이 힘들다면 법의 바퀴를 돌린 것이 의미가 없다. 지금은 이런 일이 많다. 앞으로 제자들이 더 많아질 것이다. 그것은 나중 문제이고, 지금은 이 첫번째 제자들이 반드시 깨닫게 해야 한다. 반드시 등지에 오르게 해야 한다.

 

두번째는 육바라밀을 원만히 하는 것이다. 모든 보살의 학처(學處)가 육바라밀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만행(萬行)이라고 한다. 육바라밀을 원만히 하고, 유정의 상속을 성숙하게 하고, 불국토를 청정하게 한다. 자기의 불국토를 준비해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은 아주 오랜 동안 준비를 하셨다. 우리는 아마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준비를 하지는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준비를 하긴 해야 한다.

 

극락원문(31)

자기의 불국토를 만들어야 한다. 자기의 불국토를 만들면 성불할 불국토를 청정히 한다. 이 불국토는 자신이 성불함을 보여줄 장소다. 그러므로 불국토를 청정히 해야 한다. 이 사바세계는 석가모니 부처님에게는 청정하다. 그러나 다른 중생에게는 청정하지 않다. 진토(塵土). 

서방극락세계 아미타 부처님 앞에서는 수행이 빠르고, 육바라밀도 빨리 원만하게 할 수 있다. 수석 제자들의 상속도 빨리 성숙해질 수 있다. 청정한 불국토를 빨리 만들 수 있다. 극락세계에 가고 나면, 모든 조건이 갖추어져 있어서 그렇다. 여러 보조적인 연인이 다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아주 빠르다. 서방 극락세계에 간 후에, 수기를 받아야 한다. 원만히 하고, 성숙케 하고, 청정하게 해야 한다. 원만하고, 성숙하고, 청정하려면 발원을 해야 한다. 이렇게 발원한다. 여러분은 이렇게 발원한 적이 있는가?

 

다들 별생각 없이 사벙극락세계가 좋으니까, 나는 서방극락세계로 가겠습니다.’ 이렇게 발원한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수기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원만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고, 청정하게 하는 것도 모른다. 이러면 안 된다. 

서방극락세계로 가는 것이 수기를 받고 원만, 성숙, 청정하는 3가지 일을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미팜 린뽀체의 <극락원문>은 글은 짧으나 포함하는 내용은 아주 많다. 이렇게 발원하면 수승하다.

 

기도

여래 무량광께 기도합니다

저는 무상한 보리심을 냅니다

모든 선근을 회향하고

왕생을 성취할 수 있게 가피를 빕니다

 

 

기도는 일종의 힘이다. 내가 발원할 때도 기도를 했었다. ‘스승과 삼보께서 나를 가피하여 상속에 찰라라도 이기심이 생기지 않게 하여 주십시오.’ 여래 무량광께 기도하고, 아미타 부처님께 기도한다. 계속 아미타 부처님에게만 기도하면 안 된다.  가끔 바꿔야 한다. 무량광 부처님께도 기도하고, 무량수 부처님께도 기도한다. 다들 다르다. 왜 무량수 부처님이라 하고, 왜 무량광 부처님이라 하는가? 왜 아미타 부처님이라 하는가? 생각해 보고 깨달으라.

 

나는 무상한 보리심을 냅니다

나는 당신이 계신 곳에 가서 정진 수행하여 성불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와서 중생을 구제할 것입니다. 나는 이기심이 없습니다. 이미 무상한 보리심을 냈습니다.

모든 선근을 회향합니다

내가 쌓은 선근을 모두 회향했다.

왕생을 성취할 수 있게 가피를 구합니다.’

내가 유일하게 바라고, 유일하게 받고자 하는 것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게 가피를 내려주시는 것이다.

 

이 게송대로 발원하면 얼마나 간절하고 얼마나 진실된가? 나의 선근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회향했다. 내가 무상의 보리심을 내는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중생을 위해서다. 이런 마음으로 아미타 부처님과 소통하면 좋다. 부처님, 제가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가피해 주십시오 하고.

 

왕생하는 네 가지 인()은, 날마다 아미타 부처님을 생각하고, 마음을 모아서 자기가 죽어서 서방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선근을 언제나 보리에 회향하고, 서방극락세계에 회향한다. 시시각각 이렇게 할 수 있다. 걷거나 서거나 앉거나 눕거나 이렇게 할 수 있다. 간단하다.

 

 

네 가지 인이 갖추어졌으면, 절대 왕생할 수 있다. 다섯 가지 무간죄를 짓고 법을 버린 죄는 예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밀법이 있다. 업장을 없애는 금강살타 법이 있다. 그밖에도 좋은 방편 방법이 많다. 올바르게 하면 이런 죄업을 모두 청정하게 할 수 이다. 현교의 교리에 의하면 이 두 가지 죄는 철저하게 청정해질 수 없다.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왕생할 수 있다. 네 가지를 갖추지 못하면, 왕생하지 못한다.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나 서방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은, 죽음 후의 일이 아니다. 임종할 때 왕생하는 방법은, 지금 원만하게 하는 방법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이다. 구결이고 지혜다. 

진심으로 서방극락세계에 가고 싶다면, 진심으로 아미타 부처님을 뵙고 싶다면, 자량을 쌓고 죄업을 청정케 하는 데 정진할 것이다. 그러면 삿된 생각과 사견이 자연히 끊어지고, 나쁜 인과 나쁜 연이 자연히 사라진다

 

극락원문(32)

이것을 다시 강조하겠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왕생하는 4가지 인()을 말할 때 이 네 가지 조건을 갖추면 서방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다고 말하면, 이것이 죽은 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자기의 생활, 일과는 관계가 없으며, 이번 생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를 들면, 부처님은 우리더러 한마음 한뜻으로 타인을 이롭게 하라 하셨다. 사실 타인을 이롭게 하는 것은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자기를 원만하게 하는 방법이다. 이것도 구결이고 지혜다. 이 구결, 지혜를 불법이라고 한다. 경전을 읽는 것만 불법인가? 심주를 외우는 것만 불법인가? 아니다. 이런 것들을 다 운용해봤는가? 경전을 읽고, 심주를 외워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면 그것이 생활에 운용하는 것이고, 그것이 불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 불법이 아니다. <지장경>, <금강경>을 백 번 읽어도 소용이 없다. 연화생 심주를 백만번, 천만번 외워도 소용이 없다.

 

불법은 번뇌를 다스리고, 고통을 해결하는 방법이다. 불법 하나로 번뇌 하나를 줄이고, 불법 하나를 얻어서 고통 하나를 없앨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법이 아니다. 정말이다. 그렇지 못하면 다 불법이 아니다. 이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이렇게 할 수 있는가는 각자의 문제다. 나는 사실을 여러분에 분명히 말했다. 이것이 나의 임무다.

 

 

이번 법회 기간에 이야기하고 있는 <극락원문>은 미팜 린뽀체가 지은 것이다. 또한 미팜 린뽀체의 각성(覺性) 중에 흘러나온 것으로 지혜의 정수다.

 

회향

이 복으로 이미 모든 지혜를 얻고

모든 잘못된 적을 굴복시켜

생로병사가 파도와 같은

고통의 바다에서 뭇 유정을 구하고자 합니다.

부처님이 얻으신 삼신의 가피와

법성의 변치 않는 진리의 가피와

승중의 물러서지 않는 마음의 가피로

이처럼 회향하고 성취를 얻을 것을 발원합니다

 

<극락원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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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티베트정토법 >

출처 : 티베트정토법 -연꽃위에 부처님 티베트정토법 - 연꽃 위의 부처님 (daum.net)

티베트정토법(1)

오늘부터 <티베트 정토법>을 같이 공부하겠다. <극락원문대소(極樂願文大疎)>라고도 한다. 

직메푼촉 법왕의 일생 가장 큰 바람은, 인연을 맺은 모든 중생을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불학원에서 매년 대형 극락법회를 열어 정토법을 같이 수행했고, 이로써 사부대중이 극락세계로 갈 수 있게 공동으로 발원했다. 

보리학회의 불자들은 <입보살행론>을 공부한 후에 2단계 공부를 신청했다. 그것이 <극락원문대소>, <대원만전행인도문>, <반야섭송>이었다. 나는 이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정토법문과 밀교법 혹은 공성법을 결합해서 수행하면, 가피와 공덕이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수승한 공부의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

 

중국 불교에서 정토법문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많다. 티베트 불교의 각 교파에서도 정토법문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2단계 공부에서 정토법문을 강의하기로 했다. 시간은 좀 길어질 수 있다. 과거에는 티베트 정토법을 짧게 강의했었는데, 여러 도반들이 진정으로 왕생극락에 대한 강렬한 바람을 갖고, 이 세상을 떠날 때 아미타부처님을 봴 수 있게 되려면 짧게 공부해서는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래서 이번에 긴 시간을 안배했으니, 여러분은 나의 생각과 목표를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번에 강의할 <극락원문대소>는 내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법문이다. 이 선한 인연으로, 나와 다른 중생이 모두 극락으로 갈 수 있는 수승한 선근이 뿌려지기 때문이다. 나는 일생 동안 이 법을 2번 강의했는데, 앞으로 3번째가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 나에게도 여러분에게도 이것은 쉽지 않은 기회다. 지금 내가 이 법의 전승을 여러 도반들께 공양하니, 여러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전승을 원만히 하기 바란다. 중간에 여러 위연으로 전승을 원만히 하지 못한다면, 시디나 MP3로 보충하라. 나도 스승님과 삼보, 공행, 호법신께 이 법을 끝까지 원만히 강의할 수 있게 가피해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시디나 MP3로 전승을 얻을 수 있느냐 하는 데 이론이 많다. 나는 현장에서 법을 듣는 것이나 시디로 법을 듣는 것이나 여러 가지 면에서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장에서 법을 듣고 전승을 얻을 수 있다면, 시디로도 전승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시디로 불법을 전하는 것으로도 완벽하게 법맥을 이어나갈 수 있다. 나도 이 점을 100% 확신할 수는 없다. 인과의 도리는 매우 깊고 미세해서 육안이나 분별심으로는 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어떤 법의 전승을 받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있으면, 다른 인연이 갖추어지지 않아도, 청정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시디나 MP3로 전승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과거에 말했었다.

 

본래는 이번에 <극락원문>을 강의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보리학회 도반들이 공부해야 할 내용이 많고, <극락원문대소>의 내용이 매우 풍부해서 이번에 <극락원문대소>를 강의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극락원문대소>를 공부함으로써 여러분이 극락 왕생에 대한 강렬한 신념이 생기고, 티베트 불교를 중심으로 한 세간의 모든 불법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기 바란다. 그래서 이번에 이 법을 다시 강의하게 되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번 기회와 인연을 소중히 여기라. 나도 힘닿는 한 <극락원문대소>를 자세하게 강의할 것이다

 

티베트정토법(2)

<극락원문>은 착메 린뽀체가 지었고, <극락원문대소>는 라라최지 린뽀체가 지었다. 두 존자의 전기가 <티베트정토법>에 실려 있는데, 여기에 두 대덕의 출생부터 입적까지의 주요한 인생 역정이 소개되고 있다. 사실 모든 논전을 공부할 때 저자를 이해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여러분이 전기를 통해 두 저자를 알게 되면, 굳은 신심이 생기리라 믿는다. 또한 이 논전을 공부하는 의미가 더욱 깊어질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극락원문> <극락원문대소>는 역대 고승대덕들과 여러 신도들이 중요하게 생각해왔다. 위짱, , 암도 지역에서 널리 알려졌으며 지금까지 끊어지지 않고 있다. 티베트 사람들 중에 <극락원문>을 외우지 못하는 사람은 극소수다. 남녀 재가신도들이 이 발원문을 외울 수 있다. 또한 법회를 열 때도 <극락원문대소>를 따른다. 

우리가 이 논전을 들을 수 있는 인연을 가진 것은, 실로 백만 겁, 천만 겁 동안 자량을 쌓은 선한 과보임에 틀림없다. 이제 <극락원문대소>의 강의를 정식으로 시작하자.

 

스승님 아미타 부처님께 절합니다.

이것은 티베트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번역자가 쓴 번역자의 절이다. <극락원문대소>의 저자인 라라최지 린뽀체가 지은 글에는 이 절이 없다.

