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불/정토공부2-*소동파의 사례

보살도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악업중생도 극락왕생할 수 있는 도리/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모음***

아미연(阿彌蓮) 2019. 12. 4. 18:14

(원본:http://cafe.daum.net/MRSB/RCqQ/103)

보살도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악업중생도 극락왕생할 수 있는 도리/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모음

*책: [의심 끊고 염불하세]-저자 김지수, 불광출판사

*출처: 보적념불당 (다음블로그)寶積念佛堂 (tistory.com) 

          천인대동전당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lotusbud44/221456324097

 

 

***보살도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보살도 극락 왕생을 발원하는 까닭

 

첫 번째 의문

모든 불보살님들께서는 대자대비를 본업(本業)으로 삼으신다는데, 만약 중생들을 제도하시고자 한다면, 정말로 오직 삼계(三界)에 몸을 나토시어 오탁악세(五濁惡世)와 삼악도(三惡途) 가운데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셔야 마땅할 줄 압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스스로 자기 생명만 평안히 수행하며, 중생을 내버리고 떠나시려 한단 말입니까? 이는 대자대비가 없는 것이며,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하는 것이니, 보살이 추구하는 보리도(菩提道)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답변

보살에도 두 종류가 있소. 하나는 오랫동안 보살도(菩薩道)를 닦고 행하여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은 분으로서, 이 분들은 진실로 자기 책임(사명, 원력)을 감당할 수 있소. 다른 하나는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분들과 이제 막 보살의 마음[初發心]을 낸 범부들이오.

두 번째의 범부 보살(凡夫菩薩)들은 모름지기 어느 때고 부처님을 떠나지 않아야 한다오. 그렇게 (항상 부처님 곁에 머물면서) 무생법인의 법력[忍力]을 성취하여야만, 비로소 삼계 안에 몸을 나토어 오탁악세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래서 『지도론(智度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와 업장에 얽매인 범부 중생이 제 아무리 큰 자비심을 지녔더라도, 오탁악세에 태어나길 발원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왜 그런가 하면, 오탁악세는 번뇌가 매우 강렬하여, 스스로 무생법인의 법력을 지니지 못한 자는 마음이 바깥(사물) 경계에 따라 뱅뱅 돌기(흔들리기) 때문이다.”

자기 마음이 빛과 소리에 얽매여(물들어) 스스로 삼악도에 떨어질 판인데, 어떻게 다른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가령 인간 세상에 태어난다고 할지라도, 성인의 도[聖道]를 얻기가 어렵소. 더러 보시나 지계 등의 수행으로 복을 지어 인간 세상에 태어나 국왕이나 대신이 된다고 합시다. 전생의 복덕으로 자유자재로이 부귀영화를 누리다 보면, 설령 훌륭한 선지식을 만난다고 할지라도 그 말씀(가르침)을 믿고 따르려 하지 않고, 그저 탐착과 미혹에 휩싸여 안일하게 방종하면서 온갖 죄악을 두루 짓게 마련이오. 이러한 악업을 짊어지고 한번 삼악도에 들어가면, 한량없는 겁[無量劫]이 지나야만 비로소 지옥에서 빠져나올 수 있소. 그것도 몹시 가난하고 천한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고, 만약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면 또 다시 지옥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이와 같이 생사 륜회를 되풀이하여 오늘에 이르렀으니, 지금 사람이란 사람은 죄다 이 모양 이 꼴이라오. 이것을 일컬어 수행하기 어려운 길[難行道]이라고 부르오.

그래서 『유마경(維摩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자기 질병도 구제할 수 없는데, (하물며) 다른 병든 사람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自疾不能救, 而能救諸疾人].”

또 『지도론(智度論)』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예컨대 두 사람이 똑같이 각기 자기 가족이 물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았다고 하자. 한 사람은 감정이 다급하여 곧장 물 속에 뛰어들어 구해 내려 했으나, 적절한 방편의 힘이 없어 물에 빠진 사람이나 구하려는 사람 모두 그만 다 함께 익사하고 말았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훌륭한 방편을 생각해 내고, 곧장 가서 배나 뗏목(또는 밧줄이나 튜브)을 가져다가 그를 무사히 건져 올려 마침내 모두 다 익사의 고비를 벗어났다.”

막 보리심을 낸 보살도 또한 이와 같은 리치라오.

이처럼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한 보살은 스스로 중생을 구제할 수가 없소. 이러한 까닭에 항상 모름지기 부처님을 가까이 해야 한다오.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라야 바야흐로 중생을 구제할 수 있소. 마치 위의 비유에서 배를 얻은 사람처럼 말이오.

또 논(論: 智度論인 듯)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비유하자면 갓난아기가 어머니 품을 떠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에 어머니 품을 벗어난다면, 더러 깊은 구덩이나 우물에 빠지거나 또는 젖에 굶주려 죽을 것이다. 또한 비유하자면 새끼 새가 날개에 깃털이 완전히 자라나지 않았을 때에는, 단지 나무에 의지하여 가지 사이나 옮겨 다닐 수 있을 뿐, 멀리 공중으로 날아가지는 못하는 것과도 같다. 날개에 깃털이 온전히 자라나야, 비로소 허공에 날아올라 걸림없이 자유자재로이 비행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 범부 중생은 스스로 힘이 없으므로, 오직 아미타불만을 일념으로 생각하고 염송하여 삼매(三昧)를 이루도록 해야 하오. 그렇게 청정한 도업이 성취되기에, 림종에 한 생각 추스려 결정코 극락 왕생하여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 다시 삼계에 되돌아와 무생법인의 큰 배[船]를 타고서 생사고해의 중생들을 구제하며, 자기 뜻[발원]대로 자유자재로이 부처님 사업(事業)을 널리 펼치는 거라오.

그래서 또 논(論: 智度論인 듯)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지옥에 돌아다니며 노닐고 싶은 자는 (먼저) 저 나라[彼國: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무생법인을 얻은 다음에, 다시 생사 륜회의 나라[生死國]에 되돌아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교화하게 된다.”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보살들도 극락 정토에 왕생하길 발원하노니, 진실로 그 가르침을 잘 알고 따르길 기원하오. 그래서 룡수(龍樹) 보살님의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서 정토념불 법문을 쉽게 수행하는 길[易行道]이라고 이름 붙였다오.

【옮긴이 보충 소감: 새벽·낮·저녁 하루 세 때 부처님 앞에서 경건히 독송하는 예불문의 맨 끝에, 원공법계제중생 자타일시성불도(願共法界諸衆生 自他一時成佛道)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문맥상 흔히들 시방 법계 모든 중생들이 나와 남 할 것 없이 한꺼번에(동시에) 부처님 도를 이루길 발원합니다라는 발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게 보통입니다. 그런데 뒷 구절만 따로 떼어 음미해 본다면, 한문의 중의(重義)적인 특성상 또 다른 의미까지 함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는 수행의 과정 및 결과의 차원에서, 공부가 무르익어 나와 남이 하나가 될 때 부처님 도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즉,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이 전혀 없어진 경지에 이르러, 물아일체(物我一體) 또는 천인합일(天人合一)이 되는 것이 궁극적인 깨달음의 도라는 해석입니다.

다른 하나는 수행의 방법 차원에서, 자력(自力)과 타력(他力: 불보살님의 가피력)이 하나가 될 때 부처님 도가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바로 극락 왕생을 발원하며 념불하는 정토 법문이 가장 손쉬운 수행의 길[易行道]이라는 의미입니다.

물론 근본 목표는 나와 남[중생]이 모두 동시에 부처님 도를 이루자는 대승적인 발원에 두어야 하겠지요.

우리 불교가 지금까지 수행이나 중생 교화에서 부진과 쇠약을 면치 못하는 주 요인도, 어쩌면 부처님 가피력을 동시에 구하는 념불 법문을 무시 또는 경시하고, 오로지 자기 마음 하나 닦아 지혜를 밝힌다는 참선(특히 화두선) 수행에 치우친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면에서 자기 반성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주체성을 부인하고 창조주에게 노예처럼 종속되는 타력 신앙이라고 불교인들이 비판·폄하하곤 하는데, 불교처럼 불성 평등의 기본정신에서 자력과 타력을 하나로 결합시켜 수행한다면, 그 효과(복덕과 지혜)가 얼마나 크게 증폭되겠습니까? 우리가 부처님을 생각하고 념불하는 타력 수행의 측면을 하찮게 여기는 생각이, 혹시라도 중생의 제 잘난 교만심의 발로는 아닐까요? 중국에도 도가 한 자 높아지면 마장은 한 길이나 높아진다[道高一尺, 魔高一丈]는 속담이 있는데, 우리 불교 수행인도 자칫 그런 어리석음을 범하는 건 아닌지요?】

 

 

범부중생도 극락왕생하여 불퇴전에 이르는 까닭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범부 중생도 극락 왕생하여 불퇴전에 이르는 까닭

 

다섯 번째 의문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은 죄악의 업장이 몹시 두텁고 무거워, 한없는 번뇌망상을 터럭 끝만큼도 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서방 정토는 시방 삼계를 벗어나 있다고 하던데,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이 어떻게 왕생할 수 있겠습니까?

 

답변

두 가지 연분[緣]이 있으니, 첫째는 자력(自力: 자기 힘)이고, 둘째는 타력(他力: 남의 힘)이오. 자력이라 함은, 자기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것이니, 진실로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소. 그런 까닭에 『영락경(瓔珞經)』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이 불·법·승 삼보도 모르고 선악의 인과응보도 알지 못하다가, 처음으로 보리심(菩提心)을 낸 때부터 믿음을 바탕으로 부처님 가르침 안에 머물면서, 계률을 근본으로 삼고 보살계를 받아 지닌 다음, 한 생 한 생 계속 이어가며 계률을 지킴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수행해 나간다. 그렇게 하기를 1겁(劫), 2겁, 3겁 계속해 나가야 비로소 초발심주(初發心住)에 이른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10신(信) 10바라밀(波羅蜜) 등을 꾸준히 닦아 가면서, 한량없는 발원 수행[行願]을 잠시도 끊임없이 계속하여 1만 겁(劫)이 꽉 차야, 바야흐로 제6 정심주(正心住)에 이르게 된다. 만약 여기서 더 한층 정진하여 제7 불퇴주(不退住)에 이를 것 같으면, 여기가 곧 종성위(種性位)이다.”

이상은 자력 수행의 대강을 말씀하신 것인데, 끝내 서방 정토에는 왕생하지 못하는 것이오.

반면 타력(수행)이라 함은, 아미타부처님께서 념불(念佛)하는 중생들을 모두 대자대비의 원력으로 거두어(받아) 주심을 굳게 믿고서, 곧장 보리심을 내어 념불삼매(念佛三昧)의 수행을 하는 것이오.

