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불 염불/왕생사례1-*중요 정리

***자재왕생!!!~~~ 병고없이 미리알고 ---(사례모음)

아미연(阿彌蓮) 2021. 3. 11. 22:21

(원본:https://cafe.daum.net/MRSB/RCsr/19 )

자재왕생!!!~~~ 병고없이 미리알고 ---(사례모음) :

 

 

​# 자재왕생 하려면

 

염불인이 임종시 장애 인연을 만나지 않으려면 첫째, 3년~5년 염불정진하여 공부성편功夫成片에 이르도록 염하여 미혹을 조복한 사일심불란事一心不亂에 도달하면 곧 자재왕생할 수 있다. 임종시 타인이 조념할 필요 없이 선 채로 앉은 채로 곧 왕생할 수 있고, 속진을 털어내고 맑고 시원하게(瀟洒) 자재왕생할 수 있다.

3년~5년 이러한 시간은 결코 함부로 하는 말이 아니고 수많은 왕생전기의 총결에서 나온 말로 매우 많은 염불왕생의 성공사례 중 대부분은 3년~5년에 곧 자재왕생한다.

황념조 대덕의 법문에 따르면 3년~5년 동안 일일공과로 3만번 부처님 명호를 염하되, 최소한 1만번 아래로 떨어져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대덕 거사들은 일과로 5만 번 이상 염불하였다.

임종시 결정코 자재 왕생하려면 반드시 한 매듭의 긴 시간 동안 염불 정진하여야 희망이 있다. 한가롭게 그저 흘려보내며 염불하면서 관행위觀行位에 이르도록 염하려고 한다면 오계ㆍ십선이 원만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틀림없이 비현실적인 것이다.

 

- 인광대사문초청화록(허서 역, 근간)

 

출처: 자재왕생 하려면 : 네이버 블로그https://m.blog.naver.com/tladu7935/222543005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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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주삼매경 (동국역경원)https://ntassabas.tistory.com/190

 

반주삼매경 (동국역경원)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지루가참(支婁迦讖) 한역, 한보광 번역 (동국역경원) https://abc.dongguk.edu/ebti/c2/sub2_pop.jsp?nbooknum=609&startpage=0&endpage=89 동국대학교 한글대장경 abc.dongguk.edu https://abc.dongguk.edu

ntassabas.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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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왕생하려면

일심불란(一心不亂) 이르기까지 염불해야”

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⑫ https://cafe.daum.net/mahayeonsutra/n8k3/12

 

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⑫

“극락왕생하려면 일심불란(一心不亂) 이르기까지 염불해야”중국 정공 스님의 '무량수경청화' 법문 ⑫잡되고 산란하면 왕생 불가능염불공부 한 덩어리에 이르면부처님이 오셔서 접인하실 것

cafe.daum.net

 

*정공큰스님 정토법문 한글더빙 -법등사설오스님TV (유투브) 정공큰스님 정토법문 한글더빙 - YouTube

 

정공큰스님 정토법문 한글더빙

 

www.youtub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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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먼 노파의 왕생 이야기 (염불감응사례)-중국어/한글 통역https://youtu.be/StkCR-mH-Bw

(왕생사례눈먼 노인이 갈 시간을 미리 알다 정전스님 법문(양산염불당 개원법회)https://youtu.be/7axvNRL2CT0

 

 

욕쟁이 할매, 하루 3만편 3년간 “나무아미타불” 하여 환골탈태 후 왕생https://youtu.be/b892AYWIr10

승보종찰 송광사 방장 故 보성스님이 법문하신, 욕쟁이 할매 이야기입니다.

이 할머니는 "나무아미타불"을 하루 3만 편 3년 동안을 지속한 후,

환골탈태하였으며, 임종을 미리 아시고 편안히 왕생하셨다는 것입니다.

 

 

4년 염불로 왕생한, 이복연 보살님의 서상瑞祥(무지개 원상)과 조념염불 모습https://youtu.be/sy3nJM0BETM

할머니는 해현노화상과 마찬가지로 글자도 모르고, 심지어 국문도 잘 알지 못하여 경을 들을 수도 없었고, 

성질도 고약했으며 번뇌의 장애마저 무거웠다.

그러나 마지막 4년동안 “아미타불” 한 구절을 성실하게 염하여, 

번뇌와 습기가 점차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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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숙하게 염불하여 앉아서 왕생하다정토종 (홍원염불회) | 어리숙하게 염불하여 앉아서 왕생하다 - Daum 카페

 

어리숙하게 염불하여 앉아서 왕생하다

어리숙하게 염불하여 앉아서 왕생하다 대만 의란宜蘭에 매일 십만 번씩 염불하는 노보살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노보살님은 아주 간단하여 염불밖에 할 줄 몰랐고, 그 밖의 독경 등은 전혀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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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군향將軍鄕의 한 노파, 서서 극락왕생하다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D/16

 

장군향將軍鄕의 한 노파, 서서 극락왕생하다

근대, 약 30년 전에 저는 불광산佛光山에서 개최한 대전불학강좌大專佛學講座에 참가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저녁에 열 사람이 넘는 동학들이 방생지放生池 옆에서 불법에 관한 토론을 하였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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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법륜각 보살의 염불과 왕생

 

보국사 태원큰스님 구술

이 법륜각 보살은 서울 정릉 보국사 신도이다. 1923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났는데 한국전쟁 때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면서 정릉의 보국사에 다녔다. 법륜각 보살은 처음에는 참선에 관심을 가지고 참선수행을 하였는데, 인천 용화사의 송담큰스님을 친견하고 그분의 가르침에 따라 간화선을 수행하였다 한다.

그렇게 참선에 몰두하였으나 간화선이 최상승인지라 자신의 근기에 맞지 않다고 여기고 있던 차, 1960년경 보국사에서 대동염불회를 조직하여 정토염불법을 크게 펼치신 자운(慈雲, 1911~1992)큰스님을 만나게 되면서부터 정토염불을 알게 되었다.

자운노스님께서는 3.1운동 독립선언에 참여한 33인이었던 용성(龍城)큰스님의 전법제자로, 1981년부터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셨으며, 해인사에 계실 때 수산(秀山)스님과 함께 만일염불회를 결사하시어 정토왕생업을 닦으셨고 또 보국사에 오셔서는 대동염불회를 조직하시어 정토염불을 널리 펼치신 분이시다.

1992년 스님께서 해인사에서 열반하실 때에는 “서쪽을 향하여 합장하고 단정히 앉아 아미타불의 명호를 칭명하면서 조용히 입적하시니 향기가 진동하고 묘음이 청아하였으며 염불소리와 함께 입으로부터 오색광명이 서쪽하늘을 가득 메웠다.”고 한다.

법륜각 보살은 보국사에서 이러한 자운스님으로부터 정토법문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그동안 수행하던 참선을 내려놓고 서방정토에 귀의하여 오로지 ‘나무아미타불’ 염불만 하였다. 이로부터 30여 년간을 한결같이 하루에 10만독 씩 염불하셨다고 한다. 10만독이라면 하루종일 염불을 놓지 않았다는 것이 된다.

하루는 보국사 주지이신 태원스님께서 법륜각보살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법륜각 보살은 텔레비전을 보면서 염주를 돌리고 있었다. 스님께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염불하면 염불이 제대로 되겠느냐?”고 물었다.

법륜각 보살은 웃으면서 “그래도 염불이 됩니다.”고 대답하였다. 스님께서는 이 말을 듣고 속으로 의아스러웠다고 한다. 상식적으로 텔레비전을 보면서 염불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법륜각 보살은 일상생활 속에서도 걸림없이 염불이 돌아가는 경지에 있었던 것이다.

당시 보국사의 대동염불회는 만일염불회의 전통을 계승하여 대단한 신심과 원력으로 염불결사를 한 모임으로, 대표는 회서 홍인표거사가 맡고 있었다. 홍인표거사는 임종 후 사리가 나올 정도로 철저히 수행하셨다 한다. 그리고 그가 지은 는 한국근현대불교사에서 정토에 대해 가장 최초로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서술을 한 저서로 평가받고 있다.

법륜각 보살은 바로 이러한 대동염불회의 수행분위기 속에서 염불수행에 매진하였던 것이다. 재가자들이 모여 이렇게 염불수행을 열심히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물론 자운노스님의 원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운스님께 비구계를 받으시고 스님과 함께 해인사에서 염불만일회를 결사한 수산스님께서도 대구에서 염불선원을 세우시어 수많은 재가 염불행자들을 배출하였으며, 수산스님께 염불법을 배우신 법장(法藏)스님께서도 경주 미타사에서 1985년 염불만일연회를 결사하시어 20년 넘게 염불수행과 포교를 해 오시는데, 여기에는 자운스님의 크신 원력이 밑받침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법륜각 보살은 평소 심장이 안 좋았는데, 왕생 수개월 전에는 병환이 심해져 몇 차례 병원입원을 한 적이 있었다. 길게는 열흘, 짧게는 일주일 정도 입원하였다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곤 하였다. 이즈음에 법륜각 보살과 아시는 분이 보살님을 도와드리며 함께 생활하고 있었는데 법륜각 보살이 병원에 입원할 때도 늘 함께 따라가서 간병해 주곤 하였다.

법륜각 보살은 간병도우미인 그분에게 불교를 가르쳐주어 불법에 귀의하게 하고 보국사에도 함께 가곤 하였다. 1998년 어느 날, 법륜각 보살이 세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병원에 입원하였을 때였다. 이때도 간병인이 함께 가서 간병을 해 주었는데, 이번에는 병환과 노환이 심해 더 이상 생명을 이어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임종할 때가 다 된 것이었다.

법륜각 보살은 침대에 누워서 임종에 임박한 상황에서도 평소와 다름없이 염불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부처님이 오신다!”, “부처님이 오신다!”하고 두 번이나 외치고는 몸소 침대에서 내려와 서쪽을 향하여 세 번 절을 올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다시 침대에 돌아와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이것은 이 자리에 함께 있었던 간병인이 분명히 목격한 사실이다.

간병인은 나중에 태원스님께 이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함으로써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다. 태원스님은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예전에 법륜각 보살이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염불이 된다는 말을 비로소 의심없이 믿었을 뿐 아니라 평소에 지극한 정성으로 염불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웬만한 수행력을 지닌 고승이라 해도 임종에 이르러서는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상황이기에 앉아있기도 불가능한 처지인데, 법륜각 보살은 임종을 바로 앞둔 상황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와 삼배를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평소에 지극정성으로 염불한 공덕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며, 이러한 염불공덕으로 임종 직전에 아미타부처님의 내영(來迎)을 받고 가피를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나무아미타불

 

출처: 나무아미타불 :: 이 법륜각 보살의 염불과 왕생 (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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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에 아미타불과 관음보살님 친견하고 왕생하신 정공 큰스님의 모친 마태馬太부인의 염불수행과 서상瑞祥 https://youtu.be/6h9MOmcJmZ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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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中 길림성 장춘시 불서佛瑞 보살, 미소지으며 자재自在 왕생 https://youtu.be/jEMi87jkBMQ

글쓴이: 무량수여래회-자항 김성우

 

中 장춘시 불서佛瑞 보살,

미소지으며 자재自在 왕생

 

2019년 10월 27일, 중국 길림吉林성 장춘시長春市의 불서佛瑞(속명 조문예祖文銳) 보살이

스스로 법복을 입고 침상에서 아미타부처님의 접인(接引)을 기다린 후, 미소를 띤 채 왕생극락하였습니다. 세수 52세.

 

그녀는 극심한 가난 속에서 폐암과 난소암으로 투병생활을 해왔으며,

스스로 이생의 고통을 끝내고 윤회를 벗어난 극락세계에서 성불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고 오로지 아미타불 염불만 하면서 왕생을 발원하였다고 합니다.

 

그녀는 왕생 시간을 미리 예지하고 편안하게 임종하였으며, 숨을 거둔 지 한참 후에도 온몸이 부드러웠다고 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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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淨土聖賢錄] 김광전金光前 장군과 부인 공씨龚氏의 염불왕생(무량수여래회 慈航 번역/더빙/편집)https://youtu.be/q5JoAL6ZLbo

무량수여래회-자항 김성우

#보리권속菩提眷屬왕생기往生記

무량수여래회 慈航 번역/더빙/편집

 

김광전 장군과 부인 공씨의 왕생

 

金光前。清族正黄旗人(清代的户口编制,用八种不同颜色的旗子加以区别)。起身于戎伍之间,平日若看见善事一定发心去做。并告诫一切士兵,不得随意杀人,不可奸淫任何一个妇女,不许掠夺任何一件财物,不准烧毁任何一间屋舍。

김광전金光前은 청족淸族의 정황기인(正黃旗人·청대의 호구 편성으로 8가지 색깔의 깃발로 구별)이었다. 

군대의 무리 사이에서 출세하여, 평소 좋은 일을 보면 반드시 마음을 내어 행하였다. 또 모든 군사에게 임의로 사람을 죽이지 말며, 어떤 여자도 간음하지 말며, 어떤 재물도 빼앗지 말며, 어떤 집도 불사르지 말 것을 경고하였더라.

 

光前的妻子龚氏,也能识字诵经。清世祖顺治十年(西元一六五三年),随著军队出征到福建,取道经过杭州时,听闻具德和尚讲经说法于灵隐寺。金光前于是偕同妻子前往参访叩问,亲身蒙受具德和尚的开示,从此以后一心念佛而有所得。

김 씨의 아내 공씨龚氏도 글을 읽을 줄 알아 불경을 독송하였다. 

청 세조 순치顺治 10년(서원 1653년), 군대를 따라 아내를 데리고 복건福建으로 출정하였다. 항저우를 지나다가 구덕具德 화상이 영은사靈隱寺에서 경법經法을 설법說法하는 것을 들었다. 이에 김 씨는 아내를 대동하고 참방하여 구덕 스님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으며, 이후 일심염불一心念佛로 얻은 바가 있었다.

