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7. 수월음관
도를 닦는 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외세가 밀물처럼 조선을 침략하던 19세기말. 백성들은 집 잃은 나그네처럼 처참한 생활로 연명했다. 이때 출현한 경허스님은 ‘조선의 등불’로 암울한 시대를 밝히며 수행의 길을 열었다. 경허스님 문하에는 수월.혜월.만공.한암 스님 등 걸출한 선지식들이 배출되어 법을 계승하고 불교의 생명을 이었다. 수월(水月, 1885~1928)스님의 행장을 일제강점기 <불교>를 비롯한 각종 자료와 증언으로 살펴보았다.
“도를 닦는 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경허스님 제자로 북장에서 가르침 전파
일심으로 천수주력 삼매일여 경지 도달
<사진설명>수월스님 진영. 여수 흥국사와 중국 수월정사 등에 봉안돼 있다.
○…설정스님(덕숭총림 수좌)이 혜암스님과 벽초스님에게 들은 이야기 가운데 수월스님의 출생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자식이 없어 노심초사하던 수월스님의 부친이 어느 날 나무하러 산에 갔다가 포熾“� 쫓기는 노루를 ‘솔굴’에 숨겨주었다. 뒤늦게 달려온 포수가 노루를 찾기에 엉뚱한 방향을 알려주어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이듬해 봄에 또 다시 산에 갔더니, 노루가 나타나 옷깃을 물어 잔설(殘雪) 있는 곳으로 인도했다. 노루를 따라가 보니 눈이 쌓여 있었는데, 유독 한곳만 녹아 있었다. 노루는 그곳을 발로 팠으며, 수월스님 부친은 그곳에 선조들의 묘를 썼다고 한다. 그 후 건강한 아이를 갖게 됐는데, 훗날 수월스님이었다.”
○…수월스님은 어려서 이집 저집을 전전하며 머슴살이를 했다. 나무를 하다 팔아 생활을 영위하던 수월스님은 장에 갈 때마다 한 스님이 눈에 들어왔다. 키가 장대한 스님의 모습이 너무 좋아 보여 그 스님을 따라 갔는데, 그곳이 서산 천장암이었다. 당시 천장암 주지는 경허스님의 속가 형님인 태허스님이었다.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선 수월스님은 매일 나무를 하고 짚신을 삼고 방아를 찧으며 정진했다.
○…천장암 아래 마을은 장요리(長要里)이다. 수월스님이 천장암에 머물 무렵 마을사람들은 몇 번이나 천장암으로 달려 왔다고 한다. 천장암에서 비추는 서광(瑞光)이 마치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불을 끄려고 달려와 보면 천장암은 아무 이상이 없고, 방광(放光)한 수월스님의 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수월스님의 수행력과 도력, 그리고 주민들에게 존경 받았던 상황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 몇 차례 그런 일이 있은 후로 천장암이 환하게 밝아지는 일이 생겨도 사람들은 달려가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아, 오늘도 수월스님이 방광하시는 구먼.”
○…어느 때인가 수덕사 정혜선원에서 수월스님이 며칠이나 보이지 않았다. 대중이 모두 나서 찾았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해우소에 가보니, 한쪽 구석에 수월스님이 있었다. 대중이 문을 열어도 몰랐다. 더구나 뒤를 닦는 자세로 구부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님 도대체 뭘 하고 계십니까.” 그제야 허리를 펴고 일어선 스님이 말했다. “그 놈의 쥐가 똥을 맛있게 먹고 있어서 구경했지.” 대중들은 황당하면서도 어떤 경지에 들어야 3일이나 그렇게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다. 수월스님 문하에서 정진했던 성암스님이 성수스님에게 들려준 일화이다.
○…산에서 나무를 한 짐 해온 뒤 공양간에서 불을 지폈다. 무쇠 솥을 걸어놓고 아궁이에 나무를 넣기 시작했다. 시뻘건 불이 금세 아궁이 속으로 들어갔고 무쇠 솥의 물은 끓기 시작했다. 수월스님은 또 다시 삼매에 들었다. 곁에 놓아둔 나무를 하나하나 아궁이에 넣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나무는 모두 타고 솥안에 있던 물도 모두 증발해 버렸다. 무쇠 솥도 벌겋게 닳아 올랐다. 그러나 수월스님은 삼매일여 경지에서 나오지 않았다. 다른 스님이 발견하지 못했으면 밤을 샜을지도 모를 일이다.