 

논전의 첫부분에 저자는 먼저 절을 하고, 맹세를 한다. 여기에 극락법회를 열고, 법을 듣기 전에 해야 할 준비작업을 추가로 이야기한다. 

이어서 법을 듣는 방식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에 법을 이야기하는 법, 법을 듣는 법의 중요성 등의 내용을 추가한다. 

마지막으로 법이 나온다. , <극락원문>의 게송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다.

 

관세음보살께 절합니다.

이것은 저자가 자신의 본존에게 하는 절이다.

 

 

큰 자비심으로 수승한 보리심을 내고, 2가지 자량을 위해 크게 정진하고, 큰 지혜로 4가지 몸을 나타내 보이신 

3세의 모든 부처님 앞에 절합니다.

이것은 저자가 3세 부처님께 하는 절이다. 의미는 이러하다. 3세 여러 부처님이 처음에는 끝없는 중생에 대해 큰 자비의 마음을 내시고, 그후에 큰 자비의 마음으로 무상의 수승한 보리심을 내셨다. 그리고 3대아승지겁, 7대아승지겁, 33대아승지겁이라는 길고 긴 세월 동안 정진하며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등을 닦았고, 이로 인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 2가지 자량을 쌓았다. 510지를 원만히 한 후에는 큰 지혜(인무아와 법무아를 깨달은 지혜)로 법신, 보신, 화신, 본성신 4신의 과위를 나타내 보였다. 이러한 3세 부처님 앞에, 저자인 나는 몸과 말과 마음의 삼문을 공경히 하며 정성을 다해 절합니다

 

<보현행원품>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시방 세계의 과거, 현재, 미래 3세 모든 부처님께, 나의 청정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절합니다.’ 우리는 저자와 보현행원에 따라, 늘 시방 3세의 모든 인사자 앞에 공경하며 절해야 한다. 이렇게 절하면 그 공덕이 끝이 없다. 

불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처님이 세상에 계실 때 부처님 앞에 절한 것과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 불상 앞에 절한 것이나 관상하면서 부처님 앞에 절한 공덕이, 완전히 같고 차이가 없다. 불교도는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전에 반드시 붓다께 절을 하고 붓다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저자는 논전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붓다께 절을 했다. 그 목적은 자신의 본존이 외도의 조사가 아니고, 번뇌를 끊고 깨우침을 원만히 한 붓다임을 명확히 하기 위해서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밖에도 이것은 이 논전을 순조롭게 잘 쓸 수 있게 부처님의 가피를 비는 것이기도 하다

 

티베트정토법(3)

끝없는 바다 같은 원력을 성취하고, 명호를 찬탄하는 소리가 온 세계에 가득 차서, 무수한 중생이 수승한 불국토를 보게 하시는, 아미타 부처님 앞에 절합니다.

저자가 아미타 부처님 앞에 하는 절이다. 과거, 법장비구(法藏比丘)를 대표로 하는 무수한 아미타 부처님의 전생이 세자재왕 등의 여래 앞에서, 무수한 중생을 위해 48가지 바람 등 무량한 원력을 세웠다. 그리고 육바라밀을 원만히 성취함으로써 모든 바람을 성취했다. 그리고 지금은 성불해서 청정한 불국토로 많은 중생을 인도했다. 왕생하고자 하는 자는 그의 명호를 부름으로써 불국토로 왕생하니, 이 때문에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가 시방 세계에 가득하고, 칭송과 찬양을 받는다. <극락세계공덕장엄경(極樂世界功德莊嚴經)>에서 이렇게 말했다. 시방 여러 부처님이 시시각각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칭송하며 찬탄한다. 아미타 부처님은 무수한 인연있는 중생을 극락 불국토로 인도하시고, 그에게 아미타 부처님의 금빛 얼굴과 정토의 장엄함을 보이신다. 그의 불가사의한 발심과 가피는 시방 삼세 여러 부처님 중에 지극히 드무니, 저자는 아미타 부처님 앞에 몸, , 마음을 공경히 하며 절한다. 

 

여러 불국토에 비해서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은 쉽다. 그래서 티베트와 중국의 불교 사원들이 모두 정토법문을 널리 알리고 있다. 모든 전승에서 정토법을 공부한다. 그러나 불교를 모르는 과문한 이들이 티베트에는 오직 밀법만 공부하고, 중국에서는 선종, 정토법만 공부하는 줄 안다. 이것은 개인의 편견일 뿐, 사실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아미타 부처님이 혼탁한 세상을 사는 중생의 가장 수승한 의지처이며, 그 발원의 힘과 공덕과 가피가 불가사의함을 알아야 한다

 

 

티베트정토법(4)

자비의 자성을 방편으로 가진 관세음보살지혜를 지키는 대세지보살, 금강신을 가진 연화생 대사

세 분께 길상을 올립니다.

이 게송은 저자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연화생대사께 올리는 절이다. 절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견해를 깨달음, 몸과 말과 마음으로 공경함, 길상을 올림 등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 분 존자께 정토법을 수행하는 사람의 몸과 말과 마음의 길상을 올리는 방식으로 절을 하고 있다.

 

게송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시방 여러 부처님의 자비의 마음이 모인 것이 관세음보살이다. 그는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방편을 갖고 있으니, 바로 자비의 자성이다. 시방 여러 부처님의 지혜를 지키는 금강수보살은 대세지보살이라고도 하는데, 지혜와 방편이 하나임을 깨달았다. 혹은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 두 보살은 하나이며, 아미타 부처님과 하나이며 이와 같은 금강신(金剛身)을 얻은 자는 연화생 대사다.

 

이 세 분의 존자는, 정토로 왕생하려는 자에게 매우 중요하다. 국왕을 가까이 하려면, 대신들과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극락세계로 가려면 이 세 분 존자께 기도해야 한다. 아미타 부처님과 이 세 존자는 국왕과 대신의 관계가 아니지만, 겉으로 보면 약간 비슷한 점이 있다. 티베트 불교의 여러 교파에서 극락세계로 가려는 사람은, 이 세 분께 기도하라고 한다. <극락원문>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아미타 부처님의 오른손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관세음보살이 되고, 왼손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타라가 되고, (대세지보살이 된다고도 한다.) 가슴에서 나온 빛이 무수한 연화생 대사가 된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 세 분께 기도하라.

 

 

연화생 대사가 아미타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말하는 복장품과 논전도 있다. 그러니 연화생 대사는 티베트 불교의 조사(祖師)이고, 아미타 부처님은 정토종의 스승이니, 정토종을 수행하면서 연화생 대사께 기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 밀교를 공부하면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나, 이것은 아무런 교리적인 근거가 없는 말이다. 

오늘 한 거사의 전화를 받았다. 그는 누군가 자기에게 정토종의 근기가 있고, 밀교의 근기는 없다고 말했다며, 그래서 밀교에서 떠나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붓다께서 나와 나 같은 사람만이 상대방의 상속을 알고, 다른 사람은 이를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하셨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누군가 나에게 저에게 밀교의 근기가 있습니까?’ 하고 물으면, 나는 나의 육안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누가 당신이 무슨 법을 공부할 근기인지 알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대보살일 것이오. 왜냐하면 다른 이들은 타인의 상속을 그처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오 라고 말할 것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것저것 수행하면 안 되고, 마음을 모아서 부처님만 부르면 왕생할 수 있다.’ 이 말이 통하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일률적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더구나 정토종 경전에서 다른 법을 배우지 말라고 하지 않았고, 이것저것 수행하면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다. 티베트에는 인도에서 번역해 온 경전이 많다. 중국 불교에 있는 정토종 경전이 티베트 불교에 거의 다 있다. 이 경전들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러나 이런 교증을 찾지 못했다. 정토로 왕생하는 심오한 도리를 교증의 증거도 없이 자기 상상력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내 생각에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은 타인의 근기를 알지도 못하면서, 어느 스승이 한 말을 듣고 자기 멋대로 이해하고 떠든 것 같다. 물론 스스로 이렇게 수행해 보는 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타인의 선근을 끊고, 심지어 연화생 대사로부터 내려오는 밀법의 전승을 훼방하고 버리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티베트 밀법은 확실히 매우 수승하다. 그러나 우리는 티베트 밀법만 수행하고, 다른 법을 수행하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말한다면 자기 제자들이 더욱 충성할 테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타인의 근기를 모르는 상황에서, 누구도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그러니 여러분은 많이 듣고 많이 공부하라. 그리고 정토로 왕생하는 데 필요한 인과 연이 무엇인지 알라. 물론 그 근거는 경전에 바탕해야지, 누구 한 사람의 말을 듣고 판단하는 것이어서는 안 된다

 

티베트정토법(5)

연화생 대사를 이름난 스승이나 지혜가 높은 박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은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이런 분별심을 갖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불교의 참 역사를 알아야 한다. 

사실 연화생 대사의 가피는 누구에게도 비할 수가 없다. 지금 티베트 불교가 이처럼 흥할 수 있는 것은 연화생 대사의 가피 때문이라고, 수많은 복장품과 논전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이것을 깊이 믿는다. 넓은 티베트에 불법이 아직까지 손상되지 않고 완전하게 보전되고, 극락정토로 왕생한 이들과 성취자들이 끝없이 나오고 있는데, 연화생 대사의 가피가 아니면 어떤 힘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이 점은 티베트 불교의 역사를 배운 사람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자신을 의지하는 자의 나쁜 생각을 남김없이 없애고

삼유의 중생을 죄의 흑암에서 구하고

희유하고 수승한 선()의 길을 보이시는

가장 높은 여러 스승님들 앞에 공경하며 절합니다

이것은 저자가 자신의 여러 전승스승께 올리는 절이다. 이런 의미다. 법상과 공덕을 갖춘 스승에게 의지해야만, 상속에 있는 탐욕과 성냄과 무지의 번뇌 등 나쁜 생각이 남김없이 청정하게 된다. 스승의 방편으로, 삼계의 불쌍한 중생이 모두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지은 죄업의 흑암에서 벗어난다. 그래서 희유하고 수승한 해탈의 길을 보이신 가장 높은 여러 스승 앞에 저자는 공경하며 절을 한다.

 

스승과 달리 부모, 지도자, 범천, 제석천은 모두 우리에게 해탈의 길을 보이지 못한다. 그래서 스승의 공덕과 은혜가 누구에게도 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스승에 감사해야 한다. 3천대천세계의 어느 누구도 스승의 은혜와 공덕을 대신할 수 없다. 누구도 스승과 나란히 거론될 수 없다. 스승이 출세간의 길을 가리켜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윤회를 떠돌며 무량한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불법의 자양과 따뜻함을 맛본 사람은 자기의 스승에 끝없이 감사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여러 전승 스승 앞에 공경히 절하고 있다

 

 

성자 관세음보살의 화신 착메 린뽀체께서

지으신 발원문은 보석과 같아,

무수한 유정에게 수승한 행복을 주었으니

부처님의 말씀처럼 찬송해야 합니다

이 게송은 착메 린뽀체께 절하고 <극락원문>을 찬탄하고있다. 여기서 착메 린뽀체를 관세음보살의 화신이라고 했다. 저자 혼자의 생각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착메린뽀체밀전>에서 착메 린뽀체가 어려서부터 52살까지 수행했던 과정을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회가 되어 <착메린뽀체밀전>을 읽는다면, 존자께 지극한 신심이 생길 것이다. <착메린뽀체밀전>에서 그분이 5세에 심성을 인식했으며, 6세에 <미라래빠도가집>을 읽고 8식이 사라진 깊은 고요에 안주할 수 있었다. 또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무념의 경계에 머물 수도 있었다. 착메 린뽀체는 보통 사람이 비교할 수 없는 수행의 경지를 갖고 있었다

 

이 논전이 만대의 중생을 이익되게 할 수 있고, 무수한 중생은 이 논전을 의지해서 순조롭게 극락세계로 왕생할 수 있다. 그래서 저자는 논전의 공덕을 매우 찬탄하고 있다. 이 논전은 <금강경>, <반야섭송> 등 붓다께서 친히 설하신 금강어들과 아무 차이가 없다. 여러분이 평소나 법회에 왔을 때 열심히 염송을 하면 그 공덕이 불가사의할 것이다. 