시방 삼계에 중생의 몸 다시 받는 걸 지긋지긋하게 싫어하며, 신심을 내어 보시와 지계로 복덕을 닦아 가되, 하나하나 수행마다 한결같이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회향 발원하는 것이오. 그러면 아미타부처님의 원력 가피에 편승하여, 중생 자신의 근기와 정성이 (부처님의 원력과) 서로 감응함으로써, 곧장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그래서 『십주비바사론』에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 (사바) 세계에서 도업을 닦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닦기 어려운 길[難行道]이고, 다른 하나는 닦기 쉬운 길[易行道]이다. 닦기 어려운 길이라 함은, 이 오탁악세에서는 한량 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어 중생을 제도하시어도 중생이 아비발치(阿萊跋致: 不退轉)를 닦아 얻기가 몹시도 어려움을 말한다. 그 어려움은 티끌처럼 많아 말로 다할 수 없지만, 아주 중요한 것만 말하자면 대략 다섯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외도(外道)가 착한 모습으로 다가와 보살도[正法]를 어지럽힌다.

둘째, 사악한 무뢰한들이 남의 훌륭한 덕을 깨뜨린다.

셋째, 좋은 결과[善果]에 걸려 넘어져 청정한 수행[梵行]이 무너지기 쉽다.

넷째, 자신만 이롭기 바라는 성문(聲聞)에 머물러 대자비의 보살행에 장애가 된다.

다섯째, 오직 자력 수행만 있고, 타력의 가피가 없다.

비유하자면, 절름발이가 도보로 길을 걷자면 하루에 고작 몇 십 리도 못 가면서 지극히 힘들고 고생만 하는데, 이것이 자력 수행에 해당한다.

반면 닦기 쉬운 길이라 함은, 부처님 말씀을 믿고 념불삼매의 가르침에 따라 정토 왕생을 발원하는 것이니, 아미타부처님께서 념불 중생을 거두어들이시겠다는 원력의 가피를 받아 의심할 나위 없이 결정코 극락 왕생함을 뜻한다. 비유하자면, 사람이 물길을 따라 배를 타고 순풍에 돛 단 듯이 나아감에 잠깐 사이에 천리에 이르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타력 수행에 해당한다.

달리 비유하자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시중들게 되면, 하루 밤낮 사이에 네 천하(四天下)를 두루 돌게 되는데, 이는 그 사람 자신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 바로 전륜성왕의 위력 덕택이다.”

만약 번뇌망상에 찌든[有漏] 범부 중생들은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고 한다면, 그런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 중생들은 부처님 몸[佛身]도 또한 뵈올[親見할] 수 없다는 말이 되오.

그런데 념불삼매는 물론 번뇌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들어갈 수 있지만,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 중생들도 각자 수행의 정도에 따라 부처님 몸을 거친 모습으로나마 어렴풋이 뵈올 수 있다오. 보살 경지에 이른 분들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것일 따름이오.

극락정토 또한 마찬가지라오. 비록 번뇌망상을 여읜[無漏] 선근(善根)들이 왕생하지만, 번뇌망상에 찌든 범부 중생들도 위없는 보리심을 내어 정토 왕생을 발원하면서 늘상 념불하게 되면, 그 힘으로 번뇌를 다스려 소멸시키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다만 각자 념불 수행[번뇌 소멸]의 정도에 따라 거친 모습을 어렴풋이 친견하되, 번뇌가 스러진 보살은 미세한 모습까지 뚜렷이 친견하는 차이가 있을 따름이니, 이러한 리치를 어찌 의심한단 말이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르시기를, “일체의 모든 부처님 국토는 한결같이 두루 장엄하고 청정하거늘, 중생의 업장과 수행이 달라 각자 보는 게 같지 않을 뿐일세[一切諸佛刹 平等普嚴淨, 衆生業行異 所見各不同].”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러한 뜻이라오.

 

여섯 번째 의문

번뇌망상에 얽매인 범부 중생들이 설령 아미타부처님의 원력 가피로 서방 정토에 왕생한다고 하더라도, 사견(邪見)과 탐·진·치 삼독(三毒) 등이 늘상 일어날 텐데, 어떻게 서방 정토에 왕생한 다음 곧장 불퇴전(不退轉)의 경지를 얻어 삼계를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답변

서방 정토에 왕생하게 되면, 다섯 가지 인연으로 불퇴전의 경지에 들 수 있다오.

첫째, 아미타부처님께서 대자대비 원력으로 거두어 지켜 주시기 때문에 불퇴전을 얻을 수 있소.

둘째, 부처님 광명이 늘상 비추기[佛光常照] 때문에, 보리심이 계속 증진하기만 하고 줄어들거나 물러남이 없소.

셋째, 물 소리·새 소리·나무 소리·바람 소리 등의 교향 음악이 모두, 륙도 륜회 중생계의 과보가 본디 괴롭고[苦] 텅 비었으며[空], 덧없고[無常] 나라고 할 게 없다[無我]는 진리를 설하기 때문에, 이를 듣는 사람들이 늘상 부처님을 생각하고[念佛] 부처님 가르침을 생각하며[念法] 그 가르침을 수행하는 분들을 생각하는[念僧] 마음을 내게 되어 불퇴전에 머문다오.

넷째, 그 서방 정토에서는 순전히 보살님들만 있어 훌륭한 벗[良友: 道伴]이 되기 때문에, 사악한 연분이나 경계가 전혀 없소. 밖으로는 사악한 귀신이나 마장(魔障)이 없고, 안으로는 탐·진·치 삼독 등의 번뇌가 언제까지라도 일어나지 않기에, 불퇴전이 된다오.

다섯째, 그 서방 정토에 왕생하면, 수명이 보살이나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영겁(永劫)토록 계속되기 때문에, 수행이 후퇴하거나 정체할 염려가 없소.

여기의 사바고해 오탁악세는 목숨도 아주 짧고 덧없지만, 그 곳은 아승기겁을 지나도록 다시는 번뇌망상이 일어남이 없이 오래도록 도업을 계속 닦아나갈 수 있소.

그런데 어떻게 무생법인을 얻지 못하겠소? 이러한 리치가 아주 분명하거늘, 더 이상 무엇을 의심한단 말이오?

【옮긴이 보충 해설: 『화엄경』 「십주품(十住品)」에 보면, 법혜(法慧) 보살님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받자와 보살무량방편삼매에 들어 무애지(無巫智) 등 열 가지 지혜를 얻고, 보살이 삼세 모든 부처님 집안에 머물며 수행해 나아가는 열 가지 단계를 설한 내용이 나옵니다.

첫째가 초발심주(初發心住), 둘째가 (그 마음 자리를 정돈하는) 치지주(治地住), 셋째가 수행주(修行住), 넷째가 (존귀한 법이 생겨나는) 생귀주(生貴住), 다섯째가 보살구족방편주(菩薩具足方便住), 여섯째가 정심주(正心住), 일곱째가 불퇴주(不退住), 여덟째가 (청정 수행으로 어린애같이 천진해지는) 동진주(童眞住), 아홉째가 보살법왕자주(菩薩法王子住), 열째가 보살관정주(菩薩灌頂住)라고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정심주(正心住)란, 보살이 다음의 열 가지 법을 듣고도 마음이 흔들림 없이 안정된 경지를 뜻합니다.

① 부처님, ② 부처님의 가르침[法], ③ 보살님, ④ 보살님이 수행하는 법을 각각 누군가 찬탄 또는 비방·훼손하거나, ⑤ 중생이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거나, ⑥ 중생이 혼탁[有垢]하다거나 청정[無垢]하다거나, ⑦ 중생을 제도하기 쉽다거나 어렵다거나, ⑧ 법계가 유한하다거나 무한하다거나, ⑨ 법계가 생성된다거나 파괴된다거나, ⑩ 법계가 있다거나 없다거나 등을 각각 누군가 말하는 걸 듣고도, 부처님 가르침[佛法] 가운데 마음이 조금도 흔들림 없이 견고하게 안정되는 경지라고 합니다.

이처럼 열 가지 말을 듣고도 마음이 놀라거나 흔들리지 않는 정심주(正心住)는, 유교의 세간적 인격 수양에 대비하자면, 공자가 마흔에 미혹되지 않았다는 불혹(不惑), 또는 맹자나 고자(告子)가 역시 마흔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부동심(不動心)의 단계에 상응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정심주의 보살은, 일체 모든 법이 모습[相]도 없고, 본체[體]도 없으며, 닦을[修] 수도 없고, 존재하지도[所有] 않으며, 진실하지도 않고, 텅 비었으며, 본디 성품도 없고, 허깨비 같고, 꿈 같으며, 어떠한 분별도 없다는 열 가지 가르침을 배우고 닦아야 합니다.

그래서 한 단계 높이 뛰어올라야, 비로소 일곱 번째 불퇴전의 경지에 올라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게 되는데, 이 때는 어떠한 법을 듣든지 남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훤히 알게 된다고 합니다.

불퇴주에 오르면, ① 부처님이 계신다든지 안 계신다든지, ② 부처님 가르침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③ 보살님이 계신다든지 안 계신다든지, ④ 보살님 수행이 있다든지 없다든지, ⑤ 보살님 수행이 세속을 떠났다든지 못 떠났다든지, ⑥ 과거에 부처님이 계셨다든지 안 계셨다든지, ⑦ 미래에 부처님이 계실 거라든지 안 계실 거라든지, ⑧ 현재 부처님이 계신다든지 안 계신다든지, ⑨ 부처님 지혜가 끝 있다든지 끝 없다든지, ⑩ 삼세(三世)가 한 모습[一相]이라든지 아니라든지 따위를 말하는 걸 듣고도,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마음이 조금도 후퇴하지 않는다[不退轉]고 합니다.】

 

 

***악업중생도 극락왕생할 수 있는 도리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악업 중생도 극락왕생할 수 있는 도리

 

여덟 번째 의문

우리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無始]부터 한량없는 악업을 지어 왔습니다. 금생에 다행히 사람 모습을 타고나긴 했지만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였고, 그래서 또 다시 죄악이란 죄악은 짓지 않은 게 없을 정도로 모든 죄업을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臨終]에 ‘나무 아미타불’ 명호 열 번만 염송[十念]해 내면,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시방 삼계를 벗어나고 생사 륜회의 악업을 끝마칠 수 있다고 하십니까? 도대체 어떠한 도리로 해명하시렵니까?