○…스님이 출가한 천장암에는 방앗간이 있었다.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방아를 돌려 곡식을 찧어 식량으로 삼았다. 그날도 방앗간에서 같은 일을 했다. 방아 공이가 올라가면 바닥에 움푹 패인 구멍으로 곡식을 넣었다. 그리고 다시 공이가 올라가면 알갱이를 뒤집거나, 껍질이 다 벗겨지면 꺼낸 후 다른 알갱이를 넣었다.
<사진설명>수월스님의 출가도량인 서산 천장암.
그 같은 일을 반복하던 스님이 삼매에 들었다. 공이가 올라가 곡식을 넣는 순간, 바닥의 구멍 안에 들어있는 알갱이들을 바라보면서 삼매에 든 것이다. 잠시 후면 공이가 바닥을 향해 떨어질 텐데……. 마침 태허스님이 이 모습을 보고, 큰 소리로 말했다. “수월아 뭐하는 거냐” 그제야 삼매에서 깨어났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북방으로 간 것은 스승 경허스님과 좀 더 가까워지려 했던 것도 한 이유로 보인다. 수월스님은 금강산 건봉사와 영변 석왕사에 머문 후 함경도 갑산에 있던 은사를 찾아 짚신을 만들어 올렸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경허스님은 수월스님을 만나지 않았다. 방문을 사이에 둔 은사 경허스님과 제자 수월스님의 만남은 오로지 수행정진을 본분사로 삼은 선지식들의 ‘법거량’이었을 뿐이다. 훗날 경허스님의 입적소식을 혜월.만공스님에게 전한 수월스님은 더욱 북방으로 올라가 독립운동에 나선 조선인을 후원하면서 정진했다.
○…만주에 머물 당시 수월스님은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나눠주는 것을 수행의 한 방편으로 삼았다. 나라를 잃은 채 험한 만주벌판을 유랑하던 조선인에게 당장 급한 것은 한 끼의 식량이고, 한 켤레의 짚신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월스님이 탁발을 하려고 마을에 들어서면 아무리 사나운 개도 짖지 않았다고 한다. 산길을 걸으면 노루와 사슴, 토끼 등 동물들이 거리낌 없이 스님 곁으로 다가 왔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여 “어떻게 하면 짐승들이 도망가지 않습니까”라고 물으면, 수월스님의 답은 간단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뉴, 악의(惡意)만 없으면 되는 것이여.” 만공스님은 생전에 “복덕과 도력을 누가 감히 감당하겠냐”면서 수월스님을 높이 기렸다고 한다.
○…수월스님이 간도에 머물 때 금오스님과 청담스님 등 남방의 수좌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구했다. 금오스님이 공부할 때의 일이다. 마을 주민 한명이 ‘아기 돼지’를 갖고 와서 불공을 드려달라고 청했다. 부처님 전에 돼지를 올리겠다는 요청에 난감해진 금오스님이 수월스님에게 그 같은 소식을 전했다. “어찌할까요.” 수월스님은 아무 표정 변화도 없이 “부처님 앞 탁자에 올려라”고 답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꽥 꽥”하고 울던 돼지는 부처님 탁자에 올라가더니, 얌전하게 있는 것이 아닌가. 수월스님은 직접 목탁을 들고 불공을 드렸다. 정성스럽게 축원하던 스님은 “돼지도 잘 크게 해주세요”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새끼 돼지가 무사히 마을로 돌아가 잘 성장했음은 물론이다.
○… 수월스님의 법문은 전해오는게 거의 없다. 다음은 구전을 통해 전하는 스님의 법문 가운데 일부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 별거 아녀. 이리 모으나 저리 모으나 무얼 허든지 마음만 모으면 되는 겨. …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게 되는 겨. 집에 있으면서 부모님을 열심히 모시면 효도라도 하는데, 집을 나와서 도를 깨치지 못하면 두 집에 죄를 짓는 게 아니고 뭐여. … 사람 몸 받아 참 나를 알지 못하고 참 나를 깨치지 못하면 이보다 더 큰 죄가 어디 있어. 이보다 더 큰 한(恨)이 어딨어.”