겉으로 보면 <극락원문> 8~9개의 게송뿐이다. 누구나 쓸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오만한 사람들은 나는 게송 1000개도 문제없이 쓸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의 가치는 완전히 다르다. 황금과 돌이라 할만하다. 돌이 황금보다 훨씬 무거워도 황금의 가치가 돌을 넘는다. 마찬가지로, 범부가 아무리 문장을 많이 써도, 가치가 있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성자가 쓴 금강어는 불가사의한 가피를 갖고 있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를 중히 여기라

 

티베트정토법(6)

현대인의 마음은 과거와 다르다. 예전에 내가 학교에 다닐 때 선생님들은 옛 시를 좋아하고 직접 시도 썼다. 그러나 요새는 이런 사람이 많지 않다. 선생님들까지 날마다 돈벌이에 바쁘다. 그래서 요새는 이 시가 참 좋구나’ ‘이백과 두보의 시는 배울만한 가치가 있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대신 저기에 아주 좋은 차가 있다’ ‘저 차는 얼마인가?’ 등등의 소리만 들린다. 책이 있어도 장식품이지 마음을 가라앉히고 책을 보는 사람은 극소수다. 진정으로 깊이 있게 불법을 듣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은 밤마다 <극락원문>을 읽었다. 낮에는 소치고, 집안일을 하면서도 아름다운 목소리로 <극락원문>을 외웠다. 이것은 아주 좋은 습관이다. 그래서 앞으로는 중국의 여러 학회와 도량에서 다함께 <극락원문>을 외우면 좋겠다. 공덕과 가피가 있다면 종파를 나누지 말고, 민족과 국가도 나누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은 다 분별심이 빚어낸 가짜다. 진정한 보물, 진정한 황금은 어디에 있어도 그 가치를 잃지 않는다. 

그런데도 줄곧 배척하는 마음으로 일부 가르침만 좋아하고 나머지는 모두 배척하는 사람도 있다. 세간사람들도 이런 태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번 공부를 통해 각지에서 <극락원문>을 외우는 습관을 배양하면 좋겠다. 그렇게 하면 무량한 중생이 이를 통해 왕생극락하는 수승한 인연을 맺을 것이다

 

 

‘나도 허위의 비열한 마음을 버리고, 이 인도문으로 해탈의 길을 보여줄 터이니, 

물러서지 않고 정토로 왕생하기 원하는 모든 이들은 믿음과 기쁨으로 들으라.’ 

이것은 서약의 구이다. 저자 라라최지 린뽀체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 논전을 지을 때, 나는 부정하고 허위에 찬 세간의 모든 법이나 이기심과 같은 저열한 마음을 버렸다. 그리고 착메 린뽀체의 금강어를 기초로 하여 인도문의 형식으로 정토로 왕생하는 지름길을 보여줄 터이니,  물러서지 않고 극락세계로 왕생하기를 원하는 모든 믿음을 가진 자들은 지극한 신심과 비할바 없는 공경심으로 기뻐하며 잘 들으라.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도 모두 이런 마음으로 들으라. 확실히, 이처럼 수승한 대승 불법은 백만 겁, 천만 겁 동안에도 만나기 힘들다. 지금은 오탁이 불타오르는 말법시대다. 우리가 이처럼 수승한 정토 법문을 들을 수 있는 것은 대단한 복덕이다. 여러분은 이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번 환희심을 내라

 

이상 절과 서약을 말했다. 이어서 극락법회와 법을 듣기 전에, 해야 할 준비 작업을 이야기하겠다. 화지 린뽀체와 미팜 린뽀체의 전통에 따르면 극락법회를 열 때 정토법을 같이 이야기한다. 후에 라라취지 린뽀체가 극락법회를 여는 방식을 결합해서 이 주석서를 썼다. 직메푼촉 법왕은 우리 불학원에서 매년 8일간 극락법회를 여는 것은, 라라취지 린뽀체의 관점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물론 상황에 따라 한 달, 3, 하루 동안 법회를 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왕생하는 4가지 인() 등 정토법의 중점도 이야기해야 한다.

 

 

극락법회를 열어서 경전을 이야기한다. 그 전에 먼저 법을 전하는 장소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법을 전하는 장소와 근처까지 깨끗하게 청소하고, 먼지가 일지 않게 물을 뿌린다향수가 있으면 향수를 뿌리는 것도 가능하다. 그러나 적당량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방에 향수를 몇 병이나 뿌려서 스승이 방에 들어갔다가 어지럼증이 나고 토할 뻔했다는데, 이렇게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불교 역사에서 법을 듣기 위해 피를 뿌려 먼지를 가라앉힌 공안이 널리 전해진다. 우리도 법을 듣기 위해 열심히 청소하자. <대반야경 상제보살품(大般若經常帝菩薩品)>에서 이런 기록이 있다. 과거 상세보살이 반야법문을 구하기 위해 법승보살(法勝菩薩)을 찾던 중에 상인의 딸을 만났다. 그들은 5백 명의 시녀를 거느리고 법승보살을 찾아갔다. 법승보살은 그들을 만나고 7년간 선정에 들었다. 그들은 7년 동안 법승보살을 기다렸다. (보통사람이라면 기다리지 못했을 것이다. 7년 아니라 7, 7시간, 심지어 7분도 못 기다린다. 그들은 왜 아직 안 나오시지? 안 나오시면 그냥 가야겠다고 생각한다) 7년 후에 법승보살이 선정에서 깨어나 법을 전했다. 7일 전에 그들은 법승보살이 법을 전하는 장소를 깨끗하게 청소했다. 먼지가 일지 않게 하려고 물을 뿌리려 했는데, 마왕 바순이 위연을 만들어 모든 물이 사라지게 했다. 이에 상제보살과 상인의 딸, 5백 명의 시녀들은 자기의 혈관을 찔러 뿜어나오는 피로 먼지를 가라앉혔다. 그들은 이렇게 고행하고 마침내 반야법문을 구했다

  

트베트정토법(7)

그러므로 스승이 법을 전하기에 앞서, 우리는 경당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공양품을 진열해야 한다. 왜 이렇게 해야 하는가? 스승이 법을 전하는 것이 지극히 수승하기 때문이다. 상사가 훈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런데도 상사가 훈시할 때 회의장을 청소한다. 이번 생과 다음 생에 큰 의미를 갖는 법을 스승이 전하는데, 어떻게 주변을 먼저 청소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우리는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말고 이 수승한 인연에 함께해야 한다.

 

지비광 존자는 <공덕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법을 행하기로 결정한 자는 수승한 스승이 2가지 자량을 쌓을 때, 선법을 행하기로 결심한 제자는 수승한 스승이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쌓는 것을 보면 (예를 들어, 스승이 불법을 전하는 것은 지혜자량이다. 경전을 설하는 것은 중생의 상속에 있는 무명을 없애고 지혜를 자라게 하기 때문이다. 스승이 방생하고, 보시하는 것은 복덕자량이다.) 최선을 다해서 스승과 인연을 맺어야 한다. 

어떻게 인연을 맺을 것인가? 예를 들어, 스승이 선한 일을 할 때, 자기가 재물이 있으면 일부를 내어 공양한다. 스승이 법을 전할 때, 사람들을 모아서 법을 공부하게 하고, 청소를 하게 하는 등등의 일을 한다.

 

혹은 스승이 여러분을 다른 곳으로 보낼 때 혹은 어떤 일을 하라고 시킬 때, 심지어는 스승의 집과 불당을 청소하거나 대중이 쓰는 경당을 청소하라고 시킬 수도 있다. 이와 같은 모든 일들이 쓸모없는 헛일이 아니다. 이런 노동이 큰 공덕을 갖고 있으며 해탈의 길을 걷는 수승한 자량이 된다.

 

직메푼촉 법왕은 이렇게 말했다. 진정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스승이 어떤 일을 하든, 제자는 이를 놓치면 안 된다. 노동을 하든 돈들 내든, 스승과 인연을 맺어야 한다. 물 한 방울이 바다로 떨어지면, 바다가 마르기 전까지는 그 한 방울이 영원히 존재하는 것과 같다. 스승의 여러 선근 중 어느 하나와 우리가 인연을 맺을 수 있으면, 물방울 같은 자신의 발심이 바다처럼 끝없는 스승의 공덕의 바다와 하나가 된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선근이 영원히 다하지 않는다. 이런 공덕은 자기가 중심이 되어 하는 거짓된 선근을 훨씬 뛰어넘는다

 

이밖에 <찬집백연경>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경당이나 불당을 청소하면, 5가지 공덕을 갖는다. 부처님이 사위국의 급고독원에 계실 때 급고독장자가 매일 붓다께서 법을 이야기하시기 전에 경당을 청소했다. 하루는 급고독장자가 청소를 아직 하지 않았을 때다. 붓다께서 아무도 청소하지 않는 것을 보고 친히 경당을 청소하셨다. 목건련과 사리자 등 비구가 이를 보고 따라서 청소했다. 

이에 붓다께서 대중들에게 땅을 쓰는 5가지 공덕을 이야기하셨다. 첫째, 자신의 마음의 때를 없앤다. , 자상속의 오염을 없앤다. 둘째, 타인의 때도 없앤다. 그와 인연을 맺은 중생의 상속에 있는 오염을 없앤다. 셋째, 오만을 없앤다. 오만한 사람은 다른 이들보다 위에 있기 때문에 바닥을 청소하지 않는다. 오직 공경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만, 바닥을 청소할 수 있다. 넷째, 마음을 다스린다. 바닥을 쓺으로써 아주 쉽게 자기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 다섯째, 공덕이 자라게 한다. 땅바닥을 쓰는 것은 지혜의 공덕이 자라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티베트정토법(8)

보리학회의 도반들이 누구 집에 모여서 법을 듣고 있다. 주인이건 손님이건, 법을 듣는 장소를 잘 청소하라. 이렇게 하면 큰 공덕이 있다. 지도자나 스승인 사람은 이런 생각을 할 것이다. ‘왜 내가 이런 낮은 일을 해야 하지?’ 사실은 그렇지 않다. 청소를 하고 불과를 깨달은 공안을 이야기해보겠다.

 <증일아함경>에 이런 공안이 있다.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형은 영리해서 출가하고 바로 아라한과를 깨우쳐 얻었다. 그러나 그는 아주 멍청해서 4달 동안 게송 하나를 외우지 못했다. 하루는 이 때문에 상심해서 울고 있는데, 붓다께서 그더러 승중을 위해 청소를 하라고 하셨다. 그리고 먼지를 쓸다라는 말을 알려 주셨다. 그는 쓸다는 말은 기억했는데, ‘먼지라는 말은 잊어버렸다. ‘먼지를 기억하면 쓸다는 말을 잊어버렸다. 붓다께서 더러움을 없애다는 말을 알려주셨지만 역시 한 글자를 기억하면 한 글자를 잊었다. 

그래도 그는 붓다의 가피와 승중을 위해 청소한 공덕으로, 점점 죄업과 장애가 청정해졌다. 한번은 마음을 관찰하면서 속박이 더러움이고, 지혜가 이것을 없애는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지혜의 청소로 번뇌라는 속박을 쓸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 깊이 이것을 깨닫고 나니, 그 자리에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승중을 위해 청소한 공덕이 이렇게 크다. 그러니 불학원에서 불당을 청소하는 봉사를 하는 도반들은,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말고 승중을 위해 무언가 일을 하면 자기의 더러움과 장애를 없앤다는 것을 생각하라.

 

청소는 아랫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한 선생님이 말 안 듣는 아이들에게 화장실 청소를 시켰다. 우리는 자기가 화장실 청소를 하게 될까봐 몹시 걱정했다. 