 

清世祖顺治十二年(西元一六五五年)夏天,返回北方之时,半途驻军于钱塘江的水边。金光前忽然现出病相,妻子龚氏准备为他延请医生。

청나라 세조 순치 12년(서원 1655년) 여름, 북쪽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전당강錢塘江 수변에 주둔하였다. 

김 씨가 갑자기 병이 들자, 아내 공 씨가 의사를 불러주려 하였다.

但金光前则阻止她说:‘我以前曾经与你亲自去请教灵隐寺的具德和尚,而今正想作转身西方净土的打算,以求证明和尚所说的,还要医药作什么呢?’

그러나 김광전은 말리면서 아내에게 말하였다. “이전에 영은사의 구덕 화상께 직접 가르침을 받은 바 있었는데, 지금이 곧 서방 정토로 돌아가야 할 때인 듯 하오. 왕생극락으로 화상의 설법을 증명하려 하니, 약이 무슨 필요가 있겠소?”

龚氏于是大笑说:‘没有料想到夫君也修得此种境界。’

공씨는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부군께서도 이런 경지까지 닦은 줄 몰랐습니다.”

于是就叫人制造两个棺木,并说道:‘我与夫君您一起走,但是要稍晚一些,等到为您办完后事吧!’金光前听完这席话,即合掌而往生。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두 개의 관을 만들며, 남편에게 말했다. “나도 부군과 함께 왕생하겠소! 다만 당신이 왕생한 얼마 뒤에 따라 가리다.” 

김광전은 공씨의 말을 다 들은 후, 곧 합장한 채로 왕생극락하였다.

 

龚氏派遣使者到灵隐寺,请求为他们两人点灯,并且嘱咐要供斋饭僧修习忏法。

공씨는 영은사로 사자를 보내 연이어 왕생할 부부를 위해 등불을 켜달라고 부탁하고, 기도승에게 참회법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到第七天完毕后,摒除断绝一切的饮食,日夜不睡觉休息,专志一心地念佛。

공씨는 (남편의 장례를 치른 후) 7일째가 되자 모든 음식을 끊은 채 밤낮으로 잠도 안 자고 쉬면서 일심으로 염불에만 몰두하였다.

又经过七天,午后,龚氏看太阳很早就下山了,便靠著棺木而睡。一会儿,睡醒说:‘时候到了!’然后端坐,念佛而往生。(果报闻见录)

다시 7일이 지난 오후, 공씨는 해가 일찍 진 것을 보고 하산하여 관을 쓰고 잠을 잤다. 잠시 후, 잠에서 깨어나 “시간이 되었습니다!”하고는 단정하게 앉아 염불하며 왕생극락하였다.(과보문견록)

 

 

자비는 안락의 근원이자, 지혜가 머무는 곳이다. 잠시 머물다 다시 오지 않을 인생에게 의미를 갖게 한다.

论曰:‘王公大臣要悟入佛道,是比居士还要难。急求功名的人,必定以进取执著为首要。而沉溺于安逸快乐的人,必然以寂静修行为苦事。

『정토성현록』에서 논하였다. 

왕공王公이나 대신이 불도에 깨달아 들어가는 것은 거사보다 더 어렵다. 공명을 급히 구하는 사람은 반드시 집착하는 대상으로 향하는 것이 우선이다. 안일한 쾌락에 빠진 사람은 고요한 수행을 괴로운 일로 여기기 마련이기에.

若不是宿世种植的善因,并且坚持自己纯正的誓愿,哪里有不于修行之事畏难而退的呢?

숙세에 심은 선인(善因)이 아니라면, 자신의 순수한 서원을 굽히지 않고 수행하는 일에 어떻게 두려워하거나 퇴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像我们前面提到的诸公,不舍世间的尘劳,而一同归心于西方净土,这可说是现宰官身而说法的人了!

앞서 말씀드린 제공들처럼 세상의 노고를 마다하지 않고 서방의 정토에 함께 귀의했다는 것은 현재 벼슬아치의 몸으로 설법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至于如柳宗元、白居易、苏东坡、赵子昂等诸位贤人,曾经赞叹归依佛道,净土的因地是具足。

유종원, 백거이, 소동파, 조자앙 등 여러 현인들은 불도에 귀의하여 서방정토의 인지因地를 구족했다고 찬탄했다.

但是当临命终神识要脱离色身的时候,其感应的瑞相却很少听到。

그러나 임종시에 아뢰야식(神識)이 색신을 벗어나려 할 때, 그 감응의 서상은 잘 들리지 않는다.(서상이 드물다)

这实在是因为世智辩聪,而迷惑于种种的思想歧途之中;因为有贪爱执著、割舍不下而产生弊病。

세간의 지혜와 총명함 때문에 온갖 사상에 현혹되고, 탐욕과 애정, 집착을 버리지 못해 생기는 병폐다.

读书人的结习难改,从古至今都是如此。到了生死关头的时候,绝对是很难徼幸得以超脱生死的。往后的贤人君子,应当要知道引以为警戒。’

독서인의 안 좋은 습관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생사를 초탈할 수 있는 것은 결정코 어렵다. 앞으로의 현인ㆍ군자는 응당 경계할 줄 알아야 하리라.

 

220净土圣贤录:往生王臣第六 清 金光前、龚氏 转自《学佛网》,原文地址:http://text.xuefo.net/show1.asp?id=18...

 

 

--->(*참고 :)

대통령 여섯 분 장례담당 30년 장의사 장례명인의 이야기 :

이건희의 묘를 크게 하고 싶었던 이재용?…30년 염장이의 이야기https://youtu.be/qRva0FH458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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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빚 독촉을 염불로 해결하다.(상)

 

10년 전 2월 초순으로 기억된다. 대아의 용선사 주지스님과 대중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만났다.

그분은 2월 29일 자기의 절에서 법문을 해 줄 것을 요청했는데, 나는 즉시에 갈 것을 약속하였다.

법회일에 나는 "무상지보"(無上至寶) 즉 극락세계의 삼존불의 그림과 염불하는 방법을 적어놓은

책과 정토법문에 관한 소책자들을 법문이 끝나고 골고루 나누어 주어

법회에 참여한 신도들과 좋은 인연을 지었다.

 

다음 해 2월 대중에 있는 영산사에서 7일 기도를 할 때였다.

그 날은 혜번스님이 담당하는 날이었다. 오후 3시 무렵 내가 염불당에서 염불을 하고 있을 때였다.

혜번스님이 내게 다가와 장삼을 슬쩍 당기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더니 거기에는 50세 가량의 시골 부인이 한 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그 부인을 전혀 알지 못하겠기에, 물어보았다.

「당신은 어디에 살고 있으며, 무슨 일로 저를 찾습니까?」

그가 말하길...「저의 남편이 저에게 스님을 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하라고 했습니다.

아침 일찍 이 도시에 와서 사방으로 스님을 물어보았는데

어떤 분이 여기 계시다고 하여 이렇게 왔습니다.

한가지 일을 스님에게 알려드려서 당신의 은혜에 보답을 하려는 것입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한 두 마디의 말로 끝나지 않을 것 같고, 또 영산사는 7일기도 중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도량에서 대화를 하기에는 불편하여 밖으로 나갔다.

 

그 부인이 말하길...「저는 대아의 부근 시골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스님이 작년 2월 대아의 용선사에서 법문을 할 때 저의 아들 뢰흥복도 그 자리에서 법문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무상지보"라는 소책자를 가지고 돌아오더니 그 날부터 불교를 믿고,

매일 예불과 염불을 "무상지보"의 방법대로 실천하였습니다.

아침과 저녁 뿐 아니라 거의 하루종일 낮과 밤 동안 부처님을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고,

마음도 부처님을 떠나지 않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너무나 신기하게 생각했다. 사바세계에 어떻게 이런 복 많은 사람이 있어서 한번 불법을 듣고, 곧바로 실천수행을 할 수 있었는지?

 

내가 다시 물었다.「당신 아들의 나이는 몇이며, 무슨 직업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발심을 했는가?」

부인이 말하길...「저의 아들은 작년에 25세 였습니다. 그는 대학을 23세에 졸업했습니다.

집에 돌아오자 폐결핵에 걸려서 매일 악을 먹고 침을 맞는 등 3년 동안 적지 않은

재산을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시작한 뒤부터 몸은 비교적 건강해 졌고,

정신적인 것도 낙관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는 가끔 시내에 가서 불교서적을 구해보기도 했습니다.」

 

내가 또 물었다...「당신 집안에는 몇 식구가 살아요?」

부인이 말했다...「남편과 저 그리고 소실(첩)과 아들 이렇게 넷입니다.

아들이 병에 들자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정성을 다해서 간호하였고,

속히 완치 돼서 우리 세 사람의 의지처가 되기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작년 12월 초순에 흥복이 갑자기 우리 세 사람을 함께 부르더니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버님과 두 분의 어머님, 저는 오늘 낮에 서방극락세계로 가게될 것입니다.

당신들 세분은 절대로 상심하지 마시고, 아들 없는 것에 근심하지도 마세요.

우리 형님이 일본에 건너간지 수 십 년이 되어도 소식이 없었지만,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가정과 사업을 세우고,

결혼하여 아들이 있습니다. 형님은 2월 초순에 소식이 올 것이며,

일본과 왕래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더 이상 적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의 남편이 말하길...『너의 몸이 이전에 비해서 아주 건강해 졌는데 왜 떠나려 하는가.

아미타불에게 너를 보호해줄 것을 기도할 것이니, 절대로 가려고 하지 말아라. 』

 

이때 흥복이 말하길...『나는 본래 빚을 받으러 온 것입니다.

당신들 세 사람은 과거에 저와 깊은 원한 관계를 맺었고, 저에게 많은 책무를 지고 있었습니다.

금생에 당신들의 아들이 돼서, 대학까지 나온 상태에서 바로 나쁜 병에 에 들었습니다.

3년 동안의 투병생활에 아직 책무가 다 끝나지 않았습니다.

본래는 이 집과 소유한 땅도 다 팔아치우고 당신 세 사람이 완전히 걸인이 돼서 살아도

죽은 것만 못한 상태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숨을 걸고 일심으로 염불하여 여러 생 동안 지었던 죄업을 소멸시키고,

극락세계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 네 사람은 원한도 없고 빚도 없습니다.

당신들 세분도 지성으로 아미타불을 염하여 극락세계로 가십시오.

그런 다음 우리가 다시 만나면 영원히 함께 살면서 헤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분명히 기억해 주세요. 시간이 다 됐어요. "무상지보"를 이리 주세요.

당신들 세분도 저를 도와서 염불해 주세요.

그리고 울어서는 안되며, 저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지도 마세요.

등을 저에게 보이고 절대로 돌아보지 마세요. 저도 염불을 하겠습니다.』

 

흥복이 "무상지보"를 두 손바닥에 사이에 두고 합장하였고, 처음에는 큰 소리로 염불하였습니다.

우리들도 따라서 염불했는데, 그가 돌아보지 말라고는 했지만 저는 가끔 슬쩍 슬쩍 돌아보았습니다.

대략 20분이 지나자, 흥복의 소리가 점점 줄어들더니 숨이 끊어질 무렵에 합장이 풀리고,

"무상지보"는 그의 가슴 앞에 떨어지고, 편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08] 빚 독촉을 염불로 해결하다. (하)

 

부인은 잠시 쉬었다가 다시 말했다...

「저희 집은 방이 많아서 모두 여러 사람에게 세를 주었습니다.

본래 흥복이 폐병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

모두 전염될까보아 겁을 내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할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흥복이 임종할때의 모습을 지켜본 다음에 모두가 마음 한곳에 느끼는 바가 있었으며,

이구동성으로 불교의 영험이 불가사의 하다고 하며 이사가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다만 그가 임종할 때 말한 큰형에 관한 이야기는 최근까지 우리들 누구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일본에서 친척을 찾는다는 편지가 왔습니다.

참으로 흥복의 예언이 완전히 들어맞았습니다.

그러나 저의 남편이 말하길...

 

『만약 스님이 사람들에게 염불을 권하는 법문을 하지 않았다면,

흥복이 임종전에 어떻게 이 많은 인과의 일을 알 수 있었을 것이며,

원한을 해결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의 큰형이 일본에서 예언한 날에 맞추어 편지가 온 것을 보아

흥복이 유언한 일은 모두 믿을만 한 것입니다.』

저의 남편이 또 말하길...

 

『이후에 우리가 행복하게 노년을 보낼 수 있는 것은 모두 스님의 공덕을 입은 것이니,

이 은혜와 이 정은 반드시 갚아야 하는데,

우선 스님을 찾아서 이 기이한 영험의 사실을 말씀드려서 기적을 알게 하고,

당신에게 기쁨을 전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은정에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내가 그 부인과 남편의 이름을 물었는데 그가 주소와 이름을 말했는데,

그동안 함께 듣던 혜번스님이 부인의 남편과는 가까운 친척이라고 말해서 한번 더 놀랐다.

 

우리 세 사람은 영산사의 담 밖에서 두시간 가량 시간을 보냈다.

이미 5시가 넘었다.

이상에 말한 두 가지의 이야기에서 확실히 아미타불이 계시며,

극락세계도 존재한다는 확신할 수 있다.

아미타불을 부르면 원수 맺은 업도 해결할 수 있으며,

다겁동안 지은 죄업도 소멸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미타경에 보면...『그 국토(극락세계)의 중생들은 항상 새벽마다 새 옷을 입고,

여러 가지 꽃을 모아서 다른 세계의 10만억 부처님을 공양올리고,

식사시간이 되면 본국으로 돌아간다.』라고 하였으니,

 

극락세계의 중생들은 왕생한 다음에 신족통(몸을 자유로이 움직이는 신비한 힘)을 얻기 때문에,

이 세상으로 자유롭게 올 수 있을 것이다.

더 자세한 일은 현명한 독자들이 나를 위하여 해석해 주길 바란다.