○…입적할 시기가 도래했음을 알게 된 스님은 당신 스스로 준비한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놓았다고 한다. 짚신 하나 머리에 이고, 불 속으로 들어간 자화장(自火葬)이었다. 연기는 향으로 변하여 널리 퍼졌고, 일주일간이나 향훈(香薰)이 계속됐다고 한다. 또한 일주일간 방광이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수월스님의 입적에는 이설(異說)도 있다. 말이 아닌 행동으로 불법을 실천했던 수월스님의 삶은 ‘지금의 한국불교’에도 유효한 하나의 경책이다.
서산=이성수 기자
■ 행장 ■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 출신으로 알려졌다. 1885년 태어난 스님은 속성 조차 정확하지 않다. 전(田)씨라고 알려졌지만, 일부에서는 전(全)씨, 김(金)씨, 제(祭)씨, 최(崔)씨라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어릴적 부모님이 세상을 떠난 스님은 고아가 되어 머슴살이를 하며 연명했다. 천성이 착하고 성실한 스님은 부지런하게 일하여 주위의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머슴살이로 인해 20세 될 때까지 전혀 글을 배우지 못했다.
서산 천장암으로 출가한 스님은 처음에는 공양주와 나무하는 일을 했다.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소임에 전념했던 스님은 천수대비주를 알게 된 후 일념으로 염송했다. 행주좌와 어느 순간에도 천수 주력을 놓지 않은 스님은 구경(究竟)에 이르렀지만, 당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수행에만 몰두했다.
공양주 나무꾼 ‘수행’
묵언스님에 법맥 계승
경허스님의 인가를 받은 수월스님은 금강산과 묘향산 등에 몸을 숨긴 채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묵묵히 실천했다. 경허스님 열반후 더욱 북방으로 올라간 수월스님은 60세가 되어가는 노구에도 한 농가의 일꾼으로 들어가 지냈다. 품삯으로 주먹밥을 만들고 짚신을 삼아 ‘무주상 보시’를 실천했다.
말년에 만주 송림산 아래에 화엄사라는 ‘작은 절’을 짓고 밭을 일구며 지냈다. 화엄사에서 지내길 8년. 스님은 점심공양을 마친 후 목욕재계하고 새 옷과 새짚신을 머리에 얹은 채 조용히 열반에 들었다. 호랑이와 새, 산천초목이 모두 울었다고 한다. 이때가 1928년이다. 수월스님의 법은 묵언스님을 거쳐 도천.명선스님 등으로 이어졌다.
[출처 : 불교신문 2454호/ 2008년 8월27일자]
출처: [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27. 수월음관 - 도를 닦는 다는 것은 마음을 모으는 거여https://blog.daum.net/ksdsang0924/9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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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김성우(재경)ㅡ비움과소통 대표 - 공겁인空劫人, 백봉... : 카카오스토리
https://story.kakao.com/_0TD4u/iRQfgK6HP9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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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스님의 천수주력
수월스님은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어머니가 모두 세 살 안에 돌아가셔서 외삼촌 집에 의지하여 살았습니다.
모두가 가난했던 조선 말기에 내 가족들도 못 먹여 살리는 형편이었으므로 외삼촌은 남의 눈도 있고 하여 생질을 데려다 놓았지만, 부담도 되고 힘도 들어 머슴처럼 부렸습니다. 20세가 넘어가면서 스님은 동네 사람들이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결혼을 하여 아이를 업고 다니는 것을 보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사느니 산골로 들어가 중노릇을 하며 살리라.’
결심을 한 그는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출가하여 성원(性圓)스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배우지 못한데다 머리까지 둔하여 불경을 배워도 쉽게 이해하지를 못했습니다.