그런데 이번에 북경에서 국제 자선 논단에 참석했다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다. 자제공덕회 사람 말이 자기들은 가장 훌륭한 학생에게 화장실을 청소한 자격을 준다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해를 못했다. 왜 제일 뛰어난 학생에게 화장실을 청소하게 할까? 보통은 이렇게 하지 않는데 말이다. 그들은 떨어지는 사람이 청소를 할 것이 아니라, 고상한 사람이야말로 이런 공덕을 지을 복이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학생들도 이해를 못해서 상을 못 받으면 좋다고 생각했다. 상을 받으면 변기통을 청소해야 하니까. 그러나 생각을 바꾸고 나서는 이 일을 좋다고 생각하는 학생이 많아졌다. 이때부터 그들은 화장실 청소를 낮게 보지 않았다. 사실은 오만한 마음 없이 진실되게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 위대한 행위다. 생각을 바꾸면 더욱 큰 복과 공덕을 지을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방금 말한 <증일아함경>의 남자는 왜 그렇게 멍청했는가? 불경에서 전생에 그가 지혜로운 법사였는데, 스스로 지혜롭다 생각하여 타인을 무시했으며 자기가 알고 있는 법의 의미를 타인에게 알려주기 싫어했기 때문에 아주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세세생생 오만하지 않고 영리한 사람이 되려면, 화장실 청소를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공덕을 많이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기 속의 더러움을 참회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움인연이기 때문이다. <육조단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거울이니, 늘 닦아서 먼지가 앉지 않게 해야 한다.’ 우리의 몸은 보리수이고 마음은 거울이다. 늘 청소하면 몸과 마음에 먼지가 앉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 모두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불당과 도량을 늘 청소해야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세세생생 지혜롭고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이다

 

티베트정토법(9)

설법할 장소를 깨끗하게 청소한 후에, 아미타 부처님이나 극락세계의 당카(다른 법회라면 그 상황에 맞는 불상을 모신다)와 불탑과 <반야경> 등의 경전을 놓는다. 이상 3가지는 삼보를 대표하며 모든 법회에 모셔야 한다.

한 청결하고, 아름답고, 장엄한 공양품을 올린다. 일반적으로는 그 수를 100가지 이하로 하지 않는다. 티베트 불교에서 공양품은 주로 5가지다. , , , , 음식이다. 그중 음식은 주로 똘마인데, 똘마가 없다면 과일 등의 식품으로 대체할 수 있다. 불상 앞에 공양물을 올리는 것은 중국 불교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산골에서는 공양품을 잘 올려도 바람이 한 번 불고 지나가면 전부 먼지를 쓴다.

 

공양품을 전부 올리고 나서, 법회 참가자들을 부른다. 물론 사원에서라면 바다고동을 불어도 되고, 법고를 울려도 된다. 그러나 높은 건물이 있는 도시라면 이렇게 하는 것이 불편하다. 이때는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도 된다. 이 돈이 아깝다는 거사들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된다. 이것은 지혜와 복덕을 쌓는 일이지 낭비가 아니다. 생각해 보라. 우리는 탐욕, 성냄, 무지 등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위해서 수없이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있다. 그에 비해서 선법을 위해서 돈을 조금 쓰면 모두 선과(善果)로 연결되는데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가?  

 

모두를 부른 후에, 법을 듣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모자를 벗고, 신발을 벗게 가르쳐야 한다. 법을 들으면서 계속 모자를 쓰고, 신발을 신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에게 신발을 벗고 모자를 벗으라고 알려 주어야 한다. 공경을 표하기 위해 무기와 장식품을 휴대할 수 없다. 물론 평상시 하는 귀걸이, 반지 등은 장식품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법을 듣는다고 특별히 열심히 꾸미는 것은 맞지 않다. 여기 오는 것은 다른 목적이 있어서가 아니라, 법을 듣기 위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몇몇 거사들은 주의하라

 

 

법을 집중해서 듣기 위해, 염주와 경륜통은 내려 놓으라. 

또한 법을 들으며 음식을 먹고 마시고, 화장실에 가고, 전화를 걸고, 문자를 보내고, 말하는 등등도 모두 옳지 않다. 법을 들으며 전화를 받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법을 듣는지 모르는 것이다. 어떻게 법을 듣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법을 듣는 법을 아는 사람은 이를 알릴 의무가 있다.

 

또한 법을 들을 때 몸, , 마음을 적정하고 부드럽게 해야 한다. 가장 좋은 것은 청정심과 공경심으로 법을 듣는 것이다. 붓다께서 <비나야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공격하지 않는 자에게 법을 말하지 말라.’ <본생경>에서는 기쁜 눈빛으로 스승을 보고, 감로를 마시듯이 마음을 집중해 법을 들으라고 했다. 

그래서 이번 공부를 통해 여러분이 법을 듣는 행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 불학원에서 법을 듣는 사람들은 그래도 법을 듣는 방법을 안다. 그러나 불학원 밖에 있는 도반들은 그렇지 않다. 특히 새로 온 사람들은 본래 있던 사람들과 법을 듣는 법을 아는 사람이 잘 가르치라. 처음에는 어쩌면 그 사람들이 왜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가? 나는 견과류를 꼭 먹어야겠다! 왜 꾸미면 안 되는가? 나는 거울을 꼭 봐야겠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한 번에 두 가지 일을 하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면 안 된다. 불법은 아주 심오하다. 마음을 집중해도 다 못아들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한편으로 다른 일을 하면서 법을 듣는다면 마음이 집중이 되겠는가? 이번에 올바로 법을 들으라. 그렇지 않으면, 일주일에 한두 시간 시간을 내서 법을 들어도 의미가 별로 크지 않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하겠다.

 

티베트정토법(10)

<티베트정토법>을 이어서 이야기하겠다.

본문은 둘로 나뉜다. 1. 법을 듣는 방식, 2. 

 

 

정식으로 논전을 이야기하기 전에, 보충설명을 조금 하겠다. 앞에서 경당을 청소하는 일이 공덕이 크다고 말했다. 

경당을 제공하는 공덕은 더욱 수승하다. 경당을 제공하는 공덕은 붓다께서 <광계경(廣戒經)>에서 이야기하셨으니 이를 참고하라. 다른 경전에서도 경당을 제공하는 것이, 범천으로 태어나는 4가지 인() 중 하나라고 했다. 자신의 집을 불법을 공부하는 장소로 제공하는 도반들이 있다. 나는 이것이 매우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집을 사는 데 돈을 얼마를 썼든, 거기서 같이 수업을 들을 수 있으면 모인 사람 수가 적어도 공덕은 집값보다 훨씬 높을 것이다. 공부하는 환경을 제공하는 공덕이 대단히 크기 때문이다. 인생은 짧다. 이런 유루의 재산을 합리적으로 쓰지 않으면 그 가치를 잃는다.

 

나는 1991년에 지금 사는 나무집을 지었다.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집을 짓는 비용이 여러 신도들에게서 나왔으니, 그 집을 쓰기 전에 강의를 해야겠다고. 그때는 법을 강의하는 경당이 없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특별히 미팜 린뽀체의 <입,지자문론(入智者門論)>을 강의했다. 사람들이 공덕을 잘 모르지만, 돈은 쉽게 벌리지 않는 것이니, 어떤 경우라도 우리는 시주들이 피와 땀으로 번 돈을 불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데 써야 한다. 불학원을 떠난 지 1~2년이 된 도반들이 아직도 집을 비워 놓고 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이것이 참 아깝다고 생각한다. 자기의 집에 도반들이 머물게 하거나, 보충공부를 하게 하면 좋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빈 집으로 두는 것은 전혀 의미가 없다

 

얼마 전에 불학원의 대경당을 짓는 자금을 댄 시주가 경당을 보러 불학원에 왔다. 그는 장엄한 경당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 생에 대경당과 인연을 맺을 수 있는 것이 나의 복입니다. 승중이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데 돈을 쓸 수 있다면, 정말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내 별장을 사거나, 호화로운 호텔에 썼다면 가치가 없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지혜로운 자의 말이다.

 

 

그래서 나는 보리학회 회원 도반들이 공부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기 바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대단히 의미있는 일이다. 또 도반들을 위해 과일과 음료 등을 준비하겠다고 발심하는 것도 좋은 일이다. 욕계의 중생은 물질에 어느 정도 탐욕과 집착이 있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에 함께 과일, 물을 마시면, 모두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물론 수업시간에는 먹으면 절대 안 된다. 경륜통과 염주도 들고 있으면 안 된다. 이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했다.

 

아주 잘 살면서도 인색한 도반들이 있다. 자기의 집을 사람들에게 제공하기를 원치 않는다. 아마 이렇게 하면 공덕이 큰 것을 몰라서 그러는 것일 터이다. 법과 경전을 강의하는 것은 모든 공덕 중에서도 가장 최고의 공덕이다. 법과 경전을 강의할 때 편의를 제공하면 복덕 자량과 지혜 자량이 자란다.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것은 지혜 자량이고, 재물을 보시하는 것은 복덕 자량이다. 이렇게 하면 자신과 타인의 이번 생과 다음 생에 매우 유익하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법을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는 데, 순연을 제공하도록 노력하라. 이것은 매우 의미있는 일이다. 직메푼촉 법왕께서 살아계실 때, 경당을 짓고 경당을 공양하는 일이 얼마나 수승한 공덕을 지닌 것인지 이야기하셨다. 그러니 여러분은 유루의 재산을 합리적으로 사용하라. 그래서 자신과 타인이 모두 무루의 재산을 얻게 하라.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의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이어서 정식으로 논전으로 들어가자.

 

어떤 논전을 공부하든지, 보리심 내기와 행위가 매우 중요하다. 물론 여기에 차제와 종류가 아주 많다. 보리심에는 원보리심(願菩提心)과 행보리심(行菩提心) 등의 차제가 있고, 현교의 광대한 마음가짐의 보리심과 밀교의 지극히 청정한 보리심 등의 종류가 있다. 행위도 행해야 하는 행위와 버려야 하는 행위가 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4가지 인을 이야기하므로, 3가지 수승함과 결합해서 이야기하겠다. 처음에는 보리심을 내는 것이 중요하다. 중간에는 자량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에는 발원이 중요하다. 극락세계로 왕생하려는 자는 먼저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무상한 보리심을 내야 한다. 그리고 중간에 복덕자량과 지혜자량을 많이 쌓아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덕이 자라게 해야 한다. 또한 <극락원문>, <보현행원품> 등의 발원문으로 발원해야 한다. 사실 왕생하는 4가지 인은 이 3가지에 다 들어간다. 복전을 관상하는 것도 이 3가지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티베트정토법(11)

1. (법을 듣는 방식)은 둘로 나뉜다.

1. 개요, 2. 본문

1. 개요

 

처음 법을 듣는 사람이 법을 듣는 방식을 아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법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법을 듣는 기회를 얻기가 힘들다는 것을 깊이 아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어서 법을 듣는 중요성을 먼저 이야기하겠다.

 

이런 경험을 가진 도반들이 많을 것이다. 오랫동안 불법을 듣지 않으면, 자기의 행위가 점점 바르지 않게 되는 경험이다. 늘 선지식의 가르침을 듣거나 불경을 보면, 행위가 점차 바르게 된다. 사람뿐 아니라 축생도 이렇다. <부법장경(付法藏經)>에 이런 공안이 있다. 화씨국왕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자기의 흰 코끼리에게 밟아 죽이라고 했다. 나중에 코끼리를 가두는 울타리가 불에 타서 국왕이 코끼리를 사원 근처로 옮겼다. 코끼리는 사원에서 비구들이 <법구경> 선을 행하면 하늘로 가고, 악을 행하면 악도로 떨어진다는 게송을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자비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범인을 데리고 와도, 밟아 죽이지 않았다. 국왕이 이 일을 알고 신하들을 모아 어떻게 할지 의논했다. 한 지혜로운 신하가 말했다. ‘이것은 코끼리가 법을 들어서 생긴 일일 것입니다. 그를 도살장 부근으로 옮기면 문제가 해결될 것입니다.’ 국왕이 그 말 대로 코끼리를 옮겼다. 코끼리는 도살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는, 악한 마음이 더욱 불타올라 잔인하고 흉폭해졌다. 이것을 보면 불법을 듣는 일이 지극히 중요함을 알 수 있다

 

환경이 미치는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우리가 늘 사원에 살거나 좋은 환경에 머물고, 늘 고승대덕의 설법을 들으면 알게 모르게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선법을 행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늘 악한 친구를 만나고, 열악한 곳에 살고, 늘 살생하는 장면을 본다면 점점 악해질 것이다. 늘 사람을 죽이는 자와 만나면, 사람을 죽여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살인을 재밌다고 생각할 것이다. 현실에서 이런 일이 수없이 일어난다. 전에 아주 선량한 사람을 알았는데, 그의 복이 충분치 못해서인지, 아주 안 좋은 곳으로 직장을 배정받았다. 나중에는 나쁜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리 불학원에도 처음 올 때는 눈빛이 흉흉했다가, 점차 피비린내가 가시고 자비로운 눈빛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불법의 가피다.