 

출처:대만의 염불 감응록 모음 http://cafe.daum.net/amtb/Jrdc/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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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허대사염불론’ 중에서 -자재왕생 세분의 사례:

 

사람이 임명종시 마지막 숨이 끊어지려할 때, 그 사람의 일생 동안 지은 업이 최후의 호흡 한마디 아미타불을 따라 극락왕생하여 부처님을 친견하는 것이다. 염불왕생에 관하여 출가 재가 남녀노소의 임종 시 갖가지 상서로운 모습은 왕생 전에 수록되어 있으며, 이런 사례는 하도 많아 이루 셀 수가 없다.

 

내가 출가 후 직접 두 눈으로 본 것만도 스무 몇 분이나 되고 기타 전해들은 사례는 헤아릴 수도 없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심을 계발(啓發)하기 위해 제가 본 가운데 세분의 사례를 들겠다.

 

 

첫 번째는 출가한 수무(修無)법사이다.

 

이분은 영구(營口)사람으로 벽돌을 굽고 기와를 쌓는 장인(匠人)출신이다. 생활환경이 좋지 않고 일할 때도 고생이 싫었기 때문에, 우리의 이 세상에는 고통만 있고 즐거움이 없음을 느꼈으며 여러 번 고통을 벗어날 방법을 생각했다.

 

나중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염불이 좋다는 말을 듣고 곧 발심하여 염불을 하였다. 출가 후 정식(正式)으로 불법을 듣고 나니, 염불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해졌으며, 만나는 사람마다 염불할 것을 권하였다. 민국18년 내가 동북 하얼빈 극락사에서 제한(諦閑)노스님을 초청하여 계를 전(傳)하였다.

 

어느 날 어떤 스님이 나를 찾아와서 영구에서 수무(修無)스님이 오셨는데 전계(傳戒)하는 동안 발심하여 고행을 하겠다고 하였다.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했더니 아픈 사람을 돌보는 일을 하겠다고 했다. 극락사 감원직을 맡고 있던 정서스님이 요사채에서 방하나 내 주었다.

 

십여 일이 지난 후 다시 나를 찾아와서 가겠다는 것이었다. 정서스님이 옆에서 말씀하셨다.

“스님이 발심하여 아픈 사람을 돌보겠다해 놓고서 열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가시겠다하는가? 너무 항심(恒心)이 없는 게 아닌가?”

“제가 다른 곳으로 가려는 게 아니라 극락왕생을 하려 합니다. 부탁이니 감원스님께서 자비심을 내어 장작 몇 백 근만 준비하여 죽은 뒤 태워 주십시오.”

 

정서스님이 물었다.

 

“언제 갈 것인가?”

“열흘 내에 갈 것이다.”

이 말을 마친 수무스님은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다음날 수무스님은 다시 나와 정서스님을 찾아오셨다.

“스님들께 휴가를 부탁드립니다. 제가 오늘 갈 것인데 방하나와 거사님(중국에는 남여신도를 모두 거사라 함) 몇 분을 불러 염불하여 저를 바래다주십시오.”

 

정서스님은 빈 방을 찾아 널판자 몆 개를 펴서 침대를 만들고 또 외료(外寮)에서 스님 몇 분을 찾아서 염불 해주기로 했다. 수무스님이 왕생하기 전 염불을 해 주려고 모인 사람들이 “수무스님 오늘 곧 불국토로 가실 건데 시를 몇 구절 적어 주시던지 아니면 게송이라도 기념으로 남겨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우둔해서 시를 지을 줄도 모르고 게송도 지을 줄 모르오. 다만 경험의 말을 여러분께 들려주고 싶은데, 바로 말만하고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진정한 지혜가 아니오.”

 

수무스님의 이 말을 듣고 모두가 마음이 든든해지고 편안해짐을 느꼈다. 이어 대중이 다 같이 염불하고 수무스님도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을 시작했다.

 

염불을 한지 15분도 채 못 되어 스님은 왕생을 하셨다. 상주(常住)에서 임시로 감실을 하나 만들고 밤이 되자 그를 감실로 옮겼다. 비록 더운 날씨였지만 그 얼굴이 맑고 수려함이 평소와 달랐다. 몸에서는 조금도 나쁜 냄새가 나지 않았으며 파리 한 마리도 붙지 않았다. 제한노스님과 일반 신도들이 서로 다투어 보러 갔고 희유함을 찬탄하셨다.

 

이튿날, 나무에 불을 붙여 다비식을 지내는데 빨간 불과 흰 연기에 조금도 이상한 냄새가 없었다

 

 

13. 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두 번째는 정석빈 거사인데 산동성 해묵사람으로 장사를 하였다. 불경(佛經)을 읽은 인연으로 염불이 좋음을 알았고, 곧 발심하여 염불하였으며 평생 장가를 가지 않았다. 민국22년 청도에서 내가 귀의와 염불에 대한 법문을 하였는데 법문을 듣고 나니 그의 염불하는 마음은 더욱 더 간절해졌다.

 

집안일을 모두 동생에게 맡기고는 일심으로 염불만 하였다. 그 후 아미타경을 배워 능숙하게 강의를 할 수 있었다. 매년 마다 꼭 해묵으로부터 청도로 오셔서 하루 이틀 묵곤 하였으며 평도현(平度縣)의 불자들에게 몇 차례씩 법문을 해주곤 하셨다.

 

민국24년 정거사가 또 나를 초청하여 평도에서 법문을 한 적도 있었다. 28년 봄 정거사는 또 청도를 거쳐 평도현에서 경전강의를 하셨는데, 그 뒤로 2주후 평도현에서 사람이 와서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스님 아십니까? 정석빈 거사님이 돌아 가셨습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깜짝 놀랐다.

“열흘 전 정거사가 여길 떠날 때도 괜찮던데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그래 무슨 병으로 어떻게 돌아 가셨는가?”

 

그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정석빈 거사님이 아미타경을 강의하고 난 후, 법문을 듣던 사람들은 다 흩어지고 일을 보던 사람만 몇 분 남았다. 서로가 오랜 친구사이였기에 저녁식사를 같이하게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정거사는 친구들에게 가겠다며 방 한 칸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의아해진 친구가 물었다.

“가신다면서 방은 왜 빌리는가?”

“내가 오늘 극락왕생을 하려는데 다른 사람 집에서 죽으면 기휘(忌諱:꺼리어 싫어함)를 범할까 그러내.”

친구들이 말했다.

 

“자네와 우린 오랜 친구사이네 극락왕생이 아니라 병이 들어 누워 우리 집에서 죽어도 마땅한 것인데 무엇 하러 따로 방을 찾는가. 지금 여기에는 불법을 믿고 염불하는 불자들이 많이 있는데 자네가 참말로 왕생할 수 있다면 이 지방 염불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보여주시고 본보기가 되어 주시게”

그의 친구는 자신의 집에서 방 두 칸을 정리해주고 침대를 하나 만들어 주었다.

 

정 거사는 친구들과 간단한 작별인사를 하고는 옷을 몇 번 툭툭 털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가부좌를 틀고 단정히 앉았다.

“여러분께 휴가를 드립니다. 난 지금 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불법의 인연으로 만났는데 마지막으로 염불하여 날 바래다주시오.”

옆에 있던 친구가 말했다.

“임종이 다 됐는데 아직 게송을 짓지 않는가? 우리에게 기념으로 남겨주시오”

 

정 거사는 이렇게 대답했다.

“무슨 게송이 더 필요한가? 지금 나의 이 모습을 보지 않았는가. 오고감이 자유자재하다. 자네들도 나처럼만 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좋은 기념인가?”

이 말을 마치고 장엄한 염불 속에서 15분도 채 안되어 웃음을 머금고 왕생을 하셨다.

 

그 후로 평도현 일대 사람들은 모두 염불이 좋다는 것을 알았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정거사의 동생은 처음엔 형님이 가정과 사업을 다 버리고 염불만 하는 것을 보고 마음속으로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나중에 형님의 여러 차례 권유로 마지못해 염불을 하였지만 간절하지 않았다.

 

이번에 형님이 염불왕생하고 미리 갈 시간도 알고 오고감이 자재(自在)함을 직접 본 그는 염불이 절대 사람을 속이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일심으로 염불하였으며 3년 후 미리 갈 시간을 알고 염불왕생 하였다. 다만 임종시 약간의 병이 있어 형님처럼 시원스레 가지는 못했다.

 

 

14. 여거사 장씨 이야기

 

세 번째는 女거사 張씨인데 청도사람이고 아들하나 딸 하나를 두었다. 집안형편이 어려워서 남편은 항구부두에서 인력거(人力車)를 끌어 생계를 유지했다. 장 씨는 청도시내 항산정사(港山精舍)근처에 살았는데 정사(精舍)내에 염불회(念佛會)가 있어 일요일이면 담산사(湛山寺)로부터 이곳에 와서 강의를 하곤 하였다. 거사님들은 경을 듣고 난 후면 한 시간씩 염불을 하였다.

 

장 씨는 이러한 인연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불법을 만나게 되었으며 그 믿음이 아주 독실했다. 평소엔 집에서 염불하고 일요일만 되면 두 아이를 데리고 염불회(念佛會)에서 강의를 듣고 강의가 끝나면 대중과 함께 염불을 하였다. 민국26년 겨울 어느 날 아침 일찍 일어난 장 씨는 문득 남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아이들을 데리고 잘 지내세요. 나는 오늘 불국토로 왕생할 거예요.”

장 씨의 남편은 먹고 사는데 바빠서 불법에 대한 훈습이 적었으므로 화난 얼굴로 꾸짖었다.

 

“그만해 ! 우리 집이 궁한 것도 모자라 당신까지 왜 이러는가.”

남편은 아랑곳 않고 차를 끌고 부두로 달려갔다.

 

장 씨는 또 두 아이에게 당부했다.

“난 오늘 극락세계로 갈 것인데, 너희들은 앞으로 아빠 말씀 잘 듣고 말썽 피지 말거라.”

이때 두 아이는 큰애는 열 살이고 작은 애는 다섯 여섯 살 밖에 안됐다. 비록 어머니의 말을 들었지만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여전히 문 앞에서 뛰어 놀고 있었다.

 

장 씨는 집안일을 대충 정리하고 나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었다. 워낙 어려운 살림이었기에 갈아입을 새 옷이 없어 빨아놓은 헌 옷을 입고 침대위에서 서쪽을 향해 앉아 염불하면서 왕생하였다.

 

장 씨의 두 아이는 밖에서 놀다가 배가 고파서 집에 들어왔는데 어머니는 침대위에 앉아있고 밥을 하지 않았다. 가까이 가서 불러도 대답이 없고 손으로 밀어 봐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때서야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알고 울면서 옆집으로 뛰어가 소식을 전했다.

 

이웃사람들이 소식을 듣고 장 씨의 집에 도착했을 때 비록 죽은 지 한참 지났지만 얼굴은 살아생전과 같은 것을 보고 염불공부(念佛功夫)가 깊음을 찬탄하였다.

 

나중에 남편이 돌아와서 한바탕 슬피 울었다. 집안사정이 어려워 염(殮)할 돈이 없어서 불학회(佛學會)의 여러 거사님들이 돈을 모아 장례를 치러 주었다.

 

 

인생에서 가장 요긴한 일은 생사를 해결하는 것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우리는 자신의 환경에 맞추어 바쁜 시간 속에서도 짬을 내어 조용히 앉아서 한 시간씩 염불하여야 하고 일을 할 때도 마음속으로 염불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매일 살생 투도 사음을 일삼고 온갖 업을 짓는다면 삼악도에 타락함을 면치 못할 것이며 육도를 윤회하면서 끝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부처님이 능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에게 목숨을 빚졌고, 나는 너에게 빚을 갚아야하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늘 생사에 있다. 너는 나의 마음을 사랑하고 나는 너의 빛깔(色)을 가엾이 여기니 이러한 인연으로 백 천겁이 지나도록 항상 속박에 있다. 오직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 세 가지가 근본이며 이러한 인연으로 업의 결과가 이어져 끊이질 않는다.” 하셨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살(殺), 도(盜), 음(淫)의 업을 지으면 얼마나 고통스러운가. 받들어 권 하건데 여러분이 하루빨리 염불하고 염불을 많이 해야 한다.

 

이른바 “염불 한마디에 무량한 복이 늘고 부처님께 한번 예배하면 항하의 모래와 같은 죄업이 소멸된다.”

 

念佛一聲 福增無量 禮佛一拜 罪滅河沙

염불일성 복증무량 예불일배 죄멸하사

 

이상 염불의 좋은 점을 매우 산만(散慢)하게 대충 설명하였다. 자세한 내용과 구경처를 알려거든 정토오경(淨土五經)과 정토십요(淨土十要)등을 참고로 하면 된다. 바라건데 여러분이 염불의 좋은 점을 안 이상 참된 신심으로 六根을 도섭(都攝:모두 거두어)하여 잘 다스리고 정념(淨念)이 이어져서 착실하게 지극정성으로 노실(老實)하게 염불하여 장차 다 같이 서방극락세계에서 만납시다.

 

1950년(庚寅) 1월1일

香港華南學佛院

大光敬記

南無阿彌陀佛

 

출처: https://inseng.tistory.com/142 [하늘의 기운, 인연, 수양. 보은사 태은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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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사례: 좌탈입망하신 박청업보살님

박청업 보살님은 전남 여수 흥국사신도로
항상 법회를 빠지지 않고 열심히 절에 다니신
불자님이었다고 합니다.

 

박보살님의 따님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모친께서는 살아생전에 열심히
염불하셔서  앞일을 미리 내다보실 수
있을 정도로 공부가 깊으셨는데,

 

평소에는 속으로 염불을 하시느라
입을 굳게 다물고 일체 말씀을 하지 않으셨고,

 

주변 사람들에게 재앙이 다가오는 경우에만
그러한 위험들을 미리 알려주어 사전에 예방하도록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한평생 염불수행을 하신
어머니 박청업보살님께서는
돌아가시는 날짜도 다 알고서
가실 날짜를 가족과 친족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는데,

 

지금으로 부터 20여년 전 1999년

음력 2월 그믐날이 되자 평소처럼
목욕을 하시고 여수 흥국사 절에 가셔서
하룻밤을 주무시고 3월 초하루 법회를 보신다음
집에 내려오셔서 하룻밤을 주무신 뒤


3월 초이틀이 되자 병도 없이 건강하셨는데,
평소 가족들에게 미리 귀띔해 주신 것처럼
가신다고 하는 날짜인 음력 3월2일에
앉아서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염불 수행을 통해 공부가 깊어지니
도인 스님들처럼 보살님께서도
앉은 채로 마치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
육신의 옷을 벗어버리고 좌탈입망(坐脫入亡)하여
극락세계로 왕생하신거지요.