성원스님이 예불문을 일러주면서 ‘따라 읽어라’고 하면 따라 읽었지만, ‘혼자서 읽어보라’고 하면 한 구절도 못 외우는 것이었습니다. 몇 번을 그렇게 해보다가 은사 성원스님은 글을 가르치는 것을 포기하고 땔나무를 해오는 부목(負木), 밥을 짓는 공양주(供養主) 등의 소임을 3년 동안 맡겼습니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수월스님이 불공할 때 올릴 마지를 지어 법당으로 갔을 때, 마침 부전스님(불공을 주관하는 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송(頌)하고 있었습니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 사다바야 …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사바하.”
스님은 이를 한 번 듣고 모두 외울 수 있었습니다. 그토록 머리가 좋지 않다고 구박을 받았는데, 총 442글자의 신묘장구대다라니가 저절로 외워진 것입니다. 이후 스님은 나무를 하러 가거나 밥을 짓거나 마냥 신묘장구대다라니를 흥얼거리며 다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은사 성원스님이 법당에서 불공을 드리다가 마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당연히 제시간에 와야 할 마지는 한참이 지나도 오지 않고 밥 타는 냄새만 절 안에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부엌으로 찾아간 성원스님은 전혀 예상 밖의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수월스님이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면서 계속 아궁이에 장작을 넣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밥이 까맣게 탄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솥이 벌겋게 달아 곧 불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속에서 대다라니를 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본 성원스님은 수월스님에게 방을 하나 내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오늘부터 너에게 이 방을 줄 터이니, 마음껏 대다라니를 외워 보아라. 배가 고프면 나와서 밥을 먹고 잠이 오면 마음대로 자거라. 나무하고 밥 짓는 일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수월스님은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가마니 하나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서 문짝에 달았습니다. 빛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신묘장구대다라니를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방 밖으로는 밤낮없이 대다라니를 외우는 소리가 울려 나왔을 뿐, 물 한 모금 마시러 나오는 일도 없고 화장실 가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8일째 새벽, 성원스님이 예불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려는데 그 소리가 딱 그쳤습니다. 그때 수월스님이 방을 뛰쳐나오며 소리쳤습니다.
“스님, 스님! 이겼어요, 이겼어요.”
“뭐라고 했느냐?”
“스님, 제가 이겼어요. 잠 귀신이 ‘너한테 붙어 있다가는 본전 못 찾겠다’고 하면서 멀리 가버렸어요. 잠 귀신이 도망갔어요. 스님, 제가 이겼어요.”
은사스님은 수월스님이 기도를 하다가 미친 것이라 생각하고 호된 꾸중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수월스님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관세음보살이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나는 그걸 모른다.”
“어딜 가야 답을 들을 수 있습니까?”
“동학사에 가면 경허(鏡虛) 사숙님이 계신다. 그 스님께 여쭈어 보아라.”
“가도 됩니까?”
“도시락은 내가 싸줄 테니 짚신은 네가 삼아라.”
수월스님은 서산의 천장암에서 동학사까지 걸어가 경허스님의 방문을 열고는 여쭈었습니다.
“관세음보살께서 합장을 하고 서 있는 뜻이 무엇입니까?”
경허스님이 답을 해주시는데 뜻이 서로 상통하였고, 거기에서 수월스님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수월스님은 천수삼매(千手三昧)를 증득하여 무명(無明)을 깨뜨리고 깨달음을 얻었을 뿐 아니라, 불망념지(不忘念智)를 증득하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는 글을 몰라서 경전을 읽지도 못하고 신도들의 축원도 쓰지 못하였지만, 불망념지를 이룬 후부터는 어떤 경전을 놓고 뜻을 물어도 막힘이 없게 되었으며, 수백 명의 축원자 이름도 귀로 한 번 들으면 불공을 드릴 때 하나도 빠짐없이 외웠다고 합니다.
그리고 천수삼매를 얻은 뒤에도 참선정진을 꾸준히 계속하였는데, ‘잠을 쫓았다’는 그 말씀대로 일평생 잠을 자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년에는 백두산 간도 지방 등에서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짚신과 음식을 제공하며 보살행을 실천했던 수월스님! 오늘날까지 자비보살이요 숨은 도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수월스님의 도력은 신묘장구대다라니 기도에서 비롯되었던 것입니다.