 

왜 꼭 선지식에게 법을 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렇다. 불법이 심오하고 미세하기 때문에 꼭 법을 들어야 한다. 보통 사람은 물론이고, 지혜로운 자라도 법을 들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법에 통달하기 힘들다.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어둠 속의 보물을 등이 없으면 보지 못하며, 불법을 말하는 사람이 없으면 지혜로운 이라도 이를 알지 못한다.’ 등이 없는 데서는 보물을 보지 못한다. 그런 것처럼 불법을 말하는 이가 없으면, 지혜로운 이도 여기에 통달하지 못한다. 불법뿐 아니라 세간의 지식도 마찬가지다. 선생이 가르쳐 주지 않으면, 컴퓨터를 배우는 일도 힘들다. 그러니 스승에 의지해서 불법 듣는 데 정진하라.

우리가 선지식 주변에 오래 머물며 법을 들을 수 있으면, 법의 의미가 자기의 마음으로 들어올 수 있다. <보살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 중생은 무엇으로 변하는가? 두 가지 인연에 의해서다. 다른 이의 목소리를 따르고, 바르게 내부의 인연을 관상해야 한다.’ 이런 뜻이다. 중생은 어떤 인연으로 변하는가? 내적인 인연과 외적인 인연이다. 외적인 인연은 우리가 따르는 대상 즉 타인이 말하는 가르침이다. 내적인 인연은 스스로 들은 법에 집중하고 그 의미를 사유하는 것이다. 마음을 선지식의 가르침에 집중하면, 저절로 마음이 선량해진다. 마음을 악인의 말에 집중하면, 마음이 점점 악랄해진다. 범부의 마음은 홀로서지 못하고, 외적인 인연, 내적인 인연을 따라 바뀐다. 그러니 여러분은 좋은 인연을 만들라. 그러기 위해 늘 스승을 의지하고 법을 들으라.

 

이상 여러 가지 면에서 불법을 듣는 중요성을 말했다. 이어서 법을 듣는 기회가 어려움을 이야기하겠다.

 

티베트정토법(12)

불법을 듣는 것은 정말 어렵다. 삼악도나 변경에서 태어나면, 아무리 오랜 겁 동안 한 순간도 정법을 듣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 정법을 듣고 수행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하다. 이런 기회는 있을 수가 없다. 삼악도의 중생은 물론이고, 불법이 흥하지 않은 곳에서는 사람이 70, 80을 살아도 단 하루 불법을 들을 기회도 없다.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도 듣지 못한다. 그들은 날마다 죄를 짓기만 할 뿐, 한 평생 의미있는 일을 전혀 하지 못하고, 죽을 때도 빈 손으로 중음의 먼 길을 떠날 뿐이다. 얼마나 불쌍한가.

 

불법은 듣기가 힘들다. 특히 신심과 공경심과 환희심으로 불법을 듣는 것은 더욱 어렵다. 겉으로는  법회,  법회에 참가하고, 새로온 스승에게 의지해서 법을 들어도 무기의 마음가짐이거나 재미있는 것을 구경하겠다거나 기타 청정하지 못한 마음으로 법을 듣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 불법은 귀한 보물처럼 얻기 힘든 것인데, 내가 불법을 들을 수 있게 되다니, 정말로 영광이다, 이런 마음으로 법을 듣는 사람은 극소수다. 붓다께서 <보적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신심으로 법을 듣는 이는 백 겁 동안에도 만나기 힘들다. 붓다께서 한탄하며 말씀하신 것이다. 무수한 중생이 끝없이 악업을 짓고, 신심으로 불법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은 백 겁 동안에도 만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불법을 쉽게 얻을 수 있으며,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불설감로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몸은 얻기 힘들고, 불법을 만나기 힘들고, 신심을 얻기 힘들고, 보리를 깨닫기 힘들다.’ 보물과 같은 사람의 몸을 얻기 힘들고, 불법을 만나기도 힘들고, 불법을 만나고 나서 진정으로 믿음이 생기는 것도 힘들고, 마지막으로 보리를 깨닫는 것도 지극히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모두 불법을 듣는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신심과 공경심과 환희심으로 법을 들어야 한다. 법의 의미를 사유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수행할 기회가 없다 해도 이런 세 가지 마음으로 법을 들으면 매우 의미가 있다. 다른 것은 말고, 말법시대에 한 가지 법 전승을 원만히 하면 충분히 기쁜 일이다.

 

불법을 듣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드문 기회인 것을 알고 나면 법을 듣는 방식을 알아야 한다. 이제 막 법을 듣기 시작했거나 법을 듣는 규칙을 모르는 사람은 법을 듣는 규칙이 중요한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인도 대덕 단빠상제가 말한 것처럼 법을 바로 듣고 행하지 않으면 정법이 오히려 악도로 가는 인이 된다.’ 이렇게 되는 것은 불법이 아주 엄한 대상이기 때문이다. 바로 행하면 법을 의지해서 해탈을 얻고, 바로 행하지 않으면 이로 인해 악도로 떨어진다. 그러므로 바르지 않은 행위를 근절하고 바르고 모든 불법을 행하고 지켜야 한다.

 

실생활에서 세간의 온갖 법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불법을 파는 사람도 있고, 불법에 사견을 가진 사람도 있고, 불법을 비방하는 사람도 있고, 같은 도반과 늘 갈등을 겪는 사람도 있다. 이런 청정하지 않은 마음과 행위로 법을 듣고 불법을 지킨다면 그것은 악도로 가는 인이 된다. 불법에 바른 믿음을 갖고, 바르게 듣고 사유하고 수행하면 불보살의 과위를 얻는다. 맞는 약을 먹으면 질병이 고쳐지고 잘못된 약을 먹으면 생명이 위험해지는 것과 같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법을 듣지 않는 것이 낫겠군.’ 이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법을 바르게 듣지 않으면 악도에 떨어지지만 그래도 법을 듣는 것이다. <보적경>에 이런 공안이 있다. 문수보살과 선주의천자가 심오한 무생공성 법문을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500명의 비구가 그것을 듣고 사견을 가졌다. 결국 그들은 이 때문에 지옥으로 떨어졌다. 사리자가 이것을 보고 문수보살에게 말했다. ‘이렇게 심오한 불법을 이야기하지 않았어야 합니다. 공덕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잘못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많은 비구나 이 법을 듣고 전부 지옥으로 떨어진 것을 보십시오.’ 문수보살이 대답했다. ‘그들이 잠깐 지옥으로 떨어졌으나 아주 빨리 해탈을 얻을 것이다. 이처럼 심오한 법문을 듣지 않았다면 그들은 언제 해탈할지 알 수 없다.’ 붓다께서 문수보살을 찬탄하며 말씀하셨다. ‘자신의 견해를 갖고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 많은 겁 동안 갠지스 강의 모래 만큼 많은 여러 붓다께 공양을 올리는 것이 공성법문에 사견을 갖고 빨리 해탈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고 공성법문에 사견을 가지라는 말은 아니다. 자신의 견해를 갖고 오랫 동안 붓다께 공양을 올리거나, 다른 선행을 하면 큰 공덕이 되지만 우리가 빨리 해탈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공성법문에 사견을 가지면 잠깐 동안은 악도에 떨어지나 공성법문이 지극히 수승한 가피가 있기 때문에 이 인연의 힘으로 빨리 해탈을 얻을 수 있다.

 

티베트정토법(13)

며칠 전에 한 도반이 이렇게 말했다. ‘OO 스승님이 법을 전하는 방식이 아주 엄격하다는데 법을 듣는 것이 좋을까요, 듣지 않는 것이 좋을가요? 저는 완전히 올바르게 할 자신이 없습니다.’ 나는 그래도 법을 듣는 것이 좋다고 했다. 또 이렇게 묻는 사람도 있었다. ‘밀교와 공성을 배우는 것은 위험하다는데, 배우는 것이 좋을까요?’ 배우는 것이 좋다. 배운 후에 사견이 생겨도 윤회하는 동안 이를 마무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 기회를 얻지 못하면 우리는 영원히 해탈하지 못한다. 여러분은 이것을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이어서 이야기하겠다. 법을 듣는 방식을 알면 정법을 넣은 보물창고가 열린 것이다. 큰 보물을 얻은 자는 큰 이익을 얻고, 작은 보물을 얻은 자는 작은 이익을 얻는다. 정법은 보물창고 같다. 보물창고에 모든 재부가 다 있다. 무궁무진하고 써도 써도 끝이 없다. 그러나 사람마다 복이 달라서 복이 많은 사람은 큰 이익을 얻고, 복이 적은 사람은 작은 이익을 얻는다. 그런 것처럼 여러분이 법을 듣는 방식대로 바르게 법을 들어도 사람의 근기와 신심이 다르기 때문에 같은 <티베트정토법>을 의지해도 수확이 다르다. 신심이 충분치 않거나 견해가 아주 높지 않아도 바르게 법을 듣기만 하면 그에 상응하는 이익을 얻는다. 보물창고가 열리면 사람마다 얻는 바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법을 듣는 것이 바로 듣는 것인가? 외부의 행위가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이다. 적천보살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자기 마음을 관찰하고 바르게 행하라.’ 어떤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자기의 마음을 반복해서 관찰하라. 그것이 선인지, 불선인지, 무기인지 보라. 불선이라면 바로 멈추고, 무기라면 선으로 바꾸라. 선이라면 계속 하라. 이렇게 관찰하고 나서 바르게 행할 수 있다. 전에 니덴 캔뽀가 법을 전하기 전에 이 가르침을 외워서 제자들이 자기의 마음을 진지하게 관찰하고 바르게 행하게 한다 했다.

 

왜 이렇게 관찰해야 하는가? 세존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 앞에 마음이 먼저 행하니, 마음이 빠르고 마음이 주인이다.’ 모든 일을 하기 전에 마음으로 세밀하고 치밀하게 계획을 세운다. 경당을 세운다면 아직 공사를 시작하기 전에 마음 속에 이미 건축물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누구를 죽여도 실행하기 전에 오랫동안 계획을 세울 것이다. 마음은 모든 법의 시작이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일상생활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도 완전히 마음의 지배를 받는 일이다. 마음에 번뇌가 없으면 싸움이 일어날 수 없다. 마음이 모든 일의 뿌리이고, 마음이 모든 선행과 악행을 조정한다. 모든 선업과 불선업을 만드는 이가 마음이다. 그래서 세존께서 누누히 자기 마음을 관찰해야 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법을 듣는 공덕이 큰가, 작은가 혹은 법을 들어서 공덕이 되는가, 오히려 잘못이 되는가는 완전히 마음이 결정한다. 법을 듣고 싶은 생각에 끌려 법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앉을 때 마음을 관찰해 보라. 나는 어떤 발심으로 법을 들으러 왔는가? 나쁜 마음이나 무기의 마음이라면 이를 배제하라. 선한 마음이라면 잘 지키라.

 

사람마다 법을 듣는 목적이 다르다. 방장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법을 듣는 사람도 있고, 법사의 학위가 필요해서 법을 듣는 사람도 있다. 명성을 위해서, 부자가 되려고 법을 듣는 사람도 있다. 한 거사가 이런 말을 했었다. 그는 출가는 하기 싫고 재가 법사가 되고 싶다 했다. 재가 법사가 되려고 법을 듣는다고 했다. 불학원에 티베트 라마도 내 강의를 들으러 오는데, 이런 목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중국말을 배운 후에 중국 여러 곳을 다니며 관정을 내리고 법을 전하면 좋은 차, 좋은 집을 가질 수 있겠지.’ 이것은 돈과 명리를 위해서 법을 듣는 것이다. 중국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해탈하기 위해서 법을 듣는 것이 아니다. 다른 도반들과 인연을 맺어 사업에 도움을 받으려고 한다. 이것은 돈 때문에 법을 듣는 것이다. 법과 스승에 전혀 신심이 없으면서 호기심으로 법을 듣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는 잘못을 꼬집어내려고 법을 듣는 경우도 있다. 모두 아주 안 좋은 경우다.

 

 까담파 까마궁겔 게세는 이렇게 말했다. ‘지위를 탐내서 법을 말하는 것과 경쟁심으로 공부하는 것, 이름을 얻고자 하는 오만한 자가 어찌 정법으로 들어가겠는가!’ 스승이 법을 설하는 목적이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것이거나, 제자가 공부를 하는 목적이 경쟁하기 위해서라거나, 지혜로운 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얻고자 하는 오만한 자가 어찌 정법으로 들어가겠는가. 여러분은 이를 깊이 사유하라. 우리의 목표가 정확하지 않으면 처음부터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그러면 법을 들어도 의미가 없다. 해탈하려는 사람들 틈에 있어도 해탈이 멀고 멀다. 인과를 믿지 않는 사람은 목표에 이르기 까지 줄곧 모양새를 꾸미고 법을 듣는 사람들 틈에 앉아 있을 것이다. 인과를 믿고 진정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사람은 이런 방심으로 법을 듣지 않는다.