 

답변

중생들이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 온 선행과 악업의 종자가 얼마나 많고 얼마나 강한지는 결코 알 수 없소. 다만 목숨이 다할 때 선지식을 만나 (그 가르침을 믿고 따라) ‘나무 아미타불’ 명호 열 번만이라도 염송해 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숙세(宿世)의 선행공덕[善業]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에 비로소 림종에 선지식을 만나 열 번 념불[十念]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오. 만약 악업이 많은 중생이라면, 그런 선지식을 만날 수조차 없는 법인데, 하물며 어떻게 목숨이 끊어지는 그런 순간에 (정신을 집중하여) 열 번의 념불을 성취할 수 있겠소?

또 그대가 (질문하는 걸 보니)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만 아주 무겁게 생각하고, 목숨이 다할 때 ‘나무 아미타불’ 염송 열 번 해내는 공덕은 가벼이 여기는 모양인데, 이제 세 가지 도리(道理)로 비교해 본다면, 악업과 공덕의 경중이라는 게 일정하게 정해지는 것도 아니고, 또 그 시간(세월)의 길고 짧음이나 수량의 많고 적음에만 달린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소.

그 세 가지 도리가 무엇인가 하면, 첫째는 마음[心]에 달려 있고, 둘째는 연분[緣]에 달려 있으며, 셋째는 의지 결정(決定) 여하에 달려 있소.

첫째, 마음에 달려 있다 함은 이렇소. 중생이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虛妄)하고 앞뒤가 뒤바뀐[顚倒] 번뇌망상으로 말미암지만, 념불(念佛)하는 것은 선지식으로부터 아미타부처님의 진실하고 공덕(功德) 원만한 명호에 대해 설법을 들음으로써 비롯되오.

이렇듯이 하나(죄업)는 허망하고 하나(념불 공덕)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만 년 동안 깜깜했던 암실(동굴)에 햇빛이 잠시만 비쳐 들어도 암흑은 단박에 사라져 버리는 것과 같소. 어찌 오래된 암흑(죄업)이라고 해서 순간의 햇빛(념불 공덕)에 사라지지 않을 리가 있겠소?

둘째, 연분에 달려 있다 함은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허망하고 어둡고 어리석은 마음이 허망한 경계의 연분을 만나 본말이 뒤바뀌어 죄악을 짓게 되오. 그러나 념불하는 마음은 부처님의 청정하고 진실하며 공덕 원만한 명호를 듣고서 더할 나위 없는 보리심[無上菩提心]을 연분으로 생겨나게 마련이오.

이처럼 하나는 거짓되고 하나는 진실하니, 어떻게 둘을 서로 나란히 비교할 수 있겠소? 비유하자면 마치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는데, 독이 극렬하고 화살이 깊이 박혀 근육을 손상시킴은 물론 뼈까지 파괴되었으나, 한번 독약을 말끔히 사라지게 하는 신령스런 북[藥鼓] 소리를 듣자마자, 금세 화살이 저절로 뽑혀 나오고 독 기운도 풀려 버리는 것과 같소. 그런데 이 경우 화살이 좀 깊이 박히고 독이 극렬하다고 해서, 어찌 안 빠지고 해독 안 될 리가 있겠소?

셋째, 의지 결정에 달려 있다 함은 또 이러하오. 죄악을 지을 때는,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상황에서 이거 한번 해볼까 하는) 한가한 마음[閒心]과 (나중에 뉘우치고 속죄할 기회가 있겠지 하고) 뒷날을 은근히 기대하는 마음[後心]이 으레 있게 마련이오.

하지만 념불할 때는, 지금 당장 숨 넘어가면 생명이 끝날 판인데, 그런 한가한 마음과 뒷날을 기대하는 마음이 도대체 있을 수 없소. 그래서 착한 마음[善心]으로 맹렬하고 예리하게 정신 바짝 차려 념불하게 되므로, 곧장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다오.

비유하자면, 열 겹으로 묶은 밧줄은 천 사람도 끊을 수 없지만, 어린애가 칼 한번 휘두르면 순식간에 두 동강 나는 것과 같소. 또 천 년 동안 쌓아 놓은 장작더미가 콩알만한 불씨를 가지고도 짧은 시간에 죄다 타버리는 것과 같소. 그리고 반대로 말하자면, 어떤 사람이 한평생 동안 열 가지 선행[十善業]을 꾸준히 닦아 마땅히 천상에 올라가야 할 인연인데, 림종 때 한 순간의 결정(決定)적인 삿된 생각[邪見]을 품음으로써 곧장 아비지옥에 떨어지는 것도 마찬가지 리치라오.

악업이라는 게 허망한데도 불구하고, 림종 때 한 생각이 맹렬하고 예리했던 까닭에, 오히려 한평생 동안의 선행 공덕을 죄다 물리치고 지옥이라는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만든 것이오. 하물며 림종 때 맹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념불한다면, 한가한 생각 없는 진실한 마음의 선행 공덕은 오죽하겠소?

그러한 결연한 마음의 념불 공덕으로,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어온 악업을 말끔히 물리치고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없다면, 이는 정말 말도 안 되오.

또 경전에 말씀하시기를, 한 순간의 념불 공덕으로 80억 겁 동안 생사륜회의 죄업을 소멸시킨다고 하는데, 이는 념불할 때의 마음이 아주 맹렬하고 예리하기 때문이오. 그렇듯이 악업을 말끔히 소멸시킨다면, 결정코 극락정토에 왕생할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소.

그리고 옛부터 전해 내려오는 말씀 가운데, ‘나무 아미타불’ 열 번 염송하는 공덕을 성취하는 걸 (금생에 과보를 얻는 게 아니라 내생을 기약하는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판단하는 견해가 더러 있는데, 이는 결코 그럴 수 없소. 어찌 그런 줄 알겠소?

예컨대, 『섭론(攝論)』8)에는 “오직 발원만 하는 까닭에 수행이 전혀 없다”는 말씀이 나온다오. 또 『잡집론(雜集論)』9)에는, “만약 안락(安樂: 극락) 국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곧장 왕생할 수 있고, 만약 티없는[無垢] 부처님 명호를 들으면 곧장 아누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를 얻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두 다른 때의 원인[別時之因]으로, 전혀 수행이 없다”고 하고 있소.

[『섭론(攝論)』: 무착(無著)보살이 지은 『섭대승론(攝大乘論)』]

[『잡집론(雜集論)』: 안혜(安慧)가 짓고 현장(玄乍)이 번역한 『대승아비달마잡집론(大乘阿毘達磨雜集論)』의 약칭. 일명 『대법론(對法論)』.]

그렇지만 (단지 발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림종의 순간에 뒤돌아볼 겨를도 없이, 한가한 생각 없이 맹렬하고 예리(간절)하게 열 번 념불하는 십념(十念)의 선행 공덕까지 (내생의 극락 왕생을 위한 인연 종자 정도로) 다른 때[別時]의 의미로 해석한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오도(誤導)하는 커다란 잘못이 되겠소?

원컨대, 념불 수행자 여러분께서는 이 리치를 깊이 생각하여 자기 마음을 굳게 다잡아 결연히 행하고, 다른 견해를 잘못 믿어 함정에 떨어지는 일이 결코 없기를 간절히 바라오.

 

아홉 번째 의문

서방 정토는 여기서 십만억 불국토나 떨어져 있다는데, 열약(劣弱)한 중생이 어떻게 거기까지 갈 수 있습니까? 또 『왕생론(往生論)』10)에는, 여인과 신체 불구자와 성문·연각의 이승(二乘) 대중은 극락세계에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정말 이러한 가르침이 있다면, 여인과 신체 불구자들은 결정코 극락 왕생할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닙니까?

[『왕생론(往生論)』: 세친(世親)보살이 지은 『무량수경우바제사원생게(無量壽經憂婆提舍願生偈)』 일명 『정토론(淨土論)』]

 

답변

이는 범부 중생의 육안(肉眼)과 생사관(生死觀)을 향해서 설하신 법문일 따름이오. 그러한 관점에서 서방 정토는 여기서부터 십만억 불국토나 떨어져 있소. 그러나 정토 왕생의 선업(善業)이 무르익은 중생에게는, 림종 때 왕생하겠다고 결정된 마음이 바로 극락정토에 생명을 받는 마음이고, 그 생각을 움직이면[動念] 곧바로 정토에 왕생하는 때가 된다오.

그래서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에서는 “아미타불 국토가 여기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고 말씀하셨고, 또 “업력(業力)이란 불가사의하여, 한 생각[一念]에 곧장 그 곳(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니 멀다고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셨소.

또 비유하자면, 사람이 꿈을 꿀 때, 몸은 비록 침대 위에 있지만 마음 의식은 평상시와 다름없이 다른 모든 세계에 두루 돌아다니는 것과 같소. 극락정토에 왕생함도 또한 이와 같아서, (왕생하겠다는) 생각이 움직임과 동시에 곧장 이를 수 있으니, 이는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소.

그리고 여인과 신체 불구자 및 성문·연각의 이승(二乘) 대중은 (극락세계에) 생겨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은, 단지 극락국토에 생겨나는 대중 가운데는 여인도 없고 장님·벙어리·귀머거리 따위도 없다는 뜻이지, 이곳 사바세계의 여인이나 신체 불구자가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라오. 만약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다면, 이는 경전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일 것이오. 예컨대, 위제희(韋提希) 부인 같은 분은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원하여 부처님께 설법을 청한 주인공이고, 또 오백 시녀(侍女)들도 모두 극락국토에 왕생할 수 있다고 부처님께서 수기(授記)를 내리시지 않았소?

다만, 이 곳 사바세계의 여인과 장님·벙어리·귀머거리 등도 마음으로 아미타불을 염원하면 모두 극락국토에 왕생하여, 다시는 여인이나 신체 불구의 몸을 받지 않는다는 뜻이오. 또 성문·연각의 이승(二乘) 대중도 단지 마음을 돌이켜 정토 왕생을 발원하면, 그 곳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성문이나 연각의 이승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게 된다오. 이러한 까닭에 여인과 신체 불구 및 이승 대중은 (극락국토에) 생겨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것이오. 이 곳 사바세계의 여인이나 신체 불구자가 극락 왕생할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게 결코 아니오. 그래서 『무량수경』의 48원(願)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소.

“가령 내가 부처가 되어, 시방세계의 모든 여인이 내 명호를 부르면서 여인 몸으로 태어난 걸 싫어하는데도, (그 여인이) 목숨이 다한 뒤 다시 여인 몸을 받는다면, (나는 결코) 올바른 깨달음(부처)을 이루지 않겠나이다.”