[출처] 수월스님의 천수주력|작성자 미타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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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월 스님 : '북녘의 상현달' - 부처님의 길을 따라 - 지리산 천년 3암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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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선지식의 천진면목] 13. 혜월혜명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근세 한국불교 중흥의 씨앗을 뿌린 경허스님 법제자인 혜월혜명(慧月慧明,1862~1937)스님은 무심도인(無心道人)이다. 덕숭산에서 남방으로 내려와 부산 백양산 선암사에서 대중들에게 깨달음의 향기를 전했던 스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무심도인으로 깨달음 향기 전한 ‘지혜의 달’
경허스님 상수제자 한국불교 선맥 중흥
어려운 이웃에 아낌없이 베푼 수행자
<사진설명>부산 원효정사에 모셔진 혜월스님 사진. 진영은 부산 해운정사에도 모셔져 있다. 출처=부산 원효정사
○…일제 강점기. 부산 선암사에는 많은 대중이 모여 들었다. ‘남방의 도인’인 혜월스님의 가르침을 받기 위해서였다. 선농일치(禪農一致)의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따르는 이유도 있었지만, 농사를 짓지 않고는 대중 외호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선암사에서는 소를 키워 농사일을 거들도록 했다. 지금처럼 농사를 기계로 짓지 않던 시절에 소는 가장 큰 재산이었다. 소에게 ‘우순(于順)이’라는 이름까지 지어준 혜월스님은 “너무 일만 시켜 미안하다. 다음 생에는 사람 몸 받아라. 농사철만 지내면 편히 쉬도록 해줄게”라며 아꼈다고 한다.
○…어느 날 고봉(古峰)스님을 비롯한 수좌(首座)들이 양산시장에 가서 소를 팔아 버렸다.
절로 돌아온 수좌들은 원주에게 “대중공양 때 맛있는 반찬을 해 달라”며 소판 돈을 건넸다고 한다. 시장에 다녀온 혜월스님이 소를 찾았지만 있을 리가 없었다. 다음날 아침 공양을 마치고 대중공사가 벌어졌다. 아무리 천진불이라지만 소를 팔아버렸으니 화를 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혜월스님은 꾸중대신 “살던 소 갖고 오너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이때 소를 판 ‘주모자’인 고봉스님이 앞으로 나와 네발로 기어 다니며 “음매 음매”라고 소 울음을 냈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내 소는 애비소요, 애미소이지, 이러한 송아지가 아니다”라고 했다. 혜월스님 전법제자 운봉(雲峰)스님의 손법제자 진제스님(조계종 원로의원.부산 해운정사 조실)은 “깨달음을 찾는 납자들의 세계에서는 소를 판 ‘엄청난 일’도 공부의 방편”이라고 말했다.
○…“스님, 옷 좀 우리에게 보시하십쇼.” 혜월스님이 마을에 나타나면 동네 거지들이 뒤를 따라 다녔다. 마음 좋기로 소문난 스님이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기 때문이다. 옷을 달라면 옷을 주고, 먹을 것을 달라면 먹을 것을 주니, 거지들에게 스님은 부처님이나 마찬가지였다. 승복을 벗어준 스님은 더럽고 낡은 거지 옷으로 갈아입고 선암사로 돌아오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신도들이 스님 옷 대주기 바빴다”는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온다. 일제가 수탈을 일삼던 시기로 먹고 사는 일이 너무 어려워 많은 사람이 유랑하던 시절, 중생의 아픔을 보듬어 준 스님은 ‘보살’이었다.
○…절에 재(齋)가 들어오면 상좌나 신도와 함께 장을 보러갔다. 하지만 장을 온전하게 보고 오는 일은 드물었다. 어느 날 시장에서 콩나물 한독(광주리)을 샀다. 대중들이 많았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런데 옆에서 장사하는 또 다른 상인들이 “시님. 우리 콩나물도 사 주세요”라고 하면, 스님은 주저 없이 “그래요. 그럼 주시오”라며 모두 샀다. 한동안 선암사 대중들은 콩나물을 재료로 한 반찬과 국을 ‘질리도록’ 먹어야 했다.