 

 

그러니 여러분은 어떤 선법을 행하기 전에 반드시 자기 마음을 관찰하라. 자기의 발심이 바른지 살펴보라. <개계수심문비>를 공부할 때 사람들이 얻은 바가 많았다. 이 법을 공부함으로써 세상을 꿰뚫어보는 출리심이 필요한 것을 확실히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법을 듣는 가운데 앉아 있어도 의미가 없다. 범부니까 영원히 나쁜 생각을 갖지 않을 수는 없다. 그러나 근본적인 목표가 잘못되면 법을 들어도 의미가 없다. 해탈을 얻는 것이 목적이라면 어쩌다 한번 번뇌해도 쉽게 참회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정법을 들어도 이익이 안 되고 오히려 그로 인해 악도로 떨어진다는 옛말처럼 된다

 
 

티베트정토법(14)

특별히 설명해야  것은, 누군가 스승과 정법에 공경심을 갖지 않고 오히려 사견을 갖고, 심지어 적대적인 마음을 갖는다면 이런 이런 사람에게는 정법을 이야기하면  된다. 법사가 이야기할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들었다. ‘당신이 이렇게 말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이것은 일부러 죄를 짓는 것이다. 무섭고 불쌍한 일이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면 법사를 때릴지도 모른다. 설령 붓다께서 자애로 모든 중생을 대한다 해도, 공경심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법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다. 스승은 마땅히 붓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법을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매한가지라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런 사람에게도 불법을 전할  없다. 내가 어느날 누구에게 ‘OO스승은  대단하다. 그의 발원의 힘이 매우 크니 당신은 그에게 가서 법을 들으라라고 했다. 그런데  사람이 나는 법은 얻어도 그만이고, 얻지 못해도 그만입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사람에게는 법을 전하면  된다.

 

공경심이 없는 사람에게 불법을 전하면 불법의 가치가 떨어진다. 이런 사람에게 불법을 전한다 해도 진실된 이익을 얻지 못한다. 인광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불법의 진실된 이익을 얻고자 하면 공경하는 마음으로 구해야 한다.’ 화지 린뽀체도 이렇게 말했다. ‘자신에게 상등의 믿음과 공경심이 있으면 그가 얻는 스승과 삼보의 자비와 가피도 상등일 것이며, 중등의 신심과 공경심을 갖는다면 그가 얻는 자비와 가피는 중등일 것이다. 하등의 신심과 공경심만 갖고 있다면 적은 가피와 자비를 얻는다. 신심과 공경심이 전혀 없으면 스승과 삼보의 가비와 가피를 결코 얻을 수 없다.’ 스승과 삼보는 집착이 없다. 그러나 그들의 가피와 자비를 얻으려면 신심과 공경심을 갖추어야 한다. 이것은 연기의 법칙이다. 물이 맑아야 달그림자가 비출 수 있다. 혼탁한 물에는 달 그림자가 비추지 못한다. 그러니 여러분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진정한 공경심을 갖도록 노력하라.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공경하지 않는 자에게 불법을 말하지 않고, 친하지 않은 자에게는 충언을 하지 않는다.’ 세간 사람들도 이런 경험을 한 것이다. 친하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절대 충언이나 비밀을 말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의 정신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불법에서는 공경심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공경심이 없는 사람에게는 불법을 이야기하면 안 된다. 전에 많은 스승들이 제자의 공경심을 살펴보고 그가 얻을 가피와 법의 이익이 얼마나 되는지를 판단했다. 불법의 가피는 오직 공경심이 있어야만 얻을 수 있다. 공경심이 없는 사람은 법의 인연을 끊어내는 사람이다. 불법으로 자기의 마음밭을 적시는 것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해야 한다.

첫째, 정법의 가치를 떨어뜨리지 말라.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에게 신심이 있든 없든 상관하지 않고 오직 공양을 받기 위해 함부로 관정을 하고 법을 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것은 정법을 파는 행위다.

 

 

둘째, 법을 말한다면 그 법은 반드시 중생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법을 말하는 사람은 반드시 법을 말할 자격을 갖추어야 한다. 법을 듣는 사람도 공경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양쪽이 다 법을 말하는 이익과 법을 듣는 이익을 얻지 못한다. 물론 여기서 더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법을 듣는 사람이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하늘에게 비가 내리면 사람들은 모두 즐거워한다. 그러나 업이 잘못된 아귀에게는 비가 삼킬 수 없는 피고름으로 보인다. 이런 것처럼 어떤 중생에게는 불법이 감로라서 생로병사의 고통을 없애주는 신비한 약이지만, 전혀 믿음이 없고 사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아주 조금의 이익도 주지 못한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주문을 한번 외워주는 정도로 그쳐야 한다.

 

그러니 도반 여러분은 불법을 전할 때 신중해야 한다. 중생의 인연과 근기를 살핀다 하나 이것이 범부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최선을 다해서 관찰하라. 어느 지역 사람들이 불법에 공경심을 갖고 인연도 괜찮으면 그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정법과 법을 전하는 사람에게 전혀 공경심이 없고, 심지어 사견도 갖고 있으면 그중에는 정법을 망치겠다는 나쁜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에게는 억지로 법을 전하지 않아야 한다.

 

법을 듣는 사람은 스스로를 신중하게 관찰해야 한다. 자신의 상속에 신심과 공경심이 없고 오히려 나쁜 생각만 일어나고 있으면 특별히 주의하라. 범부는 정법에 사견을 갖고 신심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스스로 참회하게 독려하고 스승과 삼보께 기도하라. 사실 우리의 마음은 어린이 같아서 좋은 방편을 쓰면 쉽게 바뀔 수 있다. 어린이는 개구장이라도 인내심이 많은 스승과 부모가 때로는 회초리도 들고, 때로는 맛있는 것도 주고, 때로는 좋은 가르침을 주며 교육하면 조금씩 말을 잘 듣는 아이로 바뀐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이 간혹 이런 나쁜 생각을 하고, 저런 나쁜 생각을 해도 불법을 통해 쉬지 않고 다듬어나가면 결국은 정도로 들어갈 수 있다. 역사상 많은 고승대덕들이 이랬다. 처음에는 마음이 부드럽지 않고 행위도 바르지 않았다. 그러나 선지식과 정법의 가피와 자신의 노력으로 결국은 훌륭한 성취자가 되었다.

 

티베트정토법(15)

 어찌 되었든, 고귀한 불법을 한 글자도 낭비할 수 없다. 지금 인간세계에 아직 존재하는 불법은 붓다께서 무량한 고행으로 성취한 것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붓다께서 중생을 이롭게 하려는 대자비다. <화엄경>에서 피부를 벗겨 종이를 삼고, 뼈를 부러뜨려 붓으로 삼고, 피를 찔러 먹물로 삼아 경전을 썼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가 어찌 중생의 이익을 앞에 두지 않고, 붓다께서 인지에서 무수히 머리와 골수 등을 보시하는 고행으로 성취한 불법을 가볍게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겠는가? 그러니, 전승 스승으로부터 전해온 진귀한 불법을 보물처럼 아껴야 한다. 누군가 불법을 공경한다면,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전부 전해주어야 한다. 그런 경우가 아니라면 함부로 전하면 안 된다. 오직 공양하는 재물에만 관심이 있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자기 이름을 내려고 가장 심오한 법을 전하면, 그것은 너무 무책임한 행위다. 물론 우리가 붓다를 따라 배워 자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것보다 더 불법을 소중히 여기면 불법의 이익을 얻을 것이다.

 

본래 증법과 교법은 법신이다. 그러나 이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색신이 친히 그런 사람들 앞에 와도 소용이 없다. 세존께서 이렇게 이야기하셨다. ‘나의 교법을 공경하지 않으면 나를 보아도 이익이 없다.’ 일반적으로 붓다께서 중생을 구제하는 방식은, 당신이 법을 이야기하고, 제자들이 그에 따라 수행하여 해탈을 얻는 것이다. 붓다는 이 때문에 세 번 법의 바퀴를 돌리셨다. 그러니 <반야경> 등의 법보를 볼 때 진짜 부처님처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늘 공경하고 절해야 한다. 그래야 붓다의 가피가 우리의 마음에 녹아들 수 있다. 불법을 듣는 것은 붓다를 보는 것이다그런데 혹자들은 정법과 스승에 공경심을 갖지 못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찌 불법을 전하겠는가?

 

붓다께서는 불법을 전하는 방식으로 인연있는 중생을 해탈의 길로 들어서게 할 뿐 아니라 모든 선지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니 우리는 백 배의 신심과 공경심으로 스승이 전하는 불법을 들어야 한다. 법을 듣고나서는 가르침대로 바르게 수행해야 한다. 그러면 불법의 불가사의한 가피가 우리의 상속으로 들어올 수 있다. 그때가 되면 우리도 진정한 해탈을 얻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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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법을 듣는 방식을 계속 이야기하며 법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다. 사실 현교의 경전과 밀교의 속부, 논전에서 현교와 밀교의 불법을 듣는 법기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대원만심성휴식>, <여의보장론>, <공덕장> 등의 논전에서 현교, 밀교의 법을 듣는 법기를 자세히 소개한다. 어떤 공덕을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제자들이 신심을 갖고 정진하고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반드시 멀어져야 할 것을 이야기하면서 제자들이 신심이 없고, 참회하지 않고, 부끄러워하지 않음 등등에서 멀어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겠다. 여러분이 경전을 참조하라.

 

법기가 갖추어야 할 공덕과 갖지 않아야 할 것을 다양하게 관찰해야 하지만 이것을 대략해서 이야기하자면, 제자는 반드시 아래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또한 정토법을 듣는 사람은 반드시 네 가지를 갖추어야 한다.

 

첫째, 스승과 정토법에 강렬한 신심과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불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여러 선법이 나지 않으니 불에 탄 씨앗에서 어찌 싹이 나겠는가?’ 신심이 없는 사람에게 선법의 공덕이 전혀 나타날 수 없다. 불에 탄 씨앗이 푸른 싹을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우리가 신심을 갖고 있다면 모든 선법의 공덕이 자연히 생겨난다. 연화생 대사는 이렇게 말했다. ‘굳은 믿음을 가지면 가피를 얻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승과 불법에 강렬한 신심과 공경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보살의 가피를 얻을 수 없다. 모든 선법의 공덕도 생길 수 없다

 

 

티베트정토법(16)

티베트의 노인들은 잘 한다. 불법을 전할 때 그들은 매우 공경하는 태도로 합장하고 열심히 듣는다. 정법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마음이 있다. 불법을 들음으로써 그들의 상속에 자연히 변화되었다. 그에 비하면 젊은이들은 신심이 형편없다. 그들은 지위, 명성, 재산 등에 집착한다. 욕망의 끈에 단단히 묶여 있다. 그런 상태에서 해탈을 향하기는 불가능할 것 같다.

 

둘째, 질투심 등에 빠지지 않고 품성이 정직해야 한다. 품성이 정직하지 않고 교활한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법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스승과 도반을 속이고, 말도 진실되게 하지 않는다. 양심없는 일을 하고, 거짓된 수단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한다. 이것은 매우 좋지 않은 일이다. 우리는 이런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한다. 최소한 정직하고 선량한 인격을 갖추어야 한다.