하물며, 그 부처님 나라[극락정토]에 왕생하는데도 다시 여인 몸이나 신체 불구로 태어난다면,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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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솔천보다 서방 정토가 확실한 선택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도솔천보다 서방 정토가 확실한 선택

 

일곱 번째 의문

미륵보살님께서는 일생보처(一生補處)에 계시면서 바로 다음 생에 성불하실 분입니다. 우리 중생이 열 가지 착한 일[十善]5)을 닦아 상품(上品) 수행이 되면, 미륵보살님께서 계시는 도솔천(兜率天)에 생겨날 수 있습니다.

[십선(十善):십악(十惡)을 범하지 않는 일. 즉, ① 산 목숨을 해치지 않고[不殺生], ② 남의 물건을 훔치지 않으며[不偸盜], ③ 배우자 아닌 이성과 간음하지 않고[不邪淫], ④ 거짓말 하지 않으며[不妄語], ⑤ 이간질하는 두 말을 하지 않고[不兩舌], ⑥ 거친 말(욕설) 안 하며[不惡口], ⑦ 음란하고 번지르르한 말 않고[不綺語], ⑧ 탐욕 부리지 않으며[不貪欲], ⑨ 성(화) 내지 않고[不瞋迷], ⑩ 어리석고 삿된 생각 갖지 않는[不邪見:不愚癡] 열 가지 선행을 뜻함. ]

거기서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고 수행하다가, 미륵보살님께서 사바세계에 내려오실[下生] 때 함께 따라 내려오면, 세 차례의 법회[龍華會上] 교화를 받아 저절로 성인의 과위[聖果: 아라한과]를 얻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꼭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답변

도솔천에 생겨나길 구하는 것도 또한 도를 듣고 부처님을 뵙는 것[聞道見佛]이라고 말들 하니, 외형상 얼핏 보기에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비슷하게 여겨질 듯하오. 하지만 좀더 세밀히 비교하자면, 우열의 차이가 아주 크게 벌어진다오. 그 논거로 두 가지만 들어보겠소.

첫째, 설령 열 가지 선행을 닦아 지닌다 해도, 꼭 도솔천에 생겨난다는 보장은 없는 것 같소. 왜 그런가 하면, 『미륵상생경(彌勒上生經)』에 뭇 삼매를 수행하여 올바른 선정에 깊이 들어야만 바야흐로 (도솔천에) 생겨날 수 있다[行衆三昧, 深入正定, 方始得生]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이걸 보면 미륵보살님께서는 그밖에 달리 특별히 중생을 이끌어 맞아들이는 방편법문을 갖지는 않으신 것이오.

이와는 달리,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본래 서원의 힘과 광명의 위신력을 바탕으로, 단지 부처님을 생각하고 명호를 염송하는 중생이 있기만 하면,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거두어 받아들이신다오. 게다가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구품(九品)련화의 방편법문으로 중생들을 교화하시면서, 서방 정토에 왕생하도록 은근하게 이끄시고 간곡하게 당부하셨소.

그래서 단지 중생들이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그 명호를 염송하기만 하면, 근기와 정성이 두 부처님의 자비 원력 및 가르침에 서로 감응하여 반드시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마치 우리 세간에서 어떤 사람이 누군가를 사모할 때, 그 상대방이 사모하는 사람을 받아들일 마음만 내면, 서로 의기(意氣)가 투합(投合)하여 틀림없이 그 인연이 이루어지는 것과 똑같은 리치라오.

둘째, 도솔천도 기껏해야 욕계(欲界)에 속하기 때문에, 수행의 경지에서 후퇴하는 자가 많다오. 그리고 극락세계처럼 중생들이 듣고서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고 번뇌를 여의며 보리심을 낼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물 소리·새 소리·나무 소리·바람 소리 같은 미묘한 교향 음악도 있지 않소. 또 거기에는 여인이 존재하여, 뭇 천상 인간들한테 다섯 가지 욕망[五欲]6)에 애착하는 마음을 불러일으킨다오.

[오욕(五欲):사람의 욕심을 일으켜 진리를 더럽히는 빛깔[色]·소리[聲]·냄새[香]·맛[味]·느낌[觸]의 다섯 경계[五境]를 가리킴. 또 이와 달리 재물욕·여색욕·음식욕·명예욕·수면욕을 가리키기도 함.]

게다가 도솔천의 여인들은 매우 미묘하고 아름다워서, 뭇 천상 인간들이 그들과 어울려 놀고 즐기기에 정신 팔려, 수행에 힘쓸 수가 없을 정도라오.

그러니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와 같겠소? 극락세계에는 물 소리·새 소리·나무 소리·바람 소리 등의 교향 음악이 울려 퍼지는데, 중생들이 이 소리들을 들으면 모두 한결같이 부처님을 생각하고 보리심을 내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날 수도 없다오.

또 여인도 없고 성문(聲聞)이나 벽지불(陽支佛: 緣覺) 같은 이승(二乘: 小乘)의 마음이 전혀 없이, 오로지 순수한 대승보살들만이 청정하고 선량한 도반으로 계신다오. 이러한 까닭에 번뇌망상이나 죄악업장이 언제까지라도 조금도 일어나지 않고, 마침내 무생법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오.

이것만 비교해도 그 우열이 현저히 판가름 나거늘, 어찌 다시 의심할 나위가 있겠소? 예컨대,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몸소 교화하실 때에도, 부처님을 직접 뵙고 가르침대로 수행했으면서 성인의 과위(聖果: 아라한)를 얻지 못한 이들이 갠지스 강 모래알만큼이나 많았소. 앞으로 미륵부처님께서 세상에 내려오실 때에도 또한 마찬가지로, 친견하고 가르침을 받으면서도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할 이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오. 그러니 어찌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견줄 수 있겠소? 극락세계에는 단지 왕생하기만 하면, 모두 무생법인을 얻게 되고, 어느 한 사람도 다시 삼계에 떨어져 나와 생사 륜회의 업장에 묶이는 법이 없다오.

또 『서국전(西國傳)』7)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소.

[서국전(西國傳): 서역(西域: 인도)의 조사와 고승대덕들의 행적을 적은 전기인 듯함.]

세 보살이 계셨는데, 한 분은 무착(無著)이고, 다른 한 분은 세친(世親)이며, 또 다른 한 분은 사자각(師子覺)이셨소. 이 세 분은 서로 마음과 뜻이 맞아, 다 함께 도솔천에 생겨나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기로 결의하고서, 누구든지 먼저 죽어 미륵보살님을 친견하는 자가 남아 있는 이한테 그 소식을 알려 주기로 서약하였소.

그러다가 사자각이 먼저 죽었는데, 한번 가더니만 몇 년이 지나도록 도무지 캄캄 무소식이었소. 그 뒤에 세친이 가게 되었는데. 림종 때 무착이 “만약 자네가 미륵보살님을 친견하거든, 곧장 되돌아와서 알려 주게나.” 하고 신신당부를 했다오. 그런데 세친이 간 뒤로 3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왔길래, 무착이 이렇게 물었다오.

“도대체 무슨 꿍꿍이로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찾아온단 말인가?”

그러자 세친이 이렇게 대답했다오.

“거기 도솔천에 올라가 미륵보살님의 설법을 한 바탕 듣고서, 곧장 되돌아 내려와 소식 전하는 것일세. 거기 도솔천은 하루가 매우 길어, (거기서 잠깐 머물렀는데도) 여기서는 벌써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라네.”

그래서 무착이 “그러면 사자각은 지금 어디에 있단 말인가?”라고 묻자, 세친의 대답이 참으로 가관이었소.

“사자각은 도솔천의 즐거움을 누리고 다섯 욕망[五欲]을 즐기느라, 이미 바깥 권속이 되어 버렸네. 한번 도솔천에 올라간 뒤로 여태껏 미륵보살님을 뵌 적도 없다네.”

보살들도 경지가 낮으면 거기 도솔천에 생겨나서 이처럼 천상의 미묘한 오욕(五欲)에 빠지기 십상이거늘, 하물며 보통 범부 중생이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이러한 까닭에,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해서 틀림없이 불퇴전(不退轉)의 경지에 이르겠다고 발원해야 하며, 도솔천에 올라가서 미륵보살님 뵙기를 구해서는 안 된다오.

【옮긴이 보충 해설: 도솔천(兜率天)은 ‘지족(知足)’으로 번역하는데, 그 곳 천상인간들은 오욕의 경계에 부딪쳐 만족할 줄 알고 그칠 줄 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런데도 욕계에 속한 천상이라, 욕망에 빠져 즐기느라 수행할 본분을 잊는다는 것입니다.

도솔천의 하루(밤낮)는 인간 세상의 4백 년에 해당하여, 도솔천의 1년은 인간 세상의 14만 4천 년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미륵보살님이 도솔천 내원(內院)에서 4천 년을 머문다고 하는데, 인간 세월로 57억 6백만 년이 지나 이 세상에 내려오시어, 룡화수(龍華樹: 꽃가지가 용의 머리 같아 붙여진 이름) 아래서 정각을 이루어 부처님이 되고, 세 차례 법회[龍華會]를 열어 상·중·하 세 근기의 중생들을 제도하신다고 합니다.

미륵(彌勒)은 자씨(慈氏)라는 뜻인데, 과거에 수행할 때 자심삼매(慈心三昧)를 얻어 성불할 때의 명호로까지 정해졌다고 합니다. 보통은 미륵이 성(姓)이고, 무능승(無能勝: 누구도 이길 자가 없다. 仁者無敵의 뜻과 상통)의 뜻으로 번역되는 아일다(阿逸多)가 이름[名]이라고 하는데, 더러 성과 이름을 서로 맞바꾸어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배가 불룩하고 만면에 미소 짓는 미륵보살상을 흔히 볼 수 있는데, 바로 큰 자비심과 넓은 아량을 형상화한 모습으로 여겨집니다.

한편 무착(無著)과 세친(世親)은 부처님 녈반 후 9백 년쯤 지나 인도의 아유타(阿踰陀) 국에서 태어난 형제 보살로서, 형은 아승가(阿僧伽)인데 무착(無著)이라는 뜻이고, 아우는 바수반두(婆藪槃豆)로 천친(天親)이라고도 번역되었으나, 나중에 벌소반도(伐蘇畔度)로 세친(世親)이라고 옮겨지기도 했습니다.

형 무착(無著)은 『섭대승론(攝大乘論)』 등을 짓고, 아우 천친(天親)은 『구사론(俱舍論)』과 『유식론(唯識論)』 등 1천 부의 론장(論藏)을 지어, 형제가 함께 법상종(法相宗)의 시조가 되었는데, 그래서 법상종을 무착천친종이라고도 부릅니다.