 

그래서 모친께서 돌아가시고
입관을 하기위해 가족들이 장의사에 연락하여
관을 가져오기는 하였지만
남자 장의사가 어머님의 몸을  
만지는 것이 싫어서

 
딸인 감로월 보살님이 당시
흥국사 주지스님인 명선스님의 조언을 받아
옆에서 알려주는 그대로 어머님의
몸을 직접 씻겨 염습하였는데

 

당시 어머님이 몸을 씻겨드리면서
몸을 직접 만져보니
마치 갓난아기의 피부처럼
살결이 뽀얗고 살결도

너무너무 부드러웠다고 합니다. 

                                                     모친의 얘기를 전해주신 감로월보살님

 

연세가 많은 노보살님의 살결이

마치 갓난아이처럼 뽀얗고 피부도

한없이 부드러운 이러한 현상은

전형적인 극락왕생의 징후에 해당하는

현상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염불하시고

앞일을 내다볼 정도의 공부힘과

좌탈입망하셨다는 것만으로도

극락왕생을 믿어 의심치 않지만

염불수행자가 앞일을 내다보거나

좌탈입망할 정도의 수행력이 아니어도

임종후에 극락왕생을 확인할 수 있는 징후 가운데

하나가 아이같이 뽀얀살결이나

아이같이 부드러운 피부입니다.

 

그래서 중국이나 대만의 동물왕생사례를

올려놓은 것을 찾아 보면

사후에 경직현상이 나타나지 않고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부드러운 현상들을

동영상으로 올려놓은 사례들이 있습니다.

 

박청업보살님의 염불왕생 사례는

마치 일타스님의 외증조할머니를 연상케하는

일화로서 일반불자님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희유한 일로 사실 스님들보다 더 훌륭하신
숨은 도인보살님의 일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무아미타불

 

출처: 최근사례 좌탈입망하신 박청업보살님cafe.daum.net/amtb/ZEF/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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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사례 진주 연화사 송선덕화님의 극락왕생과 광명

 

경남 진주 연화사 신도 송선덕화님

 

진주 연화사 신도 송 선덕화보살님은

어느날 그 절 스님으로부터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왕생한다는

법문을 듣고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행주좌와 어묵동정에 일심으로 염불하며 누구를 만나면 인사가 "나무아미타불" 이였다.

그렇게 20년정도 되던 해 어느날 송 선덕화는 만나는 사람마다

"나는 석달뒤 몇날 몇일에 극락세계로 간다"고 했으나 믿지 않았다.

 

그러나 석달뒤에 자식들을 다 불러 놓고

유언하기로 "너희들은 내가 간뒤에 오직 열심히 염불하라" 는 말을 남기고 임종했다.

 

임종후에 서방에서 광명이 집안을 환하게 비추고

또 기이한 향기가 진동했다. 그 광명은 7일 동안이나 비췄는데

얼마나 밝았던지 진주일대 소방소에서 불이난줄 알고 몰려 왔으며

 

또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와서 참배하며 장례와

제를 잘 올리고 사리탑을 세웠다.

사리 7과가 나왔다.

 

 

(청담스님 법어)

 

경상남도 진주에 가면 송보살이라고 내가 어려서 봤는데 길가에 다니다가 만나서 우리가 어디가십니까?인사를 하면 하고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가기만 하는 그런 여자가 한 분 있었습니다.

 

내가 중이 된 뒤 그이가 거진 구십살이나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그 집이 가난한 살림인데 절에 불공이 있으면 와서 거들어 주고 떡 부수러기나 얻어다 아이들 먹이는 이런 형편입니다. 그렇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염불을 자나깨나 하고 있는 그런 보살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 뒤에 내가 진주에 가 보니까 시내 연화사(蓮華寺) 포교당(布敎堂)에 낮설은 탑이 하나 생긴 것을 보고 이게 무슨 탑이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애기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이 송보살이 자기가 죽기 나흘 전에 진주 신도 다 찾아 보면서 내가 나흘 뒤 아무일 저녁을 먹고서 어둑해질 때 가겠느니 부디 염불 잘 하십시오. 나는 먼저 극락세계 가니까 같이 거기 가서 만납니다.이런 인사를 하고 다니는데, 사람들은 아마 나이가 하도 많은 노인이라 망녕이 들어서 정신이 좀 이상해진 것 같다고 모두 곧이 듣지를 않고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날 아침 먹고 나서 손자고 누구고 식구들을 아무데도 못가게 하고는 불러 앉혀 놓더니 내가 오늘 저녁때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은 부디 딴 짓 하지마라, 극락도 있는 거고 천당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 있으니 잘 명심(銘心)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당부를 하더라는 겁니다. 일념으로 마음이 통일이 되어 놓으니까 그 무식한 노인이지마는 밝은 마음의 가 열려서 무얼 알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니까 가서 물 데워 오라고 해서 목욕을 하고 그리고 새옷으로 갈아 입고는 너희들 밥 먹고 나서 아무데도 가지 마라. 저녁 일찍 해 먹으라는 겁니다. 그래서 식구들은 할머니가 뭐 정신이 돌았거나 망녕이 든 것같지도 않게 태연하고 엄숙하니까 행여나 싶어서 식구들이 모두 시키는 대로 저녁 일찍 해 먹고 모두 아이들도 못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어두워지기 시작하니 요를 펴라고 해서 요를 펴니까 요 위에 앉아서 또 얘기를 합니다.

 

이 세상이 다 無常하고 여기는 苦海고 불붙은 집이고 그러니 아예 방심하지 말고 네 일좀 해야지 만날 육체 . 몸뚱이 그렇게 가꾸어 줘 봐야 갈 때는 헛수고했다고 인사도 안하고 나를 배반하고 가는 놈이며 몸뚱이라는건 그런 무정한 놈이니 그 놈만 위해서 그렇게 살지 말아라. 나도 평생에 염불해서 이런 좋은 수가 있지 않느냐.

 

구십장수(九十長壽)도 하고 병 안앓고 꼬부러지지도 안하고 그리고 가는 날짜 알고 내가 지금 말만 떨어지면 간다 . 곧 갈 시간이 되었어. 이러니 너희들도 그랬으면 좀 좋겠느냐. 두달이고 일년이고 드러누워 똥을 받아 내고 이래 놓으면 그 무슨 꼴이냐. 너희한테도 빌어먹을 것도 못 벌어먹고 모자간에 서로 정도 떨어지고 얼마나 나쁘냐. 부디 신심으로 염불도 하고 부디 그렇게 해라.

 

이렇게 말한 뒤 살며시 눕더니 사르르 잠든 것처럼 가 버렸는데 그리고 얼마 있다가 그만 그 집에서 광장히 좋은 향내가 나고 또 조금 있으니 서쪽을 향해서 환히 서기방광을 해서 소방대가 불났다고 동원이 되기까지 했다는 겁니다.

 

불교 신도들이 이 소문을 듣고 송보살이 예언 한 대로 돌아갔다, 열반을 했다, 이래 가지고 진주 신도라는 신도는 수천명이 모여 와서 송장에 대해서도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무수배례(無數拜禮)하고 마당에서 길에서 뜰에서 신도들이 꽉차게 모여 가지고 절도 하고 돈도 내고 이래서 장사를 아주 굉장하게 화장으로 지내는데 사리가 나와서 사리탑을 지어 모셔 놓은 것이 연화사에 있는 낯선 저 탑이라는 것입니다.

 

원출전: 청담 스님 금강경 대강좌 금강경 지경공덕분 제15 (양우당, 19775월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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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선덕화 보살님(1852--1933)의 사리탑과 비석입니다. 先德의 무량한 법은에 절합니다.

나무아미타불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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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생사례 진주 연화사 두보살님(송선덕화보살님,오정토화보살님)의 극락왕생 사례

 

고즈넉한 산사의 분위기와는 사뭇 다르지만 연화사에는 오래 전부터 널리 알려지지 않은 노 보살에 관한 사연 2가지가 전해져 온다.

#송 보살 사연

 대웅전을 올라 오른쪽 선방을 지나 대나무 숲 사이에는 5층으로 된 높은 사리탑이 하나 보인다. 송보살에 관한 사연인데 불가의 정신을 다시 한번 깨우칠만한 영험한 사례로 꼽힌다.

 이 사찰에는 과거 말이 별로 없고 우직한 송 보살이 있었다. 보살은 인근에 살고 있으면서 절에 자주 찾아와 갖가지 일을 도왔다. 집이 힘겹게 가난했지만 다복하게 살았다.

 그러던 중 스님으로부터 “‘나무아미타불’ 을 부르면 죽어서 극락세계에 왕생 한다”는 법문을 듣고, 그때부터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보살은 비가 오나 눈이오나 일심으로 염불을 하고 다녔고, 누구를 만나더라도 인사가 ‘안녕하세요’가 아닌, “나무아미타불”이었다.

 그렇게 20년이 지난 어느 날 송보살은 갑자기 자기가 언제, 어느 때 세상을 떠날 일을 예언하고 다녔다. 사람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4일 후(3개월인지 확실치 않음)저녁 어두워질 때 가겠으니 부디 염불 잘하시오. 나는 극락에 가니까 거기서 만나자”며 인사를 하고 다녔다.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 망령이 났다’며 믿지 않았다.

 그날이 되자 보살은 자식들을 다 불러 놓고 “오늘 저녁 해질 무렵에 간다. 너희들도 딴 짓 하지마라. 극락도 있고 지옥도 있는 줄 알고, 또 사람이 부처가 되는 법이니 잘 명심하고 신심으로 살아야 한다”고 유언하고 임종했다.

 임종 후에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서쪽에서 한줄기 빛이 방안에 환하게 비추고 특이한 향기가 났다. 그 빛은 오랫동안 비췄는데 너무 밝아 진주일대 소방서에서 불이난 줄 알고 달려오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

 이 사실이 신도들에게 알려지면서 수천 명이 몰려왔다 그들은 한결같이 “송보살이 예언대로 돌아갔다. 열반했다”며 그를 부처님같이 생각하고, 절하고 돈도 냈다.
 이후 화장하고 수습해 보니 사리 7과가 나왔고 이를 기려 ‘송씨선덕화사리탑’을 세워 모셨다.

 처지가 가난해도 일념으로 염불하고 기도하면서 부처님의 뜻대로 살면 마음이 통일되고 밝은 마음의 혜가 열려 극락세계로 간다는 불심을 깨우치는 일화로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 진주 연화사 송보살 사연은 진주출신의 청담 큰스님의 기록을 간추린 것임.

 

#취골탑(就骨塔) 사연

 연화사 입구에 들어서 대웅전 앞에 서면 오른쪽에 탑이 하나 보인다.

 이것이 취골탑으로 90여년 전 연화사에 적을 두었던 한 보살을 화장했는데 화장 후 뼈가 마치 인위적으로 모아 세운 것처럼 탑같이 보여 이 탑을 세우고 기리고 있다. 탑에는 ‘청신녀오정토화사리부도’라고 새겨져 있다.
 90년 정도 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세월의 흔적 때문에 다소 검게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이 탑의 주인공은 94세의 나이로 돌아가신 노 보살이다. 이 보살 역시 절에서 법당청소나 빨래 허드렛일 등 궂은일을 도맡았다.

 언제나 말없이 봉사하면서 속으로는 끊임없이 염불을 했는데 여간 정성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살은 부엌의 부지깽이도 일어나 거든다는 모내기철에 세상을 떠났다. 유독 그해 가뭄이 심해 논바닥이 거북등처럼 갈라졌고, 물이 없어 모를 심지 못할 지경이었다. 발인식 날,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보살의 관을 보고 말했다.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이다”지금 농부들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물이 없어 갈증을 느끼고 있다. 친구! 부처님에 대한 친구의 정성스럽고 간절했던 평소의 생각으로 남아 있는 세상 사람들에게 이롭도록 비를 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상여를 지고 진주 시내를 한바퀴 돌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 발인 후 운구를 하려할 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몰려들고 순식간에 진주 시내를 감싸더니 소나기가 내린 것이다.
 사람들은 너무나 기쁜 나머지 상여를 메고 진주 시내를 한바퀴 돌았는데, 연화사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비가 그치지 않고 계속됐다.

 장사를 치르고 다음날 뼈를 수습하려고 다비장에 갔더니 뼈들이 탑처럼 쌓여 있었다.
 신도들은 이를 신기하게 여겨 사리와 함께 연화사 경내에 탑을 세워 노보살의 덕을 기리고 있다.

 이 일은 평소 노 보살이 염불하고 기도하며 부처의 뜻대로 살아온 것을 부처님이 갸륵하게 여겨 가뭄이 심한 중생에게 소망을 들어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출처: 근래사례 진주 연화사 송선덕화님의 극락왕생과 광명cafe.daum.net/amtb/ZEF/577

출처: 진주 연화사 두보살님(송선덕화보살님,오정토화보살님)의 극락왕생 사례cafe.daum.net/amtb/ZEF/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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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타스님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과 방광(放光)
<일타 큰스님의 글>

나의 가족은 친가와 외가를 모두 합하여 모두 41명이
승려가 되었습니다. 이 41명의 출가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이평등월(李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안성이씨(安城李氏) 평등월 보살은 일찍이 우리 나라
제일의 양반으로 치던 광산 김씨(光山金氏) 집안으로
시집을 갔습니다.


