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불/정토공부2-*소동파의 사례

[隔陰之迷] 무정설법 깨친 소동파가 말년에 염불하고서도~ -관련2

아미연(阿彌蓮) 2019. 9. 11. 21:32

좀더 자세히 자료들을 조사해보니...
무정설법을 깨친 소동파(1036~1101. 송나라)가 
말년에 왕생하려고 매우 열심히 염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시와 글짓기를 좋아하는 문인의 습기 집착이 강해서 장애하여 소동파의 생에서는 왕생을 못했고, 
그후 400~500 년 뒤에야 원굉도(1568~1610. 명나라)라는 사람으로 또 태어나서
'또 유명한 시인 문인으로 살았고'  허약한 몸과 병때문에 일찍이 스스로 관직을 버리고
세상사에서 떨어져 한적한 삶을 즐기면서 서방왕생을 바라고 염불행을 열심히 하였고, 결국 왕생하게 되었답니다. 

-출처: 책 [중국불교의 거사들] -저자 김진무, 운주사

한번을 그르쳐 400~500년 뒤라... 그래도 400~500년 뒤에라도 왕생하셨다니 부럽습니다.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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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 Ssu Tungp'o , 蘇東坡

출생 1036. 12. 19 사망 1101. 7. 28 국적 중국, ()

본명은 소식(蘇軾), 자는 자첨(子瞻).

동파는 그의 호로 동파거사(東坡居士)에서 따온 별칭이다.

소동파는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로 황주로 유형되었는데, 이 때 농사 짓던 땅을 동쪽 언덕이라는 뜻의 '동파'로 이름짓고 스스로 호를 삼았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과 함께 '3'(三蘇)라고 일컬어지며, 이들은 모두 당송8대가(唐宋八大家)에 속한다(소순, 소철).

소동파는 북송 인종(仁宗) 때 메이산[眉山지금의 쓰촨 성(四川省)에 있음]에서 태어났다.

 

8세 때부터 메이산의 도인(道人)이라 불리던 장역간(張易簡)의 문하에서 공부를 시작했는데, 그 영향을 받아 도가(道家), 특히 장자(莊子)의 제물철학(齊物哲學)을 접하게 되었다. 1056년 그의 아버지 소순은 두 형제를 데리고 상경하여 이들의 시를 구양수(歐陽修)에게 보여주고 격찬을 받았다. 이들 형제는 그해 가을 진사(進士)가 되었고 이듬해 예부(禮部)에서 주관하는 시험에 나란히 급제했지만 모친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갔다.

1060년 복상(服喪)을 마치고 수도인 카이펑[開封]으로 돌아온 소동파는 관리임용 특별시험인 제과(制科)에 동생과 함께 급제했다. 이어 봉상부(鳳翔府지금의 산시 성[陝西省]에 있음)의 첨서판관(簽書判官)이 되어 수도에 남게 된 동생과 헤어져 임지로 떠났다.

 

그는 신법으로 인해 고생하는 농민들의 생활상을 시로써 묘사하고는 했다. 후저우 지사(知事)로 있던 1079년 조정의 정치를 비방하는 내용의 시를 썼다는 죄목으로 어사대(御史臺)에 체포되어 수도로 호송되었다. 이때 어사들의 심문과 소동파의 변명을 담은 기록이 오대시안 烏臺詩案에 남겨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다행히 사형을 면한 그는 100일간의 옥살이를 마치고 황주(黃州지금의 후베이 성[湖北省] 황강 현[黃岡縣]) 단련부사(團練副使)로 좌천되었다. 정치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황주에 거주할 의무가 지워진 일종의 유형(流刑)이었다.

황주에서의 생활은 매우 비참했다. 부인은 양잠을 했고, 그는 본래 병영이었던 땅을 빌려 농사를 지었다. 이 땅을 동파(동쪽 언덕)라 이름짓고 스스로를 동파거사라고 칭했는데, 그의 호는 여기서 유래한다. 그 유명한 적벽부 赤壁賦가 지어진 것도 이곳에서였다.

 

1085년 신종이 죽고 철종(哲宗)이 즉위하자 신종의 어머니이며 철종의 할머니인 선인태황후(宣仁太皇后)가 섭정을 시작했다.

그녀는 뤄양[洛陽]에 운둔해 있던 사마광(司馬光)을 불러들여 왕안석 일파가 만든 신법들을 폐지했다. 이때 소동파도 다시 발탁되어 예부랑중(禮部郞中)을 시작으로 중서사인(中書舍人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 등의 요직에 올랐다.

 

사마광이 죽고난 후 당쟁이 시작되었고, 선인황태후마저 사망하자 철종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다. 철종은 신법들을 다시 부활시켰으며, 소동파는 다시 좌천되어 혜주사마(惠州司馬)로 임명되었다. 그에 대한 탄압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그를 질시하는 정치인들로 인해 하이난 섬[海南島]으로 유배되어 그곳에 주로 거주하던 리족[黎族]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다.

 

철종의 죽음으로 휘종(徽宗)이 즉위하면서 제거옥국관(提擧玉局觀)이라는 명예직에 봉해져 상경하던 도중, 큰 병을 얻어 창저우[常州]에서 66세의 생을 마감했다.

 

출처: 소동파 Ssu Tungp'o , 蘇東坡 다음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12s2052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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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굉도

1568년 태어남. 1610년 죽음. 명나라의 시. 징저우시 출신.

원굉도(袁宏道, 1568~ 1610)중국 명말의 문인이다.

자는 중랑(中郞), 호는 석공(石公).

후베이(湖北) 공안(公安) 사람. 만력(萬曆) 20(1592)의 진사.

형인 종도(宗道), 아우인 중도(中道)와 함께 공안파로 불린다.......'성령설'이라고 불리는 그의 문학론은 후세에까지 영향이 컸고, 이것은 그들 형제의 스승인 이탁오(李卓吾, 양명학 좌파)의 반전통주의 사상의 문학상의 반영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스승의 반체제적인 사상은 계승되지 않았고, 문인으로서의 취향이 강하고 시보다도 산문에서 청신하고 개성적인 경지를 개척하고 있다.

 

출처: 원굉도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https://ko.wikipedia.org/wiki/원굉도

 

袁宏道원굉도는 蘇軾(소동파) 시문에 나타나는 閑適의 삶을 계승하여 인생의 목표로 삼았고, 이에 따라 원굉도의 시문은 佛敎를 애호하고 꽃구경을 좋아하며 친구들과 유람을 다니는 소식(소동파)의 취향을 반영하게 되었다.

다만 원굉도의 한적은 스스로 관직을 버림으로써 체현되었다는 점에서, 소식(소동파)의 그것과 차이가 있었다. 황주 유배시기의 소식(소동파)한적의 삶을 구현하면서도 여전히 상심과 좌절을 느낀 반면, 은거 기간의 원굉도는 그로 인한 행복과 쾌락을 온전히 누릴 수 있었다.

 

출처: 취향의 계승과 발현 원굉도(袁宏道)의 소식(蘇軾:소동파) 수용과 그 의미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36608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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