 

셋째, 법의 의미를 깨닫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돼지처럼 어리석으면 아무리 그들에게 불법을 많이 이야기해도 하나도 알지 못한다. 그들은 법기가 되지 못한다정토법은 노인네들이 하는 수행법이라 높은 지혜가 필요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정토법은 그렇게 간단한 법이 아니다. 강렬한 신심을 가진 사람은 사유를 하지 않고도 정토로 갈 수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불법을 듣고 사유해야 한다. 정토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위연을 없애는 기본 방법도 모른다면 어떻게 순조롭게 왕생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반드시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넷째. 정토법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개에게 풀을 주는 것처럼 정토법에 아무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근기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아미타부처님이 바로 앞에 와서 수승한 정토법문을 두 손으로 받쳐 그들에게 줄 때는 상관도 않다가 노래를 들고, 음식을 보고 큰 환희심을 내는 사람들은 법기가 아니다. 그러니 자신이 정토법에 관심이 있는지를 잘 관찰하라. 관심이 없으면 정토법으로 성취를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성천논사가 <중관사백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이 바르고 지혜로 법의 의미를 구하는 것이 법을 듣는 법기이다.’ 마음이 바르고, 법의 의미에 통달하는 지혜를 갖추고, 정법을 추구하는 마음, 이 세 가지를 갖추어야만 진정한 법기라 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어서 무기의 마음을 끊어야 함을 이야기한다. 법을 들으러 가서 법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어도 마음에 선한 분별심도 없고, 악한 분별심도 없이 오직 멍하니 앉아서 돌덩어리처럼 있는 것은 무기의 발심이다. 이런 사람들이 있다. 정법을 강렬하게 추구하는 마음도 없고, 정토를 추구하는 마음도 없다. 아주 악한 마음도 없다다른 사람들이 법을 들으러 가니까 자기도 따라간 것뿐이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법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산양, 야크 등이 같아 앉아 있다 하면 그들과 차이가 없다. <구사론>의 관점에 따르면 무기의 마음으로 법을 들으면 이숙과보가 성숙하지 못하고 오직 약간의 선근만 뿌릴 뿐이라 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기의 마음으로 법을 듣지 말라.

 

법을 듣는 사람들 사이에 앉아 있을 때는 자기 마음을 잘 관찰하라. 자기의 마음이 무기의 상태라면 바로 자신을 일깨우라. ‘이렇게 멍청하게 앉아만 있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선한 마음을 내자.’  이런 상태를 보리심, 출리심으로 바꾸라. 혹은 믿음과 공경심과 희구심 등의 선한 마음을 가지라. 마음으로 이렇게 생각하라. ‘스승과 삼보의 가피는 불가사의하다. 그분들께서 언제나 자비의 마음으로 나를 살피시니, 말법시대에 이런 대승의 불법을 듣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는 마음을 모아서 법을 들어야지. ‘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법을 듣는 사람이 믿음과 법이 귀하다고 생각하는 표시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만 법을 들어도 의미가 있다

 

티베트정토법(17)

사실 법을 듣는 태도를 보면 그의 신심의 크기를 알 수 있다. 내 앞에서 법을 듣는 사람들은 각자 표정이 다르다. 한 마디를 들어도 강렬한 공경심을 품고, 마음을 집중해서 들으며 중요한 문제를 이야기하면 바로 기억하는 사람이 있고, 멍하니 앉아서 무엇을 들어도 아무 반응이 없는 사람도 있다. 물론, 사실은 신심을 갖고 있는데, 겉으로는 무표정한 사람은 예외다. 이런 보살도 분명 있을 것이다.

 

전에 내가 밖에서 70살이 넘은 노인을 만났는데, 그 노인은 매번 1~2시간씩 차를 타고 법을 들으러 왔다.  당시 <입행론> 180회 넘게 강의했는데, 그는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물었다. ‘저 분이 이해합니까?’ 그들이 말했다. ‘대부분의 의미는 알아듣습니다. 일부는 잘 못 알아듣습니다. 귀가 별로 좋지 않고,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불학원에도 이런 도반들이 있다. 지혜는 별로 높지 않아도, 불법을 강렬하게 추구하며 한 번도 법을 듣는 것을 멈춘 적이 없다. 내가 아는 한 티베트 라마는 20년 동안 날마다 법을 듣는데, 언제 한 번 내가 이렇게 농담을 했다. ‘당신은 왜 켄뽀 학위가 없습니까?’ 그가 말했다. ‘켄뽀 학위는 없어도 불법에는 아주 신심이 있습니다.’ 그런, 불법을 듣는 것이 지극히 중요하다. 법을 듣는 기회는 흔치 않다. 법을 제대로 듣는 것은 더욱 힘들다. 그러니 올바르게 법을 듣자. 마음은 만법의 근원이니, 선한 마음으로 법을 듣고, 최소한 신심을 가지자.

 

여러분은 이 점을 반드시 기억하라. 법을 듣고, 법을 닦는 등 모든 선법은 3가지 수승을 벗어날 수 없다. 3가지 수승은 제일 처음의 보리심내기, 중간의 열심히 수행하기, 마지막의 회향이다. 사실 3가지 수승의 구결은 티베트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경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 <무량수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리심을 내고, 여러 공덕을 쌓아 덕의 뿌리를 심고, 지성으로 회향하라.’ 여기서 이렇게 분명히 말하고 있다. 앞에 보리심을 내고, 중간에 한마음한뜻으로 선법을 닦고 공덕을 쌓으며, 마지막에 정성으로 회향하라. 중국 불교의 대덕들이 이렇게 똑같이 말하지는 않지만, 이렇게 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니 모든 선법을 행할 때 반드시 이 3가지 수승을 지키라.

 

 

그리고, 나는 여러분이 계속 법을 듣기를 원한다. 또한 <티베트정토법>의 전승을 꼭 원만히 하면 좋겠다. 그리고 늘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라. 여러분이 이렇게 공부와 수행을 병행하면 수승한 가피를 분명히 얻을 것이다. 몇몇 사람들은 <티베트정토법>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염불하는 것이 섞어 수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 생각에 대승법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염불하는 것은 절대 섞어서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경전에 새겨진 대로 염불하는 것이 결코 잘못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상한 것은 순결하고 무구한 불법을 배척하고 스스로 정토 사상에 세상의 온갖 법이라는 독을 버무리고도 알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불법을 배척하면서 왜 자기의 탐욕과 성냄과 무지를 깨끗이 씻지 않는 것일까 싶다

 

대승법을 공부하면서 염불하는 것이 섞어 수행하는 것이라면 조사들도 섞어 수행한 셈이 된다. 홍일대사는 중국 불교에서 공인하는 대덕이다. 그러나 그의 불교 사상은 ‘<화엄>을 경계로 하고, <사분>으로 행하고, 정토를 과로 한다.’ 그의 견해는 <화엄>에 의지하고, 행위는 <사분>에 의지하고, 정토로 가는 것을 수행의 마지막으로 했다. 이것도 섞어 수행이란 말인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인광대사와 우익대사의 저작을 자세히 보아도 이렇게 수행하는 것이 절대 섞어 수행이라 할 수 없음을 알 것이다.

 

 

전에 지혜가 없는 한 사람이 이렇게 물었다. ‘직메푼촉 법왕께서 마지막에 극락세계로 가시려 한다면 밀법을 수행해서는 성공하기 힘들 겁니다. 그러니 밀법은 정토종에 항복해야 합니다.’ 나는 그가 쓴 글도 읽었었다그의 글은 우습고 논쟁할 가치도 없었다. 그의 말이 옳다면 중국 불교의 인광대사 등도 이런 잘못을 저지른 셈이다. 그들은 여러 종파의 기초 위에서 마지막에 정토로 갔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우리의 견해는 대원만, 혹은 대중관이다. 그리고 소승의 별해탈계에 따라 행한다. 마지막에 극락세계로 간다. 그러나 심도깊게 법을 듣고 사유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것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충고하고 싶다. 견해, 행위, 수행, 결과에서 아무 문제를 발견하지 못했다면 자기의 분별심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라.

 

그러니 여러분은 반드시 깊이 사유하라. 법을 듣고 사유하는 것이 정토로 왕생하는 데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왕생하는 데 자량이 된다. 정토로 왕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밀법을 비방하고, 다른 전승의 가르침을 비방하고, 상속에 5가지 독과 갖가지 번뇌가 가득 찬 것이 왕생하는 데 장애가 된다. 정토종 경전과 논전에 왕생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것을 확실하게 알라. 그렇지 않으면 자칫 이와 같은 악업을 짓게 된다

 

티베트정토법(18)

선근을 방편으로하여 수승한 가행의 보리심을 냄

오직 티베트 불교에서만 왕생하려면 보리심을 내라 한다, 한마음으로 염불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무량수경>을 열심히 보면 우리가 왜 보리심을 내야 하는지 확실히 알게 된다. <무량수경>에 왕생하는 세 부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기억한다. 첫번째 부류는 반드시 출가하고 보리심을 내 한마음으로 염불을 하며 큰 공덕을 쌓은 이들인데 죽을 때 아미타 부처님과 여러 대중이 맞으러 온다. 두번째 부류는 출가를 하지는 않으나 보리심을 내고 한마음으로 염불을 하며, 스님을 공양하는 등의 선법을 힘껏 닦는다. 죽을 때 아미타 부처님이 그 앞에 와서 인도하신다. 세번째 부류는 선법을 많이 하지 않더라도 보리심을 내고 한마음으로 염불을 해야 한다. 죽을 때 꿈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보고 왕생한다. 이 세가지 왕생 중 후자는 신통, 공덕, 지혜 등이 전자에 훨씬 못미친다.

 

극락세계로 왕생하는 것은 무수한 중생이 아침저녁으로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자면 여러 인연이 갖추어져야 한다. 사바세계의 중생은 아미타 부처님과 극락세계와도 깊은 인연이 있다. 그래서 역대 고승들이 모두 정토법문을 널리 알렸고 왕생한 자가 끊임없이 나타났다. 법왕과 인연을 맺었던 도반들은 이미 왕생할 수승한 인연을 갖고 있다. 보리금강이 법왕에 대해 이런 수기를 내렸었다. ‘무릇 인연을 맺은 자는 모두 극락에 간다’ ,’법왕의 스승 라마로되와 마니라마도 법왕에게 수기를 주었다. , ‘너는 말년에 정토 법문을 널리 알리라. 이로 인해 무량한 중생이 극락세계로 가리라.’ 이상의 수기에 근거하여 법왕은 60세가 지난 후부터 정토법문을 널리 알렸다. 그분은 인근에서 대규모 극락법회를 열었는데, 매번 십만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전에 법왕이 극락법회를 여는 모습을 녹화한 영상을 보았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아미타 부처님과 수승한 스승의 발원의 힘으로 무수한 중생이 쉽게 극락세계로 갔다고 확신했다. 그러니 여러분 모두 이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열심히 정토법을 수행하기 바란다.

 

이어서 구체적으로 보리심 내기를 이야기하겠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선한 마음이 중요하다. 선한 마음을 키우기 위해 방편을 가져야 한다. 수승한 가행의 보리심을 내야 한다. <보온경>에서 이렇게 말했다. ‘마음은 모든 법의 전행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크게 하고, 선근도 크게 하라. 발심이 작으면 선근도 작다. 두 사람이 사원에 100원씩 기부를 했다. 한 사람은 모든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행복해지기를 바라며 기부를 했다. 그의 선근은 매우 크다. 끝이 없다 할 수 있다. 다른 한 사람은 자기의 건강과 사업이 잘 되라고 기부를 했다. 삼보의 가피로 그의 바람이 실현될 가능성이 높으나, 그의 발심이 작으므로 얻는 선근도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입보살행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선행은 파초와 같아서 열매가 열리고 나면 말라버린다.’ 보리심을 갖지 않아서 선근을 다 써버리고 과보가 성숙한 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공덕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선한 마음과 악한 마음의 차이만 따르고, 선한 모습과 악한 모습의 크기를 따르지 않는다.’ 모든 법이 동기가 선한가 악한가에 따라 공덕이 있는가, 잘못이 있는가가 정해지지 선한 모습, 악한 모습으로 공덕이 있는가, 잘못이 있는가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겉으로 보면 한 사람이 무서운 악업을 지었을지라도, 그 악업이 중생의 이익을 위해 지은 것이고, 마음은 선하다면 겉으로 악업으로 보여도 잘못이 아니다. 자비로운 대상인이 칼을 든 흑인을 죽인 것과 같다. 마음이 아주 나쁘다면 겉으로 불탑을 짓고, 사원을 짓는 등 큰 선근을 가진 것처럼 행동해도 공덕이 없다

 

티베트정토법(19)

<입보살행론>에서도 말했다. ‘선한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 범천계에 태어나고, 몸과 마음의 선근이 좋게 보여도 마음이 약하면 성취하기 어렵다.’ 과거에 모녀가 같이 강을 건넜는데 갑자기 강물이 불어나서 죽을 위기에 처했다. 둘은 서로 착한 마음을 내었고, 결과적으로 범천계로 태어났다. 좋은 마음을 내는 것만으로도 범천계에 태어나는 과를 얻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겉으로는 몸과 말의 선근이 지극히 큰 것처럼 보여도 마음이 미약하다면 공덕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이다.