그녀는 남편 김영인(金永仁)의 아낌없는 사랑 속에서
삼형제를 낳아 기르며, 학식있는 양반집 안방마님으로
부족함 없이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이 60이 조금 지났을 때 갑자기 불행
닥쳐왔습니다. 남편이 남의 빚보증을 섰다가 대부분의
재산을 날려 버렸고, 연이어 시름시름 앓던 남편은
끝내 저 세상사람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평등월 보살이 실의(失意)에 잠겨 해어나지 못하고
있자. 이미 장성하여 가정을 꾸리고 있던 만수(萬洙)
* 완수(完洙) * 은수(恩洙) 세 아들은 머리를 맞대고
상의했습니다.

"이제 시대는 바뀌었다. 우리가 양반이라고 마냥
이렇게 살 것이 아니다. 노력하여 돈을 벌어야 한다."
이렇게 결의한 세 아들은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조금도 염려 마십시오. 이제부터
저희들이 집안을 꾸려 어머니를 편안하게 모시겠습니다."

그리고는 남은 재산을 모두 처분하여 목화를 솜으로
만드는 솜틀기계 한 대를 일본에서 구입하였습니다.
기계를 발로 밟으면서 목화를 집어 넣으면 껍질은
껍질대로, 씨는 씨대로 나오고 솜은 잘 타져서 이불짝
처럼 빠져 나오는 당시로서는 최신식 기계였습니다.

이렇게 공주 시내 한복판의 시장에다 솜틀공장을 차린
삼형제는 작업복을 입고 하루 여덟시간씩 3교대로 직접
솜틀기계를 돌렸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멈출 때가 없었습니다.

공주 사람들은 그 솜틀기계 돌아가는 소리를 듣고
"공주도 이제 개명을 하는구나." 하면서
'공주개명(公州開明)! 공주개명!'을 외쳤습니다.
마침내 공주 주변에서 생산되는 목화는 모두 이
공장으로 들어왔고, 산더미같이 쌓인 목화가 솜이 되어
나오는양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집안에는 돈이
쌓여 갔습니다.

월말이 되면 삼형제는 한 달 번 돈을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세 몫이 아니라 네 몫으로 나누었습니다.
남는 한 몫은 누구의 것이겠습니까?
바로 어머니 평등월 보살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돈을 어머니께 직접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머니께서 한 달 동안 '삼형제 중 누구 집에 며칠을
계셨느냐'에 따라 그 집에 직접 분배를 하는것입니다.
막내아들 집에 열흘을 계셨으면 3분의 1을 막내아들
집에 주었습니다. 이렇게 하니 며느리들은 서로
시어머니를 잘 모시기 위해 갖은 정성을 다 우렸습니다.

집집마다 어머니 방을 따로 마련하여 항상 깨끗하게
꾸며 놓았고, 좋은 옷에 맛있는 음식으로 최고의
호강을 시켜드렸습니다. 때때로 절에 가신다고 하면
서로 시주할 돈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이 집안은 공주 제일의 효자 집안으로 소문이
났고, 벌어 들인 돈으 로는 논 백 마지기를 다시
사들이기까지 하였습니다.

평등월 보살은 신이 났습니다.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매일을 평안함과 기쁨속에서 지내던 할머니가
막내아들 집에 가 있던 어느 날, 한 비구니스님이
탁발을 하러 왔습니다.

그 스님을 보자 할머니는 눈앞이 밝아지는 듯했습니다.
"아! 어쩌면 저렇게도 잘생겼을까? 마치 관세음보살님
같구나." 크게 반한 할머니는 집안에서 가장 큰
바구니에다 쌀을 가득 퍼서 스님의 걸망에 부어
드렸습니다. 그때까지 비구니 스님은 할머니를 조용히
보고만 있다가 불쑥 말을 했었습니다.

"할머니! 요즘 세상사는 재미가 아주 좋은 신가 보지요?"
"아, 좋다마다요. 우리 아들 삼형제가 모두 효자라서
얼마나 잘해 주는지....... 스님. 제 말 좀 들어 보실래요?"
할머니는 신이 나서 아들 자랑을 시작했고, 며느리
자랑, 손자 자랑까지 일사천리로 늘어놓았습니다.

마침내 할머니의 자랑은 끝내 이르렀고, 장시간 묵묵히
듣고만 있던 스님은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머니, 그렇게 세상일에 애착을 많이 가지면
죽어서 업(業)이 됩니다."
"업?"
충청도 사람들은 '죽어서 업이 된다'고 하면 구렁이가
된다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죽어서 큰 구렁이가 되어 고방(庫房) 안의 쌀독을 칭칭
감고 있는 업! 할머니는 그 '업'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는 것 같았 습니다.

"아이구 스님! 어떻게 하면 업이 되지 않겠습니까?"
"벌써 업이 다 되어 가는데 뭐.......... 지금 와서
나에게 물은들 뭐하겠소?"
스님은 벼랑을 짊어지고 돌아서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업만은 면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5리, 10리 길을
쫓아가면서 스님께 사정을 했습니다.

"스님, 제발 하룻밤만 저희 집에 머무르시면서 업을
면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스님, 제발
저 좀 살려 주십시오." 간청에 못이겨 다시 집으로 온
스님은 할머니가 이끄는 대로 방으로 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윗목에서 벽을 향해 앉아 말 한마디 없이
밤을 새웠고, 할머니 역시 스님의 등뒤에 앉아 속으로만
기원을 하고 있었습니다.
"제발 업이 되지 않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제발....."

마침내 날이 밝아오기 시작하자 스님은 할머니 쪽으로
돌아앉았습니다.
"정말 업이 되기 싫소?"
"아이구. 제가 업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안됩니다.
스님. 절대로 안됩니다. 인도환생(人道還生)하든지
극락세계에 가도록 해주십시오."

"정말 업이 되기 싫고 극락에 가기를 원하면 오늘부터
행실을 바꾸어야 하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부터 발은 절대로 이 집밖으로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입으로는
'나무아미타불'만 부르고, 일심으로
아미타불을 친견하여 극락에 가기만을 기원하시오."

스님의 '집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씀은 몸단속을
하라는 것이고, 나무아 미타불을 불러라'는 것은 입을
단속. '일심으로 극락왕생할 것을 기원하라'는 것은
생각 단속입니다.

곧 몸[身]과 입[口]과 생각[意]의 삼업(三業)이 하나가
되게 염불할 것을 가르쳐 준 것입니다. 그러나 할머니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스님. 다시 한번 자세히 일러주십시오."

"보살님 나이가 70이 다 되었는데, 앞으로 살면 얼마나
살겠소? 돌아가실 날까지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부르면 업 같은 것은 십만 팔천 리 밖으로 도망가
버리고, 극락세계에 갈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는 첫째나 둘째 아들집에도 가지 말고,
이웃집에도 놀러가지 마십시오. 찾아오는 사람에게
집안 자랑하지도 말고. 오직 이 집에서 이 방을
차지하고앉아 죽을 주면 죽을 먹고 밥을 주면 밥을
먹으면서 '나무아미타불'만 외우십시오. 그리고
생각으로는 극락 가기를 발원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까?"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할머니는 다짐을 하면서 큰절을 올렸고, 스님은 옆에
놓아두었던 삿갓을 들고 일어서서 벽에다 건 다음
슬며시 방문을 열고 나갔습니다.
걸망도 그대로 둔 채.....
'변소에 가시나 보다.'
그러나 한번 나간 스님은 영영 돌아올 줄 몰랐습니다.

사람을 풀어 온 동네를 찾아보게 하였으나 '보았다'는
사람조차 없었습니다.
'아! 그분은 문수보살님이 틀림없다. 문수보살님께서
나를 발심시키기 위해 오신 것이 분명하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더욱 발심(發心)이 되었습니다.

할머니는 방의 가장 좋은 위치에 스님의 삿갓과 걸망을
걸어 놓고, 아침에 눈만 뜨면 몇 차례 절을 올린 다음
'나무아미타불'만 불렀습니다.

어느덧 할머니는 앞일을 내다보는 신통력(神通力)이
생겼습니다. "어멈아! 오늘 손님이 다섯 온다. 밥 다섯
그릇 더 준비해라." 과연 끼니때가 되자 손님 다섯
사람이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또 하루는 막내아들을 불러 각별히 당부하였습니다.
"얘야. 너희들 공장에 화기(火氣)가 미치고 있다.
오늘은 기계를 돌리지 말고 물을 많이 준비해 놓아라.
위험하다." 그 말씀대로 세 아들은 아침부터 솜틀기계를
멈추고 물통준비와 인화물질 제거에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오후가 되자 바로 옆집에서 불길이 치솟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서둘러 옆집 불을 껐습니다.
만약 목화 솜에 불이 옮겨 붙었다면 솜틀공장은
삽시간에 잿더미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다행히 할머니의 예언으로 조금도 손상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웃 집의 피해까지 줄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의 결혼도 외증조할머니의
말씀에 따른 것입니다. 손녀인 어머니가 결혼 적령기가
되었을 때, 외증조할머니는 큰아들을 불러 말씀하셨습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30리 가량 가면 구름내[雲川]라는
마을이 있다.

김창석 씨네 둘째 아들과 네 딸 상남(上男)이와는
인연이 있으니, 찾아가서 혼사(婚事)를 이야기해
보아라." 이렇게 외증조할머니는 가 보지도 않고
신통력으로 나의 부모님을 결혼시켰습니다.

마침내 주위에서는 외증조할머니를 일컬어 '생불(生佛)
이라고 부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어느 날부터인가 외증조할머니가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지 않고 '문수보살'을 찾는 것이었습니다.

갑작스런 변화를 걱정한 아들 삼형제는 인근 마곡사의
태허(太虛: 鏡虛대선사의 사형) 스님을 찾아가
상의했습니다. "문수보살을 부르는 것도 좋지만,
10년 동안이나 아미타불을 불렀으면 끝까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좋다.

그리고 앞일을 자꾸 예언하다 보면 자칫 마섭(魔攝)이
될 수도 있다.내가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는
글을 써 줄 테니 벽에 붙여 놓고 '나무아미타불'을
항상 부르도록 말씀드려라."

常放大光明! 언제나 대광명을 뿜어낸다는 이 글을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불렀습니다.그리고 앞일에 대한 말씀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부지런히 염불기도를 하다가 할머니는 88세의
나이로 입적(入寂)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야말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7일장(七日葬)을 지내는 동안 매일같이 방광(放光)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으나, 밤만 되면
그 빛을 본 사람들이 '불이 났다'며 물통을 들고
달려오기를 매일같이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상객으로 붐비는 집안 역시 불을 켜지 않아도
대낮같이 밝았습니다.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

그야말로 외증조할머니는 염불기도를 통하여
상방대광명을 이루었고, 그 기적을 직접 체험한 가족들은 그 뒤
차례로 출가하여, 우리 집안 친가*외가 41인
모두는 승려가 되었습니다.

몸과 말과 뜻을 하나로 모아 염불하고 기도하는 공덕.
그 공덕을 어찌 작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부처님의 불가사의가 어찌 없다고 하겠습니까?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기도는 우리 집안을 불심(佛心)으로
가득 채웠고,

41명 모두를 '중노릇 충실히 하는 승려'로 바꾸어 놓는
밑거름이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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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기사 내용 -

일타스님,염불 영험담수록 「기도」펴내

조계종 전계대화상(傳戒大和尙) 日陀스님이 자신과 주위
사람 및 옛 선사(禪師 )들의 기도 성취 영험담을 모은 책
「기도(祈禱)」를 펴냈다.

전계대화상은 조계종 소속으로 출가하는 모든 승려에게
계(戒)를 주는 원로스님으로 청정계율을 지킨 승려만이
이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영예로운 직책이다.

192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한 스님은 13세때 출가,
일평생 참선정진과 중생교화에만 몰두한 수행승으로
유명하다.

친가와 외가를 합쳐 모두 41명이 출가한 얘기며 20 대에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매일 3천배씩 7일동안 기도를
드린뒤 오른 손 네손가락 열두마디를 모두 불태워 버린
일화는 지금도 불가에서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일타스님은 자신의 저서에서 『외증조할머니인
李平等月 보살이 10년동안 지극한 정성으로
나무아미타불 염불기도를 한 끝에 「생불(生佛)」로
불리다가 세상을 뜨자 7일간 불을 밝히지 않아도

집안을 대낮같이 밝히는 방광(放光)
현상이 나타났었다』고 회고하면서 『이를 직접 체험한
가족들이 차례로 출가, 결국 석가모니 이후 한 집에서
가장 많은 출가자를 내게됐다』고 말했다.

손가락 연비(燃臂)에 대해서도 스님은 『손가락이
없으면 세속적인 모든 생각이 저절로 뚝 끊어질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세 명예 행복등 세속적 미련을
손가락과 함께 태워버렸다』면서

『연비후 홀로 태백산 도솔 암으로 들어가 6년동안
조그마한 갈등도 없이 참선 정진했던 시절은
일평생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기간이었다』고
회고했다.

스님은 옛 선사들의 기도에 얽힌 얘기와 1백만배(拜)로
원력(願力)을 이룬 제자 慧印스님, 7일간 3천배로
운동권 아들의 마음을 돌려 법조인으로 만든 보살등
평범 한 이들의 기도 성취담도 아울러 소개하고 있다.


도서출판 효림 간행.〈吳明哲〉

[동아일보] 1995-11-12 (문화) 뉴스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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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아미타불과 극락, 염불에 관한 자세한 가르침 바로가기→ http://cafe.daum.net/amtb/8L2t/515

 

출처: 일타스님 외증조할머니의 염불과 방광https://amtb.tistory.com/m/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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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심보살님의 왕생영험(최종 수정,증보)

나무아미타불

현정심賢靜心 보살님의 왕생영험

 

현정심 이희순 보살님은 86세를 일기로 2015.12.24.오전 8 20분경 의왕시 부곡사(경기 의왕시 삼동 94-29) 근처의 자택에서 약40(새벽 3 20분에서 4시까지)에 걸친 눈부신 방광의 영험을 보이시고 편안하게 극락으로 돌아가셨습니다.