○…스님은 차별을 두지 않고 대중을 맞이했다. 출.재가를 분별하지 않았고, 재산.명예.지위도 스님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깨달음을 이뤄야 할 수행자이며 중생일 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누구든 절에 왔다 돌아가면 문밖 까지 나와 공손하게 합장하며 배웅했다고 한다. 부산 원효정사 회주 법산스님은 “보살행을 하셨지만 도인이라는 상(相)을 내지 않으셨던 분”이라고 말했다.
○…혜월스님은 법을 전해준 경허(鏡虛)스님이 북방에서 입적해 마을 뒷산에 법구를 모셨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수월(水月)스님이 만공(滿空)스님에게 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경허스님 입적은 1912년 4월이었으며, 소식이 도착한 것은 이듬해 여름으로 추정된다. 혜월스님은 철우(鐵牛).운봉(雲峰).운암(雲庵)스님 등 선암사 대중 5~6명과 함께 갑산으로 향했다.
만공스님 일행과 합류한 혜월스님은 경허스님 법구가 모셔진 산에 도착했다. 찌는 듯한 무더위로 법구 수습에 선뜻 나서기 어려웠다. 이때 혜월스님은 “내가 하지”라며 법구를 모셨다. 철우스님 법어집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혜월선사는 철우스님을 앞세우고 다른 스님 몇 분과 수덕사의 만공스님을 모시고 가서 경허선사의 무덤을 파 화장을 하게 되었다. 경허선사의 뼈는 장대한 황골이었고 장례 중에 혜월선사는 그냥 말없이 눈물만 흘리셨는데, 철우스님은 그날 혜월선사의 눈물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혜월스님 열반 상황에 대해선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백양산에서 솔방울을 주워 자루에 담고 내려오는 길에 산기슭에서 입적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솔방울을 주워 올 때면 백양산 중턱 길에서 한 번씩 쉬었는데, 그곳서 입적했다는 것이다.
1937년 2월 어느 날. 그날도 스님은 평소처럼 절로 돌아오고 있었다. 늘 쉬어가던 곳에서 한숨 돌린 스님은 백양산과 마을을 한번 바라본 후 자리에서 반쯤 일어나는 자세를 취하다 원적에 들었다. 가고 옴이 따로 없는 선지식의 열반을 혜월스님이 보여준 것만은 사실이다. 길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처럼 혜월스님은 집착하지 않는 삶의 가르침을 마지막 순간까지 보여주었다.
○…혜월스님이 공양을 마치고 양치하는데 치사리(齒舍利)가 나와 방광(放光)을 했다고 한다. 이를 본 혜월스님은 바닥에 떨어진 치사리를 발로 깔아뭉개면서 말했다. “에이, 고약한 놈.” 스님의 유훈에 따라 법구는 화장후 사리를 수습하지 않고 백양산으로 돌아갔다. 부도와 비를 세우지 않은 것도 스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진제스님은 “입적에 들기 전 혜월선사는 백양산에 올라 떨어진 솔방울을 주워 불 때는 일로 소일 하셨다”면서 “일생을 무심도인의 경지에서 수행정진하신 선지식”이라고 했다.
■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
<사진설명>혜월스님이 운봉스님에게 내린 전법게.
혜월스님의 법맥은 운봉스님을 통해 향곡.진제스님에게 계승됐다. 또한 철우스님에게도 게송을 지어주었다. 절도 있으면서도 자유로운 혜월스님의 필체는 평생 무심도인으로 자유 자재했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1902년 쓰인 운봉스님의 전법게 한글풀이는 진제스님 법어집 <고담녹월(古潭月)>을 인용했다. 한글풀이는 다음과 같다.
“운봉 성수에게 부치노니,
일체의 유위법은 본래 진실 된 모양이 없으니
저 모양 가운데 모양이 없으면 곧 이름하여 견성이라 함이라.
세존응화 2951년 4월 경허문인 혜월 설함”
付雲峰性粹(부운봉성수)
一切有爲法(일체유의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若無相(어상약무상)
卽名爲見性(즉명위견성)
世尊應化(세존응화) 二九五一年(2951년) 四月(사월)
鏡虛門人(경허문인) 慧月(혜월) 설(說)
■ 행장 ■
<사진설명>부산 선암사 전경.