『서역기(西域記)』에는 세친보살이 회심(回心)하여 론장을 저술하는 인연담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세친은 본디 천성이 총명하고 영민하였는데, 아직 시절인연이 닿지 않아 소승(小乘)을 일삼았다. 붓 끝과 혀끝이 미묘하고 유창한데다가, 날카롭기는 서릿발보다 준엄했다. 또 온갖 변론 재주가 강물을 걸어 놓은 듯 종횡무진하며, 별빛이나 칼날처럼 예리했다.

무착은 부처님께서 소승의 방편 가르침[權敎]으로 하근기의 중생들을 끌어들여 제도하시는 인연으로 알았다. 즉, 『법화경』에서 피곤한 길손들을 위로하기 위해 허깨비성[化城]을 나토시고, 궁박한 아들을 꾀어 잡기 위하여 똥 치는 일을 맡기시는 비유로 여긴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아우를 교화할 방편으로, 중병에 걸린 것처럼 병상에 누워 자기가 곧 세상을 떠날 것이라고 아우를 불렀다.

세친이 그 소식을 듣고 하루도 안 되어 찾아오자, 무착이 아우를 보고 자기 병의 원인을 자세히 설명한 다음, 대승의 가르침을 설해 주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죽기 전에, 자기가 공부하던 경전이나 한 번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세친은 곧장 『화엄경』을 봉독했는데, 비로자나 법계와 보현행원의 바다가, 마치 햇빛이 눈부시게 온 천지를 비추고 제석천 구슬 그물[帝網]이 서로 영롱하게 머금은 것처럼, 생생하게 펼쳐져 있는 모습을 보았다.

이에 큰 믿음과 깨달음이 저절로 일어나면서, 결연히 탄식하였다.

“날카로운 칼을 가지고 내 혀뿌리를 잘라, 내가 지금껏 소승을 찬탄한 잘못이 얼마나 막중한지 증명해 보여야겠다!”

이에 형이 극구 만류했다.

“만약 사람이 땅에서 넘어졌으면, 또한 땅을 짚고 일어나는 법일세. 마찬가지로 지난날 아우가 혀로 대승을 비방했으니, 그 혀로 이제는 대승을 찬탄하면 될 걸세.”

그래서 마침내 산에 들어가 대승경전을 두루 열람하고 『십지론(十地論)』을 지었는데, 글이 완성되던 날 대지가 두루 진동하고 광명이 훤하게 충만했다. 이에 국왕이 찾아와 알현하며, “아라한과를 얻었습니까?”라고 묻자, 세친은 “얻지 못했습니다.”라고 답했다. “성인의 과위를 얻지 못했는데, 무슨 연유로 대지가 진동합니까?”라고 되묻자, 세친은 이렇게 대답했다.

“도가 얕고 덕이 보잘것없는 제가 젊은 시절 대승을 믿지 않고 비방하였다가, 이제 뉘우치고 진실한 마음으로 대승론을 지으니, 대지가 진동하는 것입니다.”】

 

 

왜 꼭 아미타부처님의 서방정토만 염원하는가?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 :

왜 꼭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염원하는가?

 

세 번째 의문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의 정토(불국토)는 그 법성(法性)이 평등하며, 그 공덕 또한 똑같은 줄 압니다.

따라서 수행자는 그러한 일체 공덕을 두루 생각하면서 일체의 불국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해야 할 텐데, 어찌하여 지금 꼭 한 부처님(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외곬으로 구한단 말입니까? 이는 평등성과 어긋나는 것이니, 어떻게 정토에 왕생하겠습니까?

 

답변

시방세계의 일체 불국토는 진실로 모두 평등하오. 다만 우리 중생들은 근기가 둔하고 마음이 혼탁하며 산란스러운 자가 많소. 그래서 만약 오로지 한 마음으로 한 경계를 붙들어 잡지 않는다면, 삼매(三昧)가 이루어지기 어렵다오.

오로지 아미타불만을 사념(염송·염원)함이 곧바로 일상삼매(一相三昧)라오. 마음을 오롯이 모으기 때문에, 그 불국토에 왕생하게 되는 것이오. 그래서 『수원왕생경(隨願往生經)』4)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4) 수원왕생경:원명은 『불설관정수원왕생시방정토경(佛說灌頂隨願往生十方淨土經)』으로, 원하는 대로 시방 정토 어느 곳이나 왕생할 수 있음을 설하신 경전. 보광보살의 질문 청법에 답한 형식으로 되어 있어 『보광보살경(普廣菩薩經)』으로 부르기도 함. 동진(東晋) 때 백시리밀다라(帛尸梨密多羅)가 한문으로 옮김. 『불설관정경(佛說灌頂經)』의 제11권임.]

“보광보살(普廣菩薩)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시방세계에 모두 정토(淨土: 불국토)가 널려 있는데, 세존께서는 무슨 까닭에 오직 서방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만 내세워 찬탄하시며, 오롯이 아미타부처님에 전념하여 극락 왕생하라고 권하십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 보광보살한테 이렇게 답하셨다.

‘염부제 중생들은 마음이 매우 혼탁하고 산란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서방 한 부처님 정토만을 내세워 찬탄하느니라. 모든 중생들한테 마음을 한 경계[一境: 나무아미타불 명호]에 오롯이 집중(전념)하여 정말 아주 쉽사리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줌이니라. 만약 일체의 모든 부처님을 전부 다 사념할 것 같으면, 념불의 경계(목표)가 너무 넓어서 마음이 산만해지고 삼매가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따라서 정토에 왕생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한 부처님의 공덕을 구한다고 해도, 일체 부처님의 공덕과 전혀 차이가 없소. 부처님 법의 성품이 한결같이 똑같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아미타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 곧바로 일체 부처님을 사념(염송)함이며, 한 (극락)정토에 왕생함이 또한 곧 모든 부처님의 정토(불국토)에 왕생함이 되오.

 

그래서 『화엄경』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一切諸佛身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몸은

卽是一佛身 곧 한 부처님의 몸이니,

一心一智慧 한 부처님의 마음이고 지혜이며,

力無畏亦然 위신력과 무외심 또한 그러하네.

 

또 이렇게 말씀하셨소.

 

譬如淨滿月 비유하자면 맑고 둥근 달이

普應一切水 모든 물에 두루 비치듯,

影像雖無量 물 속 그림자 비록 수없어도

本月未曾二 본래 달은 결코 둘이 아닐세.

如是無巫智 이와 같이 걸림없는 지혜로

成就等正覺 위없는 바른 깨달음 이루신 분

應現一切刹 일체 국토에 두루 모습 나토시어도

佛身無有二 부처님 몸은 본디 둘이 아닐세.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하고 깨닫는다오. 지혜로운 이여! 그대는 일체의 달 그림자가 곧 한 달의 그림자이고, 거꾸로 한 달의 그림자가 곧 일체 달의 그림자인 줄 깨닫겠소?

달과 그림자가 둘이 아니지 않소? 만약 그렇다면, 마찬가지로 한 부처님이 곧 일체의 부처님이시고, 거꾸로 일체의 부처님이 곧 한 부처님이신 줄도 아시겠구려. 법신(法身)은 본디 둘이 아니기 때문이오. 이러한 까닭에 한 부처님을 치열하게 지성으로 염송할 때, 곧바로 모든 부처님을 염송하는 것이라오.

 

네 번째 의문

한 부처님의 정토에 왕생하길 염원하는 것이 모든 부처님 정토에 왕생하는 것과 같다고 한다면, 시방세계 수많은 불국토 가운데 자기 마음대로 어느 한 부처님의 정토를 염원하여 거기에 왕생하면 될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고, 하필 아미타불만 염송해야 된다고 외곬으로 주장하십니까?

 

답변

우리 범부 중생들은 지혜가 없기 때문에, 감히 독단해서는 안 되고, 부처님 말씀을 오롯이 듣고 따라야 하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만 염송하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이오.

그러면 어째서(어떻게) 부처님 말씀을 듣고 따른단 말이오. 위대하신 스승 석가모니부처님께서 한평생 설법하신 걸 보면, 거룩하신 가르침 곳곳에서 오로지 중생들한테 일심전념으로 아미타불만 염송하여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하라고 간곡히 권하셨소.

예컨대 『무량수경(無量壽經)』이나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왕생론(往生論)』 등 수십여 부의 경전과 론장(論藏)들에서 한결같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라고 은근히 가르치고 간곡히 당부하셨소. 그래서 아미타불만 외곬으로 염송하라고 내세우는 것이오.

또 아미타부처님께서는 특별히 대자대비하신 48대 서원을 세워 우리 중생들을 이끌어 맞이하고 계시오. 그리고 『관무량수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아미타부처님은 팔만사천 상(相)을 지니셨는데, 하나하내 상마다 각각 팔만사천 호(好)가 간직되었고, 하나하내 호마다 각각 팔만사천 광명(光明)을 나토시어, 모든 법계의 념불하는 중생들을 두루 비추시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거두어들이시니라. 그래서 만약 아미타불을 염송하기만 하면, 그 착한 근기와 정성이 부처님의 서원과 서로 감응(感應)하여 틀림없이 극락 왕생하느니라.”

또 『아미타경』이나 『대무량수경』·『고음왕다라니경(鼓音王陀羅尼經)』 등에서도 이르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이들 경전을 설법하실 때, 한결같이 갠지스 강(恒河) 모래알 수만큼 많은 시방세계 모든 부처님들께서 각각 그 혀를 길게 드리우시어 삼천대천세계를 두루 뒤덮으신 채, “일체 중생이 아미타불을 염송하면, 부처님의 대자대비하신 본원력(本願力)의 가피를 받잡기 때문에, 결정코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고 증명하고 계신다고 말씀하셨소.

우리는 아미타부처님이 우리 사바세계와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아야 하오. 어찌 그런 줄 아는고 하면, 『무량수경』에 “말세(末世)에 부처님 법이 소멸하는 때, 특별히 이 경전만 세상에 백 년간 더 남겨 두어 (인연 있는) 중생들이 저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이끌어 맞이하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오. 그래서 아미타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의 지독히 혼탁하고 사악한 중생들과 자못 각별한 인연이 있으심을 알 수 있다오.

물론 그 밖의 다른 부처님들의 모든 정토도 한두 경전에서 중생들한테 거기에 왕생하길 발원하라고 대략 권하고는 계시오. 그렇지만 아미타부처님의 극락정토처럼 수많은 경론(經論)이 도처에서 고구정녕으로 은근하고 간곡하게 왕생하길 전하시는 불국토는 전혀 없소.