 

선법과 악법은 마음이 만드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리심을 가지면 겉으로는 선법이 아무리 작게 보여도 아주 큰 선근이다. 여러분은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겉으로 아무리 선법을 많이 행해도 공덕이 크지 않다. 겉으로 열심히 수행하고, 발심하고, 이런 일을 아주 오래 동안 하는 불교도들도 있다. 그러나 그에 맞는 공덕이 없다. 그것은 이기심에 묶여 있는 것이 원인이다.

 

새벽 4시부터 있는 힘껏 아미타부처님을 부르고 밤 12시가 되어야 그쳐도, 이것이 오직 자신이 해탈하고, 자녀가 건강하고, 사위의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서라면 이렇게 열심히 아미타 부처님을 불러도 공덕이 크지 않다. 그러니, 여러분은 결코 자신과 가족의 일시적인 이익, 궁극적인 이익을 위해 발심하고, 정토법문과 모든 선법을 듣고 사유하지 말라.

 

모든 중생이 윤회에서 해탈하고, 나아가 불과를 얻기 바라는 보리심을 갖고 법을 듣고 수행한다면 공덕이 대단히 크다. <입보살행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보리심이라는 나무에 언제나 열매가 열려 있는데, 열매가 다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무성해진다.’ 이런 의미다. 보리심이라는 나무는 언제나 열매를 내는데, 사라지지 않을 뿐더러 공덕이 더욱 자란다. 바다로 들어가는 물방울이 바닷물이 마르기 전에 사라지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법을 듣고 수행할 때, 혹은 그 어떤 선법을 행할 때라도 먼저 자기 마음을 다듬고 보리심을 가지라

 

 

무시이래로 중생이 모두 아집에 끌려다니며 오직 자기 이익만 생각한다. 그 결과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이 지금껏 윤회를 떠돌고 있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무수한 중생이 아집과 아집이 대상에 끌려 오직 자기와 자기 친구들의 짧은 이익만 생각한다. 그 결과 아라한과도 얻지 못한다. 과거 무수히 많이 사람도 되고 천인도 되었고, 무수한 선법도 닦았지만 그것이 모두 이기심 때문이었으니 전혀 성취를 하지 못했다. 아직도 보리심을 내지 않으면 앞으로도 이럴 것이다. 지금 우리가 이처럼 수승한 대승불법과 스승을 만났으니, 생사가 떠도는 옛 길을 걷지 말고, 불보살의 큰 길을 택해야 한다. 또한 모든 중생의 이익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지금 오직 타인의 이익을 위해 법을 듣고 법을 수행하면 자신의 이익도 동시에 이루어진다. 마지막에는 반드시 진정한 이타의 불과를 얻을 것이다. 예를 들면, 불을 피우려고 장작에 불을 붙이는데, 불을 붙이고 나면 연기를 원치 않아도 저절로 생긴다. 현실 생활에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명성과 지위를 위해 목숨을 건다. 그러나 그들이 진정으로 중생을 돕거나, 중생의 이익을 위해 보리심을 갖는다면, 명성과 이익은 저절로 얻게 될 것이다. 세상에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사람 돕는 데 몽땅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자신의 생활을 걱정하지 않고 오히려 명성과 지위가 저절로 찾아온다. 그런가하면 오직 자기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이기심으로 인해 성취를 하지 못한다. 남을 위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이타는 대단히 수승한 구결이다. 또한 어길 수 없는 규칙과 법칙이다. 

 

티베트정토법(20)

<입보살행론>을 말할 때 이 문제를 반복해서 강조했다. 그래서 발보리심의 중요성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물론, 나는 정토법문을 공부하는 많은 사람들도 보리심을 낼 수 있기를 바란다. 불경을 읽는 사람 중에는 자신의 이익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의 목적은 자기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도 있다. 극락세계에 왕생한 후에 아미타 부처님 밑의 대단한 권속이 되어서 인간 세계에 다시 와서 복수하고 적들을 모두 죽여버린다…… 또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임 내에서 서로 다투고 격렬하게 싸운다. 그러니 진정으로 반성해야 한다. 그러고나면 수행의 과정에서 보리심이 절대적으로 없으면 안 되겠구나 하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꼭 타인을 위하는 보리심을 가지라. 이렇게 하면 불경을 외워도 성공하고, 참선을 해도 성공할 것이다. 보리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나서, 실제로 보리심을 내야 한다. 여러분도 잘 알겠지만 보리심은 자비심에서 출발한다. 자비심은 또한 모든 유정과의 인연으로 생긴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보리심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아띠샤 존자의 일곱 가지 인과의 가르침으로 차제에 맞게 수행해야 한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모든 유정이 과거 우리의 부모였다는 것이다. 물론 안다고 말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한 확실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그래야 보리심이 뿌리를 내린다.

 

 

사실 어디에나 중생이 가득 차 있다. 모든 중생의 상속에 업과 번뇌와 고통이 가득 차 있다. 이들 중생 중에 일찍이 나의 부모가 아니었던 중생이 없다. 오래 태어나고 윤회하면서 지금은 그들이 우리의 부모였던 것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사실은 모든 중생이 다른 중생의 부모가 되었던 적도 수없이 많다. 다른 모든 중생의 경우야 얼마나 더 많겠는가? 송아지, 새끼 양 등의 축생은 태어나자마자 무리 중에서 자기 부모를 알아본다. 무시 이래의 습관 탓에 그렇다.

 

전에 내가 소를 치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송아지가 태어나면 어미소가 그의 태반을 핧아서 터뜨린다. 그렇지 않으면 태반에 싸여서 송아지가 숨이 막혀 죽는다. 송아지는 태반에서 벗어나자마자 어미 젖을 찾는다. 바로 설 수도 있다. 자기 어미와 다른 어미소를 구별할 수 있고, 결코 잘 못 알아보지 않는다. 나는 이것이 참 신기했었다. 어미소는 어떻게 이런 방식으로 자기 새끼를 보호할 줄 알았을까? 막 태어나서 눈도 아직 못 뜬 송아지가 또 어떻게 어미의 젖을 찾을까? 어떻게 자기 어미를 정확하게 찾아낼까? 사실 축생계의 부모가 자기 아이를 돌보고 아이가 자기 어미를 정확하게 찾아내는 것에는 심오한 이치가 담겨 있다. 그러나 생물 선생님은 이것은 동물의 본능이다. 아무리 파고들어봐야 다른 것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100% 설명이 가능하다. 붓다께서 이야기한 모든 중생은 자기 어미를 찾는다는 것은 정확한 이야기다.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 생명의 윤회를 연구하는 곳이 많다. 그들 중 다수는 현대의 사상과 이념으로 동물계의 모자 관계가 포함한 심오한 윤회의 신비를 연구한다. 그러나 사실 불교의 교리와 이증에 의지하지 않고 범부의 용속한 분별심에만 의지해서는 이것을 알기가 매우 어렵다. 

 

티베트정토법(21)

현재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여러 나라에 생명과 윤회를 연구하는 연구소가 많다. 그들은 현대의 사상과 이념으로 동물계 모자 관계가 담고 있는 윤회의 신비를 연구한다. 그러나 불교의 교증과 이증에 의지하지 않고 범부의 용속한 분별심만 의지해서는 어려운 일이다.

 

아래서 공안을 하나 들어 모든 중생이 과거 우리의 부모였다는 것을 설명하겠다. 과거 정등각을 원만히 한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권속들이 길을 가고 있었는데, 늙은 부인이 붓다를 보고 몹시 기뻐하며 소리를 질렀다. ‘내 아들! 내 아들!’ 그러면서 뛰어와 붓다를 껴안으려 했다. 이때 여러 비구들이 노부인을 막았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이 부인은 과거 5백 세 동안 나의 어머니였다. 지금은 과거의 습기로 이러는 것이니 말리지 말라.’ 비구들이 물었다. ‘왜 이번 생에는 어머니가 아닙니까?’ 붓다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인연이 있다. 첫째는 이번 생의 어머니가 내가 성불할 때 나의 어머니가 되겠다고 발원을 하셨던 것이고, 둘째는 그녀가 5백 세 동안 나의 어머니를 할 때 내가 늘 보시를 하고 출리심을 갖는 데 위연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싫어하는 마음을 가졌다.’ 후에 그녀는 출가해서 아라한과를 얻었다. 불교 역사에서 그녀는 비구니 중 경전 해석의 일인자였다. 이것을 보면 모든 중생이 수없이 많은 횟수 동안 우리의 부모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용맹보살이 이렇게 말했다. ‘지구의 모든 흙을 대추씨만한 환으로 만들어도 그 수가 어머니의 수에 미치지 못한다.’

 

 

과거 빠당의 한 게세가 문화혁명 후에 입적했다가 나중에 라싸에 다시 태어났다. 한번은 게세의 누나가 라싸로 성지순례를 갔는데, 어느 유아원 문 앞을 지날 때 6~7살 된 아이가 뛰어와 그녀를 껴안으며 말했다. ‘누나, 누나 그녀는 신기하게 생각되긴 했으나, 눈앞의 이 아이가 자신의 동생이었던 게세가 다시 태어난 것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그대 마침 게세가 전생에 있던 사원에서 두 출가자가 라싸에 <대장경>을 청하러 왔다. 이에 세 사람이 이 아이를 보러 왔는데, 아이는 이 두 사람도 정확하게 알아봤다. 나중에 그들은 아이를 원래의 사원으로 데리고 갔다. 그는 전생에 이 사원의 3대 게세 중 가장 높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원래 앉았던 가장 높은 법좌에 앉혔다. 그러나 그때는 여러 인연이 맞지 않아 사원에서 의식을 행하지는 못했다. 후에 그는 라싸의 사원에 공부하러 보내졌는데, 남들보다 경전을 외우고 심오한 의미를 해석하는 데 뛰어났다. 나중에는 또 인도로 갔는데, 수많은 고승들이 그가 전생에 게세였다가 다시 태어났다고 확인했다. 지금은 인도에 살고 있다고 들었다. 이것으로 전생과 내생이 존재한다는 것이 입증된다. 여러분이 전생과 내생을 믿을 수 있으면 모든 중생이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도 받아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 전생과 내생의 존재를 굳게 믿어야 한다. 이것도 믿지 못하면 모든 중생이 자기 어머니였다는 것을 믿고 보리심을 갖기가 어렵다. 지금은 전생과 내생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많다. 그러면서도 극락세계로 가고 싶어한다. 심지어는 대원만을 깨닫고 싶어한다. 그렇게 되기는 매우 어렵다. 윤회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아무리 많이 공부를 해보아야 겉핧기에 불과하다

 

정리하자면, 불교를 공부하려면 보리심을 내야 한다. 보리심을 내려면 먼저 모든 중생이 과거 나의 어머니였던 것을 알아야 한다. 티베트의 여러 고승들이 이 문제를 이야기할 때 수많은 교증과 이증을 들어 믿음과 이해를 갖게 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이 문제가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러분은 이 문제가 확실히 해결될 때까지 반복해서 관상하고 수행하라. 어느 순간이 되면 모든 중생이 어머니로 생각될 것이다. 그러나 이 수승한 법문을 열심히 수행하지 않은 사람은 이렇게 하기 힘들 것이다. 현실생활에서의 어머니를 생각해 보라. 그들은 자기 아이를 위해 모든 것을 내놓는다. 그러나 자기 적이나 타인을 그렇게 위하지는 못한다. 참으로 붌쌍하다. 만약 그들이 아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사랑하면 빨리 해탈을 얻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어머니들은 자기 아이에게만 관심이 있고, 타인을 보호하고 사랑할 생각은 털끝만큼도 하지 않는다.

 

 

이상의 이론은 매우 심오한 것이다. 대승불법을 전혀 모르고 막 불교를 공부하기 시작한 사람들은 이런 가르침을 들은 후에 신심도 생기지 않고 사견이 생길 수도 있다. 대승불교가 심오하고 지혜없는 사람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다. 그러나 여러분은 공성, 밀법, 대원만은 심오하고 정토법은 간단하다고 생각하지 말라. 정토법은 심오하다. 회의하지 않고 사견없이 진정으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을 찾기 힘들다. 정토법에 신심을 가져야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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