천장암 근처 바위굴서
짚신 만들다 깨달음 성취
1862년 6월19일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신씨(申氏)이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13세에 덕숭산 정혜사로 입산해, 15세에 혜안(慧眼)스님을 은사로 출가사문이 됐다.
관음정진을 하던 혜월스님은 24세 되던 해에 경허스님을 만나면서 새롭게 발심 했다. 얼마나 열심히 수행 정진하는지 경허스님이 “혜명(혜월스님의 법명)이의 화두일념은 마치 새끼 잃은 어미 소가 새끼소를 생각하는 것과 같고, 3대 독자를 잃은 홀어머니가 죽은 아들 생각하듯 하는 구나”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서산 천장암 근처 바위굴에서 7일간 정진하며 정각(正覺)을 성취했다. 정진 6일째 되는 날 경허스님이 “내일은 길을 떠나야 하니 짚세기나 하나 지어주게”라며 짚을 굴에 넣어주었다. 스승의 뜻에 따라 짚신 한 켤레를 삼아놓고, 다른 짚신을 틀에 넣은 후 ‘탁’하고 두드리는 망치소리에 깨달음을 이루었다.
이 같은 일을 전해들은 경허스님은 인가(印可)를 하고 혜월이라는 법호를 지어 주었다. 경허스님이 혜월스님에게 법을 전하며 한 게송이다.
“了知一切法(요지일체법) 自性無所有(자성무소유)
如是解法性(여시해법성) 卽見盧舍那(즉견노사나)
依世諦倒提唱(의세제도제창) 無生印靑山脚(무생인청산각)
一關以相塗糊(일관이상도호)”
우리말 풀이는 이렇다.
“일체법을 요달해 알 것 같으면,
자성에는 있는 바가 없는 것.
이같이 법성을 깨쳐 알면 곧 노사나불을 보리라.
세상 법에 의지해서 그릇 제창하여
문자와 도장이 없는 도리에 청산을 새겼으며
고정된 진리의 상에 풀을 발라 버림이로다.”
깨달음을 이룬 후 혜월스님은 27년간 덕숭산에 머물다 51세(1913년 무렵)에 남방으로 주석처를 옮겨 정진했다. 양산 미타암과 내원암 등 선방을 유력하던 스님은 부산 선암사에 머물며 납자들을 지도했다.
1937년 어느 날 가고 옴이 없는 경지를 보여주며 원적에 들었다. 세수 75세. 법납은 63세였다. 스님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는 운봉(雲峰).호봉(虎峰).운암(雲庵).철우(鐵牛) 스님 등이 있다. 부산 안양암 성공(性空)스님도 10년간 혜월스님을 시봉했다.
부산=이성수 기자
■ 열반송 ■
일체의 함이 있는 법은
본래 진실한 상이 없도다
상에서 상 없음을 안다면
성품을 보았다고 하느니
一切有爲法(일체유위법) 本無眞實相(본무진실상)
於相義無相(어상의무상) 卽鳴爲見性(즉명위견성)
[출처 : 불교신문 2418호/ 2008년 4월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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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6조 혜월 혜명 http://domountain.tistory.com/17957596
혜월(慧月) 스님(1861~1937) https://blog.naver.com/yujmmm/222774354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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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국내 최대 규모의 관음도량 구인사/대한불교천태종의 총본산 사찰/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수행하는 주경야선(晝耕夜禪)/십선계를 받는 비구니들/2001년 https://youtu.be/hYAiUegNGr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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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세계 최고의 감마파 [명상가] /밍규르 린포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 https://youtu.be/KOZtX28qJeo
5 simple tips about meditation, with Yongey Mingyur Rinpoche https://youtu.be/3SnZFQktCaw
바르게 바라 보기 위한 명상, 명상 웹컨퍼런스 ‘티베트 불교 수행’ - 욘게이밍규르린포체https://youtu.be/QdsLbf6NsjY
--->(*참고: )
마하무드라 법문->번뇌의 '근원'을 보고인식함//그 판단과분별의 '근원'에 그대로깨어서있고, 그에대한 어떤'집착이나욕망'이 붙지않게되면/그경험에'집착'하는순간, 세간의법되어/-캄튤린포체https://ntassabas.tistory.com/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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