【옮긴이 보충 해설: 청화(淸華) 큰스님께서도 념불 법문을 하시는 가운데, 기독교는 하나님(天主님, 예수님) 한 분만 계셔서 오로지 믿고 기도하기가 쉬운데, 불교는 부처님의 수많은 공덕을 형상(상징)화한 명호가 너무도 많아 일반 불자들이 일심전념으로 오롯이 기도하고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지적하시면서, 되도록이면 총 대명사격인 ‘나무 아미타불’ 념불로 집중하는 편이 좋겠다고 거듭 역설하셨습니다.

비유하자면, 한겨울의 여린 햇볕도 돋보기로 초점을 모으면 불을 지필 수 있지만, 한여름의 뙤약볕도 그냥 놔두거나 분산시키면 별로 뜨겁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정신력, 생명의 에너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무 아미타불’의 돋보기로 초점을 맞출 때, 지혜 광명의 불도 쉽게 지피고, 극락 왕생의 길도 훤히 뚫릴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이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일심불란(一心不亂)을 뜻합니다.】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참 뜻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극락정토에 왕생한다는 참 뜻

 

두 번째 의문

모든 법의 본체는 텅 비어[諸法體空] 본래 생겨남이 없고[無生] 평등하며 적멸(寂滅)한데, 지금 이내 이 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아 아미타부처님이 계시다는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바란다면, 이 어찌 리치(진리)에 크게 어긋나지 않겠습니까?

또 경전에 이르기를, “만약 정토를 구하거든 먼저 자기 마음을 정화시킬지니, 마음이 청정하면 곧 불국토도 청정해지느니라[若求淨土, 先淨其心; 心淨故, 卽佛土淨]”고 하셨는데, 그러면 이 말씀은 어떻게 뜻이 통하겠습니까?

 

답변

이 의문에 대한 답은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소. 첫째는 전체(총론)적인 답이고, 둘째는 개별(각론)적인 답이오. 첫 번째 전체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그대가 만약 아미타부처님의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구하는 것이 이 곳을 내버리고 저 곳을 좇는 행위로 리치(진리)에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그대가 이 곳에 매달려 서방 정토에 왕생하길 구하지 않는 것은, 거꾸로 저 곳을 내버리고 이 곳에 집착하는 행위로, 이것 또한 리치에 맞지 않고 병(病: 잘못)이 된다오.

또 전계(轉計: 사람인지 책인지 미확인)가 이렇게 말했소. “저 곳에 왕생하길 바라지도 않고 또한 이 곳에 생겨나길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은 단멸견(斷滅見)3)이다.”

[단멸견(斷滅見):다섯 가지 사악한 견해[五惡見] 가운데 두 번째 변견(邊見:극단에 치우친 견해)은 상견(常見)과 단견(斷見)이다. ‘상견’은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이 사라지지 않고 항상 머무른다(존재한다)고 믿는 생각이다. 단견은 반대로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이 지금 현재 이대로만 존재하며, 지금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어져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는 생각인데, 이를 ‘단멸(斷滅)’이라고도 부른다. 흔히 사람이 죽으면 육신은 썩어 없어지고, 영혼도 육신과 마찬가지로 흩어져 더 이상 생명 존재가 없다고 믿는 무신론이 단견[斷滅]에 속한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소.

“수보리여, 그대가 만약 아누다라삼먁삼보리심(阿麴多羅三臺三菩提心)을 내는 사람은 모든 법이 단멸(斷滅)이라고 설한다고 생각하거든, 이런 생각일랑 하지 말게나. 왜냐하면 보리심을 낸 사람은 법에서 단멸의 모습[斷滅相]을 (보거나) 말하지 않기 때문일세.”

두 번째 개별(각론)적인 답은 이렇게 말할 수 있소.

무릇 불생불멸(不生不滅)이란 (모든 존재가) 생겨나는 인연[生緣] 가운데 모든 법이 조화롭게 합쳐질[諸法和合] 따름이며,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소[不守自性]. 따라서 생겨나는 본체[生體]에서 뭔가 찾으려 해도 아무것도 얻을 수 없소. 이 생명이 생겨날 때 어디서부터도 오는 바가 없기에[無所從來], 그래서 불생(不生)이라고 일컫는다오.

또 불멸(不滅)이란, 모든 법(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 역시 자기 성품을 지키지(고집하지) 않기에 내가 흩어져 사라진다고 말하지 않소. 이 생명(존재)이 흩어져 사라질 때도 어디로도 가는 바가 없기에[去無所至], 그래서 불멸(不滅)이라고 일컫는다오.

인연이 조화롭게 합쳐져 생겨나는 것 이외에 따로 불생불멸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바라지 않는 것을 가리켜 무생(無生, 無生法忍)이라고 일컫지도 않소.

이러한 까닭에 (龍樹보살이 지으시고 구마라집이 漢譯하신) 『중론(中論)』의 게송에 이런 말씀이 있소.

 

因緣所生法 인연으로 생겨나는 법(존재)일랑

我說卽是空 나는 곧 텅 비었다고 말하노니,

亦名爲假名 또한 가짜 이름이라고 일컫기도 하고

亦名中道義 또 다르게는 중도의 리치라고 일컫기도 한다.

 

『중론(中論)』에는 또 이런 말씀도 있소.

 

諸法不自生 모든 법(존재)은 생겨나지도 않고

亦不從他生 또한 다른 것으로부터 생겨나지도 않으며,

不共不無因 남과 함께 하지도 않고 원인이 없는 것도 아니니,

是故知無生 이런 까닭에 생겨나지 않는 줄 안다.

 

그리고 『유마경(維摩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소.

 

雖知諸佛國 비록 모든 부처님 나라와 중생이

及與衆生空 죄다 텅 빈 줄은 알지라도,

而常修淨土 항상 정토(법문)를 수행하여

敎化諸群生 모든 중생들을 교화한다네.

 

또 『유마경』에는 이런 비유도 있소.

“예컨대 어떤 사람이 큰 궁궐을 짓는다고 하자. 만약 그가 텅 빈 땅에 의지(기초)하여 짓는다면, 아무 어려움 없이 뜻대로 이룰 것이다. 그러나 만약 허공에 의지하여 지으려 한다면, 끝내 성공할 수 없다.”

모든 부처님의 설법은 항상 두 가지 진리[二諦]에 의지하신다오. 즉 가짜 이름[假名]을 깨뜨리지(떠나지) 않으면서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습[實相]을 설하시는 것이오.

지혜로운 이는 치열하게 극락정토 왕생을 간구하면서도, 생겨남(왕생)의 본체는 (텅 비어) 얻을 수 없는 줄 훤히 통달하므로, 이것이 진짜 생겨남이 없는 무생(無生)이오. 이런 걸 일컬어 마음이 청정하면 불국토도 청정해진다고 말하는 것이오.

반면 어리석은 자들은 생겨남(또는 왕생)에 얽매여, 생겨난다는 말을 들으면 생겨난다고 알아듣고, 생겨남이 없다[無生]는 말을 들으면 생겨남이 없다고 곧이듣소. 그래서 생겨남이 곧 생겨남 없음이며, 생겨남 없음이 바로 생겨남인 줄은 전혀 모른다오.

이러한 리치를 훤히 깨닫지 못하기에 함부로 시비를 다투며, 남들이 극락정토 왕생을 구하는 것에 대해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커다란 잘못이오? 이러한 자들은 바로 정법을 비방하는 죄인이며, 삿된 견해[邪見]에 빠진 외도(外道: 異端)일 따름이라오.

【옮긴이 보충 해설: 보통 세간에서 불교의 공(空)이나 도교의 무(無)를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 절대공[無記空]이나 허무(虛無)로 오해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불교의 색(色)이나 도교의 유(有)가 진실한 존재[實在]가 아니고 허망한 가상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공과 무도 니힐리즘적인 절대공이나 허무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색과 유가 진실로 존재한다고 믿는 착각이 상견(常見)에 속한다면, 공과 무가 전혀 없는 것으로 믿는 오해는 단견(斷見) 또는 단멸(斷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색(현상)이 공(본질)에서 나왔기 때문에 색이 곧 공이며, 공(본질)에서 색(현상)이 나토어지기 때문에 공이 곧 색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노자가 말한 것처럼, “천하 만물은 유에서 생기고 유는 무에서 생기며[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또한 “만물이 무성하다가도 각자 그 뿌리[無]로 돌아가고[夫物芸芸, 各復歸其根]”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기[復歸於無物] 때문에, 결국 유가 곧 무이며 무가 곧 유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는 견해가 중도실상(中道實相)일 것입니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를도라고 할 수 있을진대 항상적인(진실한) 도가 아니며, 이름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진대 항상적인 (진실한)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고 한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공이나 무를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 이는 진짜 공이나 무는 아니며, 색이나 유를 실재한다고 하면 이는 진짜 색이나 유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노자는 이어서 무(無 또는 無名)는 천지의 시작이고, 유(有 또는 有名)는 만물의 어머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道와 名, 無와 有, 無名과 有名)는 (한 군데서) 함께 나왔으되 이름만 다르다[同出而異名]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래서 노자 철학사상은 도는 항상 행함이 없으면서도 행하지 않음이 없다[道常無爲而無不爲]는 핵심 명제로 표현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바, 진짜 텅 빈 가운데 미묘한 존재가 있다[眞空妙有]는 명제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기도나 수행을 정성껏 열심히 해 보신 분들은, 자기가 몸소 하지 않았는데도 자기 생각이 저절로 행해지고 이루어지는, 진공묘유(眞空妙有) 또는 무위이무불위(無爲而無不爲)의 경우를 체험한 적이 계실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중도실상(中道實相) 가운데 한 면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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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극락왕생을 향한 착실한 준비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극락 왕생을 향한 착실한 준비

 

열 번째 의문

이제 결정코 서방 정토 왕생을 발원하여 구하렵니다. 그런데 어떤 수행 공덕을 닦아야 할 줄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종자(인연)로 그 나라(극락정토)에 생겨날 수 있습니까? 또 우리 세속에 사는 범부 중생들은 모두 처자식이 있는데, 음욕(淫欲)을 끊지 않아도 거기에 왕생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답변

결정코 서방 정토에 왕생하고자 하는 사람은 다음의 두 가지 수행을 갖추면 틀림없이 거기에 왕생할 수 있소. 첫째는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이고, 둘째는 흔연히 기뻐하며 바라는 흔원행(欣願行)이오.