 

보살님의 본관은 전주이고, 슬하에 3 4녀를 두셨으며, 3남 중 두 분이 출가 사문이 되었다.

 

보살님은, 보살님 연세 71세인 약15년 전 보살님의 아들이자 스님이신 성오스님(의왕시 부곡사 주지스님)의 인도로 정토법문을 믿고 신행을 시작하셨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15년 내내 굳센 의지로 언제나 나무아미타불 6자 명호를 칭명함은 물론 한글 아미타경을 많이 할 때는 하루에 30번까지 독송하셨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식사 때를 제외하고는 언제나 염불과 독경을 할 정도로 대단한 수행을 하셨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왕생하시기 1주일 전부터 병상에 누우셔서 사바 인연이 다하게 되자, 성오스님은 보살님의 따님 두 분에게 교대로 6일이 다되도록 끊어지지 않게 조념 염불을 하게 하였습니다. 성오 스님은, 모친 왕생 전날 오전 이제 모친께서 곧 왕생하실 것으로 판단하고 오랜 도반인 전북 임실 상이암의 동효 스님께 급히 연락하여 조념 염불을 부탁하였습니다.

 

동효 스님은 12 23일 저녁에 급히 의왕의 보살님 자택에 도착하여 9 40분경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까지 약5시간 넘게 성오 스님과 부곡사 총무 보살님,자녀 등 모두 10인이 정성스럽게 보살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조념 염불을 하였습니다.

 

일동은 장시간 염불한 후 스님들은 새벽 3시 조금 넘어서 근처 부곡사로 가시고, 다른 자녀분들과 지인 분들도 가시고 따님 두 분만 남아서 이어 약 10여분 조념 염불을 하던 중 보살님의 눈 언저리에서 눈부신 광명이 시작되면서 머리 부분에서는 불꽃 놀이 때 불빛이 확 퍼지는 것처럼 계속 반복하며 방광을 하였으며, 눈 주위의 흰 빛은 작은 연꽃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대중 10인이 조념 염불할 때는 보살님의 눈 언저리에 마치 눈물인 듯 보이는 약간의 반짝임이 있었는데, 나중에 크게 되어 연꽃 모양이 되었다고 합니다. 새벽 약3 20분경부터 약 4시까지 약 40분간 이러한 영험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보살님의 둘째 딸(불명:보덕심)과 세째 딸이 이 영험을 목격했는데, 둘째 딸은 7일 동안 잠도 안자고 모친을 위하여 조념 염불한 끝에 수면 부족으로 헛것이 보이는 것 아닌가 의심했으나, 아무리 다시 봐도 실제 보이는 현상이었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이렇게 약 40분간 방광을 마친 후 편히 계시다가 아침 8 20분경 두 딸의 조념 속에 편안하게 서방정토에 왕생하였습니다.

 

보살님은 왕생 전 1주일 동안 앞의 약3일간은 약간의 거동도 하시면서 조념을 따라서 소리가 나게 염불을 하셨는고, 나중의 4일간은 병세가 깊어져서 숨을 가쁘게 쉬면서도 숨이 멎는 최후 순간까지 아주 미미한 소리로 입슬을 움직여 6자 나무아미타불 조념 염불을 따라 하셨다고 합니다. 매우 높은 수행력이라 할 것입니다.

 

보살님이 왕생하신 다음 날(2015.12.25.) 오후 6시경 보살님의 평소 수행처였던 부곡사 마당에 한 참 동안 불난 것처럼 붉고 환하게 방광한 것을 여러 사람이 보았다고 합니다.

 

보살님은 임종 다음 날 염을 마치고 나서도 정수리 부분에 따듯한 온기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염할 때 법체가 매우 유연하여 염하시는 분이 오랜 기간 많은 분을 염해 보았지만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부드러운 분은 처음 보았다고 말했답니다(이 부분은 나무아미타불 카페 혜련 거사님이 확인한 사실입니다.).

 

보살님은 왕생 약 1년 전 꿈에서 극락의 아름답고 청정한 장엄을 보신 다음 아들인 성오 스님께 이를 알리면서 보살님은 극락으로 갈 것이라고 말씀하셨답니다.

 

이상은 2016.2.16.(서정), 성오 스님과 보살님의 둘째 따님 및 부곡사 총무 보살님과 장시간 전화통화로 확인한 내용을 정리한 것입니다.

 

보살님의 불퇴전의 치열한 정진 및 자재왕생을 지극히 공경하며 찬탄올립니다. 그리고 조념 사부 대중께도 존경을 표합니다. 특히 보살님의 자녀분들이 7일 동안 잠도 제대로 안자고 모친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조념 염불,독경한 것은 지극한 효심의 발로라 할 것이니,후세에 아름다운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다 할 것입니다.

 

졸견: 저의 관견으로는 보살님은 생시 대정진으로 조념 없이도 자재왕생하실 수 있었지만, 인연 있는 분들에게 조념을 하게 하여 정토인연을 굳게 맺어 주시고, 서상 왕생을 시현함으로써 염불법의 수승함을 알리려고 대자비로 짐짓 병든 모습을 보이신 것으로 보입니다.

 

                                                       2016.2.17.

                                                西定 謹識

 

                                             원제중생 동생극락

 

                                              나무아미타불

 

출처: 나무아미타불 | 현정심보살님의 왕생영험(최종 수정,증보)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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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봉스님과 혜우스님의 극락왕생과 방광 (경남 고성군 청련암)

서봉(瑞峯)스님과 혜우(惠雨)스님의 극락왕생과 방광(放光)

(소재지 : 경남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연화산 옥천사 청련암 ☎ 055 672 0078)

 

고종16년(1879)년의 일이다. 청련암(옥천사 부속 암자)에 서봉(瑞峯)스님이 계셨다.

서봉스님은 환갑을 지난 나이에 출가하여  염불을 하기로 결심하고 매일 정화수를

떠놓고 서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일념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지송하였다.

 

세월이 흘러 입적이 가까웠을 무렵에는 중풍이 와서 몸을 마음대로 가누지 못하고

대소변을 받아내었다. 시봉도 하루 이틀이지, 아무도 돌보는 사람이 없게되자

방에서 아무데나 대소변을 누는 형편이 되어 방안에 구린내가 진동했다.

 

큰절에서 끼니때마다 공양을 지어다 날랐는데 공양을 들고 간 행자들이

냄새 때문에 서로 방에 들어가지 않으려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감원스님과 부전스님의 꿈에 화관을 쓴 불보살님들께서 꽃가마를

운반해 와서 서봉스님을 가마에 태워 서쪽 하늘로 날아가는 꿈을 꾸었다.

 

꼭 같은 꿈을 꾼 두 분 스님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 청련암에 울라가 서봉스님의

방문을 열어보았더니 스님은 앉은 채로 입적하셨고 구린내 나던 방은

이상한 향기가 진동하였다. 그리고 서쪽 하늘에서 풍악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져 가고 있었다.

 

다비하는 날 밤에는 청련암은 물론 온 산중에 대낮같이 밝은 서기가 뻗쳤다.

절에서는 방광 사실을 몰랐는데 동네 주민들이 옥천사 근방의 하늘이

대낮같이 밝으므로 필시 불이 났다고 생각하고 물통 등 소방도구를

챙겨 부리나케 절에 올라왔으나  불은 나지 않았다.

 

소란 소리를 듣고 스님들이 나가보았더니 옥천사 부엌이 훤했다.

그리고 어디서 빛이 나는지 알 수 없고 그림자가 생기지 않았다.

사람들은 비로소 옥천사입구 다비장에서 뻗어 오른 방광임을 알게 되었다.

이는 사리가 방광을 하는 것으로 주민들은 절에서 불이 난 것으로 오인했던 것이다.

 

이에 감명을 받은 옥천사 스님들은 자신도 모르게 “나무아미타불” 염불이 나왔고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옥천사 입구(버스 주차장입구) 바위에

“서봉인오방광탑(瑞鳳印悟放光塔)”이라는 7자의 각자를 새겨 놓았다.

 

비슷한 시기에 꼭 같이 방광하신 스님이 한 분 더 계신다. 혜우(惠雨)스님이시다.

혜우스님도 서봉스님과 마찬가지로 늦게 출가하여 청련암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구송하더니 입적시에 방광을 하였다.

 

서봉스님 방광탑 옆에 “혜우방광탑(惠雨放光塔)”이란 각자가 따로 새겨져 있다.

두 스님의 이야기는 실화로서 일념으로 염불하면 이처럼 사리에서 방광(放光)을

하는 수가 있다. 이 같은 영험은 옥천사 뿐 아니라 통도사, 해인사, 범어사,

대원사 등 여러 사찰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서봉인오 방광탑(瑞鳳印悟放光塔) ; 옥천사 입구 버스주차장근처 암벽에 서봉인오 방광탑(瑞鳳印悟放光塔)이라는 7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는 청련암의 노장 서봉 인오스님이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다가 열반하였는데 다비 시 옥천사 근방 하늘이 대낮같이 훤하게 방광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하여 새겨놓은 각자이다.

 

혜우 방광탑(惠雨放光塔) ; 서봉 인오스님과 비슷한 시기에 꼭 같이 방광하신 스님이 한 분 더 계신다. 늦게 출가하여 청련암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지극 정성으로 구송하다가 입적하신 혜우(惠雨)스님도 다비시 방광을 하였다. 서봉스님 방광탑 옆에 혜우 방광탑(惠雨放光塔)이란 각자가 따로 새겨져 있다. 두 분 스님의 이야기는 실화로서 일념으로 염불하면 이처럼 사리가 출현하고 사리에서 방광(放光)을 하게 된다

 

출처: 나무아미타불 | 서봉스님과 혜우스님의 극락왕생과 방광 (경남 고성군 청련암)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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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염불도인 하담스님과 법산스님 이야기

무여스님이 들려주신 한국의 염불도인 이야기 .

이야기는 5,6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더벅머리 총각이 행복을 찾아 나섰다. 성은 한(韓)씨요, 이름은 복동(福童). ‘복동’이라는 이름은 ‘복’이라는 말과 인연이 깊은지, 어릴 때부터 ‘우리 복덩이, 우리 복덩이’라고 했던 것이 복동으로 변했다.

 

그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길인가?’ 심사숙고(深思熟考)하다가 어떤 때는 며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우기도 하고, 어떤 때는 괴로움이나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눈물을 뚝뚝 흘리기도 하였으며, 또 어떤 때는 살 것이냐 죽을 것이냐 생사의 기로에서 고민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그는 잘 사는 사람, 행복한 사람을 직접 보고 장래 문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어디로 갈까, 누구를 찾을까, 궁리끝에 행복은 사랑에서 올 것 같아서 주위에서 행복하다고 소문이 난 친구 집을 찾기로 하였다.


그 친구는 당시로서는 드물게도 대학까지 졸업하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도 가졌다. 특히 친구들에게 부러움을 사고 있는 것은 고향의 예쁜 처녀와 결혼하여 잉꼬부부라고 할 정도로 금슬이 좋다고 소문이 났기 때문이다. 슬하에는 예쁘고 똑똑한 아들, 딸 남매까지 둔 친구로서 누가 봐도 복이 많다는 친구였다.

 

그 친구 집에 가면 행복을 진정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서 잔뜩 기대에 차서 갔다. 대문을 막 들어서는데, ‘우당탕탕!’ 살림 던지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뒤에 그 점잖은 친구의 입에서 막말이 터져 나오더니, 부인도 질세라 쌍소리를 하니 아이들은 죽을 것 같은 소리로 마구 울어댔다.

 

행복을 찾으러 갔던 사람은 처음에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설마 내 친구 아무개는 아니겠지’라는 생각까지도 했다. 그러나 분명히 친구 집이고, 친구의 목소리가 틀림없는 줄을 알고는 크게 실망하여 도망치듯 나오고 말았다. 너무 충격이 심하여 온 전신에 힘이 쭉 빠지고 걸음조차 제대로 걷기가 어려웠다.

 

친구 집에서 크게 실망한 ‘행복을 찾는 사람’은 비틀거리며 네거리까지 나왔다. 어디로 갈까... 여러 사람을 떠올렸다. 가장 믿었던, 가장 틀림이 없다고 생각한 친구에게서 행복을 느낄 수 없다면 가볼 곳이 막연했다. 얼마를 생각하다가 고을에서 제일 갑부인 변 부자댁을 찾기로 했다. 


자수성가(自手成家)한 갑부로서 언제 보아도 당당하고, 무슨 일이든지 자신만만하고, 어떤 사람에게도 굽힘이 없이 큰소리 떵떵치는 의지와 노력의 사나이 변씨에게 가면 남다른 행복을 느낄 것 같았다.

 

사랑채에서 변부자를 찾으니, 변부자는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그 남자는 하나밖에 없는 변부자의 동생이었다. 변부자는 3천석 꾼인데, 30석도 못하는 가난뱅이 동생한테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땅 두 마지기를 돌려주지 않는다고 볼 것 없이 나무라고 있었다.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만정이 뚝 떨어졌다. 허탈한 기분으로 그 집도 나오고 말았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변부자 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또 어디로 가볼까 고민하다가 당대의 이름있는 정치가 댁을 찾아보기로 하였다. 문지기에게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으니 손님을 대하는 태도와 말이 불손하고 거칠었다. 집안에 들어서니 분위기가 쌀쌀하여 마치 범죄 집단 같은 곳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간신히 부인을 만나니 상전이 하인을 대하듯이 거만하고 딱딱하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이왕 어렵게 들어간 집안이라 ‘행복한 정치가를 만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부인이 말하기를 ‘행복은 무슨 말라비틀어진 말입니까? 그 양반은 행복의 ‘행’자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부인을 보니 알 것 같았다. 그렇게 거만하고 딱딱하고 험구이니 그런 여자의 남편이라면 행복과는 거리가 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날 봉건주의 시대 권문세도가의 전형을 보는 것 같아서 정작 정치가는 만나지도 않고 괴로운 심정으로 소슬 대문집을 나오고 말았다.