우리 범부 중생들은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오욕(五欲)에 얽매여 오도(五道: 六道 가운데 阿修羅를 뺀 나머지 다섯. 문맥상 륙도와 같은 의미)를 륜회하면서 온갖 고통을 받아 왔소. 그러므로 이 오욕을 싫어하여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면, 그 오도 륜회에서 벗어날 기약이 없소. 그러한 까닭에 늘상 이 몸뚱이 보기를, 피고름과 똥 오줌 등 온갖 불결하고 냄새 나며 더러운 오물 덩어리로서 관찰하는 것이오. 그래서 『녈반경(涅槃經)』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이와 같이 육신의 성[身城]은 어리석고 멍청한 나찰(羅刹)이 그 안에 살고 있으니, 조금이라도 지혜가 있는 자라면 누가 이 몸을 좋아하고 즐기겠는가?”

또 경전에 이렇게도 말씀하셨소.

“이 몸은 온갖 괴로움이 모인 곳으로, 일체 모든 것이 깨끗지 못하고; 온통 종기나 피고름 투성이로, 좋고 이로운 것은 근본적으로 없나니; 위로 아무리 높고 훌륭한 천상세계라 할지라도, 모두 이와 같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걷거나 앉거나 자거나 깨어 있거나 간에, 늘상 이 몸이 즐거움이란 조금도 없이 오직 괴로움뿐임을 관찰하여, 이 몸을 몹시 싫어하고 떠나 버리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한다.”

그리고 방사(房事: 부부관계, 성욕)는 설사 단박에 완전히 끊을 수는 없다고 할지라도, 점차 싫어하고 멀리하는 마음을 내면서, 다음의 일곱 가지 부정관(不淨觀)을 하면 좋겠소.

첫째는, 이 음욕의 몸뚱이가 탐착과 애욕의 번뇌로부터 생겨났으니, 바로 그 근본 종자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는 것이오.

둘째는, 부모가 성관계를 맺을 때에 붉은 피(난자)와 흰 정액이 화합하였으니, 이는 바로 생명을 받음[受生: 受胎] 자체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셋째는, 어머니 태[母胎] 속에서 머물 때, 위로는 소화되지 않은 음식물 장기[生臟]가 짓누르고, 아래로는 소화되고 남은 음식물 찌꺼기 장기[熟臟]가 떠받치고 있으니, 이는 바로 거주하는 곳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넷째는, 또 어머니 태 속에 있을 때, 오직 어머니의 피를 통해 영양을 섭취했으니, 이는 곧 음식 섭취가 깨끗하지 못함이오.

다섯째는, 열 달이 꽉 차서 머리가 출산의 문을 향해 나올 때, 피고름이 함께 왕창 쏟아져 더러움과 피비린내가 흥건히 퍼졌으니, 이는 곧 출생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여섯째는, 얇은 살갗 한 겹으로 겉만 그럴듯이 뒤덮여 있을 뿐, 그 안은 어느 곳이나 온통 피고름으로 꽉 차 있으니, 이는 바로 온몸이 깨끗하지 못함이오.

일곱째는, 그러다가 나중에 죽은 뒤에는 시신이 부어 오르고 문드러져 뼈와 살이 사방으로 널려 여우나 이리 떼의 먹이가 되고 마니, 이는 바로 궁극까지 깨끗하지 못함이오.

이렇듯 자기 몸이 그러할진대, 남의 몸도 또한 그러할 것은 당연하오. 좋아하고 사랑하는 경계(境界)나 남녀의 몸 따위도 모두 그러하거니, 늘상 깨끗하지 못함을 관조하여 몹시 싫어하고 멀리 떠나려는 마음을 깊이 내어야 할 것이오.

만약 이와 같이 몸뚱이가 깨끗하지 못함을 관찰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음욕의 번뇌망상이 점점 줄어들 것이오. 이와 함께 경전에서 널리 말씀하고 계시는 열 가지 생각[十想] 등의 관찰법도 행하면 좋겠소.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원컨대, 제가 삼계에서 온갖 더럽고 냄새 나며 오욕에 탐닉하는 깨끗하지 못한 잡식성(雜食性) 남녀의 몸뚱이를 영원히 벗어나서, 극락정토의 법성의 몸[法性身] 받아 생겨나길 간절히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하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싫어하여 떠나는 염리행(厭離行)이오.

그리고 두 번째 흔연히 기뻐하며 바라는 흔원행(欣願行)에는 다시 두 가지가 있소. 첫째는 먼저 극락 왕생을 구한다는 뜻을 분명히 함이오. 둘째는 그 극락정토의 장엄들을 보고 믿어 흔쾌한 마음으로 왕생을 구하고 바라는 것이오.

우선 왕생의 뜻을 분명히 함은 이렇소.

“정토 왕생을 구하는 까닭은 일체 중생의 고통을 구제하기 위함인데, 지금 자기 스스로 생각해 보건대 나 자신은 아무런 힘도 없다. 이렇게 험악한 세상에서는 번뇌망상의 경계가 너무 강렬하여, 나 업장에 얽매여 삼악도에 떨어지고 한없는 세월이 지나도록 계속 륜회할 것이다. 시작도 없는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륜회하며 여태껏 잠시도 쉰 적이 없는데, 어느 때나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러한 까닭에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뭇 불보살님들을 가까이 하려고 구하는 것이오. 그래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해야만 바야흐로 험악한 세상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할 수가 있소. 그런 까닭에 『왕생론(往生論)』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소.

“보리심을 낸다[發菩提心] 함은 바로 부처가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고,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란 곧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이며,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은 바로 중생들을 거두어들여 부처님 나라에 생겨나도록 이끌겠다는 마음이다.”

그리고 극락정토에 왕생하길 원하면, 모름지기 다음 두 가지 수행을 갖추어야 하오. 첫째는 보리문(菩提門)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반드시 멀리 떠나야 하고, 둘째는 보리문으로 순조롭게 이끄는 세 가지 좋은 법을 모름지기 얻어야 하오.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나쁜 법을 멀리함은 바로 이런 것이오.

첫째, 지혜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자신의 즐거움을 구하지 않고, 내 마음이 나 자신에 탐착하는 걸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둘째는 자비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편안치 못한 중생의 마음을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셋째는 방편의 법문에 의지하는 것이오. 일체 중생을 불쌍히 여겨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려 하고, 자기 자신을 공경하고 공양하려는 마음일랑 멀리 떠날 수 있는 법문이기 때문이오.

이와 같이 하여 보리문을 가로막는 세 가지 장애를 멀리할 수 있다면, 바로 보리문에 순응하는 다음의 세 가지 법을 얻게 되오.

첫째는, 자기 자신을 위해 온갖 즐거움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無染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菩提)는 본디 물들지 않고 청정한 곳이오. 만약 자신을 위해 즐거움을 구한다면, 이는 곧 몸과 마음을 더럽게 물들이고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 그래서 물들지 않은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둘째는, 중생의 고통을 제거해 주기 때문에,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安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심은 일체 중생을 편안하고 고요하게 하는 청정한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을 건져 생사 륜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야겠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이는 곧 보리문에 어긋나는 것이오. 그래서 편안스런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셋째는,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대보리(大菩提)와 녈반을 얻게 하려고 바라기 때문에, 즐거운 청정한 마음[樂淸淨心]을 얻게 되오. 보리와 녈반은 궁극의 항상 즐거운[常樂] 곳이오. 만약 일체 중생들한테 항상 궁극의 즐거움을 얻게 해 주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보리문을 가로막는 것이오.(그래서 즐거운 청정한 마음은 보리문에 순응하는 것이오.)

그러면 이 보리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얻어지겠소? 핵심 요체는 바로 극락정토에 왕생하여 늘상 부처님 곁을 떠나지 않는 데에 있소. 거기서 무생법인을 증득한 다음에 다시 생사 륜회의 사바국토에 나와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되, 자비와 지혜가 안으로 혼융일체가 되어 선정으로 항상 사용하며 조금도 걸림이 없이 자유자재로운 것이 바로 참된 보리심이오.

이것이 첫 번째 극락정토 왕생을 구한다는 뜻이오.

두 번째 흔쾌한 마음으로 정토 왕생을 원한다 함은 이러하오.

극락 왕생을 바라는 마음이 흔쾌히 일어남은 아미타부처님의 인연 때문이오. 법신(法身)이나 보신(報身)이나 금색 광명 찬란한 가운데 8만 4천 큰 모습[相]을 나토시고, 큰 모습 하나하나마다 다시 8만 4천 작은 모습[好]을 나토시며, 작은 모습 하나하나마다 또 다시 8만 4천 광명을 쏟아내시어, 항상 온 법계를 두루 비추시면서, 념불하는 중생들을 빠짐없이 거두어들이시는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 중생들은 극락정토의 칠보장엄(七寶莊嚴)과 미묘한 즐거움 등은 물론, 『무량수경』과 『관무량수경』에 설해져 있는 16관법 등의 가르침을 잘 관찰하고 사유하여, 항상 념불삼매와 보시·지계 등의 모든 선행을 함께 닦아 나가야 하오. 그래서 그러한 수행 공덕으로 일체 중생들이 다 함께 극락국토에 왕생하도록 회향 기도하는 것이오. 그러면 결정코 틀림없이 극락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

이것이 바로 흔쾌한 마음으로 극락 왕생을 원하는 것이오.

 

 

정토십의론서: 극락정토 왕생을 아직도 머뭇거리는가? (천태지자대사 정토십의론) : 

정토십의론서(淨土十疑論序):

극락정토 왕생을 아직도 머뭇거리는가?

 

사랑(애착)이 끈끈하지 않으면 사바고해에 태어나지 않으며, 생각(념불)이 한결같지 않으면 극락세계에 왕생하지 못한다[愛不重, 不生娑婆; 念不一, 不生極樂]. 사바세계는 더러운 땅[穢土]이며, 극락세계는 깨끗한 곳[淨土]이다. 사바세계의 수명은 유한하며, 저 곳의 수명은 무한하다.

사바세계에는 모든 고통이 두루 갖춰져 있지만, 저 곳에서는 평안히 수양[安養]하며 어떠한 고통도 없다. 사바세계에서는 업장에 따라 생사고해를 륜회하지만, 저 곳은 한번 왕생하면 영원히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며, 만약 중생을 제도하길 원하면 어떠한 업장에도 얽매임 없이 뜻대로 자유자재롭게 할 수 있다.

두 곳의 깨끗함과 더러움, 수명의 장단, 괴로움과 즐거움, 생사 륜회 등이 이처럼 천양지차로 판연히 다르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까마득히 모르고 있으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리요?

아미타부처님께서는 극락정토에서 중생들을 거두어 받아들이는[攝受] 교주이시고, 석가여래께서는 여기 사바세계에서 극락정토를 가리켜 안내하시는 스승이시며, 관세음보살님과 대세지보살님께서는 부처님을 도와 중생교화를 널리 펼치시는 분들이시다.

이러한 까닭에 석가여래께서 한평생 가르침을 펴신 경전들은, 도처에서 간곡하고 자상하게[苦口相舊] 극락 왕생을 권유하고 있다.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대세지보살님께서는 커다란 원력의 배[大願船]를 타시고 생사고통의 바다[生死海]에 뜨시어, 이 쪽 언덕[彼岸: 사바세계]에도 집착하시지 않고, 저 쪽 언덕[彼岸: 극락정토]에도 머물지 않으시며, 중간 물살[中流: 천상이나 중음세계?]에도 멈추지 않으신 채로, 오직 중생 제도를 불사(佛事)로 행하신다. 그래서 『아미타경(阿彌陀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만약 선남자 선여인이 아미타부처님을 듣고 그 명호를 붙잡아 지니기를 하루 내지 이레 동안 하면서 한 마음 흐트러지지 않으면[一心不亂], 그 사람의 목숨이 다할 때 아미타부처님께서 뭇 성인 대중과 함께 그 사람 앞에 나타나시리니, 이 사람은 목숨이 끊어질 때 마음이 뒤바뀌지(흔들리지) 아니하면 곧장 극락국토에 왕생하게 된다.”

또 경전[無量壽經]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시방세계의 중생들이 내 명호를 듣고 내 국토[극락정토]를 생각하며, 온갖 공덕의 뿌리를 심으면서 내 국토에 생겨나기를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 기도하여, 정말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 것 같으면, (나는 결코) 올바른 깨달음[正覺]을 이루지 않겠노라.”

그래서 기환정사(祇桓精舍: 기원정사)의 무상원(無常院)2)에서는, 병든 환자들에게 서쪽을 향해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생각을 하도록 했다고 한다.

[무상원(無常院): 선가에서는 녈반당 또는 연수당(延壽堂)이라고 하는데, 림종을 맞이하는 환자 스님이나 노스님한테 인생무상을 관조하라고 특별히 배치한 장소. 햇빛이 들지 않는 서북쪽 구석에 두었다고 함.]

무릇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은 막힘이나 한량이 없어 시방 법계를 두루 비추면서, 념불(부처님을 생각)하는 중생들을 빠뜨림 없이 모두 거두어 받아들이시기[攝受] 때문이다.

성인(부처님)과 범부(중생)는 본디 한 몸[聖凡一體]인지라, 기연(機緣)만 맞으면 서로 감응(感應)하여 통하게 마련이다. 모든 부처님 마음 안의 중생은 티끌티끌마다 극락세계이고, 중생들 마음속 정토는 생각생각마다 아미타부처님이다[諸佛心內衆生, 塵塵極樂; 衆生心中淨土, 念念彌陀].

내가 이러한 리치로 보건대, 누구나 쉽게 극락왕생할 수 있다. 지혜로운 자는 의심을 끊을 수 있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선정(禪定)에 드는 이는 마음이 어지럽게 흩어지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계률을 잘 지키는 자는 온갖 오염을 멀리하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보시를 즐겨하는 이는 나[我]라는 생각이 없어서 쉽게 왕생할 수 있다. 또 인욕을 잘하는 자는 성내지 않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용맹스럽게 정진하는 이는 뒤로 물러나지 않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리고 선도 행하지 않고 악도 짓지 않는 자는 생각이 오롯이 한결같기 때문에 쉽게 왕생할 수 있고, 온갖 죄악을 지어 업보가 눈앞에 나타나는 이는 정말로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기에 쉽게 왕생할 수 있다.

그런데 비록 온갖 선행을 쌓았더라도, 만약 정성과 신심이 없고 깊은 마음[深心]도 없으며 (극락왕생에) 회향 발원하는 마음도 없는 자라면, 상품상생(上品上生)에 왕생할 수 없다.

오호라! 아미타부처님의 명호는 지니고 염송하기가 몹시 쉽고, 극락정토는 왕생하기가 매우 쉽다. 그런데도 중생들이 념불할 줄 모르고 왕생할 수 없다면, 부처님인들 그런 중생들을 어찌하랴!

【옮긴이 보충 해설: 일찍이 노자(老子) 『도덕경(道德經)』에서도, “상근기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믿고) 부지런히 (수)행하는데, 중근기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있는 듯 없는 듯 반신반의하며, 하근기의 선비가 도를 들으면 크게 비웃는다. (일반 중생들한테) 크게 비웃음을 사지 않으면 도라고 하기에 부족하다[上士聞道, 勤而行之; 中士聞道, 若存若亡; 下士聞道, 大笑之. 不笑, 不足以爲道].”고 말했다.

또 “내 말(도)은 알기도 매우 쉽고 행하기도 매우 쉬운데, 천하 사람들이 알 수도 없고(줄도 모르고) 행할 수도 없다(줄도 모른다.)[吾言甚易知, 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고 탄식했다.

불교의 여러 수행 방법 가운데, 특히 정토 념불 수행법문이 바로 노자가 탄식했던 것처럼, 가장 알기 쉽고 행하기 쉬우면서, 또 누구도 알려고 하지 않고 행할 줄 모르는 대도(大道)이리라.】

무릇 악업(惡業)을 지으면 삼악도에 떨어지고, 아미타불을 사념[念佛]하면 극락정토에 왕생한다. 이 두 가지 법문은 모두 부처님 말씀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지옥에 떨어질까 근심 걱정하면서도, 극락 왕생을 의심하는 자가 대부분이니, 이 또한 미혹됨이 아니던가?

동진(東晋) 때 혜원(慧遠) 법사께서 당시의 고아한 선비 류유민(劉遺民) 등 123인과 함께 려산(廬山)에서 백련사(白蓮社)를 결성한 것도 대개 여기(념불로 극락 왕생함)에 정성을 다했을 뿐이다. 그 뒤 7백 년 동안 승속(僧俗)이 다 함께 수행하여, 극락 왕생의 감응을 얻은 분이 한둘이 아니다. 그들의 수행 체험이 모두 정토전기(淨土傳記: 특히 『淨土聖賢錄』)에 실려 있으니, 어찌 허풍 떠는 거짓말이겠는가?

그런데 아미타부처님의 가르침을 높이 찬탄하고 널리 펼치는 글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만, 오직 천태(天台) 지자(智者) 대사의 『정토십의론(淨土十疑論)』이 최고 으뜸으로 꼽힌다. 대사는 성인의 거룩한 말씀을 인용하여 뭇 의심을 확 풀어 주고 온갖 미혹을 말끔히 씻어 준다. 마치 만 년(萬年) 동안 깜깜했던 암실(暗室)에 햇빛이 비쳐 들면, 단박에 밝은 빛이 가득 차는 것과 같고; 또한 천 리(千里) 먼 물길[水路]에 배를 띄워 순풍에 돛 달면, 자기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손쉽게 나아갈 수 있는 것과도 같다.

법장(法藏: 아미타부처님의 전생 원인 수행 당시의 신분) 비구의 후신(後身)이 아니라면, 결코 이러한 경지(정토십의론의 법문)에 이를 수 없을 것이다.

나 양걸(楊傑)이 얼마 전에 서울에서 이 글을 얻었는데, 설하신 법문을 읽고 나서 믿음이 절로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또 나 스스로 혹독한 벌을 받았는지라, 느끼고 깨달은 바가 더욱 인상 깊고 크기만 하다. 이에 이 법문을 널리 유포시키고 길이 전하기 위하여, 삼가 몇 자 서문을 덧붙인다.

송(宋)나라 무위자(無爲子) 양걸(楊傑)

 

[양걸(楊傑): 자(字)는 차공(次公), 자호(自號)는 무위자(無爲子) 또는 무위인(無爲人)이며, 생졸 연대는 분명하지 않으나, 대략 송나라 신종(神宗) 원풍(元豊: 1078~1085년) 전후에 생존했다. 젊어서부터 명성이 있었으며, 가우(嘉祐) 연간에 진사에 급제하고, 원풍(元豊) 연간(1081년 전후)에 관직이 태상(太常)에 이르러, 그 당시의 예악(禮樂)에 관한 조정의 토론에는 모두 관여했다. 원우(元祐: 哲宗 연호, 1086~1093년) 연간(1090년 전후)에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이 되었고, 윤주(潤州) 지사로 나갔고, 양절제점형옥(兩浙提點刑獄)에 제수되었으며, 70세로 작고했다. 저서로 문집 20여권과 악기(樂記) 5권이 있다. (宋史 권443, 列傳제202, 文苑5 및 권128, 志제81, 樂3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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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도종린포체 말씀:

정토에 태어나면, 수행이 잘 되고 보살로 성취하기가 아주 쉽다시며,

정토로 가기를 발원하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https://ntassabas.tistory.com/307

 

***도종린포체 말씀: 정토에 태어나면, 수행이 잘 되고 보살로 성취하기가 아주 쉽다시며... /도종

도종린포체 말씀: 정토에 태어나면, 수행이 잘 되고 보살로 성취하기가 아주 쉽다시며, 정토로 가기를 발원하라고 거듭 말씀하셨다. 인도 따시종 둑빠까규 사원 탐방기 - 2013년 구루대제 일지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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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일스님의 미타신앙 내력 :[관세음보살이 권한 가장 빠른 성불법]https://ntassabas.tistory.com/288

 

***혜일스님의 미타신앙 내력 :[관세음보살이 권한 가장 빠른 성불법]

혜일스님의 미타신앙 내력 : [관세음보살이 권한 가장 빠른 성불법] '현세와 내세의 행복 함께 보장하는 아미타불' / 월호 스님 부디 명심하십시오. 미타신앙은 현세와 내세의 행복을 함께 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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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도윤회 벗어난 극락세계 성불학교의 탁월한 공부환경(묘주스님)https://youtu.be/A8nrGJjK7cU

왕생론강기(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실상實相)- 독송--- (유투브 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508

 

왕생론강기(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실상實相)- 독송 ---(유투브 모음)

(원본: http://cafe.daum.net/MRSB/RCtG/62) 왕생론강기(서방정토 극락세계의 실상實相)- 독송--- (유투브 모음) ---------------------------------------------------------- 전체 독송: 천국 중의 천국[天中天], 윤회계를 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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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토삼부경 (불설아미타경, 불설무량수경, 관무량수경) -https://ntassabas.tistory.com/335

 

***정토삼부경 (불설아미타경, 불설무량수경, 관무량수경) -동국역경원

불설아미타경 : 요진구자(姚秦龜玆)삼장 구마라집(鳩摩羅什) 한역, 최윤옥 번역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https://abc.dongguk.edu/ebti/c2/sub2_pop.jsp?nbooknum=250&startpage=0&endpage=5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abc.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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