정녕 행복한 사람이 없단 말인가? 이제는 행복이라는 말도 싫어졌고, 행복한 사람을 만나겠다는 마음도 없어졌다. 비틀거리며 산속으로 올라가다가 길섶의 잔디 위에 쓰러졌다. 어느덧 밤이 되어 하늘에는 별들이 총총 빛났다.

 

문득 저 반짝이는 별들처럼 하늘로 올라가고 싶었다. 순간, 자살을 결심하였다. 굳이 살아야 할 이유도 없고, 의욕도 없었다. 자살을 결심하니 마음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었다. 멀리 동쪽 하늘이 환해지는 것을 보고 잠이 들었다. 여러 날 제대로 자지 못한데다 피로가 겹쳐 깊은 잠에 빠졌다.

 

얼마를 잤을까, 눈을 뜨니 다음날 한낮이 지나서였다. 따뜻한 양지 바른 곳에서 실컷 자고 나니 지쳤던 몸도 완전히 풀리고, 행복을 찾겠다는 마음도 자살을 하겠다는 마음도 다 쉬고 나니 몸과 마음이 가볍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대단히 만족스럽고 기분이 좋았다. 순간 ‘이것이 행복이 아닌가.’ 하고 쾌재를 불렀다. 이 이상 어디에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그는 드디어 행복을 찾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뒤 그는 행복한 순간을 자세히 점검하기 시작하였다.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는 드디어 ‘행복은 마음에서 오는구나, 텅빈듯한 아무 생각도 없는 그런 마음에서 온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몇 시간을 누워 있었다. 여전히 아무 생각도 없이 편안하고 기분이 좋았다.

 

어느덧 해가 기울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목탁소리가 들려왔다. 목탁소리가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그는 목탁소리가 나는 곳으로 갔다. 목탁치는 스님은 미치광이 같은 스님이었다.


스님은 일제시대 극장 선전원들이 사방에 영화 포스터를 붙인 통을 뒤집어쓰고 거리를 다니면서 선전했던 모습처럼 앞에도 나무아미타불, 뒤에도 나무아미타불, 옆에도 나무아미타불을 주렁주렁 써서 붙였고, 그것도 모자라 나무아미타불이라고 쓴 깃대를 등에 지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목탁을 쳤다.

 

그 스님은 하루 종일 그렇게 서울의 골목을 다니다가 해가 지니 삼각산 도선사(道詵寺)로 가는 중이었다. 스님은 그렇게 5년간이나 목탁을 치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다녔다. 스님께서 그렇게 요란하게 써 붙이고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시내를 누비고 다니는 것은 귀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소리를 듣고,  눈으로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글자를 보기만 하여도 그만큼 업장이 소멸하고 공덕이 쌓인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있으면, 극락세계와 아미타불에 대한 법문을 들려주고, 때로는 염불로 업장을 참회하는 참회법도 가르쳐주는 거리의 보살이요 선지식이었다. 이 스님이 하담(荷潭) 스님이다. 스님의 세속 인연은 알려진 것이 없고 다만 성이 황(黃)씨고 19세에 금강산 장안사(長安寺)로 출가하였다고 하였다.

 

은사스님께서 “너는 경전도 보지 말고 참선에도 관심을 갖지 말고 오직 아미타불만 일념으로 염해라.”는 말을 듣고 오직 아미타불만 했다. 가나오나,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새벽에 눈 뜨자마자 밤에 잘 때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아미타불만 염하고 아미타불에 빠졌다.

 

처음에는 잘 안되더니 그렇게 지극하게 하여 3, 4개월이 지나니 자신이 생기고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1년쯤 지나니 더 잘 돼서 1, 2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장안사 극락전에 서울의 어느 신심있는 보살이 3·7일간 기도를 왔다. 주지 스님이 찾는다기에 주지실로 갔더니, “하담 수좌, 자네가 기도를 해주게.”하였다. 하담 스님은 주지스님의 말씀이 고맙기도 하고 처음으로 하는 사중 기도라 열심히 하였다. 공양하고 화장실 가고 극히 필요한 용무보는 일 이외에는 법당에 들어가 목탁을 쳤다.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할 정도로 최선을 다했고, 기도에 아예 몸뚱이를 바쳤다.

 

염불이 점점 잘 되는 것 같더니 몇 시간씩 일념에 들기도 하다가, 기도를 마칠 무렵에는 하루 반가량을 삼매에 들기도 하였다. 기도가 끝난 뒤에도 계속 열심히 하다가 입산한지 3년만인 어느 날 아미타불의 무량한 광명을 보게 되었다. 그 때 나이 30대 중반이었다.

 

그 무량한 빛과 오묘한 진리를 체험하는 순간 그 기분을 억제치 못하여 하루 종일 금강산을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 며칠을 미친 사람처럼 다니다가 이 기쁨을 나만 누릴 것이 아니라 중생들에게 회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중생들에게 아미타불 네 글자를 보여주고, 귀에 넣어줌으로써 세세생생 지은 업장을 녹여주고 죄업을 소멸시켜주어 일체 중생이 왕생극락하리라’ 하는 큰 서원을 새우고 금강산에서 하산하여 서울로 갔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서울 우이동 도선사 입구에서 목탁을 치면서 올라오는 하담스님을 보게 되었다. 스님을 보는 순간 환희심이 나고 존경심이 났다. 얼마를 따라가다가 자기도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부르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이 어색하지 않고 친근감이 났다. 도선사에 도착하여 화담 스님을 따라 밤새도록 정근을 했다. 다음날 아침인데도 전혀 피로한 줄 모르고 아미타불을 불렀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목이 터져라 불렀다. 일주일이 지나니 몸은 가볍고 점점 기분은 더 좋았다. 그는 염불이 잘 될수록 하담스님이 장안사에서 아미타불에 빠지듯이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념에 들었다. ‘행복을 찾는 사람’은 염불을 할수록 진정한 행복, 참 행복은 아미타불을 부르는 것에 있다는 것을 더 절실하게, 더 진하게 느끼며 미친 듯이 아미타불만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날도 아미타불에 빠져 석불(石佛)만 보고 정근하고 있는데, 서울역에서 목탁을 치고 다니는 하담 스님이 보였다. 이상해서 옆을 보고 뒤를 돌아보아도 하담 스님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언제 하담 스님이 내려갔는지도 모르고 염불에만 빠져있었던 것이다.

 

하도 신기해서 하담 스님을 계속 주시했다. 하담 스님은 서울역전에서 얼마간 목탁을 치면서 다니더니 여러 사람들에게 설법을 하였다. 뒤에 남대문을 거쳐서 중앙청 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날 저녁 청담(淸潭) 스님께서 외출하고 들어오셨기에 경계를 자상하게 이야기했더니, “그간 애썼다. 참으로 좋은 경험을 했다. 식(識)이 맑아지면 그럴 수도 있다. 천안통(天眼通)이 열렸다.” 하면서 “보이더라도 일체 신경을 쓰지 말고 아미타불 일념에만 빠져라.”하였다.

 

그 이후 예사롭게 서울 시내가 보이고 인천 앞바다까지 보였다. 그 때는 지나가는 사람만 보아도 그 사람에 대해 다 알 것 같았다. 도선사에서 3개월 가량 기도를 하던 어느날 하담 스님이 나타났다. 그는 하담 스님에게 묻지도 않고 사방에 나무아미타불이라 주렁주렁 매단 옷을 입고 따라나섰다.

 

그는 하담 스님의 목탁에 맞춰 아미타불을 목청껏 불렀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는 가는 곳마다 아미타불을 느끼면서 목이 터져라 서울시민을 위하여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고 불렀다.

 

두 스님이 아미타불을 부르면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우 모여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멸시하기도 하고, 아이들은 구경거리처럼 따라 다니기도 하였다. 상가 앞을 지나면 탁발하려고 온 줄 알고 돈이나 먹을 것을 주기도 하고 어떤 음식점에서는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였다.

 

동대문 시장이나 남대문 시장에서는 시장 상인이나 시장 보러 나온 사람들이 수십 명씩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 때만 해도 시장 주변에 거지가 많았는데, 시장을 돌면서 돈이나 물건이 생기면 다 나누어 주곤 하였다.

 

스님은 정근하며 가다가 농번기에는 일손이 없는 농촌에 모도 심어주고 보리를 베어주기도 하였고, 어느 곳에서는 하루 종일 타작을 해주기도 하였다. 공사판을 지나가다 막노동꾼과 같이 힘든 일을 해주기도 했고, 어떤 읍에서는 우는 아이를 봐주기도 하였고, 환자가 있으면 간호도 해주고, 지나다가 노인정을 보면 절대로 무심히 지나가지 않았다. 어떤 시골 초등학교에서는 부처님의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였다.

 

하담 스님은 무엇이든지 닥치는 대로 보살행을 하고 또 거리를 다니면서 거리의 포교사가 되고 아미타불의 전달자가 되었다. 또한 스님은 자비하고 남에게 공경심이 대단하여 누구든지 부처님처럼 대하고 부처님처럼 모시려고 노력하였다. 그래서 스님에게는 이 사람도 부처님, 저 사람도 부처님, 만나는 사람은 어떤 사람도 부처님처럼 대하여 스님에게는 가는 곳마다 부처님 세계요 극락정토였다. 그래서 스님과 한 번만 대화하거나 사귀면 평생 잊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렇게 다니다가 아미타불 일념에 들면 걸어가던 길이든, 절이든 세속 사람의 집이든 몇 시간씩 정근을 하다가 가곤 하였다. 어느 해는 충청도 계룡산 근처를 지나다가 사흘이나 묵으면서 정근을 하니 신도안에 가던 이교도들이 몰려와 공양을 듬뿍 내서 인근 주민을 포식시킨 적도 있다.

 

어느 해 충청도 천안을 지나가다가 하담 스님이 문득 ‘행복을 찾는 사람’에게 말했다. “자네도 수계를 해야지?” “네, 저도 받고 싶습니다.” 하니 길가의 큰 능수버들아래 정좌하더니 “나에게 삼배를 하게”하여 삼배를 드렸더니 “불법을 잘 호지하게. 자네가 체험한 것이 정법일세. 그것을 호지하는 것이 계일세.”하였다. 그러면서 “오늘부터 법산(法山)이라 하겠네.”하여 법산 스님이 되었다.


하담 스님은 그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아미타불 정근을 하여 극락정토를 발원하고 수많은 사람에게 아미타불 인연을 맺어주고 갖가지 보살행으로 선근공덕을 쌓다가 말년에는 부산 범어사에 정착하였다. 법산스님도 줄곧 함께 수행하였다.

 

두 스님은 대중생활을 하지 않고 공양은 행자나 일꾼들과 같이 하고 잠은 부목 방에서 잤다. 아침 공양을 하고 주변 도량 청소가 끝나면 어김없이 부산 시내를 내려가 아미타불 정근을 하며 다니다가 저녁에는 들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하담 스님은 총무스님에게 말했다.

 

“내가 석 달 후에 가야 되겠소."

 

총무스님은 무심히 지나가는 말처럼 들었다. 가야 되겠다는 말도,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말인지, 돌아가신다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었다. 가신다고 한 날 일주일 전에 총무스님을 방으로 불렀다.

 

때가 묻어 새카만 주머니에 꼬깃꼬깃 모은 10원 짜리와 100원짜리 돈 6만원을 주면서 “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네. 경책 한권도, 농짝 하나도 없네. 못난 중이라 옛 어른들처럼 땅 한 마지기도 부처님께 바치지 못하겠네. 적은 액수지만 사중에 보태쓰게.” 하면서 주고는 또 양말 속에 넣어두었던 3만원을 주면서 화장비로 써달라고 하였다.

 

하담 스님은 가시기 하루 전날 손수 향나무를 달인 물로 목욕을 하고, 미리 마련한 수의로 갈아입은 후, 깨끗한 장소에서 그간 입었던 더러운 옷을 깨끗하게 태운 후, 실로 남은 것이라고는 수건 하나, 양말 한 켤레도 없이 오직 수의와 가사 장삼뿐이었다.


3개월 전에 가겠다고 했을 때 가볍게 들었던 총무스님은 하담 스님의 거동이 이상하게 느껴져 학인 승려 두 명으로 하여금 곁을 지키도록 하였다. 예언한 날 10시가 되자 하담 스님이 조용히 말하였다.

 

“이제 내가 가야 할 시간이 되었구나.” 

 

그때 곁에 있던 젊은 스님이 말했다.

 

“스님, 10시는 부처님께 마지 올릴 시간입니다.”

 

“허, 듣고 보니 그 말도 옳구려.”

 

앉은 채로 열반(涅槃)에 들고자 했던 스님은 젊은 스님들의 부축을 받아 법당으로 올라갔다. 법당 옆에 단정히 앉아 사시 마지가 끝날 때를 기다렸다.

 

“이제는 가야겠구나. 나를 좀 눕혀다오.”

 

시내에서 정근하다가 황급히 올라온 법산 스님과 젊은 스님의 부축으로 반듯이 누운 하담 스님은 조용한 음성으로 발원하면서 가셨다.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법계의 모든 중생들이 일시에 성불하소서. 원컨대...”


하담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범어사 스님들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빠졌다. 특히 범어사 총무스님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하였다.

 

“아이구, 아이구... 진짜 도인 스님! 선지식을 옆에 두고 눈 어둡고 귀멀어 몰라보았으니 참으로 한탄스럽구나.”

 

장례는 스님의 삶처럼 간소하면서 여법하게 치러졌다. 법산 스님은 은사스님이 남긴 한줌의 재를 금정산(金井山)에 뿌리고 부산을 떠났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마지막 가시는 모습을 보고 더욱 신심을 내고 발심하였다.

 

그 이후로는 더 큰 소리로 더 간절하게 염불하였다. 그렇게 전국을 3년가량 다니다가 발걸음을 멈춘 곳이 강원도 명주군의 어느 외딴 토굴이었다. 멀리 동해 바다가 보이는 산자락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조그마하고 보잘 것 없는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는 지금까지의 거리의 삶과는 전혀 달랐다. 거의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처음 몇 년간은 땔감을 구하기 위하여 산에 오른다던가, 양식이 떨어지면 탁발하기 위하여 외출도 하였다.

 

몇 년이 지나서는 누군가 땔감이 없으면 땔감을,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조달하여 주었다. 그는 하루 종일 아미타불에 빠졌다. 오직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로 눈을 뜨면 잘 때까지 나무아미타불을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면서 달이 가고 해가 지나서 10여년간 아미타불과 함께 세월을 보냈다.

 

그간 어떤 때는 너무 좋아 춤을 덩실덩실 추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남모를 소리를 내며 즐기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법열에 자신을 억제하기 어려워 동해안을 질주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뒷산 상봉인 오대산(五台山) 삼왕봉(三王峰)을 올라가 천하를 호령하기도 하였으며, 어떤 때는 밤중에 방광(放光)하여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였다.

 

또 어느 해는 강원도 산골에 앉아서 서울을 보며 정부의 나라 걱정을 하기도 하였고, 어느 여름에는 큰 비가 올 것을 예상하고 주민들을 대피시킨 일도 있고 언젠가는 동해안으로 상륙한 공비들 2명을 자수시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그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살아있는 아미타불’ ‘살아있는 부처님’이라고 하기도 하고, ‘도인 스님’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한편 그는 앞날을 내다보는 ‘신비한 스님‘으로 보이기도 하였다.

 

그는 30년 가까이 부른 아미타불 속에서 진정한 희열을 느끼고, 그가 그토록 바라던 참 행복을 느끼다가 갔다. 그는 열반에 들 때도 아미타불 일념에 들어 법열을 느끼다가 얼굴에 미소를 지은 상태로 갔다.

 

이상 하담 스님과 법산 스님의 이야기는 법산 스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이다.

 

< 축서사보, 갑신년 신년법어 >

 

출처: 우리 시대의 염불도인 하담스님과 법산스님 이야기http://cafe.daum.net/MRSB/RCq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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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 염불 왕생한 정보살

 

충남 연기군 서면 봉암리에 정보살이 살고 있었다.
지금부터 36년전 월현사에 찾아와서 스님께 하는 말이

"나는 자손도 없이 늙은 영감하고 사는데 영감도 오래 못 살 것 같고, 내가 만약 늙고
병들어 오래 고생한다면 물한모금 떠 넣어줄 사람도 없는데 누가 병간호를 하며, 제일
큰 일은 죽음인데 어떻게 해야 죽을 때 남의 신세지지 않고 고생않고 자는 듯이 가야
할텐데, 그러한 방법은 없습니까?’ 하고 어쭈었다.

월현사 스님은 부처님 말씀에 ‘생사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하시며,
"아미타경에 보면, 누구를 막론하고 나무아미타불 열번만 불러도 생사를 해탈하고
왕생극락을 한다고 하였으니,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서쪽을 향하고 합장하고 서서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부르고 자신의 왕생극락을 축원하며,
이렇게 죽는 날까지 일생동안 염불한다면 임종시에 고생하지 않으며 아미타부처님이
연화대로 모셔간다’고 일러 드렸다.

정보살님은 36년간을 염불을 하며 근래에는 법회도 열심히 잘 나오시고, 식사도 잘하고,
건강을 유지하였다. 그러던 중 90세 되던 1994년 12월 24일 오전 12시경, 이웃집 사람이
부엌에 앉아있는[좌탈입망(坐脫立亡)] 모습이 이상하여 가서 불러보니 대답이 없기에

만져보니 수족이 차고 정신이 없었다. 구급차를 불러와 진찰을 하였다. 진찰한 의사는
‘약 한시간 전에 심장이 멈추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죽기를 원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공덕으로 누구에게도 괴로움을 끼치지 않고,
한시간 만에 이 세상을 고통없이 떠난 것이었다. 월현사 신도들과 함께 장례도
잘 모셔드리고, 칠재와 49재를 성대히 잘 지내드렸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염불공덕이며 부처님의 원력이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무슨 소원이든 원을 세우고, 지성으로 노력만 한다면 백발백중 다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하셨다. 공은 들이지 않고 공짜로 바라기만 하니 소원이
성취 안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사람들은 이승살이는 연구하고 노력하면서도 저승살이는 소홀히 한다. 저승살이는
선사공덕을 많이 행하고 ‘나무아미타불’을 열심히 염불한다면, 세세생생 좋은 국토에
태어나 좋은 인연을 만나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보살도를 행하여 마침내
자성미타를 성취하게 된다.

‘나무아미타불’을 열번 염불한 공덕으로 죽어 극락에 왕생하며, 아미타경 한번 읽은
공덕으로 멀거나 가까운 일가 친척들이 극락왕생하고, 아미타 경을 수지 독송한다면
8만 4천 지옥문이 부서지고, 8만 4천 자비광명을 얻어 3계 4생 6도 중생이
마침내 부처를 이룬다고 하였다.

유형태로 제일 큰 것은 바다요,

무형태로 제일 큰 것은 허공이며,

공덕중에 제일 큰 공덕은 아미타경을 수지독송함이라.

나무아미타불을 일생동안 염한다면 이보다 더 좋은 큰 공덕은 없을 것이다.

나무아미타불

출처 -- 
http://www.manbul.tv/subject03_03_09.html

 

출처: 주변에서 좌탈입망(坐脫立亡), 염불 왕생한 정보살https://cafe.daum.net/amtb/ZEF/2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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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육랑의 극락왕생

 

중국 원나라때 서호지방에 살았던 도씨집안의 십육랑은 26세의 젊은 나이로 남편과 사별을 하였습니다. 아이마저 없었던 그녀는 한동안 실의에 빠져 멍하니 살다가, 부근 사찰에 계신 스님의 권고로 아미타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혼자만의 삶이 가져다주는 외로움,두려움,슬픔 등을 아미타부처님께 모두 바치고 의지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침저녁으로 아미타경을 한 번씩 읽었습니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지냈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1년 가량 된 어느 날, 흰 옷을 입은 노인이 흰 연꽃 한 송이를 들고 꿈에 나타나 말했습니다.

 

"너에게 먹이기 위해 이 꽃을 가지고 왔다. 어서 먹으려무나."

 

십육랑은 공손히 꽃을 받아먹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몸이 가뿐하고 마음이 즐겁기 짝이 없었습니다. 홀로 된 이후 언제나 자기를 짓누르고 있던 외로움,두려움,슬픔 등도 말끔히 사라졌습니다.

 

이렇게 아미타불의 가피를 입은 십육랑은 자기의 방에 아미타불상을 모신 다음 더욱 열심히 아미타경을 읽고 나무아미타불을 염하였습니다. 그런데 만 3년이 되는 날, 방안에 모셔놓은 아미타불상이 방광을 하더니, 경상 위의 아미타경에 불덩어리 같은 것이 놓여 있었습니다.

 

십육랑은 경이 타는 줄 알고 황급히 불을 끄려 하였으나 꺼지지 않았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것은 한 알의 사리였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십육랑에게는 세상이 그렇게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였습니다. 그녀는 항상 부드러운 미소와 따스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아미타불을 염할 것을 권하며 한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가 되었을 때 주위 사람들을 불러 말했습니다.

 

"나는 이제 극락세계의 아미타부처님께로 갑니다. 부디 염불을 잘해서 극락세계의 연화대에서 다시 만나도록 합시다.

 

그리고는 단정히 앉은 채 숨을 거두었습니다.

 

출처: 김 현준저 도서출판 효림발행 미타신앙,미타기도법

 

출처: 십육랑의 극락왕생https://cafe.daum.net/amtb/ZEF/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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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는 입에 염불하니... 이렇게 쉽게 생사해탈하는 법이 시방세계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http://cafe.daum.net/MRSB/RCsf/13

 

노는 입에 염불하니... 이렇게 쉽게 생사해탈하는 법이 시방세계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노는 입에 염불하면...금강산 유점사에 사시는 어느 스님 한 분이 길을 가다 보니나이 드셔서 얼굴에 검버섯이 피고, 눈에는 촛점을 잃고마치 가실 날만 기다리는 듯한돌담 밑에 쪼그리고 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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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장이 황타철(왕타철)의 염불왕생---(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432

 

염불하여 서승(西昇)한 욱면비(郁面婢) :(삼국유사 감통 제7)https://blog.naver.com/muju5/50044685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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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씨湯氏, 인내하며 염불하여 앉은 채로 왕생하다!https://cafe.daum.net/amtwjungjong/etrD/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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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씨湯氏, 인내하며 염불하여 앉은 채로 왕생하다!“탕씨湯氏 작랑雀郎은 결혼한 후 아이를 낳지 않고 아들 하나, 딸 하나를 입양하였다. 자식들이 장성한 후 성격이 매우 나빠 탕씨에게 전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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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도 부처님의 구제를 가로막지 못하다 순정시대 純淨時代 | 악인도 부처님의 구제를 가로막지 못하다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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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인도 부처님의 구제를 가로막지 못하다 담란대사의 『왕생론주』의 첫 시작부분에서 자력수행은 ‘난행도’라면서 다섯 가지 난점을 들어 설명하였는데, 그중 세 번째가 ‘무뢰악인이 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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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인의 아름다운 임종 장면 (동영상: 류소청보살님 자재왕생 임종장면)https://amtb.tistory.com/17

 

염불인의 아름다운 임종 장면

현재 중국에서 정토의 대가 명인이신 류소운 여거사의 언니 류소청 보살님의 임종장면 임종직전에, 몇 일전 약속에 따라 자기에게 부처님께서 오시고 자기가 연화대에 오르는 등을 동생과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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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소청 보살님 자재왕생 -법문, 이야기---(모음) 입니다http://cafe.daum.net/MRSB/RCsr/11

 

Re:--->유소청 보살님 자재왕생 -법문, 이야기---(모음) 입니다

유소청 보살님 자재왕생-법문, 이야기모음---*** 유소청 보살 왕생개시(2)-유소청보살 염불법문http://cafe.daum.net/wepula/ahiH/2유소청 보살 왕생법문 제1집1편 http://cafe.daum.net/wepula/ahiH/6유소청 보살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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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세로 왕생극락한, 해현海賢 노화상 일대기와 가르침---(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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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사에 상관하지 않고, 일향전념한 百不關 노인의 극락왕생https://ntassabas.tistory.com/562

 

만사에 상관하지 않고, 일향전념한 百不關 노인의 극락왕생

[무량수경청화강기 법보시] 만사에 상관하지 않고 일향전념한 百不關 노인(慈航 강설)https://youtu.be/Ms8ihAJf55Q ~~~~~~~~~~~~~~~~~~~~~~~~~~~~~~~~ 백불관 노인의 극락왕생 제3부 염불법사 왕생록 (송법경 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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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오신수가 밤마다 관 속에 들어가 잠을 자며(날마다 무상을 관하며) 염불하여 왕생하다 https://ntassabas.tistory.com/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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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오신수가 밤마다 관 속에 들어가 잠을 자며(날마다 무상을 관하며) 염불하여 왕생하다 : 무상을 수행하면, 부처님의 안위를 받는다. - 오명불학원 쏘다지 캠보 무상 수행에 대하여 타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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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생서상 자료모음-노보살님 왕생서상, 여산동림사 왕생서상, 광흠화상 왕생서상, 몽참노화상 원적서상(동영상)https://ntassabas.tistory.com/349 

 

왕생서상 자료모음-노보살님 왕생서상, 여산동림사 왕생서상, 광흠화상 왕생서상, 몽참노화상

(원글: http://cafe.daum.net/MRSB/RCt1/3) 왕생서상에 대한 자료들을 검색하면서 고맙게도 다른분들이 올려주신 자료들이랑 찾은 자료들을 목록별로 모두 모아보았어요. 어머니와 제가 아무래도 염불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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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서 왕생하다 (동영상모음) ---***https://ntassabas.tistory.com/438

앉아서 좌탈왕생坐脫往生---(동영상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439

 

***염불삼매체험담---(모음) :성일스님 염불삼매체험담/허공님 어머니 염불삼매체험담...등등https://ntassabas.tistory.com/697

 

***염불삼매체험담---(모음):성일스님 염불삼매체험담/허공님 어머니 염불삼매체험담...등등

***염불삼매체험담---(모음) :성일스님 염불삼매체험담/허공님 어머니 염불삼매체험담...등등 성일스님의 염불수행(염불삼매 체험담) 성일스님은 지금으로부터 약 120 여년전 청나라 덕종 당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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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유능한 임종안내자의 중요성---(사례모음)***:적절한 방편으로 어쨌든지 염불하도록 이끌고, 임종시 왕생하도록 이끌다https://ntassabas.tistory.com/688

 

유능한 임종안내자의 중요성---(사례모음)***:적절한 방편으로 어쨌든지 염불하도록 이끌고, 임종

(원본:https://cafe.daum.net/MRSB/RCsr/17 ) 유능한 임종안내자의 중요성---(사례모음)*** :적절한 방편으로 어쨌든지 염불하도록 이끌고, 임종시 왕생하도록 이끌다 *고춘순보살님의 극락왕생 (부군 오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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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수, 악인, 백정의 염불왕생~~~오역죄의 염불왕생 ---(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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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https://cafe.daum.net/MRSB/RCsr/18 ) 제가 염불왕생에 대해서 아버지께 몇년째 틈틈이 설명드렸었더니, 아버지께서 근래에는 극락왕생하는게 참좋구나 라고 생각이 드시나봅니다. 그런데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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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생집 :연지대사(운서주굉)의 왕생집 ---(모음)***https://ntassabas.tistory.com/354

 

왕생집 :연지대사(운서주굉)의 왕생집 ---(모음)***

● 연지대사 왕생집'왕생집'의 검색결과 :: 인과응보 (tistory.com) 인과응보 innechun77.tistory.com ~~~~~~~~~~~~~~~~~~~~~~~~~~~~~~~~~~~~~~~~~~ 왕생집 :연지주굉(1535-1615)스님의 왕생집 ---(모음)***http://cafe.daum.net/muj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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